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31)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31화(31/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31화
* * *
“피곤해 뒈지겠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요 며칠간 책만 읽어서 눈이 빠질 것 같았다.
아무리 소설을 여러 번 독파했다고 한들, 직접 귀족으로 사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왕국의 무수한 영주들과 그들의 성격, 정치 성향,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보고 또 보며 외워야 했다.
그뿐인가, 가문을 대표해 기념일에 참석하는 것이라 그런지 알아야 할 정보가 뭐 이리 많은지.
“짜증 난다.”
짜증이라는 말이 버릇처럼 입에 달라붙었다.
그나마 설정을 꿰뚫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것조차 없었다면 그냥 포기한 채 망나니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공자님.”
“레오, 마침 잘왔다.”
때마침 레오가 마실 것을 들고 찾아왔다.
그에 잠시 한숨 돌릴 시간을 가진 나는 잔을 받아 들곤 창가로 향했다.
“성 분위기는 어때?”
“분주합니다. 수도에 가져가야 할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젠장. 내가 무슨 사절단도 아니고 뭐 저렇게 바리바리 싸 가는지.”
일단 영지를 대표해 기념일에 참석하는 것인 만큼, 왕실에 선물할 것들이 상당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꽤 편하겠어. 마차를 타고 갈 수 있을 테니.”
가져가야 할 짐이 많다는 건, 일행의 규모도 커진다는 걸 뜻한다.
간만에 마차 여행이라는 생각을 위안 삼고 있던 찰나.
쭈뼛쭈뼛하던 레오가 입을 열었다.
“저, 공자님.”
“왜?”
“아무래도 마차 없이 호송대보다 먼저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뭐? 왜? 출발까지 아직 며칠 남았잖아?”
“그렇지 않아도 영주님께서 공자님을 찾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말씀드리기보단 직접 설명을 들으시는 게…….”
그 양반이?
하도 말을 타다 보니 엉덩이가 찌그러진 것 같은데, 또 말을 타야 한다고?
“어디 계시지?”
“연무장에 계십니다.”
탁!
잔을 내려놓고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나가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인장이 보였다.
가문의 문장인 잿빛 매가 박힌 반지였다. 기사임을 상징하는 인장. 잠시 고민하다 이내 손에 끼고 방을 나섰다.
* * *
쉬익!
들어선 연무장은 후끈했다. 백작이 상체를 드러낸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각 같은 몸이었다. 탄력 있는 근육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저게 오십 대의 몸이라니, 할 말이 없다.
“왔느냐.”
흘긋 나를 바라본 백작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동시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이 다가가 땀을 닦고, 물을 건네주었다.
물을 들이켠 백작이 이내 손짓을 했다.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나가자 연무장에는 나와 백작만이 남았다. 어색한 상황도 잠시, 백작이 연무장 한편에 꽂힌 검을 가리켰다.
“한동안 내 연무장을 썼었지. 어디 실력 좀 보자꾸나.”
“제가 어찌…….”
“명령이다, 기사 린다이어.”
백작이 내 손에 끼워진 인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령이라는데 할 수 있나. 적당히 어울리고 나를 부른 까닭을 물어봐야겠다.
“들어오너라.”
하지만 실제로 검을 들고 마주하니 적당히 어울리려는 마음은 쏙 들어가 버렸다.
이 압도적인 분위기란.
백작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옭아매었다.
그의 검이 내 것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대체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인정한다. 솔직히 조금 쫄린다.
과연 마스터. 길레인보다도 몇 수 위인 초인다웠다.
‘후우. 적당히 하자, 적당히.’
심호흡하고, 검을 뻗었다.
탁!
그리고 내 검은 허공을 날았다.
“…….”
뭐야?
언제 받아친 거지?
다시 검을 주워 왔다. 숨을 골랐다. 이번엔 사뭇 진지하게 파고들었다. 아니, 파고든 게 아니라 밀고 들어갔다. 여전히 틈은 안 보였으니까.
탁!
그리고 내 검은 또 허공을 날았다.
그래도 좀 전보단 낫다.
백작이 어떻게 흘려 퉁겨 냈는지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장검이 아니라 수리검이었나 보군. 허공을 날아다니는 걸 보니.”
“…….”
비꼬는 거 봐라.
