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30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57화
그동안 죽어 나간 사람들이 들으면 관짝을 박차고 나올지 몰라도 이 세계는 지구와 비교하면 유토피아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평화로운 세계였다.
지구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숟가락 재질과 인생의 출발점이 달라지지만 이곳에는 각자 능력치에 따른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맨손으로 시작해 공정 한 경쟁을 갖추며 성장해 왔다.
신들의 노림수에 의해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이유마저 사라진 다음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재능이 없는 사람이어도 간단한 미션만 하면 기본적인 의식주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능력치나 고급 아이템 같은 자원은 말라붙었어도 미션이 사라진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빌빌대는 사람이 나올 턱이 없었고 체력이 어느 정도만 넘어가도 병으로 앓을 일은 없어진다.
도시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건물과 주인 없이 펼쳐진 광활한 필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집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 Utopia가 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잘사는 사람은 잘사는 사람은 더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더 못사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됐으며 과도한 빚을 지고 파산해 자살한 사람이 늘어가며 범죄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결국 문제는 주변의 환경이나 세계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성무선악설이니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본다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게 맞는 것 같아.’
이정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는 지난번에 긴급 추경안 받아갔잖아! 보니깐 절반 이상을 빼먹더니만 이번에도 한몫 챙겨 보겠다 이거냐”
“뭘 빼먹어! 쓸 거 다 쓰고 남은 거라고!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해명할 게 있을 텐데 지난번에 내외당 합동 대규모 기동 훈련 때 받아갔던 예산!”
“훈련은 무사히 끝냈는데 왜 그걸 물고 늘어져”
“무사히 허허. 훈련 기간 내내 식사가 잼도 안 빠른 빵 한 조각에 수프 한 그릇만 지급돼서 사람들이 자비로 식사를 해결하게 만들고 스크롤이나 화살도 제때 지급 안 되서 입으로 펑펑 소리 내면서 진행한 훈련이 무사히 끝난 거냐 단순 계산해도 그 금액이…….”
“그만 하지 못해! 여기 계신 분이 누군지 알고 그딴 말을!”
“어쭈,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알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몰라도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라야지!”
자유연맹이라는 거대 조직을 이끌어 가면서 나름대로 정치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통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
자유연맹에 있는 대부분의 의원은 찬성파든 반대파든 전부 자신의 말대로 움직 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에 의제 때문에 싸움이 다투거나 언성이 격해져도 느긋한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정치판은 달랐다. 이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오른 사람들, 전 자유연맹 의장, 부의장 직을 역임하고 있던 하위 도시의 권력 자들, 자격을 인정받아 참가한 대형 길드의 수뇌부들이 모여서 펼치는 회의는 이정조차도 질리게 만드는, 복마전伏魔殿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더러운 진흙탕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음. 1시간 지났네요.”
리나의 말을 들은 이정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명색이 차별받는 하위 도시의 사람들과 외면 받는 소수를 위해 올바른 정치를 펴겠다고 모인 놈들인데 1시간이 지나도록 내가 잘했네 네가 잘못했네 하는 유치한 주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하루 종일 흘러도 제대로 된 안건 하나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임시 총리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기에는 뭐했기에 나름대로 회 의를 중재하려고 했던 이정은 회의장 안의 돌아가는 풍경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1만 명도 안 되는 소수 민족 주제에 입만 살아서!”
“그만!”
안경을 걸친 청년이 휘두른 장검과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 휘두른 샴쉬르는 이정이 내지른 방천화극에 얽혀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노골적인 욕설이나 가벼운 주먹다짐 정도는 모른 척 넘기더라도 서로를 진심으로 죽이려고 덤벼드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저놈이 먼저 시비를 걸잖아요! 우리가 사람 적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내가 거짓말을 했나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도 죄야”
자신이 직접 나서도 상황은 가라앉기는커녕 한층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쪽의 싸움을 말리면 다른 한쪽에서 싸움이 터지고 하나를 수습하면 다른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네브라 이 개새끼. 이런 거대한 똥 덩어리를 던져 주고 간 거냐’
자신 혼자 남기기에 대체 무슨 안전장치를 걸어 둔 건가 고민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걸 걸어 둘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의 반발이 워낙에 거세서 새로운 안건이나 계획은커녕 원래 처리해야 하는 업무도 거의 진행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주어진 권한은 쥐똥만 하고 사람들은 비협조적이다 못해 아예 노골적으로 적대적으로 나오고 있다.
