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41
■ 140화. 연설 (1) □ ᓚᘏᗢ
알븐하임의 정치 기구, 엘로디아는 알현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원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알븐하임의 통치를 맡는 곳이기에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고 있다.
여왕도 다를 게 없다. 여왕의 공관은 엘로디아의 가장 높은 층에 개설돼 있으며 원로원이 머무는 곳보다 훨씬 단단한 방비를 갖췄다.
아르웬도 업무를 보는 게 아닌 이상 저녁부터는 그곳에서 지내는 편이다. 수많은 관리인이 여왕의 관저를 관리하고 있으며 마법까지 사용해 안락함을 전달했다.
무엇보다 엘로디아는 세계수의 바로 앞에 세워져 마음에 평화를 전달해줬다. 보통 정치 기관은 온갖 시끄러운 소리와 더불어 난잡한 권모술수가 들끓지만 엘로디아가 유독 조용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세계수가 내뿜는 마나는 내면의 악조차 정화시켜버릴 만큼 신성하고 또 성스럽다. 하물며 바로 앞에 세계수가 있다는 건 신들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
그러니 엘로디아는 심한 말조차 할 수 없는, 정치 기관치고는 다소 독특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알현실에서 원로원과 여왕 사이의 언쟁이 오고 갔지만 그것조차 나아진 것이다.
“…다 때려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세계수의 마나로도 마음에 평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여왕 아르웬이다. 그녀는 드넓은 침대에 앉아 고개를 푹 떨군 채 좌절했다.
내일이면 본인이 약속했던 날, 대국민 연설이 있을 예정이다. 알븐하임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귀빈들까지 참석하는 연설.
보통 타국의 지도자가 대국민 연설을 한다면 특별한 관계에 놓여있지 않는 이상 귀빈을 보내지 않는다. 대부분 뉴스거리를 찾기 위한 기자들만 방문할 뿐.
허나 내일 그녀가 할 대국민 연설은 상황이 약간 달랐다. 무려 즉위 이후 처음으로 행하는 연설에다가 알븐하임의 상황이 혼잡하기 때문이다.
연설을 통해 민심을 사로잡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통솔할지, 아니면 그저 그런 연설로 남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만약 전자라면 주위의 국가들이 아르웬을 경계할 것이며 그 반대라면 얕잡아 볼 것이다.
이러한 이유 탓에 아르웬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마나로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지경이었다.
천만다행히도 튼튼한 엘프여서 망정이지, 인간이었다면 당장 수면 부족으로 쓰러졌을 것이리라.
‘잘할 수 있을까…’
아르웬은 날이 가면 갈수록 떨어지는 자신감에 손에 쥐어진 종이를 바라봤다. 아이작이 불과 3일도 안 되는 시간에 전달해준 연설문이었다.
원래라면 한 번 보고 폐기 처분해야 되지만, 자신감이 시시각각 떨어지는 바람에 손에 꼭 쥐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자상하고 자애로우며, 때로는 엄격하고 단호한 여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도 결국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원로원에게서 견제까지 받으니 날마다 스트레스가 중첩되고 있다.
‘연설문은 문제가 없어. 이대로만 말하면 충분해.’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연설문을 다시 한 번 체크했다. 아이작이 고작 3일도 안 된 시간에 전해준 연설문은 그야말로 현재 알븐하임의 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엘프의 탄생 신화를 알려주는 도입부를 시작으로 선조들이 어떤 희생을 치러 알븐하임을 지켰는지 적혀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가히 절정으로 이만한 명언은 없을거라 아르웬은 생각하고 있다.
허나 이런 연설을 과연 자신이 잘 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주변인들은 괜찮을 거라 다독여줬으나 그들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니면 입 발린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옛날 원로원이 심어놓은 사람 때문에 피를 본 경험이 있는 그녀로서는, 적어도 엘레노아 내부의 인원은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부담스러워…’
원로원과 언쟁을 벌일 때는 몰랐지만, 국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려니 커다란 짐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다. 자신의 연설 하나로 알븐하임의 행방이 결정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부디 잘 됐으면 좋겠지만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왕의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돼. 나는 여왕이야.’