이쯤 되면 호승심이 일기 마련이다. 다시 검을 주워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좀 전까진 루스에게 배운 린다이어 가문의 검술을 썼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다리에 힘을 실어 밀어냈다. 동시에 허리를 틀며 힘을 주고, 팔근육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카강!
여전히 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건 있다. 내 검은 날아가지 않았고, 지금껏 멀거니 서 있던 백작이 한 걸음 물러섰다.
백작의 눈썹이 미세하게나마 꿈틀거렸다.
“그건 무엇이지?”
탓!
사선으로 겹쳐 있던 검을 백작이 밀어냈다.
그에 거리가 벌려진 상태에서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 검술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내 실력이야 머지않아 밝혀질 사실이다. 검술이야 굳이 여기서도 감출 필요는 없지. 계속 숨기는 건 마나로 족하다.
“제가 만들었습니다만.”
백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단에 내 검술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나 찾는 거겠지.
물론, 있을 리가 없다.
“루스 마이어가 알려 준 건 아닐 테고, 길레인의 것도 아니다.”
“당연한 말씀을.”
“네가 만들었다는 말, 진정이냐?”
“예.”
백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보여 준 건 방금 한 번의 검격이 전부인데, 그 한 번으로 대강 경지를 꿰뚫어 본 건가?
“고작 몇 개월 연무장 들락날락하면서 뚝딱 만들어 낸 거라고?”
“그렇습니다.”
“웃기는 녀석이군.”
어이없어하며 백작이 검을 회수했다.
고작 이거 하나 보여 줬다고 당황하긴. 만약 린다이어의 화신을 불러냈으면 아주 기절초풍했겠어.
“직접 창안해 낸 검술이라…….”
그렇게 한참 백작이 생각에 잠겨 있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일정보다 먼저 출발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째서입니까?”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할 일이라니.
“개국 기념일에 전에 끝낼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럼.”
“무슨 일이기에.”
“호위 기사를 차출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호위 기사 말입니까? 그게 저랑 무슨…… 설마 저를 지목한 겁니까?”
“그래.”
아니, 호위 기사라니.
대외적으로 나는 아직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엄연히 귀족인 삼공자를 지목해 요청하다니?
설마…….
“누가 말입니까?”
“바슈른 공작가의 요청이다.”
그래. 그 설마가 맞네.
“기념일 전에 끝낼 수 있으며 공작가의 요청이라면 필시 수도로 향하는 여정이겠군요.”
“그렇지.”
“호위 대상은 공녀이겠고요.”
“잘 아는구나.”
“저를 이용해 위신을 되찾겠다는 거군요.”
“그거야 모를 일이다만.”
당사자한테 듣지만 않았다뿐이지, 반쯤 확실한 이야기다.
공작가의 공녀가 삼공자에게 두들겨 맞았다.
게다가 파혼까지 당해 빈손으로 되돌아갔고.
최대한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막았으나 그것을 지켜본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소문은 잠재울 수 없기에 소문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공작으로선 깎인 위신을 되살릴 방법이 필요했을 테고, 호위 요청은 그 첫 단추일 게 분명했다.
한 가문의 적자가 다른 가문의 여식을 호위한다는 것 자체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모양새였으니.
“뻔할 뻔 자 아니겠습니다. 그 요청을 받아들이신 이유야 공작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겠고요.”
일방적으로 파혼한 대가를 추후 받아 내겠다고 말했던 공작이 떠올랐다.
“눈치 한번 빠르구나. 굳이 더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어. 좋은 기회다. 이런 사소한 일로 빚을 없앨 수 있으니.”
백작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좋아하긴 이르다.
“거절하겠습니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거절하겠다고 했습니다.”
“작은 일로 빚을 지울 수 있다 하지 않았느냐?”
“제 빚이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 빚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내기에 파혼을 건 백작에게 있으니.
그것을 백작도 모르지는 않는지, 유한 목소리로 회유를 시도해 왔다.
“그래. 네 말마따나 내 빚이다. 하지만 내가 곧 가문이다. 그리고 너는 가문의 일원이지. 마땅히 너의 빚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아이고 아저씨.
내가 어리석은 바보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장난일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빚이 아닙니다. 단순 호위를 위해서라면 에스테반 경이나 바랑카 경을 보내셔도 될 일입니다.”
당연히 내가 아니면 약발이 서지 않으니 공작가에서 받아들일 리 없다.
