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60
■ 159화. 겨울 방학 (3) □ ᓚᘏᗢ
아델리아가 우리 저택으로, 그것도 호위 기사가 되기 위해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니콜이 조만간 재회할 거라고 했으나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지 누가 생각했겠나.
누군가 우리 가문의 호위 기사로 오는 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데이브와 니콜은 군대에 몸을 담았으며, 자연스레 다음 대 가주는 내가 된다. 이 부분은 나도 인지하고 있어서 언제든지 준비하는 중이다.
가능하면 아버지가 가주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세계 여행을 하고 싶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아무도 모르는 법.
더군다나 본래 가문마다 호위 기사가 있어야 제대로 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집안은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영지조차 제대로 발전되지 않아 호위가 아닌 경비병만 존재했다.
황궁에서도 인력을 차출시키기에 애매한 것이, 다른 귀족이 본다면 우리 아버지를 편애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서 무산되었다.
솔직히 우리 집안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황궁에서 문제가 생겨 아버지를 호출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버지가 워낙 강해야 말이지.
그러니 영지가 차차 발전되고 있는 지금, 아버지가 호위 기사를 데려온 건 자체는 상관없다. 하물며 여동생까지 생긴 마당에 호위 기사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호위 기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델리아라는 것이 문제다. 아델리아가 누구인가?
테르스 왕국의 숨겨진 왕족이라는 건 둘째치고도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무학 조교까지 전부 수료한 인재 중의 인재다. 그녀 정도라면 우리 가문의 호위 기사가 아니라 최대 황실 근위대까지 노려볼 만하다.
그런 인재가 대외적으로는 이제 막 발전 중인 시골 영지에, 그것도 호위 기사로 발령났다?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델리아.”
“네, 네! 남작 부인.”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단다. 전시회 때도 본 적이 있잖니? 편하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렴.”
“호, 호위 기사가 될 제가 그렇게 편한 호칭을 쓰면 안 됩니다.”
응접실이 아닌 손님이 머물기 위해 마련된 객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델리아는 어머니의 제안에 크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정말로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인 것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쩔쩔매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본다.
그사이 어머니 옆의 아버지가 특유의 근엄한 목소리로 아델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니콜에게 들었다.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함께 조교직을 수행했다지?”
“네, 넵!”
긴장한 것인지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대답한 아델리아.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나는 반응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허벅지 위에 올려진 손이 쥐어졌다 퍼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다리 또한 달달달- 떨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긴장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제 세실리조차 이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진정하라고 손을 잡아주고 싶었으나 분위기상 그러기가 힘들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괜히 우리가 민망해지니까.”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아무튼 우리 가문의 호위 기사로 온다라… 너만한 인력이 어째서 우리 같은 시골 영지로 온 건지 모르겠구나.”
“펴, 평화롭잖아요. 그리고 시골 영지라 해도 천천히 발전하는 중이고. 약 5년 뒤에는 하나의 문화 도시로 성장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다만 그 5년 동안 다른 곳에 가서 경험을 쌓는 것도 괜찮을텐데.”
“그…”
데려온 건 데려온 거고, 면접은 면접이었던 모양일까. 아델리아는 아버지의 연이은 의문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달싹거렸다.
이렇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만, 적절하게도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이이도 참. 당신 밑에서 수련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
“으흠.”
어머니의 칭찬에 부끄러우셨는지 헛기침을 하시는 아버지. 아델리아는 덕분에 한시름 놓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그러나 원래 위기라는 것은 한 번에 몰아치는 법. 아버지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뭐, 니콜의 추천도 있었으니 더이상 질문은 하지 않으마.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물어보마.”
“네, 네! 말씀하십시오.”
“정말로 평민이 맞는 게냐? 은연히 묻어나오던 예법도 그렇고 식사 예절도 그렇고 평민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더구나.”
“… …”
그 질문을 하자마자 아델리아가 크게 흠칫거렸다. 본래 습관이라는 건 뿌리깊게 박힌 이상 고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아델리아는 테르스 왕국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왕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예법과 예절을 교육받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건 알아야 적어도 욕은 덜 먹었을테니까. 조금이라도 버티기 위한 발버둥이라 봐야 된다.
그리고 간간이 나오는 습관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평민이라기에는 너무나 예쁜 외모가 가장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 평민인지, 아니면 귀족 출신인지만 알려주렴.”
