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06
■ 105화. 보험 (1) □ ᓚᘏᗢ
한편 공연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시간, 마이샬 저택.
마이샬 저택에는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이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며 경계하는 중이다.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에 개최되는만큼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기사단의 배치는 대략 이렇다. 우선 각 가족 구성원의 침실 문 앞에 두 명의 기사들이 근무를 서는 중이고, 중요한 문서나 물건이 보관돼 있는 사무실이나 지하실 입구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소수의 인원이 저택을 지키고 있으나 그들은 레오르트, 리나 남매가 직접 지목하여 파견을 보낸 기사단.
한때 드래곤조차 때려잡았다던 호크도 훌륭하다며 치켜세울 정도이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 나도 축제 가고 싶은데. 나도 누구보다 잘 놀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냥 까라면 까야죠.”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던지라 축제에 참여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군인은 상명하복이 원칙이지만 가끔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다.
특히 코 앞에서 축제가 벌어지는데 본인들은 저택을 수호해야하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저희 임무 교대는 언제입니까?”
“근무 투입된지 10분밖에 안 지났다.”
“아. 젠장.”
후임 기사는 선임의 대답에 탄식했다. 이 문을 지킨지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시간 참 더럽게 안 간다.
“근데 저택에 뭐가 있다고 저희가 경계를 서야하는 겁니까?”
“글쎄. 전시회가 이 지역에서 열리니 뭐가 있다 생각하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걸 방지하는 거겠지.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난 차라리 호크 경이나 한 번 보고 싶네.”
“호크 경이 그렇게나 강합니까?”
후임의 질문에 선임 기사는 팔짱을 끼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젊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네. 넌 혼자서 드래곤을 때려잡은 사람을 본 적 있냐? 네가 그 모습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처럼 기사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리고 후회했죠?”
“조금은.”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도 비슷하다고, 아이작이 이 광경을 보면 익숙함이 느껴졌을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이 빨리 지나가도록 만들기 위해 선임과 후임이 서로 잡담을 떠들며 근무를 서는 모습.
물론 그렇다고 근무 태만이 아닌 것이,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도 탐지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특정 범위 내에 낯선 사람이 침입하면 곧바로 그들의 감각에 감지될테니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서지, 다른 종족 특히 마족이나 엘프이라면 이야이가 달라진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들의 감각을 속이는 건 물론이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여 벽을 통과할 수도 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데…”
마이샬 가문의 가주, 호크가 일처리를 하는 사무실 안.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방에서, 한 인영이 책상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기사 두 명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쪽에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침입자는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 그것도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 엘프였으니까. 엘프는 태생적으로 마법에 특화되어 있지만 다크 엘프는 은신 능력이 몇 배나 뛰어나다.
평범한 도둑이 몸을 숨긴다면 적어도 탐지 기술 혹은 마법에 적발되겠지만, 다크 엘프는의 은신술은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다.
몸을 숨기는 것 정도가 아니라 공간과 하나로 동화되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어둠과 안식의 여신, 모라가 다크 엘프에게 전수한 권능 중 하나임과 동시에 축복이다.
숙련된 다크 엘프의 은신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기준으로 최소한 중급 기사급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것조차 ‘감지’하는 거지, 다크 엘프는 한 명 한 명이 산전수전 거친 노련한 전사들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곳도 아닌가?”
이번 아르웬의 호위로 나오게 된 다크 엘프, 레인은 자기가 조사했던 서류를 모두 원래대로 되돌리면서 의문을 표했다.
현재 그녀가 찾고 있는 건 놀랍게도 제논 일대기의 초고.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아르웬에게 접근했던 빨간 머리의 남자가 했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제논은 제논 일대기를 쓴 작가의 필명이야. 그리고 그 빨간머리는 자기가 제논이라고 말했고.’
아이작과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눴을 때다. 아이작 딴에는 속삭이듯이 말했으나 기본적으로 감각이 뛰어난 다크 엘프에게는 생생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불순한 의도로 아르웬에게 접근한 건가 싶어 경계했으나 의도치 않은 소득을 얻었다.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어.’
