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2
0092 / 0473 ———————————————-
12.나는 재난영화를 좋아한다
순백색의 공간.
보통 이런곳에 떨어지면 당황할법도 하지만 3번째나 경험하면 별로 놀랄만한것도 아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다.
“술도 주나?”
“물론입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술이 있습니까?”
“글쎄. 내가 아는건 별로 없는데 추천하는 술이라도 있어?”
“그럼 비장의 술을 한 잔 따라 올리죠.”
쪼르르륵.
눈을 감았다 뜬다. 0.1초도 안되는 사이에 이미 주변의 모습은 상당히 변해있었다. 고풍스러운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절제된 동작으로 잔에 녹색빛의 액체를 따라내고 있는 제리의 모습. 다른 사람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활동하는지 성훈은 알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성훈에게 있어서 이 장소는 휴식하기 좋은 별장이라고 표현할수 있었다.
큰 미션을 진행하기 전에 휴식을 취할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산해진미를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마음껏 즐길수 있다. 미션을 피할수 없는것이고 제리로써 특별한 정보를 얻어내는게 불가능하다는것을 진작에 알아차린 성훈은 그저 이렇게 최대한 즐기는것에 중점을 뒀다.
녹색빛의 액체는 풀잎처럼 상쾌한 향기가 풍겨왔고 술이 아니라 과일주스를 마시는것처럼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맛있군.”
“도시에서 돈 주고 사려면 백만길드는 넘게 나오는 물건입니다. 후후후.”
“별로 술을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공짜라니 즐기지 않으면 손해지. 하지만 지금 마셔서 취할수는 없는 노릇이고 본론에 들어가보자고.”
지난번에 12:00 정각으로 착각했다가 00:00시. 날이 바뀌는 시점에 미션을 시작해 당황했던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지에서 알려준 날짜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모두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성훈 역시 이번에는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첫 번째 강제미션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아주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최악의 상황에 처했지만 반대로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낼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운이 두번 따라줄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돌아가는 세계도 아닌 이상 방심하고 느긋하게 행동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시 성훈님은 이야기가 빨라서 좋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이번 미션은 지금까지 경험해오셨던 던전 공략 형식이나 사냥 형식으로 진행되는게 아닙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소리지?”
“흠. 혹시 서바이벌 좋아하십니까?”
“서바이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성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리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이번 미션은 간단합니다. 한달. 한달 동안 살아남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지 한 군데가 잘리든 간신히 숨만 이어지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미션이 끝날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미션을 클리어 하실수 있습니다.”
“잠깐. 뭔가 불안한데. 혹시 막 오우거 때거리나 용족 몬스터가 나오는 곳에서 한달간 살아남으라는 그런 말은 아니겠지?”
“예? 설마 그럴리가요. 몬스터는 분명 있기는 합니다만 현재 유저분들의 수준으로 충분히 감당하실수 있는 몬스터들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고작해야 한달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그런 간단한 조건이 강제 미션으로 채택되다니? 사정이 좋아도 너무 좋아보이는 이야기에 성훈의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왜 미션이 B+급이나 되는거지? 고작해야 한달간 살아남는게 조건인데 그렇게 높은 난이도가 책정된 이유가 뭐야?”
B급 미션은 날고 기는 탑랭커나 대형길드에서도 아직 도전하지 못하는 최상위 미션이다. S급의 미션을 훌륭하게 클리어해낸적이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러가지 사정을 봐주고 NPC의 육체와 스킬을 제공해 수행한것에 불과하다.
“성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단순히 살아남는게 조건이라면 고작해야 B급은 과분하죠. C,D급은 되야할겁니다. 그럼에도 B+라는 등급이 붙은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단 두 가지 조건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죠.”
“두 가지 조건?”
“그렇습니다. 첫번째 조건은 바로 살인.”
한달간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살인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타 유저를 죽일시 그 즉시 한 끼를 떼울수 있는 식량과 식수 조금이 인벤토리로 자동 지급됩니다. 여러명이서 합공한 경우에는 최대의 피해를 입힌 일인에게만 보상이 나옵니다.”
“잠깐 설마.”
식량과 식수라는 말에 성훈의 내면에서 뭔가가 강렬한 경고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만약 이 상상이 맞는다면 이 미션에 B+라는 난이도를 주는건 어쩌면 너무 너그러운걸지도 몰랐다.
