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2
■ 171화. 금지된 마법 (2) □ ᓚᘏᗢ
아르웬은 피렌의 몸이 흠칫 떨리는 걸 보자마자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겉보기에는 금지된 마법이니 심각한 사안을 내면서 속은 시커멓기 짝이 없다.
제논 일대기 속에 언급된 합체, 그러니까 합일은 이론상 매우 위험한 마법인 건 확실하다. 합일 자체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더 나아가 주변의 에너지까지 마구잡이로 흡수하니 그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피렌의 진정한 속내는 합일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제논 일대기 속 합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면 얼추 눈치챌 수 있다.
단순한 금지 마법이 책에 나오는 건 조금 뒤에 있을 정무를 통해 넌지시 알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무례까지 저지르면서 난리를 피우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또한 피렌은 합일이 오직 엘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수 백년 간 알븐하임을 통치하던 피렌에게 있어서 특정 마법을 금지시키는 건 쉬운 일이다.
게다가 지난 연설 이후로 알븐하임은 여왕, 아르웬을 향한 민심이 급격히 상승한 참이다. 아르웬이 금지하라고 엄격히 지정하면 국민들도 순순히 따라줄 것이다.
‘그런데 엘프가 아닌 다크 엘프와 합체를 해서 문제지.’
문제는 합체의 주체가 엘프와 엘프가 아닌, 엘프와 다크 엘프라는 점이다. 비록 혼혈 문제로 인해 묻힌 감이 있었으나 다크 엘프의 등장은 독자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다크 엘프가 누구인가. 뿌리는 같지만 문화와 전통이 전혀 다른 엘프의 또다른 민족.
가끔씩 필요한 물품을 사거나 조사를 위해 인간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로 가끔씩 나온다. 이 때문에 인간들은 다크 엘프와 만나면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호기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듯 다크 엘프는 본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종족 중 하나였지만 제논 일대기에 등장하자 많은 이들이 집중했다. 제논이라면 다크 엘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리고 시리스에게 자문을 받은 정보를 토대로 쓴 다크 엘프의 설정은 현실과 다를 게 거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 정면 승부가 아닌 암습에 특화돼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몸을 영구히 은폐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굳이 다른 게 있다면 직위명이지만 이건 넘어갈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비록 혼혈 사태에 묻혔으나 제논 일대기에는 엘프와 다크 엘프의 사이가 왜 나쁜지, 그리고 다크 엘프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엘븐하임에서 추방됐는지 제논 일대기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덕분에 다크 엘프가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추방을 택했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다. 성지에 깊숙히 박혀있던 역사의 진실이 제논 일대기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엘프 학자들은 이것이 정말 사실이냐며 본격적인 연구에 나섰고, 몇몇은 아예 다크 엘프가 머무는 주거지로 여행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다.
지금 당장은 확인을 위해 증거를 모으는 시점이라 잠잠하지만 사실로 밝혀지게 되는 순간 알븐하임은 또다른 충격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다크 엘프 문제는 그나마 나아.’
아르웬은 다크 엘프와 관련된 일은 수월히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중이다. 애당초 그걸 위해 여태까지 다크 엘프들과 물밑으로 교류를 한 것이지 않은가.
오히려 아이작에게 넙죽 엎드려 고마움을 전달해야 할 판이다. 다크 엘프, 레인이 초고를 훔쳤는데도 불구하고 제논 일대기에는 호의적으로 묘사했으니.
그러므로 14권에 묘사된 엘프와 다크 엘프의 합체는 두 민족간의 진정한 통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위기의 순간 민족을 갈라놓았던 갈등은 잠시 내려놓고 세상을 위협하는 악에게 맞서 싸운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직은 미비하나 다크 엘프를 향한 알븐하임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다면 그들이 알븐하임으로 들어오는 건 시간 문제다.
