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39
■ 138화. 알븐하임에서 (3) □ ᓚᘏᗢ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갔지만 어찌어찌 세실리도 입국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심사관이 다짜고짜 안 된다고 거부한 탓에 나와 마리, 그리고 리나처럼 첫 단계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케이르는 정당한 절차만 밟았으며 더 나아가 세실리는 아르웬에게 직접 받은 승인서까지 있었다. 아까 심사관이 병신 같이 똥고집을 부린거지 이거 하나만 있으면 하이패스나 다름없다.
“이 일은 공표하진 않겠지만 여왕님에게 항의하도록 하겠어요. 대국민 연설도 있고 수습을 잘 했으니 조금은 참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잘못한 일이니 달게 받아야겠습니다. 이참에 저 놈도 짜르면 되겠군요.”
“저 자를 해고시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세실리는 뒤쪽을 가리키며 문서 여러장을 작성 중인 케이르에게 질문했다. 그녀가 가리킨 쪽에는 기절한 심사관이 다른 엘프들에게 실려가는 중이었다.
발차기 한 방이었으나 벽에 처박힐 정도로 강했으니 제아무리 튼튼한 엘프여도 기절은 면치 못한 모양이다.
케이르는 세실리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특유의 나긋나긋하면서도 느긋한 말투였다.
“공주님이 우리의 생태를 아실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보통 자신의 직업군에 평생을 종사하는 편입니다. 생각이 바뀌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 이상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법이죠. 하지만 큰 잘못을 저질러 쫒겨나는 경우에는 여러모로 큰 문제점을 안게 됩니다. 그와 관련된 직종에 종사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귀를 자르는 형벌까지 받게 되죠.”
“귀를 자르는 형별이라… 엘프에게는 가장 심한 처벌이겠네요. 그럼 저 사람도?”
“타국의 공주를 모욕했으니 최소한 한 쪽 귀가 잘리긴 할 겁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엘프에게 귀는 결코 손상되어서는 안 되는 신체 부위다. 그러니 귀를 자르는 형벌은 엘프에게 있어서 끔찍한 처벌 중 하나일 것이다.
귀가 잘린 엘프는 같은 엘프로 대우받지 못 하고 평생동안 모멸과 멸시를 받게 되지 않을까. 다크 엘프는 스스로 귀를 잘랐으니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엘프에게는 ‘나 범죄자요’라고 광고하는 격이다.
심사관은 앞으로, 평생동안, 본인이 엘프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없을 것이리라. 오만에 어울리는 대가였다.
“그거 마음에 드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세실리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르의 유도리 있는 처사 덕분에 아르웬만 고생하지, 알븐하임 전체가 싸잡아 욕먹을 일은 없을 터.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그녀는 케이르에게 하나 하나 유의할 점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여기서 하나 더 놀라운 건 그가 세실리를 ‘배려’했다는 것.
아무리 세실리가 헬리움의 공주라고 한들, 마족이기에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모양이다.
“일단 연설을 듣고 며칠 동안 머물 계획이신가요?”
“연설을 듣고 곧바로 복귀할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아카데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죠.”
“아~ 그러고 보니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셨다고 했죠?”
“잘 알고 계시네요?”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뀐 탓에 신문을 안 보면 뒤처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무튼 연설을 듣고 복귀하신다고 했으니 허가증을 발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전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여왕님의 승인서는 그대로 가지시고 여기에 제 승인서랑…”
저 사람 정말로 발로 깐 심사관과 같은 엘프가 맞는건가. 심사관이 과하긴 했어도 엘프는 마족을 안 좋게 바라보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세실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묘한 눈빛으로 케이르를 쳐다봤다.
“당신은 저 심사관이랑 조금 다르네요? 이름이 케이르라고 하셨죠?”
“네. 케이르 윈드호퍼라고 합니다. 평범한 알븐하임의 전사죠. 그리고 모든 엘프가 저기 있는 놈이랑 같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당신도 종족전쟁을 경험했나요?”
“네.”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렇기에 케이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저기 있는 심사관도 종족전쟁을 경험한 전사인데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다.
“우선 알븐하임에 입국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헬리움의 공주님. 이미 늦었겠지만 지금이라도 알븐하임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지켜봤으면 좋겠네요.”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얘들아? 나랑 발락 경은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천천히 와도 돼.”