“그쪽에서 널 원하지 않느냐?”
“제겐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가문의 일원을 호위하라 하면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슈른 공작가엔 의무가 없습니다.”
“명령이라 해도?”
“명령하신다면 저를 강제하실 순 있으시겠지만, 제 의지는 얻지 못하실 겁니다.”
가기 싫다. 하지만 네가 굳이 끝끝내 가라고 한다면 가겠다.
사욕을 위해 권력으로 사람을 주무를 것이냐 묻는 말이었다.
예상대로라면 아마 백작은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판도 아니고, 제 자식 앞에서까지 자존심을 구길 양반은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받아들이겠느냐?”
예상이 맞았다. 백작이 협상을 걸어왔다.
받아? 말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백작은 백작이다. 빚을 지워 두면 언젠간 요긴하게 받아 낼 수 있겠지.
그렇게 한껏 고민하는 모습을 내보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함은.”
“첫째.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입장의 동행이어야 합니다.”
“흐음.”
“둘째. 수도로 향하는 일행을 지휘할 전반적인 권한은 제게 있어야 합니다. 불시에 일어날 사고에 대비하려면 명령권의 일원화는 중요하니, 호위 기사이니 만큼 당연한 요구입니다.”
“또.”
“셋째. 호위에 들어가는 경비는 모두 가문에서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자기네 가문의 위신을 세우겠답시고 나를 꼭두각시 광대로 삼는 것은 막겠다는 것.
그를 위해선 내 권위와 권한을 보장받아야만 했다.
흘긋 백작을 바라보았다.
턱을 매만지던 백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염려하는 것이냐.”
“무엇을 말입니까.”
“너를 광대 삼지 않을까 말이다.”
백작 또한 내 의도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말하자면, 예. 그렇습니다.”
“그럼 네가 앞서 말한 조건은?”
“순순히 당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공작가에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글쎄요. 어떻게든 저를 끌어다 놓고 싶을 공작가가 결렬하겠습니까.”
“생각보다 네 스스로의 입지를 잘 아는 모양이구나.”
“제가 저를 모르겠습니까.”
“많다. 자기 자신을 몰라 스스로 파멸로 향하는 멍청한 놈들은 수두룩하지.”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책임을 지고 앞서 네가 말한 것들을 지켜 주마.”
그렇다면야 못 받아들일 것도 없지. 물론 챙길 건 챙긴다는 전제하에.
“그건 그렇고, 아버님의 빚을 제가 대신 청산하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내 빚을 대신 지워 준 네게 어떤 식으로든 훗날 상응하는 수준으로 보상해 주겠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언제 어디까지 오라고 했습니까?”
“공작령은 대륙 서부에 있다. 서로 출발 일자를 조율해 적당한 지점에서 합류하도록.”
린다이어 가문이 북부에서 몬스터를 막고 있다면, 바슈른 공작가는 대륙 서부에서 대수림을 끼고 있었다.
“서부에 들렀다가 수도로 가야 하는군요.”
“준비는 알아서 잘할 수 있겠지.”
“바람기사단원을 몇 차출해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바람기사단원은 안 될 말이다. 오직 너만을 요청했으니.”
안 될 줄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터덜터덜 먼 길을 갈 수도 없으니.
“그렇다면 종자 한 명을 데려가겠습니다.”
“종자?”
백작의 말에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인장을 내밀었다.
“바람기사단은 아닐지라도 제겐 배너렛의 직위가 있지 않습니까. 종자를 둘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해서, 바람기사단원 중 하나를 종자 삼겠다?”
“자존심 강한 기사단원이 종자 노릇을 해 줄 것 같진 않고, 수련 기사 중 한 명을 데려가겠습니다.”
“좋다. 인가를 내주마.”
“스카우트도 한 개 분대만 내주시죠. 공작가의 일행과 합류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욕심 한번 많구나.”
“그래 봤자 접선 지역까지 아닙니까.”
“알았다. 내주지.”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됨이 느껴졌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백작과 나는 잠시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작이었다.
“카인.”
“예.”
“매가 여우에게 잡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바슈른 공작가의 상징은 실버폭스, 은여우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 가문의 연례행사가 바로 여우 사냥 아닙니까.”
내 말에 백작이 평소답지 않게 씨익 웃음을 지었다.
“다녀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