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0
■ 169화. 헬리움의 아침 (2) □ ᓚᘏᗢ
점심을 먹기 직전까지 세실리와 엉망진창으로 해버렸다. 솔직히 그녀가 스스로 입에 담았던 발언, ‘주인님’은 사그라들던 불씨를 되살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분명 나를 자극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장장 1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격렬한 운동을 한 셈이라 지칠만도 했지만 모라의 신성력 덕분인지 체력적으로 지치는 않았다. 다만 신성력이 생리 현상까지 막아줄 수는 없었기에 허기와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세실리도 더이상 진행할 생각이 들지 못할만큼 만족한 터라 겨우겨우 끝을 맺게 되었다. 뒤이어 욕실에서 다정하게 서로의 몸을 씻겨주고 목욕 가운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침실에 도착한 하녀들이 주섬주섬 침대보와 그 주위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침대보는 재사용은커녕 완전히 불태워야 할 정도로 더러워진 상태다.
나는 온갖 체액들로 엉망이 된 침대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세실리에게 물었다.
“누나. 저런 것도 마법으로 깨끗이 청소할 수 있어?”
“할 수는 있는데 굳이? 마법을 사용해도 찝찝함은 똑같잖아. 차라리 새로 가는 게 편하지.”
세실리는 그리 대답하더니 여러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방학 내내 더러워질 건데 마법으로 깨끗이 만들 필요가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봐.”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엄청 더럽긴 더럽네. 저것 중 대부분이 내 몸에서 나왔다는 게 안 믿겨져.”
그녀는 부끄러움보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더러워진 침대보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자신을 디저트로 비유하거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달라는 등. 밤동안 갖가지 외설스러운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심지어 막바지에는 주인님이라 부를 정도로 세실리는 수치와 창피함따위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마리도 성욕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전까지는 새색시처럼 수줍어 했는데 세실리는 그런 거 없다. 마리도 성욕에 눈을 떴는데 이러다 세실리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건지 심히 걱정된다.
나는 어느새인가 완전히 검은색으로 돌아온 그녀의 뿔을 한 번 힐긋거렸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보와 그 주변을 정리했던 하녀들은 이미 밖으로 나간 상황이다.
“누나.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악주기에만 이렇게 오래 하는 거야? 아니면 평소에도?”
“음… 글쎄? 엄마한테 들은 바로는 악주기 때가 욕망, 그러니까 성욕이 가장 강할 때야. 그전에는 각자 차이가 있지. 인간마다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 누나는?”
“난 이미 너한테 빠져든 몸이라 잘 모르겠네~ 방학 후에 마리랑 자주 싸울지도?”
세실리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응큼한 미소까지 짓는 걸 보아하니 미래는 예정된 모양이다.
아무래도 신전에 자주 방문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루미너스의 신성력이 세실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니 다소 난감하다.
나는 팔짱을 끼며 사랑스럽게 앵기는 그녀의 뿔을 쓰다듬었다. 세실리도 내가 애정을 표시하자 베시시 웃으며 행복감을 만끽했다.
“누나. 루미너스 님의 신성력은 마족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줘?”
“응? 아니. 모라 님보다는 효율이 매우 떨어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기원은 인간이니까. 만약 악마에 더 가까웠다면 모라님의 신성력조차 해악을 끼치겠지. 그건 왜?”
“사실 어제 저녁에 모라 님이 나한테 신성력을 주셨거든. 누나에게도 전달할 겸 내가 지치지 않게 도와주신 것 같더라.”
“그래? 어쩐지 지칠 것 같으면서도 계속 힘이 나던데 그때문이었구나. 배가 부른 건 신성력이 아니라 서큐버스의 피 때문이겠지? 마나도 전보다 더 늘어난 것 같아.”
세실리가 아랫배를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말하자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려 12시간 동안 한 탓인지 그녀의 아랫배는 약간 튀어나와 있다.
누구는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데 누구는 배도 채우고 마나까지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서 피부에 윤기까지 흐르는 걸 보면 영락없는 서큐버스다.
