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85)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85화(85/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85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에 아휀과 마찬가지로 검은 마네킹 같은 몸을 지닌 소녀였다.
아휀의 등에 찰싹 매달린 그녀가 오들오들 떨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나왔구만.”
괜히 시간만 끌고 이게 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아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양반다리를 했다.
그 모습에 아휀이 주섬주섬 흑발 소녀를 자기 뒤에 감췄다.
“때리면 안 돼!”
아니 이 자식이 누굴 폭력배로 아나.
“내가 미쳤냐? 아무 잘못도 없는 애를 왜 때려?”
“나는 때리잖아!”
“너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나빠!”
“시끄러워.”
아휀의 말을 일축한 채 시선을 움직여 한쪽 눈만 빼꼼 튀어나온 흑발 소녀를 바라봤다.
“반갑다. 나는 카인 린다이어라고 한다.”
“…….”
묵묵부답인 모습에 나는 아휀을 바라봤다.
“껄끄러워하는 것 같으니까 네가 대신 대답해.”
“……우웅.”
“이름이 뭐래?”
“계약자가 없는 정령은 이름이 없다는데.”
“그래? 그럼 편의상 다크니스라고 부르지. 어둠의 정령이니까.”
내 말에 어둠의 정령이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는데?”
“싫다고?”
“응. 촌스럽나 봐.”
이것들이 쌍으로 놀고 있네.
욱하고 올라온 화를 간신히 잠재우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뭐라고 부를까.”
“그건 모르겠대.”
“……정령석이 흑요석과 비슷하니 옵시디언이라고 부르면 될까?”
절레절레.
“흑단(Ebony)은 어때?”
“……흑단이 뭐냐는데?”
“흑단 나무라고. 심재가 검은 나무다. 아주 아름답고 기품 있는 상록수지. 에보니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끄덕끄덕.
“에보니라는 이름이 맘에 든다는데.”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에보니. 몇 가지 물어보마. 지금껏 저 녀석에게 붙어 숨어 있던 까닭이 뭐지?”
“너를 지켜보고 싶었대.”
“지켜보고 싶었다고?”
“평상시 모습을 보고 싶었나 봐.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으니까.”
평소 모습?
아휀과 티격태격하며 꿀밤을 먹였던 게 떠올랐다.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며칠 동안 쭉 지켜본 결과는?”
“아주 폭력적이고, 불친절하고, 음탕한 데다가 성질머리가 고약하고…….”
“그건 네 의견인 거 다 알고 있으니 헛수작 부리지 말고.”
“넵.”
황급히 입을 꾹 다문 아휀이 재차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차갑기는 해도, 가식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는데.”
칭찬인가?
“그럼 이제 대화의 용의가 조금은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
“그렇겠지.”
“그렇다면 다시. 왜 엘프에게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
“엘프들조차도 믿지 못했으니까.”
“믿지 못했다는 건?”
“이 아이는 지금 복수를 원해.”
“복수?”
“응.”
“그건 엘프들에게 이야기를 감출 만한 이유가 못 되는데.”
“글쎄.”
“글쎄라고?”
복수를 원하는데 엘프들에게까지 이야기를 숨길 필요가 있다고?
엘프들은 대수림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이유는 못 되지. 조력자는 많을수록 좋잖아?
아니, 그 반대로 정령에게 대수림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모든 정보를 말해 준 다음 대수림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
‘잠깐.’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은데.
대수림은 정령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하지만 에보니는 그런 대수림에서 입을 꾹 닫고 굳이 다시 대륙으로 나아가는 내 뒤를 따라왔다.
왜?
대체 왜지?
‘설마.’
불현듯 떠오른 가설을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입을 열었다.
“놈들의 구성원 중에도 엘프가 있다는 뜻이군?”
내 말에 아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동시에 에보니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가능할 것도 없지. 엘프도 엄연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녀석들이니까.”
엘프라고 하면 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종족이란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안다.
그 엘프들이 종족전쟁 당시 어떤 잔혹함을 보여 줬는지. 그리고 그 심성이 얼마나 악독한지도.
엘프 중에 정령을 이용해 대륙을 뒤엎어 버리려는 테러리스트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에보니에겐 대수림도 안전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따져 보자.