아르웬이 아무리 노력해도 알븐하임의 국민들이 꺼려한다면 다크 엘프와의 융화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허나 제논 일대기를 통해 시선이 달라지게 된다면 서로의 오해를 풀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피렌은 그걸 어떻게든 막기 위해 제논 일대기 14권을 검열할 계획이었다. 금단의 마법이 들어있는 건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속내다.
“후우… 피렌 대의원.”
“…예. 여왕님.”
“정말로 다크 엘프 때문인 것이냐? 이 책에는 엘프와 다크 엘프가 합체를 한 바,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그대도 잘 알 것이니라. 과거의 동족상잔으로 인해 떨어지게 된 두 민족이 공통된 목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 순혈을 고집하는 특정 인물들에게는 아주 민감한 사항일테고.”
“다크 엘프는 어둠에 모습을 감춘 자들.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자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아르웬이 예리하게 지적하자 피렌도 더이상 감출 생각이 없었는지 진정한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르웬은 그걸 듣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결국 그놈의 순혈주의는 어디 가지 않았다. 합일은 위험하고 해서는 안 되는 마법임은 분명하나 이것조차 ‘명분’에 불과하다.
왠일로 평소 대동하던 의원들을 놔두고 무례까지 저지르며 알현실로 찾아왔나 싶었는데 변하는 건 없다. 속된 말로 똥줄이 탄 나머지 무작정 들이닥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여왕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합일은 매우 위험한 마법이라는 것. 이미 들킨 마당에야 숨길 것도 없겠지요. 다크 엘프 이전에 금지된 마법이 널리 퍼지기 전에 서둘러 출간을 금지해야 됩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건지 묻고 싶구나. 이미 알븐하임은 수십 년 전부터 다른 나라와 교류를 맺고 있는 바. 하물며 제논 일대기는 최근들어 알븐하임에서도 수요가 급등했지. 그런데 그걸 갑자기 막는다? 외교에 있어서 신뢰도를 깎아먹는 짓이라는 걸 그대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알븐하임에서 제논 일대기는 읽는 사람만 읽는 책이었으나 12권 이후부터 그 수요가 폭등했다.
우선 여주인공 메리가 엘프인 것부터가 수많은 관심을 이끌었으며 카이르와 엘리샤의 비극적인 서사로 하여금 ‘혼혈’이라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니.
무엇보다 우연이라 해도 세계수 뿌리의 오염을 알게 해준 것부터가 엘프의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덕분에 출판사는 행복하기 그지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는 몰라도 미네르바 제국을 언급하기에는 애매한 위치이지 않습니까? 설령 제논이 마이샬 영지 출신이라고 한들 현재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요. 제논 일대기에 대한 권한은 미네르바 제국이 아니라 출판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피렌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은 자신이 마이샬 영지 출신이라고만 말했을 뿐이지 미네르바 제국에게 권한은 없다는 것.
만약 아이작이 정체를 밝히고 미네르바 제국에 소속되었다면 모를까, 현재까지는 상황이 유지되고 있다. 또한 상층부에서 출판사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는 순간 ‘연재 중단’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발발할 가능성도 높다.
연재 중단과 그 영향에 대한 쓴맛을 제대로 보았으니 미네르바 제국도 애매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자국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책인데 정작 권한은 하나도 없었으니.
미네르바 제국이 할 수 있는 건 출판사에게서 세금을 받는 것밖에 없다. 어떻게든 뜯어가기 위해 달마다 불시로 검사하고 있으나 출판사 사장이 이미 도가 튼 터라 이렇다 할 이득은 없었다.
“그러니 우리 알븐하임에서 검열을 한다고 해도 피해는 고스란히 출판사에게 갈 뿐, 미네르바 제국은 미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마침 금단의 마법이 있다는 명분도 있으니 검열을 하는 건 문제가 없겠지요.”
“명분이라…”
아르웬은 피렌은 누차 언급한 ‘명분’이라는 단어에 작게 중얼거렸다. 13권까지는 별의 별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여도 무시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명분이 확실하다.
