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42
■ 141화. 연설 (2) □ ᓚᘏᗢ
아르웬의 충격 고백이 광장 내에 메아리 치듯이 울려퍼졌다. 안 그래도 고요했던 광장은 무거운 기류가 가라앉았다.
현 알븐하임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아르웬은 고백은 충격을 넘어서서 폭탄과도 같다. 순혈과 혼혈이 서로 견제하기 시작한 지금, 그녀의 고백은 자칫하다가 더 큰 균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
비유하자면 기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모래가 될 수도 있는 고백이다.
그야말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이 어울리는, 일종의 도박수다.
“여왕님이…”
“혼혈…?”
“그럼 우리는…”
무거운 침묵이 깨지는 소리가 군데군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앞에 앉은 알븐하임의 원로원과 귀족들은 물론이고, 광장을 가득 채운 엘프들 또한 혼란스러워하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게 그들은 자신들의 여왕이 순혈이라 굳게 믿었을테니.
게다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국에 혼혈이라 밝힌다는 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걸. 또한 자신들의 여왕이 이 사태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엘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들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라.”
웅성거림이 점점 짙어지면서 광장이 시끄러워지기 직전, 아르웬이 말문을 열었다. 연설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광장의 사람들은 모두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에는 세실리, 오른쪽에는 마리가 앉아있다.
아무래도 타국에서 온 귀빈이 아니라 자신의 국민들에게 말한 듯싶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대들은 옆 사람이 순혈인 것을 알고 있었나? 아니면 혼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모두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순혈, 혼혈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친척에 불과했을테니.”
“… …”
아까처럼 잦아지는 청중들의 웅성거림. 이건 내가 전달해준 연설문에도 없던 내용이라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르웬, 그녀는 내가 전달한 연설문만 낭독하지 않고 본인 나름대로 고민을 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이 나올리가 없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단상 위의 아르웬을 바라봤다. 때마침 그녀도 나에게 시선을 옮긴 참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자애로운 여왕에 걸맞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한 번 군중들을 바라봤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나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아르웬이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수천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신의 곁을 보필하고 있었다. 신들에게서 지혜와 힘, 그리고 영원한 삶을 부여받았지. 허나 큰 잘못을 저질러 날개를 잃고 이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신의 분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컸지만, 그렇다고 애정까지 버리는 건 아니었지. 이곳이 바로 신의 축복이 내려진 나라, 알븐하임이니라.”
드디어 내가 작성한 연설문의 도입부가 아르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내가 지도한대로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한, 어머니 같은 자애로움을 풍기며 연설을 이어나갔다.
어린 아이처럼 순둥순둥하고 앳된 얼굴의 그녀였으나 그렇기에 더 강한 매력을 발산하여 청중들의 집중을 이끌어냈다. 특히 시선이 가장 쏠리는 건 단연코 골반이라 할 수 있…
‘…계속 그쪽으로 눈이 가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르웬처럼 유독 골반이 발달된 사람이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으니 눈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저런 옷을 입은 이유도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는 이 신성한 땅 위에 알븐하임을, 최초의 문명을 건국하여 인류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그 후로 숱한 고난과 역경, 그리고 굴욕과 갈등을 거치고 지금에 이르렀지.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또 많은 것을 잃었다. 전사들은 위기의 순간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외부의 침략에 맞섰으며 성직자는 욕망을 절제하여 신에게 회개를 청했지. 3000년 전, 그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바로 알븐하임의 상징이자 우리의 긍지 그 자체, 세계수의 씨앗을 선물받은 것으로.”
연설문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다. 엘프의 오래된 역사를 알려주면서 신이 자신들에게 무슨 의무를 주었는지, 또한 선조들이 어떤 희생을 치러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마지막으로 오만함의 대가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내가 그녀에게 전달한 연설문에 모두 적혀있다.
“하지만 남들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던 탓일까? 아니면 그저 핑계에 불과했을까? 우리는 선조들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온 진정한 명예를 까맣게 잊었다. 긍지는 교만으로 바뀌었으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자만심으로 변질되었고 명예는 타락했지. 결국 300년 전, 우리는 전 세계에 피바람을 몰고 온 거대한 폭풍 속에서 휘말리게 되었다.”
종족 전쟁은 엘프들에게 있어서 치욕과 굴욕으로 점칠된 역사였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아르웬에게 시시각각 견제를 하기 바빴던 원로원들조차 정숙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아르웬의 연설 능력이 예상 밖으로 뛰어나다는 걸 방증하고 있는 것일 터. 그녀가 소녀 감성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는 나조차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그 폭풍은 여태껏 우리가 긍지가 아닌 교만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지. 얕보았던 인간은 악마 전쟁 이후 크게 발전했으나 본질적으로 교만이 우리를 굴욕적으로 만들었다. 교만으로 변질된 자긍심의 대가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를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 엘프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저 자만에 찌들어 있는 한심한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명예와 긍지는 누군가에게 갈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히 품어야 진정한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니.”
스스로의 자아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말. 엘프는 스스로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허나 그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째서 신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전혀 모른다. 연설은 그걸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이다.
