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00
■ 99화. 하이라이트 (1) □ ᓚᘏᗢ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멀미가 나버려서 토했다. 그것도 위장에 있던 모든 음식물이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
갑작스레 중력이 사라진데다가 세실리가 장난이랍시고 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니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내 신형이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요동쳤다.
세실리는 마법을 사용하여 익숙하다지만 나에게는 첫 경험이었기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우욱…”
“미안해. 그… 괜찮아?”
내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헛구역질을 하자 세실리가 옆에서 걱정해줬다. 눈이 돌아갈만한 미녀가 나를 걱정해주어서 그나마 기분은 좋았지만 상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는 머리대로 어지러웠고 속은 속대로 뒤집어졌다. 저택에서 잠깐 쉰다면 나아지겠지만 하이라이트 전까지 전시회 구경은 포기해야 한다.
“…저택에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거듭 사과할게. 마음 같아서는 회복 마법을 걸어주고 싶은데 내가 마족이라…”
“마족은 회복 마법을 못 써요?”
“사용할 수는 있는데 마족에 한해서야. 너도 알다시피 검은 마나는 악마들의 능력이거든. 마족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사용했다간 엄청난 부작용이 따를 걸?”
그녀의 설명처럼 검은 마나는 악마의 전유물이다. 성직자들이 쓰는 신성력과 완벽히 대치되는 기운.
신성력이 마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에게 이로운 효과를 준다면, 검은 마나는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을 끼친다.
회복 마법도 별 반 다른 게 없었지만 방금 전 부유 마법은 어떻게 된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아까 그 마법은…”
“레비테이션(Levitation)은 회복 마법처럼 체내에 마나를 흘려보내는 방식이 아니라서 그래.”
역시 마법은 신비롭고 매력적인 능력이다. 마법에 대해 무지하다보니 제논 일대기에도 상세히 설명을 못 했는데 조만간 가능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실리처럼 마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세실리는 마족이다보니 공식보다는 이런 이런 느낌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해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저택으로 돌아가자…’
물로 입 안을 헹궜다지만 여전히 찝찝하다. 특히 토했을 때 느껴지는 치아의 뽀득거림(?)이 매우 불쾌했다.
나는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고개를 드니 걱정을 듬뿍 담은 채 나를 바라보는 세실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딴에는 재미있는 장난을 쳤다가 이렇게 됐으니 죄책감을 느낄 터. 나는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억지 웃음을 지었다.
“…전 저택으로 먼저 돌아갈게요. 누나는요?”
“같이 가자. 적어도 책임은 져야…”
“누가 책임을 진다고?”
세실리가 말하는 도중에 앙칼진 미녀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사랑스러운 나의 여자친구, 마리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우리 둘을 번갈아보다가 파리하게 변한 내 안색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치켜올라간 눈매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걱정스러움이 담겼다.
“너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마리는 세실리는 무시하듯이 지나치며 서둘러 나를 부축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부축을 받으며 슬쩍 세실리의 표정을 확인했다.
겉으로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탓에 생각을 읽기가 더 힘들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곧바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리에게 사과했다.
“미안. 내가 장난을 쳤는데 종족 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거든.”
“무슨 장난을 쳤길래?”
세실리는 마리의 물음에 상세히 설명해줬다. 다만 아르웬과 만난 건 이야기하지 않았다.
“…토할만도 하네.”
모든 전후사정을 듣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마리.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상냥하고 따뜻한 그녀의 손길 덕분인지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으나 어지러움은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이후로 마리는 한동안 나를 걱정하는 척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가 세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책임을 진다는 게 그 말이었니? 아이작이랑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
“응.”
“그럼 같이 돌아가자. 어차피 볼 건 대충 다 봤으니 괜찮겠지. 게다가 하이라이트는 저녁부터 시작되니까.”
마리의 말마따나 본래 축제의 진정한 시작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다. 지금도 시끌시끌하지만 저녁이 된다면 이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오르겠지.