인간치고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지식을 자랑했지만 아르웬에게 비빌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과 친분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마족이 가장 신경 쓰였다.
과연 저 인간에게 무엇이 있길래 저만한 강자가, 그것도 제논 일대기 출간 전까지 악마로 차별받던 마족이 붙어있는 것일까.
겉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으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정말로 그가 제논이라면, 그 마족이 호감을 가진 것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는 뜻은 그 여마족도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 터. 이것마저도 추측이지만 퍼즐이 딱- 딱- 들어맞는 기분이라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증거가 필요해. 증거가.’
그러므로 레인은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이 저택에 침입했다.
만약 이 저택에서 초고를 찾는다면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그 후로 아르웬에게 보고를 올리면 된다.
지난 번에는 뭣도 모르고 초고를 훔쳤다가 아르웬에게 크게 혼나고, 더 나아가 장로에게도 쓴소리를 받았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아르웬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을 벌렸는데 그 결과가 좋지 못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러니 레인으로서는 반성의 의미로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한다. 증거를 찾게 된다면 몰래 훔친 초고를 돌려줄 수도 있을 뿐더러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니까.
물론, 초고는 확인만 하고 훔치지는 않을 것이다. 호되게 혼난만큼 제논 일대기의 초고가 어떤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몸소 실감했기에 어리석은 선택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생각 외로 방비도 허술해서 다행이다.’
다행히 저택의 경계는 레인의 기준에서 허술한 편이었다. 방범 마법이 깔려있었지만 다크 엘프의 힘을 이용하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대신 벽을 통과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할 때는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감각이 뛰어난 인간이 감지할 수도 있다.
‘여기는 전부 뒤졌고… 방이 많아서 헷갈리네.’
레인은 난감함에 머리를 벅- 벅- 긁적였다.
아르웬의 후원 덕분에 차차 경험을 늘려가고는 있지만 인간 저택에 침입한 건 처음이었기에 구조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방 하나 하나 세세하게 조사해도 계속해서 허탕만 치다보니 점점 답답해졌다.
‘이다음은…’
그녀는 문이 아니라 벽 쪽을 바라봤다. 벽 따위야 통과하면 그만이니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이윽고 레인은 재차 서류를 조사하다가 제논 일대기와 관련된 건 없다고 확신. 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벽에 막혀 지나갈 수 없겠지만, 그녀는 다크 엘프. 벽 따위야 간단한 마법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다.
파앗!
텔레포트나 워프처럼 장거리 이동이 아닌, 짧은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 블링크(Blink).
단 한 번의 깜빡임을 통해 벽 너머로 이동한 레인은 방의 전체적인 모습을 둘러봤다. 방금 전이 사무실이었다면, 지금은 손님들이 머무는 휴식실인 모양이다.
‘여기에는 없을 것 같네.’
그녀는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는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방을 옮겨다니다보니 마침내 누군가의 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부가 아닌 한 사람이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간소한 외양이 특징적이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퀴퀴한 책 냄새와 남자 특유의 체향이 코를 찔렀다.
‘그 빨간 머리의 방이다!’
여자의 방은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레인은 아이작만 만났지 그의 형제 데이브는 만나지 않았지만 책 냄새가 진동하는 걸 느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이건 아르웬에게서 나던 체향이었으니 분명하다.
이어서 그녀는 흥분된 마음으로 방 내부를 둘러봤다. 침대와 화장대, 그리고 책상은 작은 편이었으나 책장이 무수히 많았다.
자연히 책들도 다른 방들에 비해서 무수히 많았다. 레인은 아이작이 아르웬처럼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빨간 머리의 방이 맞아.’
레인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을 발견하고 재차 확신을 가졌다. 이 책은 서점에서 아르웬이 추천해줬던 서적이었으니.
이제 남은 건 책상을 조사해서 초고를 찾는 일 뿐. 그녀는 본인이 어떤 마법에 포착된지 전혀 인지하지도 못 한 채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무방비로 노출된 서랍부터 살펴봤으나 당연히 나오는 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뭘 넣지도 않았는지 텅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 남은 건…’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서랍 뿐. 레인은 설마하는 눈초리로 서랍을 지그시 응시했다.