“헌데 그 명예와 긍지가 다시 한 번 교만으로 변질되려는 현상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려 하고 있다. 순혈과 혼혈, 이것이 현재 우리가 싸우는 이유. 나, 그리고 누군가의 피에는 다른 종족의 피가 섞여 있지.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순혈이라 해서 무엇이 다르지? 혼혈이라 해서 무엇이 다른 것이냐? 우리는 선조들이 지켜온 긍지와 명예를 가슴에 담고 온 후손이자 신의 사랑을 받는 종족, 엘프일지어니!”
점점 더 격양되는 아르웬의 목소리. 차분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졌으며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선조들이 희생하여 지켜온 의무를 지켜야 된다는 것을.
자신들이 순혈과 혼혈로 구분되지 않는, 엘프라는 종족이라는 것을.
다른 종족의 피가 흘러도 굳센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결국 돌고 돌아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라는 것을.
아르웬은 엘프의 정체성에 대해 일깨워주고 있다.
“그대들에게 다시 한 번 명하겠다! 주위를 둘러보아라!”
이제는 완전히 높아진 아르웬의 음성.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부탁하는 조였다면 지금은 여왕으로서 고압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자애로움이 아닌 카리스마가, 상냥함이 아닌 단호함이.
그녀의 말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의 가족, 친구, 그리고 친척이 순혈인가? 아니면 혼혈인가? 우리는 결코 구분할 수 없으며 또 구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엘프로서, 또 엘프의 긍지와 선조들이 지켜온 명예를 품고 이 땅 위에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신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마지막 기회이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어니!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순혈과 혼혈이 아닌 하나의 ‘엘프’로서! 신의 축복을 받은 땅, 알븐하임에 살아갈 것이니라!”
점차 고양되는 아르웬의 억양처럼 주변의 청중 또한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엘프들의 반응을 보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굳게 다짐한 듯한 표정을 짓거나 옆 사람의 손을 꼭 마주 잡는 등등.
그들은 순혈과 혼혈이 아닌, 아르웬의 연설을 통해 엘프라는 하나된 공통체로 변하는 중이었다.
“또한 우리는, 순혈도 혼혈도 아닌 한 명의 엘프로서 명예와 긍지를 가슴 속에 품고 나아갈 것이다. 알븐하임은 신의 가호 아래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며, 교만을 뿌리치고 진정한 하나가 되어 앞으로 다가올 위기에 맞설 것이니… 기억해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선조들이 지키고 싶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이, 엘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들의 책임이자 의무다!”
이제 슬슬 그 명언이 나올 때가 되었다. 링컨이 분열된 아메리카를 하나로 통합시키게 된 연설이자 후대에 길이 남을 명언이.
아르웬은 좌중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한쪽 손을 가슴 중앙에 갖다 대었다. 뒤이어 결의가 들어있는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소리쳤다.
“지금 이 시간부로 나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 엘리디아가 고하노라! 나는 혼혈이 아닌 한 명의 엘프로서, 이 축복받은 땅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엘프의, 엘프에 의한, 엘프를 위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 신에게 맹세하겠다!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에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도록, 그대들에게 맹세하노라!”
“… …”
나는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링컨의 명언은 당연히 내가 적어준 것이지만, 아르웬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본인만의 살을 덧붙였다.
그녀가 따로 구상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연설의 살을 덧붙은 건,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에 가까운 엘프들의 마음에 딱 적중시키는 연설이라고.
짝- 짝- 짝-
그리하여 아르웬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조용히 울리던 박수 소리는.
짝짝짝짝짝!
이내 우레와 같은 소리로 변하여 광장을 가득 메웠다. 나 또한 홀린듯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으며 내 양옆에 앉은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앉은 알븐하임의 귀족들 몇몇은 아르웬의 연설에 감명받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까지 쳤다. 물론 원로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느릿느릿 박수를 칠 뿐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박수가 이어지면서 곳곳에 터져나오는 탄성. 아르웬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더니 진심 어린 격려를 입 밖으로 꺼냈다.
“모두들 연설을 들어주어서 고맙다! 부디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를 빌겠노라!”
광장을 꽉 채운 소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웬의 말은 귀에 속속 들어왔다. 나는 뿌듯함을 담아 그녀를 향해 열렬히 박수를 쳐줬다.
그런 내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아르웬은 두 손을 가슴 중앙에 모으더니 나를 쳐다봤다. 나 또한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하며 싱긋 웃어줬다.
내가 웃어주자 아르웬은 더할 나위 없아 행복한 미소를 짓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인사하는 걸로만 보이겠지.
[고맙다. 아이작. 정말로 고마워.]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아르웬의 목소리. 전처럼 텔레파시를 통해 의사를 전달한 듯싶었다.
이에 나는 순간 흠칫거렸다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르웬은 뺨을 미미하게 붉은 채 따스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 은혜는 꼭 보답하도록 하마. 혹, 원하는 게 있다면 시리스에게 부탁하거라.]원하는 거라… 그건 아르웬이 등장하면서 다 이룬 참이다.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쭈욱 감상했으니 그녀에게 부탁할 건 딱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연설하는 걸로도 충분했다고 둘러대야지.’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저 말 하나로 인해 아르웬이 어떤 착각을 해버렸는지.
그녀가 실수로 내버려두었던 연설문으로 인해 원로원이 어떤 오해를 하게 되는지.
“정말 멋진 연설이다. 그치?”
“응.”
적어도 이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