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34
■ 133화. 혼혈 (5) □ ᓚᘏᗢ
숙소가 기본적으로 방음이 깔려있다는 게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내 웃음 소리는 물론이고 아르웬의 외침까지 전달되었을테니.
하지만 아르웬과 그 분의 연설이 미묘하게 겹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게다가 교만의 상징인 엘프와 잔악무도한 나치도 묘하게 어울렸다.
아르웬이 제복을 차려입은 채 팔을 앞으로 곧게 뻗으며 특정 구호를 외치는 모습. 더 나아가 국민들을 고양시키고 전쟁통으로 밀어넣는 과격한 연설까지.
하나 하나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배꼽이 떨어질만큼의 재미를 선사했다.
‘나중에 한 번 써 봐?’
제논 일대기를 완결내면 세계 2차 대전에 관한 소설을 쓸 건데, 거기에 인간만 넣을지 아니면 다른 종족도 넣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아르웬이 연설하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씩 이끌렸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여러모로 설정이 여러모로 꼬일 수도 있으니 묻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 설정은 훗날 제논 일대기 후속작에 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제논이 살아있을 때는 모든 종족이 하나가 되어 악마를 무찌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또다시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싸우는 식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악마들도 외부가 아닌 내부부터 차근차근 좀먹으면서 침략하는 것이다. 그 후로는 세계관을 넓히는 거고.
“크흐흐흐…”
나는 끅끅거리며 눈물을 훔치다가 슬쩍 아르웬을 살펴봤다. 그녀는 개구리처럼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부끄러운지 새하얗던 피부 또한 새빨개진 상태였는데, 은회색 눈동자에 약간의 물기가 채워진 걸 보니 그만 웃어야 할 것 같다.
“…다 웃었느냐?”
아르웬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였으나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전혀 위협이 되질 않는다.
정말이지,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보고 누가 알븐하임의 여왕이라 생각할까. 평상시가 아닌 여왕으로서의 아르웬은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만 알고 있지 그 이상은 모르기에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 사과는 해야겠지. 나는 눈꼬리에 맺힌 이슬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미, 미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후우… 괜찮다. 아쉬운 건 그대가 아니라 나이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 아르웬. 그 직후,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소심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 안 어울리는 것이냐?”
“아까 연설?”
“그렇다. 정말로… 하나도 안 어울리는 건지 궁금하다.”
“어울렸으면 내가 웃지도 않았겠지.”
장난기를 싹 지우고 내린 진지한 평가다. 미묘하게 어울린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미묘한 것이지 초등학생이 웅변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휴우…”
아르웬은 그런 내 각박한 평가에 낙심했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워졌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 물었다.
“보좌관 같은 역할을 수행 중인 사람은 없어? 그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않아?”
“…그 보좌관이 원로원이니라. 알븐하임은 표면적으로 왕이 제일 위에 있고, 그걸 곁에서 보조하는 건 원로원이 하는 일이지.”
“자칫하다간 꼭두각시가 될 수도 있는 구조네.”
아르웬은 내 날카로운 지적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알븐하임의 왕은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저럴 바에야 왕위를 왜 만들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다.
알븐하임의 왕은 각 가문이 투표하여 선출한다고 했으니 여기서 복잡한 비밀이 얽혀있는 걸로 보인다. 어쩌면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가문들이 왕을 뽑는 걸 수도 있겠지.
‘어쩐지 왕이 수시로 바뀌더니 이때문이었네.’
제논 일대기에 소재로 넣어야지. 아르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알븐하임의 정치 구조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조언자지, 아르웬의 신하가 아니다. 딱 연설만 도와주고 끊을 생각이다.
“아무튼 간에 그런 식으로 연설하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해. 너랑 어울리도록 말이야.”
“그대가 생각하기에 나와 어울리는 연설 방식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음…”
팔짱을 끼고 아르웬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한다. 연설은 보통 상황에 따라 스타일이 바뀌기 마련이나 사람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히틀러처럼 과격하면서도 열정적인 스타일은 가슴에 불을 지피게 만들고, 마틴 루터 킹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진실된 목소리로 하여금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알븐하임의 현 상황은 혼혈 문제로 인해 엘프 사이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어떻게든 균열을 회복시키고 ‘엘프’라는 하나의 종족으로 단합시켜야 된다.