‘세실리랑 하기 전에 무조건 모라 님을 찾아가야 되겠네.’
그게 아니라면 12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체력(정력)을 기르던가. 불현듯 아버지에게 다시 기사 훈련을 받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꽤 좋은 선택지인 것이, 이제는 마리뿐만 아니라 세실리까지 상대해야 된다. 만약 두 명이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면 동시에 상대할 가능성도 있고.
체력 증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신성력에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니 더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듯하다.
‘일부다처제가 마냥 좋은 건 아니구나.’
물론 좋지 않다는 거지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마리와 세실리 두 명 모두 서로에게 한 발 양보한 상황이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이후로 우리 둘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목욕 가운이 아닌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하녀가 침대보를 교체해주면서 사이즈에 맞는 옷을 미리 구비해 놓은 참이다.
세실리는 어제처럼 오프솔더 드레스였으나 가슴을 전부 가려서 어깨와 쇄골만 드러났고, 나는 그냥 평범한 검은색 양복이었다. 그래도 헬리움에서 제작된 것답게 편의성 하나는 최고였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서로의 알몸이 전부 드러난 탓에 세실리의 욕구를 자극하여 하마터면 2차전으로 돌입할 뻔했지만 내가 극구 만류했다.
피임약의 효과가 다 끝난데다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할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야 된다. 루미너스가 내려준 신탁(?)도 그렇고 세실리의 가임기가 확실히 끝나기 전까지는 참는 것이 좋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미리 말해놓을게.”
“그냥 아무거나 먹고 싶어. 목도 마르고.”
이후로 세실리와 함께 식사가 진행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들으니 텔레파시로 상황을 전달한 덕에 식사가 미리 준비돼 있단다.
헬리움의 왕궁에서 이루어지는 식사는 길거리 음식과 달리 평범한 음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스테이크라던지 아니면 단순한 닭 요리를 포함한 찜이라던지 등등.
특히 자극적인 향신료를 사용하여 내 입맛에도 딱 맞았다. 특히 옛날부터 정신수양을 목적으로 매운맛을 풍기는 향신료를 즐겨 사용한다고.
옛날에는 정신수양을 목적으로 매운 음식을 즐겨먹었지만 지금은 그저 미식에 불과했다.
“일어났니? 어서 앉으렴.”
식사가 진행될 방에 들어서니 특유의 기다란 테이블 끝에 아이실리아가 미리 착석해 있었다. 그런데 데스칼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의문을 품으니 아이실리아가 내 표정을 읽고 곧바로 대답해줬다.
“그이는 업무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단다. 최근 외교로 인해 쌓인 업무가 굉장히 많거든. 어제도 겨우겨우 시간을 낸 거고.”
“아. 그렇군요.”
하긴 헬리움은 주변 국가와의 외교로 인해 한창 바쁠 때다. 당연히 최고 지도자인 국왕을 포함한 휘하 공무원들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데스칼의 불참에 대한 이유를 듣고 자리에 착석했다. 당연히 내 옆에는 세실리가 조신하게 앉았다.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돼 있던 음식은 붉은빛의 소스가 발라져 있는 스테이크. 색깔만 보면 매울 것 같은데 실제로 매콥한 맛을 자랑한다. 헬리움이 건국 초기부터 꾸준히 발전해 온 향신료 중 하나라고.
전생에 한국인이었던 내 입맛에 안성맞춤이라 헬리움에서 지내는 동안 자주 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제 내가 준비한 디저트는 맛있게 먹었니?”
“… …”
냅킨까지 모두 준비하고 식기를 잡으려는 찰나 아이실리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순간 흠칫했다가 시선을 스윽-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아이실리아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작 님이라는 존칭까지 사용했으나 말을 놓은 걸 보니 오늘부터 나를 사위로 취급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미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 하고 있을 때, 그 상황 속에서 나를 구해준 건 세실리였다.
“엄마도 참. 그걸 질문이라고 하세요? 지금 일어난 걸 보면 예상하실 수 있잖아요.”