나를 급습했던 놈들은 전부 인간이었다.
하지만 정령을 이용해 마석을 만들어 내기엔 그들의 기술만으론 힘들었을 테고, 엘프 중에 뜻이 맞는 자를 모아 음모를 진행했다는 건가.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놈들이란 뜻인데.’
엑스퍼트 최상급에 달하는 기사를 보유했음은 물론, 흑마법사와 엘프까지 가담한 단체라.
이거 파내면 파낼수록 드러나는 몸집이 장난이 아닌 놈들이었다.
“뭐, 그렇다면야 지금껏 입을 닫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지.”
“…….”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들이 뒤쫓는 네가 가장 확실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대.”
“적의 적은 가장 확실한 아군이라. 맞는 말이지. 그럼 앞으로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복수를 돕겠다고?”
“그러겠다는데.”
“좋아. 그렇다면 놈들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넘겨. 그러면 안전한 곳에 있도록 해 주마.”
절레절레.
“또 왜?”
“자기도 직접 돕고 싶다는데.”
“아니, 뭘 할 수가 있다고? 나와 계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물음에 아휀이 에보니와 몇 번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자신을 가리켰다.
“나처럼 돕고 싶다는데?”
“너?”
“응. 나처럼.”
“무슨 뜻이야? 설마 봉인된 채 싸우겠다고?”
“그렇대.”
“가능한 건가?”
“이미 봉인된 상태에서 힘을 쓴 경험은 있대. 마석인 시절 강제로 당한 것이긴 했지만.”
아휀은 검에 봉인된 상태로 힘을 발휘한다.
에보니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힘을 쓰겠다는 건가?
하긴, 이미 마석으로 힘을 착취당한 전적이 있을 테니 가능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한데 같은 방법으로 다시 싸우겠다니, 용감한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 모르겠다.
뭐, 어찌 됐건 나로선 사양할 필요 없는 일이지. 아니. 되려 잘된 일이다. 내게 있어선 옵션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니까.
“반지를 하나 구하겠어.”
“…….”
“거기에 네가 든 정령석을 박고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녀 주마. 그 정도면 마음에 드나?”
끄덕끄덕.
“네가 원하는 복수를 이룰 수 있도록 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도우마. 대신 그러려면 네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가 아는 모든 걸 내게 이야기해 달란 뜻이다.”
끄덕끄덕.
“그것 외에 네 힘을 이용하는 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차차 연구하도록 해 보고.”
말을 잠시 아낀 뒤 손을 내밀었다.
“어찌 됐건, 복수극에 동참한 걸 환영한다.”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보니가 이내 조심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내 검지만을 잡아 흔들었다.
이상한 모양새긴 하다만.
어쨌든 계약 성립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내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에보니가 결국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환상이 풀리고, 나를 맞이한 건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라헨나였다.
“끝났나?”
“예.”
대답하며 마차 안에 드러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겁니까?”
“일주일.”
“뭐라고요?”
일주일?
환상 속에서 시간을 상당히 오래 보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주일이나 흘렀다고?
잠시 당황스러워 가만히 있다가, 순간 라헨나가 생각났다. 모르긴 몰라도 일주일 동안 주술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괜찮습니까?”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은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심력을 상당히 소모한 탓이겠지.
“피곤하긴 하구나.”
탁!
책을 덮은 라헨나가 비로소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좀 쉬어야겠다. 레이딘에 도착하면 깨우거라.”
레이딘은 본디 라헨나가 거주하던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곳의 이름을 들은 뒤 머리를 굴려 대수림 초입에서 일주일의 이동 거리를 따져 보았다.
평상시의 속도라면 아직 레이딘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라헨나를 두고 마차에서 나오자 마부석에 앉아 말을 이끄는 루스가 보였다.
“루스.”
“어! 공자님! 드디어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찌뿌둥한 몸의 관절을 풀며 루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말 어떻게 되신 게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일어났으니까 됐지. 그래서, 지금 위치가 어디지?”
“곧 레이딘입니다. 늦어도 오늘 자정 전에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가공할 정도의 속도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어느 도시도 들르지 않고 곧장 주파했습니다.”
“보급도 하지 않았다고?”