전시된 작품도 저녁에 관람해도 상관없다. 하이라이트가 따로 있을 뿐 전시된 작품은 그대로 남아있어 소외되지 않는다.
“알았어. 겸사겸사 저녁 식사도 해결하면 되겠지. 일어설 수 있어?”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살짝 어지럽긴 해도 저택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것이다. 그동안 이번에 새로 구매한 책을 읽어도 된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까스로 참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혹여 내가 넘어질까봐 마리가 곁에서 부축해줬다.
그런데 얘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도 내 팔을 가슴 쪽으로 잡아당긴다. 덕분에 찹쌀떡 같이 말랑말랑한 감촉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래서 부끄럽냐고?
설마 그럴리가. 오히려 그 반대지.
이런 짓을 하도 당하다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즐길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세실리가 했다면 양심이 찔렸기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겠지만, 마리는 내 여자친구다. 이정도는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래도 예의상 말은 해야겠지. 나는 거의 가슴골 사이로 파묻히기 직전인 내 팔을 느끼면서 마리를 조용히 불렀다.
“마리?”
“응?”
“좀 많이 느껴지는데.”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며?”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정말 슬프면서도 기쁘군. 내가 아이러니한 감정을 겪고 있을 때 마리가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변태라서 이런 거 더 좋아하잖아. 안 그래?”
“내가 왜 변태야?”
“입술이 실룩거리는데?”
“…아무튼 세실리 누나가 옆에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하지 마.”
“그럼 나한테 딱 붙어 있어. 이렇게!”
마리는 내 팔을 붙잡은 채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자연히 내 신형이 마리 쪽으로 쏠려 찰싹 붙게 되었다.
실로 과감한 그녀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깐, 나는 세실리의 눈치를 보았다. 혹여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지만…
“흐응.”
내 예상과 달리 세실리는 색기가 가득한 비음을 흘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눈매 또한 장난기가 들어간 게 여러모로 불안감을 자극시켰다.
마리도 나와 비슷했는지 절대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내 팔을 더 강하게 감싸안았다. 덕분에 내 팔은 마리의 가슴 사이에 완전히 파묻혔다.
이윽고 세실리는 우리 둘을 서로 번갈아보더니 손을 부드럽게 뻗어 그나마 자유로웠던 내 팔을 슬쩍 잡았다. 그리고 약간 달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뭉클-
마리가 했던 것처럼, 세실리도 내 팔을 본인의 가슴 사이에 파묻었다. 내 양팔이 아름다운 두 미녀의 가슴 사이에서 살려달라고(행복하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나는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 감촉이 온전하게 느껴지자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나에게 남자의 본능이 튀어나오는 걸 막아달라고.
하지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야! 너 그 손 놓지 못 해?!”
“왜에? 나도 너처럼 장난치는 건데?”
“이건 연인끼리나 할 수 있는거야. 지난 번 행사에서도 인내심 테스트라면서 그러더니!”
“그때는 그런 거고 지금은 그냥 장난친 건데? 네가 자꾸 옆에서 그러니까 못 참겠잖아.”
“이…!”
마리와 세실리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는 건 착각일까, 아니면 보는 그대로일까. 문제는 그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 끊긴 인형처럼 그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을 때, 나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슬쩍 들어올려 세실리를 힐끔거렸다.
고개를 아래로 내린 탓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질식하기 직전인 내 팔이 사이에 끼여있다.
이다음에 시선을 더욱 위로 올리니 세실리의 요망한 얼굴이 보였다. 점점 더 빨갛게 변해가는 두 개의 뿔까지.
‘뭔가 점점 못 참겠다는 얼굴인데…’
오늘따라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는 듯한 세실리다. 나는 세실리에게서 시선을 떼어 반대편을 쳐다봤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눈매를 날카롭게 뜬 채 세실리를 노려보는 마리의 예쁜 얼굴이 보인다. 마리가 저렇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더욱 귀여워졌다.