‘일단…’
나는 평상시의 아르웬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으로서 그녀를 세세히 살펴봤다.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엘프 특유의 우아함과 고귀함을 풍겼으며 미소만 짓는다면 자애로움마저 느껴질 정도다. 은은하게 풍기는 기백 또한 지도자다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를 띄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것보다는, 나긋나긋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연설해야 그 효과가 증폭될 것이리라.
“혹시 대국민 연설 말고도 알븐하임의 사람과 소통한 적은 있어?”
“축제 때마다 즐겁게 놀고 조심하라고 당부한 적이 몇 번 있다.”
“그것 말고는?”
“어려운 재판에서 판결을 내린 적도 있고, 그것 말고도 백성들을 모아 소통한 적이 몇 번 있다. 아무래도 원로원을 믿을 수 없으니 백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지. 그나저나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아르웬이 똘망똘망하면서도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대답했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아는 엘프 지인이 너를 호의적으로 평가했거든. 자비롭고 우아한 여왕님이라고 했던가? 다른 사람도 그런 시선으로 보는지 궁금해서.”
“으음… 애 같은 외모와 달리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다고 들었다.”
“어디서?”
“축제에서.”
“그걸 네 면전 앞에서 대놓고 얘기했다고?”
아무리 아르웬이 착하다지만 엄연히 왕을 모욕하는 행위다. 나야, 전시회 당시에는 서로의 정체를 몰랐으며 지금은 약점을 잡은 상태이니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다.
아르웬은 내 물음을 듣고 시선을 스윽- 피하더니 머쓱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전시회 당시처럼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 여왕이 먹거리를 사거나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몇 번 물은 적이 있지.”
“노는 걸 좋아하시나 보네요, 여왕님.”
“나, 나도 스트레스는 풀어야되지 않겠느냐! 나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니라!”
내가 팩트를 찔러버리자 아르웬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건지 새하얗던 뺨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뭐, 그래도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여태까지 그녀가 버틸 수 있던 이유도 약간의 일탈 덕분이겠지.
“어쨌거나 사람들이 너를 어떤 모습으로 보고 있냐에 따라 스타일을 다르게 하면 되겠지. 평소처럼 자비로우면서도 단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연설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렵구나.”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이제 내가 말한대로 연습해봐.”
“또 그걸로 하라는 것이냐?”
거의 선동급인 임시 연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르웬이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현했다. 아예 연설이 아니라 선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과격한 액션을 취해서 그렇지, 아르웬과 어울리는 스타일로 한다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내용 자체는 패배감에 찌들어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고양시키는데 특화되었으니.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하기 싫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 아르웬을 살살 타일렀다.
“한 번만 해봐. 이번에는 안 웃을게. 진심이야.”
“후우… 이번 한 번만이니라.”
“알겠어. 대신 네가 어울린다 싶은 문장으로 수정해도 돼.”
“그러면…”
아르웬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뒤이어 내가 말한대로 내용을 천천히 상기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아한 말투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소녀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왕’에 가까웠다.
“우리 알븐하임은, 신들의 선택을 받아 이 땅에 최초의 문명을 세웠다. 더 나아가 마법으로…”
“… …”
나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와 스타일에 가만히 지켜봤다. 방금 전 연설이 마음 속에 불씨를 키워 선동을 한다면, 지금은 다친 상처를 살살 어루만져 치유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같은 내용의 연설인데도 스타일만 바꿨을 뿐인데 효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역시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된다.
“알븐하임은 더이상 패배자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일어나라, 알븐하임의 엘프들이여. 세상에 우리의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주자. 저 멀리, 신들의 고향에 우리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도록.”
“… …”
“크흠. 큼…”
연설이 모두 끝났다. 아르웬이 긴장했던 것인지 연설이 끝나자마자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이어서 민망한 건지 은회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면서 나에게 평가를 부탁했다.
“모, 모두 끝났다. 이번에는 괜찮았느냐?”
“정말 훌륭했어. 앞으로 그렇게 하면 되겠다.”
“헤헤…”
내 진심어린 칭찬에 아르웬이 헤실헤실 웃었다. 여왕으로서의 품격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칭찬받아 좋아하는 소녀만이 남아있다.