“예. 어차피 일리아와 공녀님도 떠났고, 공자님도 주무시느라 뭘 드시지도 않고…… 라헨나 님도 정신을 집중하고 계셔서 그냥.”
“뭐 그렇다면야.”
곰곰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세어 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시간에 맞겠어.”
“시간에 맞다뇨? 어떤 것 말씀입니까?”
“기사 시험.”
“아! 그게 있었지요.”
린다이어 가문에서 주최하는 기사 시험.
이곳에 통과한다는 조건으로 백작과 내기를 했었다.
처음 영지에서 출발하고 대수림까지 한 달, 이후 대수림에서 로르다인을 찾고 아슬라히나의 무덤에서 수련했던 시간이 석 달.
기사 시험까지 반년이 채 안 되게 남았다고 했으니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좋아. 레이딘 근처에서 라헨나를 보내고 며칠 쉬다가 영지로 복귀하자고. 가서 이것저것 알아봐야 할 게 많으니.”
“알아볼 거라면…… 그 정체불명의 습격자에 관한 것입니까?”
“그래.”
“원하시던 정보는 얻으셨는지.”
“대강은.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어. 생각할 게 많아지긴 했지만.”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어쨌든 루스.”
“예.”
“영지로 돌아간 뒤에 네가 맡아 줄 일이 있다.”
내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루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이지, 공자님 밑에 있으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잖아. 내게 사람이라곤 너 아니면 일리아밖에 없는데 일리아는 다른 곳으로 갔으니.”
내가 자기 사람이라고 말해 준 게 쑥스러운지 루스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그래서 이번엔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좀 멀리 다녀와야겠는데.”
“멀리요?”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나.
“루스, 해산물 좋아하냐?”
“해산물이요? 환장하죠. 내륙에선 없어서 못 먹는 것들 아닙니까.”
“이번 기회에 해산물이나 실컷 먹고 오라고.”
“예?”
눈을 뒤룩뒤룩 굴리던 루스가 이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설마 공자님.”
“응. 맞아.”
“에엑!”
“네가 대륙 남부에 좀 갔다 와야겠다.”
“그 먼 곳을요?”
“그래. 남부 군도에서 알아볼 게 있어.”
“그냥 남부도 아니라 남부 군도라고요?”
린다이어 백작령은 대륙 최북단에 있고, 남부 군도는 대륙 최남단에 있다.
끝에서 끝인 셈이다.
서울에서 부산, LA에서 워싱턴처럼.
“까라면 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졸지에 남부로 가게 된 루스가 푹푹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앓는 소리 내지 마. 어차피 지금 당장 가는 것도 아니니까. 영지로 귀환해서 푹 쉬고 단단히 준비한 뒤에 출발하라고.”
“이러나저러나 고달프겠군요.”
“고생 좀 해라. 이런 일엔 너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또 칭찬해 주니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반색하는 루스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그럼. 루스 너밖에 없지.”
“정 그러시다면야. 이번에도 제가 힘을 써 보겠습니다!”
“그래그래. 참 듬직하다니까.”
“으하핫! 제가 또 한 듬직하지요.”
대충 대답하며 루스의 웃음을 한 귀로 흘린 채 마부석에 등을 기댔다.
따듯한 햇볕을 쬐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레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노곤한 기분이 들었으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온갖 생각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생각 중에 가장 큰 것은 단 하나였다.
‘네비로스 교단.’
네비로스(Nebiros).
지옥의 후작이라 불리는 대악마.
그를 추종하는 교단은 일찍이 몰락해 없어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네비로스 교단은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한 채 대륙을 뒤엎으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대체 뭐가 좋다고 그런 계획을 짜는지는 모른다. 그래 봤자 소설의 악역인 주제이니, 개똥철학밖에 더 갖고 있겠냐마는.
그리고 어둠의 정령.
에보니는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 남부 군도였다고 말해 주었다.
‘네비로스 교단 본거지가 남부 군도 밀림 속에 숨어 있다는 거겠지.’
새로운 실마리를 얻었다.
그러니 이젠 차근차근 가지를 키워 나갈 때였다. 그러려면 일단 해야 할 것은 네비로스 교단에 관해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적을 이기려면 일단 적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바쁘다, 바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