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39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66화
미소가 떠올랐던 시간은 극히 일순간에 불과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수긍하고 진짜 정체까지 알고 있다고 말하고 반응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뒤에는 루시아가 있다.
아직 그녀를 포섭하는 계획은 완전히 중지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성훈은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순수한 호의를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군요. 아무리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면 피해망상 수준 아닙니까 그리고 해도 해도 너무하군요. 제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대했 는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지만 어떻게 악마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연기 하나만큼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이길 자신이 있는 성훈이 었다.
선천적인 재능에 후천적인 노력이 더해지고 허장성세를 비롯한 수많은 스킬들로 보정된 성훈의 연기는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고 있 었고 네브라마저도 순간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생각할 뻔했다.
그러나 일부러 알아차리라는 듯이, 극히 일부가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보며 네브라는 이를 갈았다. 이 녀석은 역시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하!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계획은 언제나 성공가도에 딱히 노 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너는 지금까지 우연, 혹은 호의를 가장해서 우리를 키워 주고 있었던 거다.”
“제가요 제가 머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너같이 미친놈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아! 네 심중이 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가축을 잡아먹기 전에 살을 찌 우는 것처럼 자유연맹과 해방 전선 사이에 그럴듯한 전쟁을 일으키려고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는 것! 내 말이 틀리냐”
역시 네브라는 네브라였다. 증거라고는 하나 없는 결과와 어렴풋한 심증만 가지고 순식간에 진상에 다다른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기는 했지만 여기까지만 이라도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훈은 태연자약했다.
“틀렸습니다.”
“틀렸다고”
“예. 애초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증거 있습니까 예 증거 있냐고요. 가만히 들어 보니까 전부 추측성 발언이거나 가정 일색의 의견이던데 의견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그거야 딱 보면 아는 거…….”
“모릅니다. 누가 봐도 몰라요.”
성훈은 단언했다.
네브라가 여기까지 추측할 수 있었던 건 성훈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수림에서 한 번, 마지막 전투에서 또 한 번 패한 이후 오감이 모두 차단된 자신 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오로지 성훈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하고 시뮬 레이션 해 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나마 루시아와 세르게이가 성훈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조금 알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에 불과했다.
“해방 전선이라는 세력이 빈민 구제와 사회구조 개혁이라는 훌륭한 일에 뜻을 두고 있다고 했기에 일부러 거대 길드들의 개입을 막고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큰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무이자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거금을 빌려줬죠. 저희들과 크고 작은 마찰이 생겼을 때에도 덩치를 키워 가는 도중 으레 생기는 말썽이라 믿고 일부러 모른 척 넘겨줬습니다. 백 명이 보 더라도 백 명 전부 선한 의도라고 보지 악한 의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성훈은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어른처럼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고 대화가 진행 될수록 네브라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일이 이 지경에 다다른 건 전부 하나같이 네브라 님 때문이죠. 처음 발표하신 것처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대의를 내걸고 순리에 따라 일을 처리했으면 상 위 도시에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을 세력을 만드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처음 목전은 온데간데없고 올바르지 못한 방법을 통해 일을 처리 하니 덩치는 커도 실속은 하나 없는 쭉정이 같은 세력이 남게 된 거 아닙니까”
“…….”
“아, 그래요. 그렇게까지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싶다면 전부 제 책임이라고 하죠. 이제 막 싹을 피우려던 세력을 처음에 확실하게 밟아 놓지 못한 죄, 어떻게든 잘 살아 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은 죄, 해방 전선이 이렇게 커 지기 전에 삭초제근하지 못한 죄, 전부 제 책임이라고 합시다. 이제 속이 좀 편해 지셨습니까”
“……닥쳐.”
“주객전도도 이 정도면 오히려 감탄할 정도로군요. 네브라 님, 제가 좋은 속담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 눈에만 보인다는 속담입니다. 제가 인정사정없는 악마로 보인다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브라 님이…….”
“개새꺄아아아! 닥쳐어어어!”
순식간에 뽑혀 나온 프라가라흐는 최단궤적을 그리며 성훈의 목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상황에서도 차갑게 식어 있는 한 조각의 이성에 따라 움직인, 최고의 일검이라 자부할 수 있을 만한 일격이었지만 아쉽게도 검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 했다.
챙!
프라가라흐는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완벽하게 막혀 있었다.