나는 그걸 보고 괜찮은 건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지만, 그녀만의 스타일을 찾았으니 문제가 없을거라 판단했다. 어차피 남은 몫은 그녀에게 달려있었으니까.
“대신 말만 하지 말고 제스쳐나 액션 같은 것도 취하는 게 좋을거야. 이때까지 연설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거울을 보면서 자기 표정이랑 몸짓을 확인했다더라고. 참고만 해.”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책으로 찾아볼 수 있으면 찾아보고 싶구나.”
“옛날에 읽은 책이라 나도 누구인지는 까먹었어. 나는 너랑 달리 인간이잖아.”
“아… 그거 아쉽구나.”
아르웬이 아쉽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전생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거짓말을 한 거라 조금 미안해지긴 했다.
“그리고 연설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 있는 말투와 태도야. 우물쭈물거리는 순간 어떻게 될지 너도 예상할 수 있겠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뭐든지 간에 처음이 어려운 법이야. 게다가 연설은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양 중 하나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지금 한다고 생각해.”
내가 격려를 해줘도 아르웬은 여전히 불안하다는 얼굴이다. 자신감이 현저히 떨어진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이에 여기서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주눅든다면 앞으로의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아르웬. 지금 내가 도와주는데도 이러면 나중에 가서는 어떡하려고?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인간이고 너는 엘프야. 내가 살아있는 동안 연설문을 작성해주거나 검토해줄 수 있어도 그 이후에는 너 스스로 해야 돼.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된다는 소리지.”
“… …”
“네가 원로원과 갈등을 빚고 있다고한들 제일 우선시 해야 되는 건 알븐하임의 사람들이라는 걸 명심해. 그 강력한 원로원도 알븐하임 그 자체나 다름없는 백성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냐.”
국가에 있어서 민심은 매우 중요하다. 민심이 떨어지게 되면 자연히 정부를 불신하게 되며 더 나아가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반대로 민심이 충만하다면 지도자가 딱히 명령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동에 나선다. 작디 작은 나라가 민심으로 똘똘 뭉쳐 강대국으로 발전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수두룩하다.
단, 여기서 민심과 선동은 철저하게 구분해 놓아야 된다. 선동은 세뇌가 풀리는 순간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에 이르지만 민심은 끝까지 함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너는 이 연설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돼. 사실상 너의 위기 관리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나 다름없지. 역사에 순혈과 혼혈을 단합한 위대한 여왕으로 남을지, 아니면 균열을 해소하지 못해 분열을 일으킨 무능한 여왕으로 남게 될지 네 손에 달려있다는 거야. 알겠지?”
“…고맙구나. 덕분에 기운이 나는 것 같다.”
내 충고와 조언에 아르웬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후련하다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똑- 똑- 똑-
느닷없이 누군가 숙소 문을 노크했다. 나와 아르웬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작. 안에 있어? 나야, 마리.
놀랍게도 문을 노크한 사람의 정체는 내 여자친구, 마리였다. 숙소는 출입만 금지일 뿐, 저렇게 노크 정도는 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다.
하지만 숙소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아르웬이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나는 온 몸의 털이 쭈볏 서는 것을 느끼며 아르웬을 쳐다봤다.
아르웬은 은회색 눈을 깜빡거리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어있는 모습이다. 하기야 그녀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모르고 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야, 야! 빨리 숨어!”
“응? 왜 숨어야 하는 것이냐?”
“됐으니까 숨어! 마법을 사용하던 은신을 사용하던 뭐라도 해! 원래 숙소는 주인 말고 다른 사람은 출입 금지란 말이야!”
“알겠다.”
다급한 내 부탁에 아르웬은 의아해 하면서도 마법을 통해 몸을 숨겼다.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다크 엘프처럼 은신을 사용한 건지 모르겠으나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걸 보고 속으로 안도한 후에 문 너머로 있는 마리에게 외쳤다.
“지금 갈게! 잠깐만 기다려줘!”
혹시라도 모를 아르웬의 흔적이 있는지 파악한 후,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에 시간을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아직 수업이 모두 끝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교수가 일찍 끝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
끼익-
문을 여니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를 띄고 있는 마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리 일찍 찾아왔어? 강의는?”
“교수님이 급한 일이 있다고 빨리 끝냈어. 엘레나 교수님의 연구실에 없길래 숙소로 찾아왔지.”