반란 반란은커녕 현상 유지도 힘든 상황이다. 고만고만한 세력 수십 개가 존재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두 곳을 끌어들인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개의 세력을 끌어들이기 전에 네브라가 귀환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네브라가 은근슬쩍 눈치 준 대로 맡은 일이나 처리하면서 최대 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게 최선이다. 사람들이 주먹질을 하든 칼질을 하든 완벽하게 관심을 끊은 이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흠. 네브라나 랏시 성격을 보면 그냥 날 보내 주지는 않을 테고 분명 뭔가 함정을 파놨을 텐데……. 4차 각성을 마치고 실력으로 나를 쓰러트린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방법은 쓰지 않겠지. 나라는 패를 최대한 활용해서 해방 전선에는 득이, 자유연맹에는 실이 되는 상황을 연출할게 뻔해. 대체 어떤 함정을 파 놓은 거지’
직접 병력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해결하든가 배신자로 몰아가는 ‘무식한’ 방법을 쓸 정도로 네브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간자를 추려내기 위해 역정보를 흩뿌린 것만 보더라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빠질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함정을 파 놓은 게 분명 했다.
툭툭.
“오빠, 회의 끝났어요. 일어나세요.”
“응 나 안 잤어.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눈 감고 있었던 거야.”
“입에 묻은 침이나 닦고 이야기하세요. 이대로 가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거 같 아서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파하고 내일 이어서 진행하기로 했어요.”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며 이정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폐회 선언을 해야 끝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오빠가 자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거 한마디 해야겠구만!”
포부도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정은 회장 안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초면이거나 노골적으로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중립, 아니 아예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도 몇몇 존재했다. 잠시 머릿속에서 저울을 기울여 보던 이정은 해방 전선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되고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카비 야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무슨 일이요”
“시간도 시간인데 같이 저녁이나 먹는 건 어떨까 해서요. 이거 총리 체면에 혼자 밥을 먹으려니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쓸쓸하기도 해서…….”
“미안하지만 이미 선약이 있소.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약속을 잡지요.”
“에이 그러시지 마시고. 식사가 안 되면 차라도 한잔 마시는 건 어떨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으으으음.”
네브라로부터 한마디 들은 게 있었던 카비야는 가급적이면 이정과 거리를 유지 하려 했다. 그러나 임시라지만 총리직을 역임하고 있는 사람이 손까지 비비면서 식사 한 끼, 안 되면 차라도 마시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하는 일마다 태클을 걸고 가깝게 지내지 말란 말을 듣기는 했는데…….’
카비야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추락했지만 한때 이정이 네브라의 오른팔로 불리며 해방 전선의 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유 명한 사실이었다.
이정이 배신자라는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한 카비야는 결국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결정했다.
“좋습니다. 단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냅시다.”
“바쁘신 분이니 당연하겠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 앞에서 기막히게 맛있는 커피를 파는 데가 있는데 제가 직접 가서 사 오겠습니다.”
“어허 총리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가…….”
카비야가 말리기도 전에 이정은 이미 문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잠시 후 이정은 향긋한 향이 풍기는 커피를 양손에 들고 돌아왔다.
“자자 받으십시오.”
“이거 참…… 응”
컵을 받아 든 카비야는 자신의 손바닥에 쥐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프로였다. 순식간에 상황을 짐작한 카비야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고 손바닥의 감촉으로 액수를 확인 한 후 한층 더 풀어진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이거 젊은 친구가 예의를 아는구만. 아까 내가 섭섭하게 말했다고 마음에 담아 두는 건 아니겠죠 이정 씨가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잠깐 기분이 안 좋았던 거니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시바 길드라는 거대한 단체를 이끄시는 만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있겠지요. 전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후후. 커피가 참 맛있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커피를 대접해 드리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묘한 미소를 지은 이정과 카비야는 커피를 홀짝이며 시시 콜콜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다고 생각될 무 렵 이정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카비야 님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그냥 차갑다는 수준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견제하는 수준이던데 혹시 저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난 게 있습니까”
“글쎄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긴 한데.”
“모자란 점이 있다면 고칠 테니 부디 말해 줬으면 합니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 이 물어뜯기는 제 입장이 어떨 것 같습니까”
이정은 재촉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고 잠시 후 카비야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 나왔다.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얻어먹고 입을 싹 씻는 건 도의가 아닌 거 같으니 특별히 말해 드리리다. 네브라 원수가 이정 씨가 하는 일마다 태클을 걸고 심리적으로 좀 압박을 가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보아하니 뭔가 실수해서 찍힌 것 같은데 참고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요.”
이정이 배신자라는 이야기까지 듣지 못한 카비야는 이번 네브라의 조치를 단순한 길들이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설치는 2인자를 길들이기 위해 한동안 한직에 처박아 두거나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압박하는 건 자신도 가끔씩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카비야가 네브라의 밀명을 순순히 말해 준 건 비싼 커피를 대접받은 이유도 있 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이 다시 권력층으로 복귀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