금지된 마법은, 책에서는 절대 언급조차 해서 안 되는 능력. 사령술에 관한 ‘서적’은 있어도 ‘마법서’는 없다. 조금이라도 상세히 설명돼 있다면 무조건 불로 태워버려야 된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에 묘사된 합체는 다소 애매하다. 합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상세하지 않고 다소 추상적인 문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과연 이것만으로 검열을 할 이유가 되는 것일까. 그녀는 한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치다가 참아왔던 한숨을 터뜨렸다.
“불허하노라.”
“하오나…”
“그대는 제논 일대기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정말 모르는 것이냐? 검열을 한다고 해서 과연 금지된 마법이 널리 퍼지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이런 말이 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다. 특히 학구열이 높은 학자들이나 마법사들이 종종 그런 실수를 범한다.
제논 일대기를 검열하는 것까지는 좋다. 금지된 마법이 들어있다는 아주 훌륭한 명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미 국외로 파견된 학자나 마법사는 그 소식을 듣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이게 어째서 금지된 마법이라는 거지? 라면서.
무엇보다 인간들 세상에 이미 널리 퍼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구멍이다. 인간 사회에는 이미 수많은 엘프들이 살고 있으며 개중에는 혼혈도 섞여 있다.
이미 뿌리까지 스며든 문화의 강력한 힘과 영향력은, 고작 검열 ‘따위’를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물며 아이…”
살짝 흥분한 나머지 본명을 말할 뻔했다. 아르웬은 서둘러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자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조차 읽는 책이다. 과연 검열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구나. 자칫하다간 불법만 늘어난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 것이냐?”
“… …”
“아까 그대가 말했지. 다크 엘프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고. 혹, 다크 엘프가 앙심을 품고 합일을 하여 우리 알븐하임을 위협할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허나 여왕님. 여왕님은 정말로 그들을 믿습니까? 겉모습처럼 속내 또한 어두운 자들을?”
다크 엘프의 피부색을 언급하면서 대차게 까내리는 피렌. 이에 아르웬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누구 보고 속이 까맣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본인이 제일 음흉한 속내를 가졌으면서.
“빛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못 보는 자들보다는 훨씬 믿을만하지. 적어도 그들은 어둠을 꿰뚫고 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 …”
“검열에 대한 건 없던 일로 하겠다. 알븐하임으로 수입되는 제논 일대기는 그대로 놔두어라.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여왕님. 여왕님은 그들을 정녕 알븐하임으로 들여보낼 계획이십니까? 그들이 추방된지 벌써 수백 년이 넘습니다. 수백 년이라는 세월은 문화와 전통마저 달라졌을 확률이 매우 높죠.”
피렌은 아르웬의 결정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직감했는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르웬은 그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이번에는 무슨 헛소리를 꺼낼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피렌이 꺼낸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문화의 충돌은 곧 균열을 의미하는 바. 비록 여왕님은 희망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으나 그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본인의 문화와 전통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잡아먹힐 수도 있지요. 그 두려움은 머지않아 혼혈 사태처럼 또다른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 …”
“여왕님께서는 확신하십니까? 뿌리는 같아도 줄기가 달라진 두 민족의 통합을? 고작 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다크 엘프는 혼혈 사태와 그 궤를 달리하니 다시 한 번 재고해주십시오.”
이미 다크 엘프와 남몰래 교류하고 있는 아르웬 입장으로서는 어이가 없을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피렌을 포함한 원로원은 그 사실을 지금까지 눈치 못 채고 있으니 할만한 질문이었다.
문제는 저 질문 속에는 알게 모르게 아르웬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 혼혈 사태는 아이작의 도움이 있었어도 다크 엘프는 다르다.
혼혈 문제는 줄기가 어긋나기 직전에 막았으나 다크 엘프는 이미 줄기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였으니. 피렌은 정말 실현 가능한 이상인지 묻고 있었다.
‘사람 열받게 만드는 건 참 뛰어나단 말이야.’