“… …”
아델리아는 아버지의 질문을 듣고 한참을 망설였다. 허벅지 위에 올라간 두 손은 꽉 쥐어졌고 고개 또한 아래로 숙였다.
맞은편의 부모님은 물론 나 또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어깨까지 기른 연갈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그렇게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려는 찰나, 아버지께서 가장 먼저 상황을 종료시켰다.
“됐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 그, 그것이…”
고개를 퍼뜩 들어올린 아델리아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과거가 불확실한 인물은 호위로 적합하지 않지.”
그 말에 아델리아의 안색이 창백함을 넘어 새하얘졌지만.
“하지만 니콜이 간곡하게 요청했으니 넘어가도록 하마. 니콜에게 듣기로는 장난이 심해도 신뢰해도 된다고 했으니.”
“그, 그럼…”
“마이샬 남작가에 온 걸 환영하네. 크로스 경. 앞으로 우리 아이작을 잘 보호해주도록.”
“아…!”
아버지가 이름이 아닌 크로스 경이라고 부르자 아델리아의 표정이 태양처럼 화사해졌다. 언제나 생갇하는 거지만 아델리아는 역시 밝은 얼굴이 제일 어울렸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무 오버하지 않아도 돼. 그러고 보니 아이작. 너는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아서 2학년 때부터 3학년 취급을 받는다고 했지?”
“네. 아버지.”
“혹시 그때도 크로스 경의 호위가 필요한 것이냐? 난 문학과를 잘 몰라서 말이다.”
“음…”
아버지의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문득 옆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에 시선을 옆으로 옮기니 아델리아가 내 얼굴을 정확히 직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소 수상쩍은 반응에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나는 겨울 방학 후부터 있을 학업에 대해 골몰했다.
‘원래 3학년부터는 사실상 대학원생과 비슷하니까…’
문학생은 무학과 달리 한 학년당 50명 내외이며 3학년이 되는 순간 전부 다 찢어진다. 전공 한 명 당 약 3~4명 정도가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지.
사실상 개인 교습이라 봐도 무방하다. 역사관에 엘레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교수가 있는 것처럼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다.
3학년은 진로를 확고히 정하고 본인이 원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 각 교수를 찾아다니면서 배움을 얻으면 된다. 설령 진로를 정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이, 오리엔테이션 당시 비루스 교수가 했던 말처럼 지식만 얻어도 된다.
애당초 헤일로 아카데미는 평민은 몰라도 귀족들은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교육 기관. 가주직을 승계받을 예정인 귀족은 졸업장만 따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역사학에 전공하는 나로서는 호위 기사가 마땅히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조사를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했지?’
엘레나 교수는 다른 교수와 좀 다르다. 괴짜라고 해야 하나.
관심이 가는 게 있으면 가장 먼저 서적을 찾아보거나 알븐하임의 성지로 찾아간다. 그것도 안 되면 관련 문서를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엘프이기에 텔레포트로 방방곡곡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지, 평범한 인간인 나는 힘든 작업이 될 것이 안 봐도 비디오다. 가끔 신디가 조사를 위해 소리없이 사라지는 걸 보면 그녀가 자기 휘하의 인력을 얼마나 혹독하게 굴리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나는 이미 그녀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았다. 대학원생으로 점찍었으니 혹독하게 굴리겠다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
예산은 그녀가 전부 지불하겠지만, 그래도 내 몸을 지킬 수단은 필요할 것이다.
“원래는 필요 없겠지만…”
“아…”
필요 없다고 하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델리아의 표정.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할 수도 있고.”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을 하자마자 빛이 날 것처럼 환해졌다. 정말이지 속내를 숨길 생각을 1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고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아델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럼 크로스 경은 방학동안 나에게 훈련을 받고, 아이작과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되겠군. 아카데미에 호위 기사를 위한 숙소가 있던가?”
“네. 있습니다. 등록만 하면 가격도 무료일 거예요.”
“좋아. 일단 그렇게 하도록 하고, 나는 일 때문에 먼저 가보마. 요즘 날마다 서류가 산처럼 쌓여서 말이야.”
“고생하시네요.”
“하루빨리 네가 가주직을 승계했으면 좋겠지만… 아카데미 졸업 때까지 버텨야겠지.”