“미션이 진행되는 장소는?”
“육지와의 접근이 차단된 섬입니다. 뭐 섬이라고는 하지만 그 크기는 꽤나 큰 편이죠.”
“…악취미로군.”
악취미다.
한달간 섬 안에 수만명의 사람들을 가둬놓는다는 발상. 게다가 사람을 죽일시 식량을 준다는 조건 또한 잔혹하다. 한 마디로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을 벌이라는 말이 아닌가?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단순히 지닌바 힘이 센자는 신들께서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번 미션을 통해서 생존력, 주의력, 유대감, 인간성 여러가지를 갈고닦을수 있는 찬스가 될수 있으니 어떤 의미로 생각해보면 이것도 기회 아닙니까?”
“글쎄. 두 번째 조건은 뭐지.”
“그리 대단한건 아닙니다. 전번에 진행하신 미션에서 미션포인트에 대해서는 잘 아셨겠죠? 이번에도 미션포인트가 도입됩니다. 미션이 시작되시면 서브미션창이 따로 생성되실겁니다. 그 서브미션에 나온 내용들을 수행하시면 미션포인트를 획득하실수 있죠.”
“보상방식도 지난번과 같나?”
“같습니다. 섬 안에서 획득하신 물건들은 미션포인트로 가져가는게 가능합니다.”
이럴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고해도 성훈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전혀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한달만 살아남으면 된다고?”
“예. 모든 유저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한 명의 사상자도 나지 않고 열심히 굶주림을 이겨내 한달간 버티는 감동적인 클리어도 가능하죠.”
“감동적? 그런걸 기대할거면 첫 번째 조건을 넣지 말았어야지.”
사람을 죽이면 식량을 준다고 해놓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미래를 기대하다니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다. 그러나 성훈의 목소리는 질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묘하게 들떠있었다.
“이런, 원래 그만한 시련이 있어야 감동이 더 커지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런 진흙탕속에서야말로 사람의 본성이 나오는법입니다.”
“그 점은 나도 동의하는바야.”
“신들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평상시에 아무리 기도를 올리고 선행을 쌓고 착하게 지내본다고한들 극한 상황에 떨어지면 평상시의 연기가 아닌 진정한 본심이 드러난다고 생각하시죠. 진정한 선인이 지옥에 가더라도 변하지 않을겁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악인은 천국에 가더라도 개심할 여지가 없겠죠.”
제리는 웃었다.
이 미션이 제안되었을때 반대할줄알았던 선신계열에서 오히려 찬성을 하는 바람에 악신들이 상당히 당황해했다.
‘진흙탕에서야말로 진정한 보석을 발견해낼수 있다고 하던가?’
인간의 관점으로보면 선신이 오히려 악신보다 더 악해보일것이다. 신은 자신이 선택한 인간을 단련시키고 확인해보기위해 시련을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신들이 내리는 시련은 어중간한 범주의 시련이 아니다.
어중간한 사람들도 절망하고 꺾이고 굴복할만한 어마어마한 시련들. 심지어 어떤 악신이 조금 난이도를 낮춰야하는게 아니냐고 말하자 한 선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않소? 지금 남아있는 자들이 적은것도 아닌데 이 정도 시련에도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해나갈 사람은 찾아보면 충분히 나오겠지. 아예 굶겨죽인다는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난리요? 고작해야 한달인데 진정으로 강직한 자들이라면 한달간 굶으면서 면벽수련을 하는한이 있더라도 살인을 안할수도 있지.”
그 말을 듣고 악신은 선신의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머리속을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낸 제리는 가볍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한달간 몸 성히 지내시길.”
박수소리가 사라지기 전 이미 성훈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있었다.
————————————————————–
흠, 제가 좀 이상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뭔가를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못하는 그런 타입입니다.
한평생 신을 믿고 살아온 신도나 선인같은 사람들의 선함이 과연 진짜인가 항상 시험해보고 싶어서 궁금증을 참을수 없습니다. 평화스러운 나라에 태어나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왠지 가식적으로 보이고 막 내전같은게 벌어지는 나라에 태어나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선인처럼 보입니다
한번 그런 사람들을 잡아놓고 한 삼일 굶기거나 지독한 고통을 주고 악행을 시켜 진정한 본성을 확인하는 상상을….
쓰읍.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은 상상일 뿐이죠(정신병 아닙니다, 소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