종족 전쟁 이후 알븐하임의 왕은 아르웬 즉위 이전에 자주 교체되었다. 원로원이 이처럼 하도 속을 박박 긁어대니 정신력이 남아나질 않을 수밖에.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혼혈로 태어나 온갖 처세술에 통달하여 이정도는 문제 없다. 아르웬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상이라… 그러면 반대로 내가 묻겠노라. 피렌 대의원. 그대가 원하는 이상은 무엇이지?”
“당연하게도 알븐하임의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깨뜨린다면, 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평화를 위해 본인의 자리마저 걸 수 있는가?”
“… …”
아르웬이 직설적으로 묻자 피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알븐하임을 평화롭게 다스린다… 언듯 보면 좋아 보이지. 하지만 피렌 대의원. 그 평화라는 건 아무런 발전도 없는, 그냥 도태라는 현상에 지나지 않느니라. 백성들은 무엇이 잘못된 지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겠지. 불편한 진실은 항상 외면하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다.”
“…여왕님께서 정녕 평화를 깨뜨리고 싶으신 겁니까? 그건 폭정입니다.”
“아니. 나 또한 평화로운 지금이 좋지. 그러나 인간을 보아라. 그들은 스스로 평화를 깨뜨리면서 끝없는 발전을 이룩하고 있지. 종족 전쟁에서도 인간이 우리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고, 보기 좋게 승리를 점했다. 발전을 위해서는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한 법이지. 헌데…”
뒤이어 그녀는 깔보는 듯한 회색빛 시선으로 피렌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것도 안 한 채 도태되기만 기다리는 꼰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대는 진정 뭘 원하는 것이냐? ‘평화’와 ‘안위’는 철저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 그대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저 대비할 생각도 없이 피할 궁리만 취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 …”
“하지만 태풍이 점점 강해진다면 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더이상 피할 곳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피해를 각오하고 대비한 자들은? 태풍에 완전히 휘말려 존재마저 사라진 것들과 달리 꿋꿋하게 자리를 버티고 있겠지. 그게 바로 발전이며 태풍 뒤에는 반드시 평화가 찾아오는 법이다. 역사적으로 늘 그랬듯이.”
장황하게 설명을 꺼낸 아르웬은 마지막 결정타를 때렸다.
“내 말이 너무 어려웠나? 그럼 다른 질문을 하도록 하마. 그대는 정치를 왜 하는 것인가?”
“… …”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은 정책만 펼친다고 해서 알븐하임이 정말로 평화로워질 것이라 생각하느냐? 난 밀수만 늘어나고 불법을 저지르는 백성들만 늘어나는 꼴이라고 생각한다만.”
꽈악-
아르웬이 원로원의 존재 의의마저 부정하는 직설을 꺼내자 피렌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정치를 하는 정치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모욕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반박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 더 큰 분노를 일으켰다. 풋내기인 줄만 알았던 여왕은 혼혈 사태 이후로 입지가 더욱 커져버렸다.
그리고 그 입지를 커지게 만든 결정적 원인은… 당장은 단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피렌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잠재운 후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은은한 분노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여왕님의 생각은 알겠습니다. 검열은 없던 일로 하도록 하죠.”
“알았다. 혹, 다른 할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단, 제논의 행방에 대한 건 제가 따로 하겠습니다. 금지된 마법을 안다는 것 자체부터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니.”
이미 출판사로 찾아가 놓고는 이제 와서. 아르웬은 속마음을 꾹 눌러담은 채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거라. 제논을 건드려 몰려오게 될 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그리 쉽게 꺾이진 않을 겁니다. 그동안 안녕하시길.”
피렌은 그 말만 남긴 채 등을 돌려 굳게 닫혀있던 알현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르웬은 몸에 주었던 힘을 탁- 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력이 크게 소모되었지만, 그래도 이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기뻐하는 표정으로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허벅지 위에는 피렌이 미처 수거하지 않은 제논 일대기 14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래도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네.”
아르웬은 희희낙락하며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