“… …”
졸업 후에는 짬이란 모든 짬은 나에게 던지겠다고 선언하시는 아버지. 하기야 아버지는 문관이 아니라 무관에 가까워서 서류 작업이 벅찰 것이다.
물론 한때 기사단장의 자리에 앉았던만큼 업무 처리 능력은 탁월하시겠지만, 펜을 눌리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더 편하지 않을까.
내가 쓴웃음만 짓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아델리아와 한 번 눈을 마주치신 후 방 밖으로 나가셨다. 그러므로 현재 방 안에는 나와 아델리아, 그리고 어머니만 남게 되었다.
아델리아는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시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에서 해방되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농담을 건냈다.
“잘 부탁해요, 누나. 아, 이제는 크로스 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 그… 알겠습니다. 도련… 님…”
“어우…”
평소 친분이 있던 누나 친구한테 도련님이라 불리니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아델리아도 나와 비슷했는지 표정은 어색해지고 테이블 아래의 두 손이 오징어마냥 말려들어갔다.
어머니는 그런 우리의 반응들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셨다.
“정 힘들면 둘만 있을 때 평소처럼 부르면 되잖니?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도련님이라 부르던지 하렴. 그리고 아이작은 평소처럼 편하게 불러도 상관없단다.”
“누가 있던 간에 아델 누나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거예요?”
“물론. 그래야 지시를 내리기 편하니까. 아델리아도 괜찮지?”
“전 괜찮습니다.”
“그래.”
뒤이어 어머니는 저택에서 지낼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 아델리아도 진중한 태도로 임하며 어머니의 말을 경청했다.
가장 먼저 저택 안에 있을 때는 나를 호위할 필요가 없다. 특히 가급적이면 내 개인 침실에 방문하는 것을 자제하고 용건이 있다면 무조건 나의 허락을 받을 것.
저택에서는 개인 단련이나 아버지에게 수련을 받는 것이 좋다고 어머니가 말씀해주셨다. 기본적인 사항에 아델리아도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호위가 필요 없으신가요? 홀몸도 아니신데…”
“나는 걱정 마렴.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사자가 나를 지켜주는데 뭐가 무섭겠니?”
아델리아의 질문에 어머니는 릴리가 자라는 배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신뢰가 듬뿍 묻어있는 말에 아델리아는 부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스윽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특유의 상쾌한 미소로 말했다. 어디까지나 농담에 가까운 말투로.
“너도 저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줄게. 기대해도 좋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에…?”
장난에는 장난으로 돌려줬다. 예상치 못한 내 역공이 당황스러웠던 것일까.
아델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귀가 새빨갛게 익어갔다.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오지 않고 귀만 빨개지는 걸 보면 원래 이런 모양이다.
이어서 그녀는 입을 꾹 다물며 꿈틀거리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참… 말은 잘하지. 아무튼 잘 부탁할게.”
“응. 나도 잘 부탁해.”
우리 둘은 서로에게 잘 부탁한다며 말한 뒤에 악수까지 나누었다. 오랜 단련으로 인해 굳은살이 손바닥 전체에 박혀있는 아델리아의 손은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서로 악수까지 나누자 아델리아는 기분 좋다는 웃음을 터뜨렸고, 나 또한 따스한 미소로 대해줬다. 예상에도 없던 호위 기사였지만, 아델리아라면 믿을 수 있다.
“인사까지 나눴으니까 이제 아이작은 잠깐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니? 아델리아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단다.”
“네? 아, 네. 알겠어요.”
“이제 슬슬 헬리움으로 가야 하니까 겸사겸사 준비도 하고. 알겠지?”
“네.”
“헬리움? 갑자기 헬리움은…”
그러고 보니 내가 조만간 헬리움으로 간다는 사실을 아델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이에 아델리아가 궁금해하며 나에게 질문을 하려는 찰나…
“아델리아.”
“네?”
어머니가 부르면서 무산되었다. 나는 그동안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아델 누나도…’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을 가슴 속에 담으면서.
* * *
아이작이 방 밖으로 나가자 안에는 아이작의 어머니, 안나와 호위 기사 아델리아만이 남게 되었다. 아델리아는 안나가 자신을 부르고 한동안 입을 열지 않자 의문을 표했지만, 아이작이 나가면서 침묵이 가라앉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다소곳하게 찻잔을 들고 있었으나 행동 하나 하나에 묘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방금 전 호크가 면접관으로서 압박을 주었다면, 현재 안나는 다르게 다가왔다.