그래도 나중에 한 소리 들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다시 아래로 떨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호강하는구나…’
그리하여 저택에 도착하고나서야 내 팔이 자유로워졌고.
“아이작. 너 이리 따라와.”
“왜?”
“…아니다. 그냥 여기서 깨물어야지. 앙!”
“악!”
마리에게 확인용 도장이랍시고 깨물깨물 당했다.
* * *
마리에게 볼을 깨물리고, 이다음에 키스까지 하고 그녀의 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좋아서 30분은 포옹한 것 같다. 역시 연인 간의 포옹만큼 달콤하고 효과가 뛰어난 치료제는 없는 듯하다.
아무튼, 나는 휴식을 위해 내 침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아델리아와 니콜과 잠깐 만나고 오는 건 덤.
어지러움증은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호전되었지만 속이 뒤집어진 탓에 안정은 필수였다.
“후우.”
나는 속을 달래기 위해 찬물을 마시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경험은 처음이었던 탓에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균형을 담당하는 기관이 망가진 것 같달까. 나에게는 새롭다 못해 스펙타클한 경험이었다.
‘장난만 안 쳤어도 좋았는데.’
하늘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는 것만큼 진풍경은 또 없을 터. 나중에 부탁할까 생각했지만 세실리의 성격상 장난을 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 요즘 세실리의 행태가 약간 이상하게 느껴져 부탁하기 껄그럽다. 뿔의 붉은빛이 강해지면 악주기가 다가왔다는 뜻인데 그녀의 뿔은 검은색보다 붉은색이 더 많이 차지했다.
악주기가 더 가까워지니 욕망에 더 충실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악주기를 무난하게 넘겨겠지만 걱정이 되는 어쩔 수 없었다.
“읏차.”
이렇게 걱정해서 뭐 하겠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저녁 식사까지 개인 휴식 시간이니 그때동인 책이나 읽으면서 여가를 보내면 된다. 때마침 서점에서 구입한 도서가 있으니 그걸 읽으면 될 터.
마리도 화장을 고칠 겸 손님방에서 가족이랑 머문다고 했으니 여유를 즐겨도 좋을 것 같다.
똑- 똑- 똑-
“아이작. 나야. 들어가도 돼?”
이제 막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 직전이었다. 노크와 함께 문 너머로 세실리의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저택에 들어오기 전 세실리는 잠깐 침실에 방문해도 되냐고 나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나는 딱히 상관없었기에 기꺼이 허락했고.
이에 나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허가를 내렸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덜컥-
출입 허가가 떨어지자 세실리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호위 기사인 가르츠는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혼자였다.
나는 세실리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는 내 침실에 한 번 들어온 적이 있으나 세실리는 처음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방 주인인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 편이 좋다.
“아. 굳이 일어설 필요는 없어요. 제가 가면 되니까.”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세실리가 손을 내밀며 나를 제지했다. 그전까지 반말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존댓말을 사용하면서.
그에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태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 둘이 있을 때는 존경의 의미로 말을 높일 거라고. 최근 둘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기가 은인께서 쉬시는 방이군요.”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를 풀고 똑바로 섰을 때 세실리가 침실을 둘러보며 감상평을 내렸다. 헬리움의 공주가 보기에는 평범하디 평범한 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머쓱해져서 뒷못을 매만지고 있을 때, 주위를 둘러보던 세실리의 시선이 내 책상 쪽에 고정되었다. 책상 위에는 책 한 권과 더불어 사용하지 않은 원고지가 쌓여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는 이곳에서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셨고요. 그렇죠?”
“네.”
“역시 그렇군요. 이곳이…”
세실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책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그녀가 걸어오는 동안 보여줄 것이 생각나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니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서랍이 보였는데, 나는 늘 갖고 다니는 열쇠를 이용해 가볍게 해제했다. 이어서 서랍을 개방하자 시간이 흘러 변색된 원고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1권을 제외한 제논 일대기의 초고들이다. 세실리가 좋아할 것 같아 보여줄 생각이다.