“응.”
“그리고 케이르… 직책이 뭐죠?”
“원래는 감독관이었지만 5분 전부터 심사관이 되었습니다.”
“푸흡.”
재치 넘치는 대답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 했다. 내가 시선을 돌리며 끅끅거리는 동안 세실리는 묘한 눈빛으로 케이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작은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심사관 님.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알겠죠?”
“글쎄요. 엘프 특성상 그러기는 힘들테니 최소 네 번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이네요. 발락 경?”
“예. 공주님.”
“짧지만 모쪼록 즐거운 여행 되시길.”
케이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굽히며 예의바르게 배웅했다. 첫 인상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동작 하나 하나에 엘프 특유의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때로는 경박한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단호하고, 그렇다고 꽉 막히지 않은 독특한 사람. 굳이 엘프가 아니어도 저런 류의 성격은 흔하지 않은데 엘프라서 더욱 눈에 띄는 것 같다.
“레이디께서도 연설이 끝나면 귀국하실 거죠?”
“네. 아, 혹시 알븐하임에 오면 반드시 사야되는 특산품 같은 건 없나요?”
“솔직히 아무거나 사도 특산품일 겁니다. 레이디께서는 흰색 비단으로 짠 드레스가 어울리시겠군요. 연설까지 하루가 남았으니 추천하는 곳은…”
리나는 두 번째 방문이었기에 무난히 넘어가고 마리에게는 세세한 것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마리 또한 알븐하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다 보니 살짝 흥분하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그것도 엘프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다음에 이어진 케이르의 말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다.
“제 아내와 딸들도 레이디처럼 흰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죠. 분명 잘 어울리실 겁니다.”
“결혼하셨나요? 아, 종족 전쟁을 겪으셨다고 하셨지.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현재까지 532번의 봄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부남에다가 무려 500년 이상을 산 엘프였다. 저 케이르라는 엘프는 분명 희귀종인 게 확실하다.
“고마워요. 덕분에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겠네요.”
“별 말씀을. 아까 전에 추태까지 보였는데 이정도는 해드려야죠. 아무튼 간에 알븐하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위그드라실은 저쪽 텔레포트에 탑승하시면 됩니다.”
마리는 그에게 환영 인사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전 세실리와 리나가 향했던 구역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혼자 남게 된 나는 케이르가 따로 호명하지 않아도 발걸음을 움직였다. 케이르는 내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도 보셨겠지만 간단한 신원 조사를 하겠습니다. 귀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붉은 사자의 자식이셨군요.”
“저희 아버지를 알고 계시나요?”
나는 케이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아버지에 대해 아는 듯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의 조합은 흔치 않아 단번에 알아본 모양이다.
“그처럼 강한 인간은 찾기 드무니까요. 종족 전쟁 이후 기술의 발달이 있었겠지만 붉은 사자처럼 전사장과 대등하게 붙을 수 있는 인간은 몇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전사장과 싸운 적이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전사장과 대등하게 붙은 수인 전사에게서 승리를 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투에 있어서 절대적인 건 없지만 얼추 맞겠죠. 실제로 강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현역 시절 국경 지대에 산재해 있던 수인을 토벌했던 전적이 있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곳에 있던 수인 중 한 명이 전사장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군대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드래곤도 토벌한 전적이 있으신데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일반인인 나에게 전투와 군대는 멀고도 먼 이야기니까.
“혹시 귀하께서도 기사이신가요?”
“아뇨. 평범한 학자를 지망하는 학생입니다.”
“의외이시군요. 어쨌거나 알븐하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기 입국 허가증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케이르 씨도 군인이시죠? 종족 전쟁에도 참전했다고 들었는데.”
“네.”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케이르 씨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종족 전쟁 참전자라는 걸 들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케이르는 마족조차 평범한 사람으로 보는 중인데 과연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종족 전쟁은 엘프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패배로 남게 되었지만, 반대로 인간이라는 종족에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방금 전의 심사관처럼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엘프도 있는 반면 케이르처럼 생각이 넓어진 케이스도 있다.
케이르는 내 질문을 듣고 눈을 깜빡거리더니 싱긋 웃으며 역으로 질문했다.
“입에 발린 말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솔직하게 털어놓을까요?”