“얘는. 엄마는 생색도 못 내니? 디저트를 준비하느라 이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아이작이 곤란해 하잖아요. 더 이상의 장난은 그만하세요.”
“흥. 이래서 딸을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까.”
세실리의 다그침에 아이실리아가 토라진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괜히 나 때문에 다툰 느낌이 들어 위로는 하는 게 좋겠다.
“걱정 마세요. 맛있게 먹었거든요. 제 인생 최고의 디저트 중 하나였어요.”
“어머. 정말이니? 다행이구나. 디저트 중이라 했으니 다른 하나는 레킬리스 가문에서 준비한 거지?”
“…네.”
막상 말하고 나니 민망함이 몰아쳤다. 그래도 아이실리아가 우아하게 웃는 걸 보니 마음이 풀린 모양이다.
“레킬리스는 디저트를 어떻게 꾸몄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참고로 어제는 내가 직접 꾸몄단다.”
“… …”
“…엄마.”
다음에 이어진 질문으로 인해 할 말을 잃게 되었지만. 다행히 세실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부르면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아이실리아도 본인이 실언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확실히 마족의 은인이 사위가 되었으니 들뜰 수밖에 없다.
이 탓에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으나 내가 먼저 입을 엶으로서 재빨리 환기시키셨다.
“흠. 흠. 그런데 이 음식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소스도 어제와 약간 다른 것 같네요.”
“아. 좋은 질문이구나. 혹시 우리 사위는 링켈이라는 몬스터를 들어봤니?”
“링켈이라면… 온 몸에 화염을 두른 소라고 들었습니다. 주로 화산 지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불의 기운을 충만하게 받아 남자에게 특히 좋은 영양분을 가지고 있단다.”
“… …”
“옆에 브로콜리처럼 생긴 채소도 비슷해. 브로콜리처럼 보이지만 캐디드라는 채소란다. 이것도 남자에게 좋지.”
이밖에도 스프에 들어간 재료가 정력에 좋다니, 후식으로 나올 음식에도 정력이 좋은 게 들어갔다니 등등. 아이실리아는 그녀대로 나와 세실리의 관계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지원해줬다.
세실리도 처음에 못마땅해 하다가 자신에게도 이득(?)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기는 배부르다며 나에게 주기도 했다.
나 또한 민망해할지언정 거부하지 않았다. 나의 안위를 위해 친절히 준비까지 한 건데 거부할 이유도 없거니와 큰 도움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언제까지고 모라의 신성력에 의지할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몸에 이로운 걸 미리미리 섭취해 놓아야 편안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하나 같이 내 입맛에 적중했다는 점이 가장 커서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벌써부터 힘이 나는 것 같네요.”
“감사하긴. 사위가 우리 마족에게 준 은혜는 평생 갚아도 한참 모자라. 원한다면 부마가 될 수도 있는데 어떠니?”
‘부마’는 왕의 사위, 그러니까 공주의 남편을 지칭하는 단어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부마이긴 하지만 아이실리아가 말하는 건 미네르바 제국을 떠나 헬리움에 정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와 자연스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그러기는 싫다. 이건 선을 넘는 정도가 아니라 마리를 매몰차게 배신하는 꼴이니.
세실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부마의 자리는 정중히 사양하는 것이 옳다.
“죄송합니다. 장모님도 아시다시피 이미 결정이 된 사안이거든요.”
“그래요. 엄마. 저는 아이작의 여자가 된 것만으로도 행복하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간간이 헬리움에 방문해주렴. 원한다면 저택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해줄 수도 있단다.”
“그것도 괜찮겠지만 제가 직접 찾아가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내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도 몇 백년 후니까.”
“그러면 되겠구나. 대신 사위가 곤란해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약속을 잡아놓으렴. 정 여의치 않으면 서로에게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야겠구나.”
나를 두고 신나게 떠드는 모녀. 아이실리아가 마족답게 젊은 나머지 사이좋은 쌍둥이 자매가 노는 것 같다.