여왕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아르웬은 호흡을 재차 갈무리하며 연설문에 시선을 옮겼다.
“아이작…”
연설문을 보니 붉은 머리와 금색 눈동자가 특징인 미남, 아이작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상을 뒤흔들만한 작가에게서 받은 이 연설문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런데 아이작은 기꺼이 자신의 부탁을 승낙했다. 심지어 연설 스타일까지 지도하여 보다 더 나은 연설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의 따뜻한 호의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지만, 연설 이후에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가 자신에게 요구를 하면 좋겠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이건 이거대로 고민이다.
돈, 명예, 여자, 권력 등등. 아이작은 그 어린 나이에 모두 가지고 있다. 아르웬으로서는 주고 싶어도 줄만한 게 없었다.
“하아…”
결국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연설은 연설대로 문제였지만 그 이후에 아이작에게 줄 보상 또한 문제다.
설령 아이작이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할 지어도 무조건 줘야 된다. 그것이 도리이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본래 사람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 때문에 아이작이 섭섭해 할지도 모르니까. 안 그래도 큰 잘못을 저지른 이력이 있던지라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래도 아이작이 있어서 다행이네.”
아르웬은 씁쓸하게 웃으며 연설문을 고이 접어뒀다. 뒤이어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침대 위에 흩뿌려진 그녀의 은회색 머리카락이 깜깜한 침실에서도 빛을 발했다. 은회색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이 없었다면…’
비록 우연과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다져진 인연이지만, 아르웬은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건 용납할 수 없었으나 그와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는 부분은 아르웬에게 있어서 전화위복이었다.
만약 아이작이 없었더라면 알븐하임의 혼란을 잠재우기는커녕 연설문조차 작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일이 되어야 그 결과를 알게 되었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아이작의 도움이 매우 컸다.
그리고 연설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면… 아이작을 향한 은혜는 더 커지겠지. 아르웬은 가슴 중앙에 두 손을 올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이작이 위그드라실에 왔다고 했지.’
입국 심사대에서 발생했던 사건은 이미 보고를 받았다. 타국에서 방문한 귀빈, 그러니까 세실리의 입국을 거부한 심사관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고.
다행히 케이르 감독관이 상황을 잘 수습한 덕분에 일이 커지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조만간 헬리움에서 정식적인 항의가 날아올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니 머리가 아팠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다.
아르웬은 지금쯤 아이작이 뭘 하고 있을지 예상하는 것도 잠시, 문득 숙소에서 보았던 하얀 머리카락의 여인이 떠올랐다. 세실리가 몰래 사귀는 애인이라면 마리라는 여인은 정식으로 약혼까지 맺은 상태.
심지어 숙소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매우 깊은 관계였다. 아쉽게도(?) 매너가 좋은 아르웬이었기에 그 장면을 직접 보진 못 했지만 어딘가 마음이 간질간질거렸다.
약간 아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친구’라 할만한 사람이 없던 아르웬에게는 생소하디 생소한 감정이었다.
“… …”
아르웬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별처럼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드러나 빛을 발했다.
차라리 이렇게 궁상을 떨 바에야 연설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게 훨씬 좋겠지. 이에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전신 거울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우웅-
“응?”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누군가 침실에 설정되어 있는 결계의 암호를 풀고 들어왔다.
보통 결계를 맨몸으로 통과하게 되면 비상음이 울리겠지만,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시리스?”
“예. 여왕님.”
아르웬이 결계의 암호를 직접 알려준 사람이라는 뜻. 아르웬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리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시리스가 찾아온다는 건 다크 엘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아이작이 소식을 전달하거나 둘 중 하나다.
최근 다크 엘프는 레인 때문에 뒤숭숭한 참이었으니 전달할 소식은 없을 터. 그러니 남은 건 아이작 밖에 없다.
“아이작이 보냈느냐?”
