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478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5화
탁, 탁, 탁, 탁!
뭔가를 두들기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코끝에 맴도는 달콤한 냄새를 맡은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꿈이나 망상인지 잠시 고민했지만 긴 세월간 잃어버린 오감이 확실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르벤은 침대에서 일어나 려다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성훈과 싸울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지금 자신의 몸은 완전하게 망가진 상황이었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력의 제어, 미세한 컨트롤, 행동 예측, 달인의 감각 등 모든 게 제대로 작동되지 않거나 미묘하게 어긋난 상태.
그래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살기를 알아채는 것도 한 발자국 늦고 말았다.
“흡!”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뒤늦게라도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단검의 존재를 깨닫고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챈 것이다.
제대로 된 타이밍에 잡아챈 것도 아니고 마력으로 손을 보호하는 것도 깜빡해서 손바닥이 크게 베였지만 어찌됐든 아르벤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단검을 멀쩡한 손으로 고쳐 잡은 아르벤은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소녀’
겉모습만 보자면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순진한 소녀였지만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었으면 바로 자신이 죽을 만한 위험한 공격을 날린 것도 분명하다.
“대체 이게…….”
“닥치고 제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당신, 노예인가요”
“노예?”
그 지옥 같은, 아니 지옥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아르벤으로서는 대체 이 소녀가 말하는 노예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질문을 던져야 할 쪽은 자신이었지만 분위기를 읽은 아르벤은 살짝 마른 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까지 어딘가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네가 말한 노예가 뭔지, 대체 지금이 언젠지조차 몰라.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너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다는 거다.”
“…….”
고작해야 잠깐만의 대치만으로도 아르벤의 몸은 긴장과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소녀는 피식 웃으면서 단검을 거뒀다.
“거짓말을 치려면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쳤겠죠. 이걸로 대충 치료하고 나오세요.”
싸구려 포션과 낡은 붕대로 급하게나마 상처를 지혈하고 방에서 나온 아르벤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포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었다.
반쯤 의식이 나가 있던 아르벤을 현실로 되돌린 것은 배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였다.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에는 약물로 영양 공급을 해결했고 풀려난 이후에도 뭔가를 입에 댄 기억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집 안에 가득 찬 맛있을 것 같은 냄새가 식욕을 마구 돋우고 있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만 음식을…….”
“실례 맞는데요.”
“…….”
“하아,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쫒고 싶지만 오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니…… 일단 거기 앉으세요.”
“……네 오빠라는 사람이 날 데리고 온 거냐”
끼이익!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 날카로워 보인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평범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청년은 아르벤을 잠시 바라보더니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듯 손바닥을 마주치며 중얼거렸다.
“아! 어제 내가 데려온 사람인가”
“그쪽이 저를 구해준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 폭우 속에 혼자 버려져 있었던 거야. 내가 어제 그 근처를 지나가지 않았으면 아마 당신 죽었을걸 혹시 탈주한 노예 아니, 금단증상이 없는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청년의 말 앞에서 아르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 신나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청년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의자에 앉았다.
“미안 미안. 집에 손님이 찾아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다행히 오늘 아침은 서양풍이니까 문제없이 먹을 수 있겠지.”
“아, 가, 감사……합니다.”
“얼굴이 수척한 게 제대로 못 먹고 다닌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지. 거 먹고 싶을 만큼 팍팍 먹어.”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맡는 갓 구워진 빵과 스프에서 풍기는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냄새는 아르벤의 인내심을 바닥내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 듯 그릇에 붙어 열정적으로 숟가락을 놀리며 빵을 뜯어먹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 남녀는 곧 자신들의 앞에 놓인 음식을 아르벤을 향해서 내밀었다.
* * *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부끄럽긴 뭐가. 잘 먹으면 오히려 좋은 거지.”
“부디 반성했으면 좋겠네요. 오빠를 위해 만든 요리를 혼자서 다 먹은 걸로도 모자라 저희는 건량으로 아침을 때워야 했거든요.”
“……정말 미안하다.”
남자 쪽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듯 했지만 여자 쪽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
물론 완벽하게 얹혀 있는 신세인 아르벤은 불만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비아냥거림을 묵묵히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통성명 먼저 하지. 내 이름은 이정. 그리고 이쪽은 내 동생 리나야. 보면 알겠지만 진짜 피가 이어진 건 아니고 의남매지.”
흑발 흑안의 이정과 금발벽안을 하고 있는 리나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제 이름은 아……네브라 입니다.”