마치 속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아델리아는 어느새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안나의 입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달그락-
이윽고 차를 한 모금 마신 안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요한 방 내부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안나는 차를 음미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아델리아를 똑바로 직시했다. 보라색 눈동자와 맑은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색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그에 아델리아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안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네. 남작 부인.”
“너도 우리 아이작을 좋아하는 거니?”
“… …”
미사여구 다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들어간 아이작의 어머니. 아델리아는 그녀의 질문을 듣자마자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안나는 핏기가 가신 아델리아의 얼굴을 보고 확신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짐작은 하고 있었단다. 어쩌면 그이도 눈치채고 있겠지. 너만한 인재가 굳이 우리 가문으로 올 이유도 없거니와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못 알아차리면 이상한 거란다.”
“… …”
“하나만 물어보마. 이건 솔직하게 답했으면 좋겠어.”
잠시 말을 멈춘 안나는 보라색 눈동자에 힘을 주며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어떤 이유 때문이니?”
“… …”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아이작은 이미 혼약자가 있단다.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 미네르바 제국의 유일한 공작가, 레킬리스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지. 이미 정사도 여러 번 나누었고, 아카데미 졸업을 한다면 결혼식까지 올려야 하는 입장이란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작에게는 또 다른 연인, 세실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아이작에게 공식적인 혼약자가 있음에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세실리는 개인적으로 마리와 원만하게 해결해서 안나도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거지, 아델리아는 꽁꽁 숨긴 채 호위 기사로 들어왔다.
자칫하다간 화목한 가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이기에 세실리와 달리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까 헬리움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시피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공주님 또한 아이작과 교제를 하고 있어. 비록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아니지만.”
“네, 네? 그게 무슨… 세실리 공주님은 왜?”
마리뿐만 아니라 세실리까지 아이작의 애인이라고 하자 아델리아가 하늘색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평소 마리와 꽁냥거리는 모습은 자주 보았으나 세실리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듣고나니 평범한 친구 관계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긴 있었다. 가끔 가다 팔짱을 낀다거나 진한 스킨십을 하는 등,
아델리아는 점점 마음이 조여오는 느낌에 울컥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는 사이에 안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정이 있단다. 대답의 여하에 따라 말해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 …”
“아델리아 크로스. 넌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 아이작에게 연심을 품은 거니? 네가 평민이 아니라 귀족 출신이라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단다. 그러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어. 혹여 우리 아이작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한 걸 수도 있잖니? 나에게는 솔직하게 말해주렴.”
안나의 말이 끝나도 아델리아는 한참동안 굳게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테이블 아래에 있는 두 손이 쥐었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탓에 땀이 흥건하게 배이고, 허벅지 부분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서 식은땀까지 뺨을 타고 흘러 턱에 송글송글 맺혔다.
허나 그럼에도 안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건 재촉해봤자 의미가 없으며 아델리아가 용기를 내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
이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아델리아는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던 손을 꽉 쥐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는 지진이 난 것처럼 떨렸으며 입술 또한 비슷했다.
“…남작 부인.”
“응. 아델리아.”
“전 사생아입니다.”
“알고 있어.”
“테르스 왕족의.”
“…뭐?”
뒷말까지 이어지자 이번에는 안나가 놀랄 차례였다. 귀족의 사생아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타국의, 그것도 왕족의 피가 흐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밖에도 그녀가 놀라는 이유는 더 있었다.
“테르스 왕족의… 사생아라고? 하지만 테르스 왕국의 국왕은…”
“네. 표면적으로는 한 여자만을 사랑한 로맨티스트로 유명하죠. 첩은 일체 두지 않았는데도 자식만 4명인 것도 유명하고. 하지만 과거의 혈기는 이길 수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 …”
“아버… 지께서는 매춘부였던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고, 저를 낳으셨죠. 이 하늘색 눈동자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안나는 아델리아의 하늘색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하늘색 머리카락은 호크의 붉은 머리처럼 이 세상에 흔하지 않다. 덕분에 세간에는 테르스 왕족의 특징이라 부르는 편이다.