“누나. 이거 한 번 보실래요?”
“이건…”
“제논 일대기 초고들이에요. 누나라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
나는 그저 좋아할 거라 예상했는데 세실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보물을 넘겨받았다는 표정이랄까.
그녀는 내 손에 쥐어진 초고들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떨리는 손으로 넘겨받았다. 이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초고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이네요… 제가 읽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해요.”
“이제 제가 제논 일대기 작가라는 걸 믿을 수 있죠?”
물론 세실리는 그전부터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임을 알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확인사살용이다.
원래 아카데미에서 초고를 보여주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서 지금 보여준 것이다.
“…네.”
세실리는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초고와 나를 재차 번갈아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은인이시여.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인데요?”
“이 초고를 헬리움에 보관해도 될지…”
“안 돼요.”
안 되는 건 안 되는거다. 1권의 초고를 도난당한 기억 때문인지 다른 초고만큼은 내가 관리하고 싶다.
만약 상황이 정말 여의치 않다면 국가에게 맡기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초고 하나만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마당에 누군가에게 맡기는 건 어불성설이다.
설령 그것이 세실리라 해도 말이다. 마족인 그녀가 초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거라 생각은 안 하지만 시기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세실리는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라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몸. 나는 머릿속으로 마리를 떠올리며 헛기침을 토했다.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어쩔 수 없죠. 마족에게 이 초고의 가치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거든요. 누나도 대충 알고 있죠?”
“네. 하지만 우리 마족은 결코 이 초고를 이용하지 않을 거예요. 제논 일대기는 우리들에게 신이 내려주신 구원과 같은 것. 그리고 이 초고는 신이 내려준 성물이나 다름없어요.”
“크흠…”
얼굴에 금칠을 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토했다.
그동안 세실리는 아쉽다는 눈길로 초고를 살펴보다가 다시 나에게 반납했다. 반납된 초고는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시켰다.
“정말 그것에 보관해도 괜찮겠어요? 하다못해 금고라도…”
“애초에 제가 제논 일대기 작가라는 건 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고, 금고라면 더욱 눈에 띌 거예요.”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이 있다. 괜히 금고에 보관했다간 시선이 갈 수도 있다.
더군다나 출판사에서도 초고를 성능이 좋은 금고에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째로 털렸다고하지 않았나. 그정도 실력이면 어줍잖은 금고는 모두 의미가 없다.
“정말로, 정말로 만약이지만 제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면 그때 생각해볼게요. 헬리움은 다른 나라와 달리 부담감이 적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누나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요?”
리나와 레오르트는 전과가 있어서 맡기기 껄그럽고, 테르스 왕국은… 정치는 몰라도 인성이 별로라서 싫다.
마리의 가문, 레킬리스에게 맡겨도 그 위에 황족이 있으니 분란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레킬리스 가문도 그 점을 우려하여 초고를 다른 곳에 맡길테고.
그러므로 남은 건 헬리움밖에 없다. 세실리의 말마따나 이 초고를 성물급으로 취급한다면 다른 나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길다. 내가 죽고나서도 세실리가 보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헬리움이 중립에 위치해 있구나.’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아리따운 미소였다.
“은인은… 정말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신기해요. 이 초고를 썼을 당시에도 우리 마족을 좋게 보셨을텐데… 아닌가요?”
“그냥 사람으로 생각한 거죠. 마족이 악마로 변한다면, 이 세상에는 악마보다 더한 사람이 많으니까.”
대표적으로 ‘인간’이 있다. 전생에서 유명했던 짤이 있는데, 악마가 신에게 이리 소리쳤다.
신은 악마라는 자신들을 만들었으면서 왜 인간을 만들었냐고.
그만큼 인간의 악랄함이 때로는 악마보다 더하다는 상징적인 짤이다. 실제로 천사와 악마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속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터넷에서 악마보다 더 심한 사람들을 무수히 지켜봤다. 저게 정녕 사람이 할 짓인가? 라는 의문을 들만큼 심한 경우도 있었다.