본명을 댈 수 없어 창졸지간에 만들어 낸 가짜 이름.
본명인 아르벤을 거꾸로 뒤집어 읽은 것에 불과한 조잡한 가명이었지만 이정은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는지 그저 살짝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서 네브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숲속에서 혼자 죽어 가고 있었던 거야 뭔가 범죄라도 저지르고 쫒기고 있던 거야”
아르벤, 아니 네브라는 잠시 망설였다.
예전이라면 어떤 상황이든 일단 진실을 말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진실을 말할 만한 처지도,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 네브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자신을 향해 따듯한 손길을 내밀어 준 이정을 향해 거짓말을 했다.
“전 어딘가의 감옥에 쭉 갇혀 있었습니다. 누가, 어디서,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납치하고 감금한 미친놈은 바로 어제 갑자기 저를 풀어줬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몇 개월이나”
“최후의 무대를 두고 대동맹과 사람들이 싸웠던 때,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갇혀 있었습니다.”
“잠깐 그게 사실이라면…… 4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고”
“4년이나 흐른 겁니까”
“……솔직히 믿기 어렵군. 뭔가 자네에게 원한이 있으니까 그런 일을 저질렀을 텐데. 그럴 거면 납치한 시점에서 그냥 죽여 버리면 될 걸 왜 굳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비싼 돈 들여 가면서 밥도 꼬박꼬박 먹이면서 지금까지 살려 둔 거야 그리고 왜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풀어 준 거고”
“…….”
그 질문에 네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훈이 진짜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성훈의 진짜 목적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은 악당이다. 그 어떤 악당보다 비열하고 저열하고 치사한 그런 악당. 그 녀석이 나를 살려 둔 이유는 간단해. 바로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성훈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필요 없이 명령 한 번만 내리면 금세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지금껏 살려 두고 풀어 준 것이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4년 전부터 지금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성훈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아는 만큼 전부 이야기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일단 가장 무난한 건 대동맹이 해체되고 자유연맹이 결성된 일이려나. 기존의 랭커들 위주로 권력이 분배되던 체계에서 벗어 나서 이제 사람들이 전부 투표로 각 도시의 의장과 권력자를 선출하고 맹주인 유성훈의 지도하에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어. 기존의 대동맹 멤버들은…….”
한참이나 문답을 나누면서 이정도 네브라가 진짜로 최근의 사실들을 하나도 모른다는 걸 사실로 받아들였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리나와 얘기 좀 하고 올 테니 푹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이 이정의 입장이더라도 일단 의심부터하고 봤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최초로 혼자만의 시간을 얻은 네브라는 갖가지 창을 열고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역시 비었군.’
1길드짜리 동전 하나 없는 황량한 아이템 창.
아이템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상태창을 띄워 본 결과 모든 능력치가 전성기 때와 비교해 최소 5할, 심한 건 7할까지 감소되어 있었다.
단순히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몸이 무거워진 것이다.
걸려 있는 상태 이상만 10개가 넘었으나 그중 아르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건 최하단에 위치해 있는 두 가지 상태 이상이었다.
약화 : 너무나 오랫동안 육체를 사용하지 않아 모든 능력치가 일정량만큼 감소합니다. 꾸준한 재활 훈련을 통해 잃어버린 능력치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태만 : 너무나 오랫동안 실전을 경험하지 않아 모든 감각이 둔해집니다. 꾸준한 실전을 통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장비를 모조리 잃어버린 것도 문제지만 일단 능력치와 감각을 다시 되찾는 게 더 중요해. 지금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컨디션을 회복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성훈에게 복수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천, 수만 가지가 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개량했지만 그 모든 건 자신의 상상일 뿐, 막상 자유를 얻자 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재활 훈련을 마치고 나면 일단 과거의 동료들을 찾아가면……지금까지 동료가 남았을까. 나 혼자만 남았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복수를 시작해야 하는 거지’
처음 튜토리얼을 시작했을 때에도 같이 있던 사람들과 힘을 합쳐 빠져나왔고 힘을 얻고 세력을 키워 가고 나서부터는 언제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처리하기 시작했다.
‘성훈은 힘, 권력, 명예, 부, 인재 모든 걸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일단은 동료가 필요하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정을 바라보며 네브라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정 씨. 초면에 이런 말을 꺼내기 부끄럽습니다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유령, 아니 유성훈에게 복수하기 위한 첫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