“네. 그렇습니다. 아이작 님이 여왕님께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전달하고 싶은 말?”
“여기 편지가 있습니다.”
시리스는 손에 들려있던 편지, 아니 쪽지 하나를 전달했다. 독특한 방식으로 접혀있는 쪽지였다.
아르웬은 처음 보는 쪽지 접기 방식에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 아무런 의심없이 건네받았다.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이윽고 그녀가 쪽지를 전부 펼쳤을 때, 하나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내일 있을 연설 때문에 긴장된다면, 뒷면을 봐.]뒷면을 보라고? 아르웬은 눈을 깜빡거렸다가 순순히 뒷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있는 건.
[여왕님 파이팅!]짤막한 응원의 메세지였다.
“…풋.”
아르웬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무하다면 허무하겠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는 따뜻한 눈빛으로 쪽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바라보다가 곱게 접었다. 어떻게 접는지 몰라서 그냥 대충 접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쪽지를 소중하게 손에 쥔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시리스에게 아이작의 근황에 대해서 물었다.
“아이작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아느냐?”
“현재 약혼녀와 한 방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래?”
아이작이 마리와 같은 방을 쓴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르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약혼녀와 같이 있는 건 별 문제가 없지만, 뭐랄까…
“…알겠다.”
그냥 불편했다.
* * *
고대하던 대국민 연설의 날이 밝아왔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앵겨붙는 마리 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다행히 예정 시간대로 기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만 그랬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내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우리의 예쁜 여친님은 아니다. 어젯밤도 늘 그랬듯이 격렬한 운동을 한 탓인지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 마리. 아침이야.”
“우웅… 5분만…”
“지금 일어나야 된다니까?”
“뽀뽀해줭…”
무슨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도 아니고. 나는 마리의 투정에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면서 요구에 응해줬다.
마리도 내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헤실헤실 웃더니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자락이 가슴께에 아슬아슬하게 걸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실리 못지 않은 색기를 표출하고 있다.
하마터면 그대로 덮칠 뻔했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이어서 우리 둘은 간단하게 씻은 뒤, 옷을 차려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 내려오니 예상대로 세실리와 리나, 그리고 그들의 호위기사가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리를 씻겨주느라 조금 늦은 듯했다.
“미안. 우리가 조금 늦었… 리나?”
“으, 응?”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다만 리나의 상태가 약간 이상했다. 잠을 설쳤는지 몰라도 피곤에 찌들어 있는 듯한 얼굴이랄까.
본연의 미모가 미모인지라 퇴색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피로가 눈에 띄었다.
“아, 아냐. 나는 괜찮아. 응… 괜찮고 말고…”
“아닌 것 같은데…”
“그, 그것보다 어서 빨리 식사부터 하자. 연설까지 앞으로 1시간 정도 남았으니 빠듯해.”
내가 걱정하자 리나는 손을 휙휙 내저으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서 나와 마리를 번갈아보다가 얼굴이 빨갛게 익는 것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방음이 되지 않아 들킨 건가 싶었으나 방음을 포함한 방어가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여관 주인에게 들은 참이다. 덕분에 조금 시끄럽게 굴어도 아무런 항의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리나는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리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쉬이 넘겼다.
어차피 그녀에게 그런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닐테니 과민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이후로 식사를 모두 마친 뒤, 여관 주인의 배웅을 받아 대광장으로 향했다. 대광장은 앞으로 연설이 진행될 곳으로, 그 중앙에는 세계수보다는 아니지만 몇 백년동안 굳건히 자리잡은 나무가 있다고 들었다.
그곳으로 가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대국민 연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아르웬을 보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겠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연설이 시작될 대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마치 제단처럼 단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 뒤에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세계수만큼은 아니어도 확실히 거대한 나무였다. 성인 남성 수십 명이 손을 맞잡고 둘러싸야 간신히 감쌀만한 두께였다.
“우리는 어디에 앉으면 돼?”