“사람으로 생각했다라… 가끔 은인이 저보다 오래 산 사람으로 느껴지네요.”
“하하. 재미있는 농담도 참.”
약간 뜨끔거렸지만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내가 환생자라는 건 죽을 때까지 숨길 생각이다.
“수명도 많으셨으면 좋았을텐데…”
“네?”
“아니예요. 그런데 은인.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에 은인께서 발간한 카이르 외전을 보고 생각난 게 있거든요.”
“그게 뭐예요?”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뒤이어 그녀는 우물쭈물거리며 망설이더니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딘가 긴장한 것처럼 느껴지고, 또 기대감이 섞여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은인은 정말로… 엘프와 인간이 이어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세요?”
“흠…”
“정확히는 수명 차이가 그토록 심한데 이어질 거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아무리 서로가 좋다고한들 신이 정해준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니까.”
세실리는 종족과 종족 간의 사랑하는 본질적인 문제, ‘수명’을 언급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늘 언급했지만 수명은 신이 정해준 운명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100년조차 오래 산 것이며 엘프는 기본적으로 300년은 훌쩍 넘는 수명을 자랑한다.
그러니 이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한들 헤어짐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몰라도 엘프는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할 것이다.
‘엘리샤도 그럴거고…’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엘프 여왕 엘리샤는 큰 비탄에 빠진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나 표현을 하지 못 했다는 후회가 사무쳤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전생에서도 수명 차이로 인한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많이 지켜봤다. 대부분 이어지지 못 한 채 ‘후회’했으며 심각한 경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여기서 항상 언급되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나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는 세실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긴장과 염려가 담겨있었다.
이에 한동안 그녀와 마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엶으로서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누나의 말대로 수명은 신이 정해준 거예요. 서로가 사랑해도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인간은 몰라도 엘프는 그 부분을 두려워할 거고요. 어찌 보면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 수도 있죠.”
“…그럼 포기해야하는 걸까요?”
내 대답에 세실리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이르와 엘리샤가 이어지지 못 한다는 게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엘리샤가 비탄에 빠진 걸 본 여주인공, 메리가 각성하는 장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니까.
전에 행사에서 에딘이 예측한 것처럼, 메리는 엘프다.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 거친 제논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품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카이르와 엘리샤의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고민하게 되지만, 이윽고 마음을 다잡으며 제논에게 다가간다.
제논도 아버지나 다름없던 카이르의 죽음에 슬퍼하던 와중에 메리의 고백을 듣게 된다.
“아뇨. 포기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간단해요.”
나는 세실리와 똑바로 마주하다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워하면 돼요.”
“… …”
“평생을 후회에 묻혀서 사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본래 추억은 만들 때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지만, 그 추억이 추억으로 남게 되었을 때가 가장 슬픈 법이다.
만약 엘리샤가 카이르의 마음을 받았들였다면 그 추억은 후회가 아닌 그리움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평생 안고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에 묻어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도 있다.
“헤어짐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짧은 시간을 행복한 그리움으로 채울지, 아니면 슬픈 후회로 채울지 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에요. 그래도 저라면 그리움을 선택할 것 같네요.”
“…은인다운 대답이네요.”
세실리는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나를 마주했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을 뻗어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제 고민을 가볍게 털어내줘서.”
“이정도로 뭘…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세실리의 감사 인사를 듣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내가 당황하는 와중에 그녀는 붙잡았던 내 손을 풀어주더니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조심조심 물러났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침대에게 시선을 한 번 주더니 나를 쳐다보면서 야릇하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침대가 넓네요. 둘이 누워도 문제없을 것 같아요.”
“… …”
“그럼 조금 있다가 식사 때 뵙도록 할게요.”
끼익-
어느새 문까지 도달한 세실리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이에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세실리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의 사랑스러운 은인.”
탁!
문이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