그건 눈동자도 마찬가지. 하지만 눈동자는 머리카락처럼 눈에 띄는 편이 아니어서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든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모욕과 끔찍한 차별뿐. 심지어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났던 형제들은 저를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
“너무… 슬펐어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죠. 한치의 정조차 주지 않는 그들과 나를 태어나게 한 이 세상이 너무 미웠어요.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그때만 생각해도 숨이 가빠오고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입술과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으며 당장이라도 속의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다음에 이어졌던 상황은 아델리아의 상처를 보듬어줬다.
“그리고 혼자 울고 있던 저에게, 아이작이 찾아왔어요. 사실 그때 아이작도 있었거든요.”
“… …”
“어머니도 알겠지만 사생아는… 귀족들에게 취급이 매우 좋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작은 저에게 손수건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울지 말라고. 아델 누나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쁘다고. 도와줄 수는 없어도 옆에 있어주겠다고. 정말로… 따뜻했어요.”
따뜻하다. 어머니와 니콜 다음으로 받아온 따뜻한 정이었다.
어머니는 부모로서의 정을, 니콜은 친구로서의 정을 받았다면 아이작은 한 사람으로서의 정이었다.
자신이 사생아라는 것을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괜찮다는 듯이 손수건을 주었으며 위로를 해줬다.
가뭄마냥 쩍쩍 갈라져 있던 마음에 소나기를 내려준 것처럼, 아이작의 따스한 말은 아델리아에게 살아갈 희망을 전해줬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그 지옥같은 곳으로 돌아갈 바에야 따뜻한 정을 주는 아이작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낫다고. 때마침 니콜도 있겠다, 왕족보다는 마이샬 가문의 호위 기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 …”
“여기까지가 제 솔직한 대답입니다. 이것 말고는 딱히 설명할 길이 없네요.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돌아가겠습니다.”
아델리아는 초연한 표정으로 안나에게 토로했다. 이미 들킨 마당에 숨길 것도 없다.
아이작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지만, 그 행복을 포기해야 된다면 살아갈 이유도 없다. 그냥 여기저기 방랑하다가 결국에는 들개처럼 죽어버리겠지. 그것도 아니면 테르스 왕국으로 복귀하여 인형처럼 살거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정’은, 아델리아에게 있어서 끊을 수 없는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약을 포기해야 된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나을 터.
이에 아델리아가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가만히 있을 때, 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행이구나.”
“네?”
“불순한 마음이 없어서.”
안나의 말을 듣자마자 아델리아가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안나는 예의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아델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아델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때 쯤, 안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아델리아가 불순한 의도, 그러니까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사실을 알고 왔다면 내칠 계획이었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사생아는 그 출생으로 인해 수많은 트러블을 일으키고 다니는 편이니.
그러나 아델리아는 아이작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그를 연모하고 있다. 마리와 같은 케이스.
“지금 내가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어서 미안하구나. 이건 내가 아니라 너의 개인적인 일이니 너희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겠지.”
“그, 그럼…”
“우리 가문의 호위 기사가 된 걸 축하해. 아델리아.”
“아…!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 큽…”
감정이 복받쳤는지 아델리아는 감사 인사를 전하다 말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걸 미리 파악한 안나는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렸던 아델리아도 안나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어서 아델리아를 살며시 껴안고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줬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가족은 너희 친족처럼 모진 사람들이 아니니까.”
“네… 크음… 네…”
“그리고 하나 더 알려줄 사실이 있단다. 네가 아이작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안나는 아델리아를 천천히 떼어내며 그녀와 똑바로 마주했다. 아델리아는 미처 눈물을 닦지 못 한 채 의문 어린 표정으로 안나를 쳐다봤다.
뒤이어 안나는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아델리아에게 조언을 해줬다.
“훗날 결단을 내리게 될 날이 올 거란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아이작을 지켜주겠다고 맹세할 수 있니?”
“맹세할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델리아의 결심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래. 만약 그때도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내가 아이작과 마리에게 잘 말해놓을게. 너도 받아달라고.”
“그,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그래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잖니?”
“… …”
정곡을 찔렸는지 아델리아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귀 또한 빨개진 것이 속내를 들킨 바람에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안나는 그런 아델리아가 귀여웠는지 미약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조심히 감쌌다.
“욕심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아델리아.”
“… …”
“너도 한 번쯤은 원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아델리아는…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런 아델리아가 귀여웠는지 안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어줬다.
‘설마 여기서 더 늘어나진 않겠지? 혹시 모르니 대비해야겠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