사람들에게, 특히 마족에게는 국보로 지정되다 못해 성물로 취급될 초고가 이 안에 잠들어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다.
그래서 정말 이곳에 있는지 의심이 갔지만, 차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어서 해제하기도 쉽다.
이에 레인은 쪼그려앉아 자물쇠를 손으로 잡았다. 열쇠나 마법 같은 건 필요없다. 마나를 통해 잠금을 해제하면 끝인 수준으로 얄팍한 자물쇠다.
딸깍-
10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서랍을 봉인하던 자물쇠가 풀렸다. 레인은 혹여 다른 장치가 있을까봐 여러번 확인한 후 조심스레 자물쇠를 빼냈다.
이제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서랍장.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서랍장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한가득 쌓여있는 원고지를 발견하자 레인의 만면에 미소가 새겨졌다.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진짜지? 진짜 초고가 맞지?’
레인이 잔뜩 흥분한 심정으로 맨 위에 있는 초고를 꺼냈다. 최근에 발간된 카이르 외전의 도입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로서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1권의 초고의 필체와 똑같아서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다.
‘다행이다. 이걸로 여왕님이 안심할 수도 있겠어.’
도둑도 아니고 남의 저택에 멋대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면 또 혼나겠지만, 그래도 묵혀놓았던 짐은 덜어줄 수 있을 것이리라.
이에 레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초고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던 찰나였다.
콱!
“케흑!”
부지불식간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낫처럼 낚아채 바닥에 꽂아버렸다. 레인은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단말마를 지르며 땅바닥과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화들짝 놀란 레인이 아둥바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시도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을 붙잡힌 순간부터 이미 몸 전체가 제압당한 것이다.
본래 목이란 뇌와 몸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누구인지 몰라도 마나를 통해 목을 마비시킨 것이 틀림없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이정도 능력이면 다크 엘프 내에서도 숙련된 전사만이 할 수 있다. 세상 경험이 거의 없던 레인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자신을 제압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레인을 제압했던 사람이 작게 읊조렸다.
“그 엘프 곁에 있던 녀석이었군.”
“크으으…”
“네놈들은 남의 저택을 터는 취미라도 있는건가?”
세실리의 호위 기사, 가르츠였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는 현재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우선 세실리가 지정했던 곳에 침입자가 들어와서 1차적으로 화가 났고, 레인 하나 때문에 하이라이트를 눈 앞에서 놓쳐서 2차적으로 화가 났다.
복면으로 입 부근을 가리고 있었으나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주님. 저택에 침입자가 있는데 다크 엘프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기습을 통해 레인을 손쉽게 제압한 가르츠는 텔레파시를 통해 세실리에게 전언을 보냈다. 세실리는 침입자가 나타났을지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 지시했으나 다크 엘프는 이야기가 달랐다.
마족과 다크 엘프 사이는 좋다고 말할 수도,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다크 엘프를 건드리게 되는 순간 귀찮아지는 건 변함이 없다.
다크 엘프의 전사들은 리퍼만큼 한 명 한 명이 강한 존재들이며, 외교와 더불어 내실을 다져야하는 헬리움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그러운 입장이었다.
비록 다크 엘프가 알븐하임에서 떨어져 나온 추방자들이라지만, 아르웬이라는 엘프 곁에 있는 걸 보면 심상치 않았다.
[…그 엘프 여왕 곁에 있던 아이죠?]가르츠의 보고에 공연에 집중하고 있던 세실리가 답변을 보냈다. 그녀도 아르웬이 알븐하임의 여왕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에 가르츠는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레인의 목을 더욱 강하게 쥐면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왜 그 저택에 침입했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만 캐내고 발락 경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이건 엄연히 그쪽에서 잘못한 것이니 아무 말도 못 할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대신 저택에서 처리하지는 말고 밖에서 처리해주세요. 괜히 피가 튀면 그 분께서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니까.]세실리는 전적으로 가르츠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지시만 내리고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곧 있으면 하이라이트가 펼쳐지기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닌 이상 저택으로 갈 일이 없었다.