4차 각성자인 자신이 기습을 하고도, 전력을 다해 날린 공격이 늦게 출발한 검에 이토록 허무하게 막혔다는 생각에 순간 숨이 턱 막혀 왔지만 상대를 보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내.”
“다짜고짜 칼을 뽑아드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걸까 인성뿐만 아니라 예절도 제 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은데 이건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아.”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살기를 받은 제임스와 송일학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무조건 반사처럼 미리내의 살기를 받는 순간 살 아남으려는 본능이 멋대로 몸을 움직인 것이다.
‘마검 마검 하더니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잖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 아직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단 말이 냐 이 괴물이!’
네브라와 제임스, 송일학이라는 쟁쟁한 실력자들이 미리내 단 한 명에게 기세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걸 넘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은 성훈이었다.
“그만.”
“너희들 조심해.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바로 베어 버릴 테니까.”
광오한 말이었지만 그녀에게 실제로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네브라는 속으로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다.
원래 탑 랭커가 강한 건 알고 있지만 미리내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랭킹 3위라는 세르게이나 1위인 유성훈은 딱 보면 어떻게든 찔러 볼 구석이 보이지만 그 녀를 상대로는 도저히 이기거나 우세를 점한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슬프군요. 평화와 화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결렬될 줄 이야.”
“파산하든가 전쟁하든가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해 놓고 그딴 개소리를 잘도 지 껄이는군.”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건 전부 네브라 님이 자초한 화입니다. 그리고 제 제안은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입니다. 상위 도시와 하 위 도시에 생겼던 대립 감정을 완만하게 녹여 낼 수 있고 시간을 벌 수 있죠. 상 황이 꽤나 좋지 않으신 것 같던데 두 달이면 구조를 개편하고 쓸데없는 세력을 쳐내서 조직을 안정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 아닙니까”
“그러고 나면 잘해야 대형 길드 수준 정도로 세력이 쪼그라들겠지. 민심을 잃는건 보너스고.”
“거품은 터트려야죠. 그리고 그렇게 속단하지 마십시오. 확실히 안 좋은 소리는 듣겠지만 뭐 몇 년, 아니 몇십 년간 열심히 뺑이 치면 사람들 생각도 바뀌지 않겠 습니까”
탕!
네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훈의 진심에 대해서 아주 잘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토록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을 벌여 주지. 유성훈, 언제까지고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을 거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네브라 님 개인의 생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겁니다!”
“가자!”
네브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남아서 성훈의 개소리를 조목조목 따지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 옳고 그른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가는 같은 편인 랏시나 제임스, 송일학마저 저쪽의 사고에 물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정도로 성훈은 위험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고 이내 삼켜 버리는 괴물. 그런 괴물과 대화를 나눠 봤자 이쪽만 손해다.
“귀환하는 즉시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야겠네요.”
“그, 그래도 되는 거야 이것저것 재 봐야 할 게 엄청 많다면서”
“방금 전 대화에서 뭘 들은 거예요 지금 상황의 주도권은 완벽하게 저쪽이 쥐고 있어요. 머뭇거리다가는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돼 버린다고요.”
“그래. 나는 깡통이라 미안하다! 머리 좀 좋으면 다야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랏시, 계획을 바꾼다. 준비가 아니라 일단 바로 선전포고를 한다. 명분은 아무 거나 갖다 붙여도 좋아.”
랏시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네브라는 단호했다.
“적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다가는 평생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측에서 벗어난 과감한 움직임이다.”
* * *
네브라가 떠난 이후 천막 안은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뒤에 서 있기만 했던 루시 아였다. 원래부터 낯빛이 좋지 않았지만 네브라와 성훈의 대화를 들은 지금은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맹주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물어보십쇼. 저희 사이에 숨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
“방금 전 네브라 님이 말했던 것……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일부러 세력을 키워 주고 자극했다는 게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후. 사실대로 말해 줬다가는 바로 졸도할 것 같네.’
루시아의 건강을 걱정한 성훈은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 헛소리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호구 취급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도움을 주고 편의를 봐준 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했으면 제 진심을 깨 닫고 서로 양측이 만족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는 게 정상인데 그 네브라라는 사람은 저랑 무슨 원수라도 진 건지 처음부터 대화를 나눌 생각도, 타협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적으로만 규정하고 움직였습니다. 결국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건 네브라의 그 이유 없는 적의 때문입니다. 그 사람 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성훈의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던 루시아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