“저쪽에 앉으면 돼. 앞에는 원로원을 포함한 명문가들이 앉는다고 했으니까.”
리나는 능숙하게 우리의 자리를 알려줬다. 이런 쪽에 경험이 많은 그녀였으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원로원과 알븐하임의 귀족이 앉는 자리와 타국의 귀빈들이 착석하는 자리와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불편할 일도 없었다. 더구나 우리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귀족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걸 보면 아르웬의 연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터. 나는 그녀가 부담감을 떨쳐내고 연설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어제 시리스를 몰래 불러서 쪽지를 전달했으나 그걸로 응원이 될지 모르겠다.
“저 여자 마족 아니야?”
“정말이네. 마족이 연설에 참석하다니…”
“흠…”
시간이 지나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세실리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특히 앞자리에 앉은 엘프들, 그러니까 원로원과 알븐하임의 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시선이 매우 따가웠다.
곁에 있는 나조차도 이런데 정작 장본인을 어떠할까. 나는 염려되는 마음에 세실리를 힐끔거렸다.
“엣츄! 크응.”
“… …”
시선이고 나발이고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제보다는 호전된 것 같았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코가 딸기코가 되었는데, 그 모습이 귀여운 재채기 소리와 맞물려 맹한 면모를 보여줬다. 세실리의 색다른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빨리 했으면 좋겠는뎅…”
“크흡!”
코까지 막혔는지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세실리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실리는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눈을 뾰족하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비웃어? 너 지금 비웃은 거징?”
“크흐흐흐… 아악!”
결국 허벅지가 꼬집혔다. 나는 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내가 허벅지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동안 세실리는 흥!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중에 사과해야 할 듯싶었다.
웅성- 웅성- 웅성-
연설이 이제 막 시작되기 직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렸다. 앞을 봐도 엘프고, 뒤를 돌아봐도 엘프였으며, 좌우 또한 모두 엘프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오직 귀빈석에 앉은 사람들만이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이었다. 생소한 기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한 마디가 내 귀에 들어왔다.
“저 분 여왕님 아니야?”
그 한 마디에 수많은 시선들이 단상 쪽으로 움직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왕님이다.”
“여왕님이셔.”
“야! 조용히 해!”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전에 보았던 타이트한 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 단상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따로 정숙하라는 말도 없었으나 아르웬이 등장하자마자 시끄럽던 주위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덕분에 드넓은 광장에는 아르웬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각- 또각- 또각-
정숙한 자태로 한 발짝 한 발짝 중앙으로 걸어가는 아르웬. 명랑했던 소녀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한 나라의 지도자에 어울리는 품위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 탓에 내가 알던 아르웬이 맞나 싶었으나 은회색 머리카락을 보면 그녀가 확실했다. 나는 이제 곧 연설이 시작될 듯하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관람 모드에 들어섰다.
또각-
이윽고 단상 중앙에 선 아르웬이 서서히 몸을 돌려 군중들과 마주했다. 타이트한 드레스인지라 그녀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는 골반이 더욱 도드라졌다.
사실 연설을 보러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르웬이 어떻게 연설할지도 궁금했지만, 지난번에 보았던 그녀의 골반 라인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으니.
보상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월계관을 착용한 아르웬의 얼굴과 그 밑의 골반 라인에 시선을 집중했다.
조금 변태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놓고(?) 볼 수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테니 마음껏 감상할 생각이다.
“…모두들 모였구나.”
내가 아르웬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감상하고 있을 쯤, 그녀의 입이 열리며 연설의 시작을 알렸다.
음성증폭 마법을 사용했는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광장 전체가 아르웬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연설을 시작하기 앞서, 그대들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한 번 청중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딱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빨간 머리는 흔하지 않으니 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말없이 손을 들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힘내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다행히 그 응원에 힘을 입었는지 아르웬은 딱딱한 표정을 지우고 부드럽게 웃어줬다. 이어서 청중을 향해 말했다.
“나,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 엘리디아는…”
그녀가 꺼낸 말은…
“혼혈이니라.”
일종의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