가르츠도 세실리와의 연락이 끊기자마자 레인을 내려다봤다. 현재 그녀는 힘이 모두 빠져서 저항을 멈춘 상태였으며,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어린 아이가 처연하는 떠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지만, 가르츠에게는 의미가 없다. 마족과 더불어 다크 엘프처럼 주변에게 배척받는 존재들은 어릴 때부터 살생을 저지르는 일이 태반이다.
그러니 레인을 어린 아이로 볼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전사라 보아야 옳다. 아쉽게도 경험이 뼈저리게 부족한 탓에 이 꼴이 났지만 말이다.
“묻겠다. 어째서 이 곳에 침입한 거지?”
“… …”
가르츠의 무미건조한 질문에 레인은 덜덜 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죽음의 두려움이 그녀를 육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하지만 가르츠는 개의치 않고 더욱 강하게 압박하면서 살기어린 목소리로 위협했다.
“앞으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네 손가락 하나 하나 자르겠다.”
“차, 찾는 게 있어서…”
“찾는 거?”
“초고…”
초고라… 가르츠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원고지에 시선을 옮겼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원고지였지만, 모험을 하면서도 저택에 들어온 걸 보면 필시 무언가가 있을 터. 이에 가르츠는 한 손으로 목을 강하게 짓누르면서 초고를 가져왔다.
뒤이어 초고를 한 줄 한 줄 읽은 가르츠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발간된 카이르 외전도 읽었기에 이것이 어떤 초고인지 눈치챈 것이다.
‘…공주님이 그 인간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를 알겠군.’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제논 일대기의 팬이라지만 현재는 임무 중이다.
그래도 마족에게 소중한 보물인 건 변하지 않아 초고를 가지런히 바닥에 놓았다. 이 검은 귀쟁이 놈을 처리한 뒤에 다시 돌아와 정중하게 돌려놓을 계획이다.
“이 초고를 통해 무엇을 할 생각이었지?”
“그게…”
이것만큼은 대답하기 싫었는지 망설이는 레인. 그와 동시에 가르츠의 눈매가 사나워지며 허리춤에 걸려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레인은 단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자 기겁하며 모조리 실토하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그녀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제, 제가 훔친 초고를 돌려드리려 했어요! 저, 정말이에요!”
“…역시 네놈들이 훔친 거였구나.”
역효과만 발생했다. 다크 엘프가 초고를 훔쳤다는 건 어디까지나 심증이었지 물증은 없었다.
하지만 레인의 증언을 통해 확실해졌다. 비록 독단으로 벌인 일인지, 아니면 알븐하임에서 벌인 건지 모르겠지만 초고를 도난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덜 떨어진 애새끼가 호위라니… 보아하니 여왕이랑 친한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지 않고 몰래 왔다고한들 여러모로 자격이 부족했다. 지켜야하는 군주는 내팽겨치고 독단적으로 일을 벌렸으니 호위 기사로서 모두 탈락이다.
가르츠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두려움에 떠는 레인을 바라보다가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일단 저택에서 빠져나와 으슥한 곳으로 이동한 뒤 처리할 계획이다.
이윽고 그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잠깐’ 방심했을 찰나였다.
시잉-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가르츠의 목덜미에 은빛 단검이 겨누어졌다. 검면이 달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과연 누구이길래 가르츠의 방범 마법에, 그리고 감각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가르츠는 자기 목덜미에 가까이 접근한 단검을 보다가 묵묵히 읊조렸다.
“그래…”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도 가르츠의 목에 겨눈 단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가르츠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자신처럼 복면으로 입을 가렸지만, 화려한 미색을 띄는 미녀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구릿빛 피부와 더불어 흰색 머리카락, 반쯤 잘린 귀. 마지막으로 레인과 달리 어른이라는 걸 보여주듯 성숙한 자태를 뿜내는 몸매까지.
아르웬이 레인을 데려오면서 안심할 수 있던 이유이자 보험.
“여왕이 미쳤다고 애새끼를 호위로 데려오진 않았겠지.”
가르츠는 또다른 다크 엘프의 등장에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