“솔직하게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서운 종족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종족이라…”
다른 종족도 아니고 엘프에게 들으니 생소하게 느껴지는 대답이다. 인간이 날고 기어도 태생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엘프에게 비빌 수 없는 법이니.
그러나 케이르가 종족 전쟁 참전자라는 걸 고려해야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엉덩이를 도로 붙였다.
케이르도 나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무리 인간이 발전해도 태생적으로 엘프를 따라갈 수 없잖아요.”
“그렇기에 더 무서운 겁니다. 아까 귀하께서 했던 말이 있죠. 인간은 탐욕이나 이기심,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발전 가능성이 그 어떤 종족보다 뛰어나다고 말이죠. 실제로 500번이 넘는 봄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말도 안 되는 발전력을 눈으로 보여줬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 세월동안 딱 한 번의 큰 변화가 일어났죠.”
“종족 전쟁 말인가요?”
“네. 그리고 현재도 혼혈 문제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입니다. 여왕님이 어떤 연설을 하실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겠죠. 부디 잘하셔야 할텐데…”
뒷말을 흐리는 걸 보면 저건 진심이었다. 케이르는 진심으로 알븐하임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정녕 그 오만한 엘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어쩌면 아르웬처럼 혼혈인 걸까.
그런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케이르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참고로 전 혼혈이 아닙니다. 이래 보여도 100% 순혈이에요. 토종이라 할 수 있죠.”
“…토종이라 하니까 어감이 이상한데요.”
“그런가요? 그래도 이해만 된다면 상관없겠죠. 하하하.”
“평소에 엘프답지 않다는 소리 많이 듣죠?”
“그게 제 매력 포인트라며 아내가 먼저 고백했습니다.”
유쾌하다 못해 상쾌함이 철철 흘러나왔다. 인간은 몰라도 같은 엘프들에게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케이르는 전사, 즉 군인이다. 딱딱한 군대 특징상 저런 성격은 여러모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뭐, 종족 전쟁 당시에는 이런 성격 때문에 여러모로 답답하긴 했죠. 저를 잘 받아주던 상관도 어이없는 이유로 원로원한테 붙잡혀가는 바람에 환멸감도 느꼈고.”
“… …”
붙잡혔다는 상관이 설마 아이케르 전사장인가. 어이없는 이유로 원로원에게 붙잡혔다는 걸 보면 반쯤 확실하다.
케이르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거렸다. 이제는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이다.
“이렇게 말해봐야 어쩌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이거 죄송하군요.”
“아뇨. 오히려 제가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원래 참전용사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실례일텐데.”
“간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습니다. 혹시 필요한 정보라도 있으신가요?”
“딱히 없습니다. 이제 가면 될 것 같아요.”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약혼녀에게 추파를 던진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큼. 큼.”
설마 그때 내 표정을 본 건가. 나는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을 토했다. 다만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윽고 케이르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듯이 입국 허가증을 넘겨주면서 예의바르게 배웅해줬다. 나 또한 정중하게 인사하며 일행이 향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 사회에서는 마차를 이용하겠지만, 이곳은 알븐하임. 각 지역으로 향하는 텔레포트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당연히 수도, 위그드라실로 향하는 텔레포트도 있다.
“조금 늦었네?”
“잠깐 얘기 좀 하느라고.”
“정말 특이한 사람이였어. 그치?”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엘프가 아니더라도 그런 성격은 몹시 희귀하다.
하지만 엘프였기에 더욱 뇌리에 박혀들었다.
“나중에 저 사람도 넣을 거야? 저런 성격의 엘프라면 사람들도 재미있어할 걸?”
“이미 메리가 있는데 무슨. 그래도 고려는 해야지. 소재가 넝쿨째 굴러들어왔는데.”
“과연 저 사람도 제논 일대기를 볼까? 딱 보고 이거 설마 나인가? 하는 거 아냐?”
세실리도 케이르가 인상 깊었는지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대부분 제논 일대기에 추가할 거냐는 질문이다.
나 또한 아예 생각이 없던 건 아니어서 두루뭉실하게 대답했다. 이런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갈 일도 없는 것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뿐더러 세실리가 미리 방음막을 설치해 놓은 참이다.
그리하여 케이르라는 인물상도 제논 일대기에 넣을까 생각하고 있을 쯤.
“크흠.”
“…?”
가만히 듣고 있던 가르츠가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