중간에 끼어들고 싶어도 마법과 관련된 주제가 나온지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도통 알 수 없는 전문 용어가 튀어나오니 끼어들기가 힘들다.
대충 쌍방 연락이 가능한 수단을 찾는다는 건 알아들었다. 난 그냥 후식으로 나온 차나 마셔야지.
이것도 정력에 좋다고 아이실리아가 언급했으며 녹차와 비슷한 맛을 띄고 있다. 왠지 코가 뻥 뚫리는 것이 비염 환자에게 제격일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사위.”
“네?”
“14권의 원고를 출판사로 보냈다고 했었지?”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을 때 아이실리아가 나에게 질문했다. 얼마 뒤면 곧 발매될 14권에 대한 이야기였다.
느닷없이 제논 일대기가 언급되자 약간 얼떨떨했지만 일단 질문에 대답부터 했다.
“네. 곧 있으면 발매될 거예요.”
“언제쯤?”
“그건 저도 자세히 모르지만 보통 원고를 보내고 3~4일 후에 초판이 발부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슬슬 발락 경을 보내야겠네.”
아무래도 초판이 나오자마자 구매할 속셈인 듯했다. 출판사에서도 발매 일정을 알려주긴 하나 헬리움까지 소식이 날아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헬리움의 사정은 나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인간 다음으로 제일 많은 구매력을 보이는 종족이 바로 마족이었으니.
세실리에게 들은 바로는 마족의 인식이 좋지 못 할 때도 헬리움에 오가는 상단은 존재했고, 그 상단을 통해 제논 일대기를 입수했단다.
제아무리 헬리움의 악마들이 사는 나라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었으나 세상에는 돈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마족이 평범한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일찍 깨달아 현재까지도 신용할 수 있는 계약자로 남아있다.
“그런데 엄마. 발락 경은 어떻게 됐어요?”
“그거 말이니? 일단 압수 조치를 했단다. 사인본 자체는 문제 없지만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거든. 후의 행실을 보고 돌려줄지 말지를 정할 거란다. 아. 사위가 원한다면 곧바로 돌려줄 수도 있어.”
“… …”
불쌍한 가르츠. 겨우 사인본 하나 가지고 갈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그 무뚝뚝하던 얼굴이 슬픔과 우울로 인해 일그러진 것을 상상하다가 연민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
“…그냥 돌려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헬리움의 아침은 평범한 일상처럼 넘어갔다.
“신전에 갔다 왔지? 오늘은 어떻게 괴롭혀줄래?”
“…악주기 끝난 거 아니었어?”
“악주기가 끝나도 몸은 이미 아이작에게 빠졌는걸? 어째서 마리가 그러는지 알 것 같아.”
밤은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듯한 방학이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아이작이 헬리움에서 세실리와 화끈한 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 제논 일대기 14권의 발매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기다렸던 신간의 발매 소식에 팬들은 벌써부터 서점 앞에서 대기하는 중이었고, 몇몇은 사람을 시켜 줄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원래 제논 일대기는 한 명당 하나밖에 구매하지 못 하게 하도록 막아놓았으나 인쇄소에서 신기술이 발매된 이후로 다시 폐기되었다.
한 사람당 하나였던 이유는 제논 일대기가 수시로 매진되어 구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제는 사재기를 할 필요도 없으니 공문을 내린 것이다.
몇몇 고위 귀족들은 웃돈을 지급하고 출판사로부터 초판까지 몰래 넘겨받기도 한다. 그리고 전세계를 누비는 상단 또한 거금을 들여 다른 나라에 제논 일대기를 팔 수 있도록 계약을 맺는 편이다.
이렇다 보니 직접 구매하지 않는 이상 미네르바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제논 일대기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참고로 미네르바 제국으로부터 지리상 제일 멀리 떨어진 나라는 엘프의 나라, 알븐하임.
알븐하임은 아르웬의 연설 덕분에 혼혈 사태라는 사회 문제를 잘 추스리고 안정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수 뿌리의 오염마저 막았으니 사실상 문제가 거의 없는 수준.
