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17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44화
통로부터 시작해서 홀에 이르기까지 벽에는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각양각색의 조각상이 위치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기나긴 통로 너머에 있는 문을 열면 거대한 홀이 보인다.
중앙에는 다소 높은 형태의 단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단상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들이 마치 자로 잰 듯 조금의 오차도 없이 깔 끔하게 배열되어 알 수 없는 위압감과 경건함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건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랏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유연맹, 자유연맹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돈이 충분하다 못해 썩어 넘치는 수준인가 우리들의 단칸방 회의실이랑은 너무 차이 나잖아.’
“마시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아, 그냥 차가운 물이면 괜찮아요.”
냉수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킨 랏시는 조심스레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각 도시의 의장이나 부의장, 대형 길드의 수장, 또는 사회 각양각색의 계층에서 선출된 대표들에게만 출입을 허용하는 비처다.
성별이나 나이, 생김새가 어떻든 이 안에 있는 것으로도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다.
‘낯선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익숙한 얼굴도 몇몇 보여. 이 정도라면 최악의 상황 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소 소란스럽던 주변의 분위기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랏시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홀을 가로 지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대로 마른 침을 삼켰다.
어둠을 그대로 베어 내 만든 것 같은 칠흑의 정장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매달고 있어 유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
개성 있다 못해 괴랄하기까지 한 다른 사람들의 복장과 비교해 본다면 이 정도는 지극히 평범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던 랏시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층 더 긴장을 끌어 올렸다.
수많은 강자와 영웅을 쓰러트리고 승리를 거머쥔 전설적인 존재. 바로 유성훈이기 때문이었다.
“축제 때문에 그런지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게 되게 오랜만인 것 같군요. 회의 좋 아하시는 분은 없을 테니 빨리빨리 끝내고 쉬러 갑시다. 그럼 첫 번째 안건부터 시작해 볼까요 축제 기간 동안 추가 집행된 예산으로 인한 추가 집행 예산 편성 을…….”
성훈의 말을 시작으로 회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듯 평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작게는 대형 길드부터 시작해 한 계층, 한 도시, 이 세계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중 요한 내용들이 쉬지 않고 거론된다.
해방 전선에서 사용하는 숫자와는 차원이 다른 단위 때문에 비명이 터져 나올것 같았지만 랏시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입을 다물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 다렸다.
“일단 이 정도면 대충 급한 불은 끈 것 같군요. 그러면 이제는 긴급 안건으로 넘 어가 볼까요 축제 후로 범죄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 기를 나눠 볼까 합니다.”
“축제가 끝나면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 아닙니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죄질이 지독한 것들이 많습니다. 단순 범죄가 아니라 마약 판매나 담보나 보증인 제도를 통한 채무자 양산, 민족이나 인종 차별 등의 비율 이 상당하죠. 대체 어떻게 하면 이걸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현상으로 생각할 수있는 겁니까”
“그, 그건…….”
“몇몇 사람들을 잡아서 조사해 보니 요즘 들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해방 전 선이라는 집단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그에 대한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 인하기 위해 해방 전선의 대리인 한 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어디 보자, 랏시양”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랏시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중앙에 있는 단상으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해방 전선의 부길드장인 랏시라고 합니다. 일단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길드장인 네브라 님은 연락을 받기 며칠 전 미션을 하러 가셔서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직위가 아니라 해방 전선의 입장을 확실히 표명할 수 있는 대리인이라는 점이죠.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으니 표정 푸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진짜 그 유성훈인가’
네브라의 표현에 의하면 유성훈은 비열하다못해 치졸한 악당, 아니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악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본 유성훈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칭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부드럽다 못해 만만하게까지 모습에 긴장을 풀 뻔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진 불 안함에 제정신을 차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긴장을 풀고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잡아먹힐 것만 같은 식충식물 같은 느낌.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위험해!’
랏시의 표정이 굳은 것을 바라본 성훈은 흥미롭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죠.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최근 들어 증가하는 흉악 범죄의 뒤에 해방 전선이라는 신생 집단이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소문은 모두 헛소문, 악의적인 모함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거 흥미롭군요. 그런 소문을 누가, 왜 퍼트린다는 겁니까”
“해방 전선이 도시를 장악하기 전 지하를 장악하고 있던 범죄자들이 바로 그 범 인입니다. 도시의 치안과 질서를 바로잡는 개혁을 시작하는 도중 온갖 지하조직과 범죄자들이 다른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해방 전선에 원한을 가지게 됐고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저희에게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아시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있을 테지만 해방 전선이 결성된 이유는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이 불가능하거나 간신히 최소한도의 생활만을 유지하는 최 하층의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제가 듣기로는 현재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자유연맹과 저를 타도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 해방되는 게 진짜 목적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저희 도시는 자유연맹이나 상위 도시인 로스엔젤레스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해방 전선의 입장이 아닌 일부 사람들이 내뱉는 단편적인 주장에 불과할 뿐이니 그 점을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으나 랏시는 당황하지 않고 침 착하게 받아넘겼다. 자유연맹의 소환장이 도착한 날부터 네브라와 함께 머리를 싸매고 만들어 낸 대답들이다.