“그래? 그럼…”
투욱-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마리는 손으로 내 가슴을 강하게 밀어냈다. 결코 약한 힘이 아니어서 내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문을 붙잡은 손은 놓지 않았으나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가 뒤로 물러난 순간을 이용하여 몸을 강하게 밀착시키더니 그대로 밀어버렸다.
자연히 나는 문에서부터 떨어졌고, 마리는 어느새인가 현관까지 발을 디딘 상태였다. 문 또한 굳게 닫겨 덜컥- 소리를 내었다.
“어, 어어? 마리?”
“굳이 여관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리나에게 들었는데 숙소는 방음이 철저하게 돼 있다고 들었어. 마치 안에서 뭘 하던 간에 듣지 못 하게 하는 것처럼.”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어딘지 들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설마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에는 욕망이 용암처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최근에 줄어들었나 싶었는데 장작을 다시 한 번 추가시킨 모양이다.
‘좆됐다…!’
마리와 단 둘이 있다면 상관없지만, 지금 여기에는 아르웬이 숨어있다. 여기서 관계를 맺는 순간 아르웬에게 모든 걸 보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고 판단한 나는 서둘러 마리에게 말했다. 적어도 숙소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이롭다.
“저… 마리? 아무리 그래도 숙소에서는…”
“뭐 어때? 여기서 간단하게 한 판하고 데이트 한 다음에 여관에서 또 하면 되잖아? 몸풀기라고 생각해.”
“이게 무슨 몸풀기야? 이 손 어서 치워!”
“싫은데?”
성욕의 화신으로 변해버린 마리의 기세에 압도되어 주춤주춤 물러가다보니 어느새인가 침대에 도착해버렸다. 나는 침대에 걸려 뒤로 넘어져버렸고, 마리가 나를 위에서 덮치는 자세가 되었다.
그림자가 졌지만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 하트빛 모양이 새겨진 듯한 착각은 왜일까. 여자의 성욕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아르웬이 보고 있는 이상 절대 여기서 일을 치르면 안 된다.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마리에게 부탁했다.
“마, 마리? 조금만 참아주면 안 될까?”
“안. 돼. 오늘 수업이 너무 어려워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 아이작의 몸으로 풀어줘야겠어. 일단은… 응?”
마리는 색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다 말고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퍼뜩 들더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킁킁. 킁.”
“…마리?”
“킁. 이게 무슨 냄새지?”
설마 아르웬에게서 나오는 체향을 맡기라도 한 걸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 했는데 역시 여자는 뭔가 다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마리는 내 목덜미에 파묻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인상을 살짝 구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침대에서도 이 냄새가 나네…”
“… …”
“흠…”
그러면서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마리. 나는 다른 의미로 좆 된 것 같아 바짝 긴장했다.
과연 그녀는 아르웬의 존재를 눈치챘을까. 부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무거운 침묵이 숙소 내에 깔렸을 쯤, 마리는 방긋 웃더니 긴장이 탁 풀리는 말을 꺼냈다.
“침대에 향수라도 뿌렸어?”
“으, 응?”
“처음에는 다른 여자가 숙소에 온 줄 알았거든. 근데 침대에서만 냄새가 나고 네 몸에서는 안 나네?”
“하하…”
내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빙굿 웃는 표정 그대로 고개를 천천히 내리더니 내 목덜미에다 입을 갖다 대었다.
“얌…”
“으윽… 마리?”
“아이작의 몸에는 내 냄새가 배이도록 할 거야.”
위기는 넘겼지만 또다른 위기는 남아있었다. 나는 황급히 마리를 떼어내려 했으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아예 찰싹 같이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 일을 치러야 되나 싶었다.
[…잠깐 자리를 비워주겠다.]머릿속에서 아르웬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울려퍼졌다. 어딘가 부끄러움이 깃들어 있지만, 분명히 아르웬의 목소리가 맞다.
아무래도 텔레파시로 본인의 의념을 전한 듯했는데, 이 모든 걸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것 같다.
‘아이고…’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것도 잠시, 마리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한사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괘씸해져 약간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으응?”
“너 오늘 죽었어.”
“뭐, 뭐? 꺄악!”
몸풀기고 뭐고 바로 본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