달라진 점이라면 제논 일대기를 향한 관심이 대폭 늘어나고, 더 나아가 제논을 향한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 신의 선물인 세계수를 구했으니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탓에 제논을 찾아야 은혜를 갚아야 된다니, 필시 예언자일 게 분명하다며 아르웬의 골치를 썩게 만들었으나 이것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하여 입국 관리 심사 기준을 좀 더 완화했으면 좋겠습니다.”
“흠.”
업무가 아닌 보고를 받기 위해 마련된 알븐하임의 알현실 안. 아르웬은 왕좌에 앉아 입국 심사관, 케이르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굳이 원로원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업무의 책임자들은 알현실로 들어와 보고를 해야 된다. 입국 심사관의 감독, 케이르도 마찬가지.
그는 현재 빡빡하디 빡빡한 알븐하임의 입국 심사 기준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으며 완화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대의 부탁은 잘 알겠다. 심사 기준의 완화도 고려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하구나.”
“관세 문제 때문입니까?”
“그래. 입국 심사가 완화된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종족이 오고 갈 수도 있다는 의미. 이뿐만이 아니라 단체 또한 마찬가지니라. 이건 원로원과 따로 회의를 해야겠군.”
“그 노땅들은 거부할 게 뻔한데…”
원로원과 회의를 한다는 이야기에 케이르가 투덜거렸다. 여왕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엘프답지 않게 털털한 케이르다웠다.
아르웬은 케이르가 원로원에게 가진 불만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에 쓴웃음만 지었다.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 입국 심사 감독관이 된 이유도 원로원 때문이었으니.
“그렇다고 나 혼자 진행할 수 없는 일이니라. 나도 그대가 원로원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했으면 좋겠구나.”
“하아… 알겠습니다. 여왕님도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건 그렇고 그… 아이케르 전사장은 현재 상황이 어떤지 알려줄 수 있느냐?”
아르웬은 알븐하임의 전 전사장이자 케이르의 전 상관이었던 아이케르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한때 종족 전쟁에서 알븐하임을 패배로부터 구할 뻔했으나 원로원의 삽질로 투옥시킨 비운의 영웅.
믿었던 조국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종족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자택에서 나오지 않고 은둔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끔씩 얼굴을 비추거나 자택 연무장에서 단련을 하는 등. 복귀하려는 조짐을 간간이 보이고 있어 여러모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이케르 님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 책 때문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무튼 아이케르 님께서 복귀하신다면 저야 환영입니다. 원로원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여러가지 이유로 변화하는 법이지. 그래도 좋은 징조로 보여 다행이구나.”
엘프는 특별한 사유가 아닌 이상 평생을 한 직종에 몸을 담는다. 그건 군인도 똑같다.
특히 전사가 된 엘프는 심한 부상을 입는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해서는 끝까지 군에 남는다. 원로원에게 배신당하여 환멸을 느낀 아이케르가 특수한 경우다.
이로 인해 엘프는 겉으로 보이는 힘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나 수인처럼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는 실력자는 잘 없다.
‘이것도 제논 일대기 덕분이겠지.’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제논 일대기 속에서 등장하는 엘프측 영웅은 아이케르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걸.
그 영웅은 과거 조국에서 배신당했지만, 자신이 지키는 것이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라는 걸 깨닫고 악마와 맞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다크 엘프와 만나 힘을 합치게 되고.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저 그렇구나~ 라고 넘어갈 수도 있는 설정이었으나 아이케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실제로 아이케르는 원로원에게 환멸을 느껴 은거했을 뿐, 알븐하임을 향한 애정은 여전했으니.
만약 악마 전쟁이 실제로 발발했다면 아이케르도 똑같은 행보를 보였을 거라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상태다.
‘아이작은 정말로 예언자인 걸까?’