‘자유연맹은 대동맹의 독재와 폭정을 탄압한다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집단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약자의 편이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적당히 기어 준다면 놈들은 우리들에게 뭐라고 할 수 없어.’
자유연맹에 대해 조금 쓴 소리를 하거나 부정적인 소리를 한다고 사람을 보내 잡아들이거나 공격하면 과거 대동맹과 다를 바가 하나 없다. 오히려 안전과 생존을 목표로 삼았던 대동맹과 달리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이념 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더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네브라와 랏시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오히려 대범하게 나가기로 결정했다.
가만히 놓아 둔다면 계획대로 돌아가니 이득이고 병력을 보내 탄압하거나 통제 하려고 하면 단기적으로 볼 때 잠깐 손해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자유연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본격적으로 저항 세력을 구성하므로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해방 전선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
‘여기에 더해서 마지막 마무리까지.’
“토론토의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도시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아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긴 악습의 폐해로 빈인빈, 부 익부 현상이 극심해지고 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고 있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연맹에서 자금과 병력을 지원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심문을 하러 불렀더니만 오히려 당당하게 지원을 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 주변의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랏시의 시선은 오로지 성훈에 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쳐다봐도 성훈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분석당하는 기분에 식은땀마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참 재밌네요. 질문이 날아드는 즉시 막힘없이 청산유수로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대답도 그러네요. 그리고 말하는 게
‘해방전선은 나쁘지 않다. 나쁜 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올 동안 방관한 다른 도시 와 자유연맹의 책임이다’처럼 들리는 건 제 착각일까요”
“……착각이에요.”
‘들킨 건가’
차 한 잔 마실 만한 짧은, 그러나 랏시에게 있어서는 영원과도 같은 긴 시간이 지나간 후 성훈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만한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일단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각종 흉악 범죄 및 뒤숭숭한 소문들과는 해 방 전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하죠. 하지만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더라도 해방 전선의 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 역시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사태의 빠른 해결을 위해 특별 범죄 단속 기간을 정하고 요청하신 대로 자금과 병력도 빌려드리도록 하죠.”
“감사……잠깐, 지원이 아니라 빌려준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랏시 양의 고통 받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는 말을 믿고 빌려드리는 거죠. 만약 대대적인 자금과 병력을 지원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만약 도시에 큰 변화가 없거나 눈에 띄는 성과가 없을 경우 빌려준 자금을 그즉시 모두 돌려받고 관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 도시의 통치권과 모든 권리를 저희 쪽에서 받아가겠습니다. 기한은 대충 6개월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요.”
성훈은 그 말을 내뱉으며 은근슬쩍 눈을 굴려 구석에 있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보기 드물게 표정이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대장 노릇을 몇 년 하다 보니 역시 이 런 쪽의 촉이 발달한 모양이었다.
이런 전개는 예측하지 못 했는지 랏시 역시 표정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있었다.
“도시의 통치권을 비롯해 모든 권리를 받아간다니.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뭐가 심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터무니없는 이자를 붙인 것도 아니고 원금을 고스란히 돌려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도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지 않았을 경우에 발생하는 일이에요. 오히려 확실한 지원을 받고도 아무런 발전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너무 짧아요.”
“확실히 좀 짧은 감이 있기는 하군요. 하지만 이미 몇 개월 전부터 토론토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 않았습니까 공식 확인된 자금만 3조 길드에 병력이나 장비품도 천 단위, 이 정도면 오히려 아주 널널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루시아 님”
“예 아, 그, 그렇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군요. 혹시 너무 기간이 길어서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자금과 병력의 규모를 키우는 대신 기간을 축소하는 식으로…….”
“6개월로 하겠습니다.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6개월이라면 네브라가 말한 기간과 아슬아슬하게 일치한다.
어차피 그쯤 되면 자유연맹과 본격적으로 싸울 예정이었기 때문에 랏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토론토의 수뇌부들을 설득해 대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건 도시의 통치권이라는 담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되면 돈은 돈대로 날리고 도시에 대한 권리도 물 건너가는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