아르웬은 결코 쉬이 넘길 수 없는 제논 일대기 속 내용을 다시금 상기했다. 지난 번 원로원에게 들었을 때부터 곰곰이 생각한 거지만 제논 일대기는 정말로 예언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계수 뿌리의 오염, 악마 소환, 리퍼 같은 ‘우연’이 연달아 터지는 건 솔직히 말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된다. 루미너스도 현재는 우연이어도 미래에는 필연이라 하지 않았나.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언급한 ‘제약’이라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르웬으로서는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원로원이 언급했듯이 아이작은 아르웬에게 무수한 호의를 보이는 중이었으니.
이성은 아니라고, 그냥 아이작의 심성이 고운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감정은 다르게 소리쳤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실제로 일어날 뻔한 이야기들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정말로…
쿠웅!
아르웬이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들기 직전, 굳게 닫혀있던 알현실의 문이 거세게 개방되었다. 그에 아르웬은 물론이고 케이르조차 화들짝 놀라며 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문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원로원의 대의원, 피렌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중이었다. 평소 대동하던 의원들은 한 명도 없었으며 오직 피렌 한 명뿐이다.
제아무리 원로원이 암덩어리 같은 존재여도 기본은 지키고 있다. 방금 전처럼 문을, 그것도 여왕이 있는 알현실의 문을 소리가 날 정도로 열어 젖히진 않는다.
보통 같으면 무례를 따져서 엄하게 다그치겠지만, 아르웬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거 참. 이제는 막나가기라도 결정한 겁니까?”
“그 입 닥치고 여기서 나가게. 여왕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케이르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어도 피렌은 평소 입에 잘 담지 않던 험한 말까지 내뱉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에 케이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피렌은 평소 점잖은 말투를 사용하는 편인데 지금은 그런 면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 들이닥쳤다는 뜻.
더군다나 의원들을 대동하지 않고 홀로 여왕을 찾아온 걸 보면 필시 그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케이르는 놀란 표정으로 아르웬의 눈치를 살폈다.
아르웬도 피렌의 이상 행동에 의아함이 들었는지 질책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는 케이르와 눈을 마주친 뒤에 조용히 명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구나. 들어가도록 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케이르는 정중히 인사한 후, 피렌을 한 번 힐긋거렸다가 알현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알현실 안에는 왕좌에 앉아있는 아르웬과 그 앞에 서 있는 피렌만이 남게 되었다.
아르웬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피렌의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피렌 대의원. 무례를 저지르면서 온 걸 보면 중요한 이야기겠지?”
“…여왕님. 실례지만 하나만 묻겠습니다.”
여왕이 먼저 질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먼저 질문한 피렌. 순간 아르웬의 눈 밑이 꿈틀거렸지만 그의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네모반듯하고 약간의 두께가 있는 걸 보아하니 책인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아르웬이 다시 한 번 의문을 가졌을 때 피렌이 이상한 질문을 날렸다.
“여왕님은… 정말 제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겁니까?”
“…그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 것이냐? 전혀 없다고 진작에 말했잖느냐.”
“그렇다면 이 책을 한 번 보시지요. 최근 미네르바 제국에서 발매된 제논 일대기 14권입니다.”
아르웬이 예상한대로 피렌의 손에 쥐어진 건 책, 그것도 제논 일대기 14권이었다. 어째서 알븐하임에서 발매되지 않은 신간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번 그는 제논을 독자적으로 찾기 위해 출판사로 사람을 보냈다. 그 인력을 통해 책을 입수했겠지.
그사이 피렌은 마법을 통해 책을 두둥실 띄워 아르웬에게 전달했다. 아르웬도 처음에는 미심쩍어 했으나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피렌이 전달한 책은 정말로 제논 일대기 14권이 확실했다. 새로운 표지부터 시작하여 정직하게 적혀있는 ’14권’을 보면 분명하다.
“책의 100페이지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처음부터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전에 어째서 이 책을 읽으라는 건지 의심이 드는구나. 우선 이유부터 말해라. 이건 명령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제권을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는 아르웬. 아무리 급해도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피렌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책에 금지된 마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