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5
■ 174화. 예기치 못한 상황 (1) □ ᓚᘏᗢ
모든 신혼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신혼은 깨가 쏟아진다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알콩달콩하기 그지 없다.
제
장기간 연애를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보통 애인의 잘 알지 못 했던 부분들을 하나 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때 쓰이는 편이다.
그리고 마리와 그랬듯이 세실리와의 왕궁 생활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리는 우리 저택에서 짧디 짧은 신혼을 지냈지만 세실리는 방학 내내 함께 있다는 걸까.
사실 마리와 약혼을 했을 뿐이지 결혼은 하지 않아 신혼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건 비단 세실리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녀는 마리와 달리 공식적으로 맺어진 관계도 아니다.
하지만 신혼에 버금갈 정도로 우리 둘은 서로 아끼고 보듬어주느라 하루가 금방금방 흘러갔다. 한창 끓어오를 때라 눈만 마주쳐도 침실로 향하기 일쑤였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몸을 맞대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마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실리는 쾌락도 쾌락이지만 정서적 안정을 더욱 추구한다는 것일까. 첫날밤은 악주기로 인해 쾌락을 더욱 선호했으나 다음 날부터는 그냥 나와 이어졌다는 부분 자체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서로 포옹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했다. 그 커다란 가슴이 닿아서 내가 참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아무튼 성욕에 눈을 뜨게 된 마리가 쾌락을 갈구한다면 세실리는 정서적 교감을 추구하고 있다. 왠지 둘의 입장이 바뀌어야 될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마리랑 나랑 비교했을 때 누가 더 기분 좋아?”
“어허. 그런 질문은 하면 못 써요.”
나는 짓궂은 질문을 한 세실리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며 엄하게 다그쳤다. 장난인 건 알고 있지만 민감한 질문은 사양이다.
현재 우리 둘은 왕궁 안에 있는 정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러다 잠깐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공간에서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은 뒤에는 다소곳이 앉아있는 세실리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편하게 누웠다. 옷 너머로 부드러운 허벅지의 감각이 머리를 타고 전해졌다.
“후훗. 내가 장난이 심했나?”
세실리는 내가 뺨을 꼬집자 내 손을 살포시 붙잡으며 물었다. 나는 그녀가 내 손을 잡자마자 곧바로 펴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애정을 담아 뺨을 만져주자 그녀는 손길을 더욱 느끼겠다는 듯이 얼굴을 갖다 대었다. 부드러운 뺨의 감촉이 내 손에 선명히 느껴진다.
아까도 설명했지만 세실리는 유달리 스킨십을 좋아한다. 굳이 관계까지 맺지 않아도 나와의 교감을 우선시했다.
듣자하니 내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나 뭐라나. 덕분에 그녀가 나에게 푹 빠져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본래는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여서 몸과 마음을 바친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리처럼 나라는 사람을 더욱 좋아하게 된 세실리다.
나는 그녀의 뺨을 살살 만져주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기 위해 허벅지 아래로 얼굴을 옮겼다. 지금 내 시야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지방 덩어리가 당당히 가로막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내가 자리를 옮겨도 세실리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그녀의 흉부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발이 안 보인다고 했었나?’
마리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고충이었다. 특히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밑이 보이지 않아 조심조심 내려간다는데 세실리는 오죽할까.
무릎베개를 한 상태에서도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사실상 아래쪽 시야를 포기하는 셈이다.
“누나.”
“응?”
“누나는 내 얼굴 보여?”
“얼굴?”
세실리는 내 물음에 순간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가 서서히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당연히 그 커다랗던 가슴 또한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푸욱-
결국에 세실리가 가슴으로 내 얼굴을 깔아뭉갰다. 검은색 드레스 너머로도 생생히 느껴지는 촉감에 다른 의미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렇게 몇 초를 있었을까. 세실리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화들짝 놀라며 급히 상체를 물렸다.
“미, 미안! 괜찮아? 숨 막히진 않았어?”
“걱정 마. 이럴 줄 알고 숨 참고 있었거든.”
“뭐? 얘가 진짜…”
능청스러운 나의 대답에 일부러 그랬다는 걸 눈치챘는지 세실리가 못 말린다는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그에 약한 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애인이 된 후에도 나에게 줄곧 장난을 잘 치던 그녀여서 한 번쯤은 놀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장난에 한해서는 세실리에 비빌 수 없다는 건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텁-
“어때? 또 장난칠래?”
“웁! 읍!”
세실리가 의도를 듬뿍 담아 상체를 아래로 숙인다. 방심하고 있던지라 나는 두 개의 거대한 산봉우리에 깔려 바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녀의 팔을 탁- 탁- 두드렸다. 다급한 내 반응에 그녀는 야릇한 비음을 흘리더니 숙였던 상체를 들어올렸다.
“푸하!”
“아이작이 원한다면 더 해줄 수도 있어. 대신…”
내가 숨을 고르는 동안 그녀는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은밀하게 손을 서서히 아래로 내리더니 복부까지 도달했다.
마침내 그 손이 복부 밑의 엄한 부분으로 내려가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챘다.
시야를 가리는 가슴 때문에 세실리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실망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다.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는 참아줘.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마법으로 몸을 숨기면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세실리는 다른 의미의 교감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양하고 싶다. 기껏 모라에게서 신성력을 얻었는데 괜히 낭비할 수 없었으니.
나는 세실리의 무릎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녀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올린 채 불만을 표시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인간 여성이었다면 마음을 달래주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세실리는 마족이다.
마족에게 있어서 특효약인 방법이 하나 있다.
스윽-
“…흐응.”
그건 바로 뿔 쓰다듬어주기.
세실리는 내가 손을 뻗어 뿔을 쓰다듬어주자 곧바로 표정이 풀어졌다. 이어서 얼굴을 내 가슴에 기대기까지.
마치 고양이가 응석을 부리는 듯한 모양새라 나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뿔을 만져줬다.
오래 전에 설명해서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만 뿔에는 감각이 없다. 부러져도 그냥 부러졌다는 인식만 할 뿐이지 고통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참고로 부러진 뿔은 하루만에 다시 자라게 된다.
그러나 마족에게 ‘뿔’은 악마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그런 뿔을 사랑스레 쓰다듬어준다는 건 당신이 악마가 되어도 열렬히 사랑해주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아온 마족에게만 생길 수 있는 로맨틱한 문화다.
‘밤에는 뭐…’
그런 아름다운 문화가 담겨있는 뿔을 ‘손잡이’로 사용했다니 무언가 오묘하다. 세실리에게 들으니 원래 그런 용도로도 사용된다나 뭐라나.
나는 내 가슴에 기대어 고양이처럼 고롱고롱거리는 세실리를 내려다 보았다. 눈을 감으며 뿔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만끽하고 있다.
감각은 없다지만 특유의 느낌 자체는 있을테니 눈을 감고 집중하는 것이다.
“하아… 아이작 냄새… 정말 좋아…”
“… …”
“평생 이렇게 있고 싶어. 이대로 쭈욱.”
체취를 맡으며 더욱 진해지는 세실리의 목소리. 뿔을 힐끔 바라보니 검은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면의 악이 들끓는 시기인 악주기와 성욕은 별개인 게 확실하다. 나는 사단이 나기 전에 내 품에서 그녀의 머리를 떨어뜨렸다.
세실리는 내가 밀어내도 촉촉하게 젖어있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좀 더 응석을 부리면 안 되냐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이렇게 보니 색다르네.’
마리는 특유의 활발한 성격으로 내 마음을 돋군다면, 세실리의 이런 면모는 차분히 가라앉혔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나듯이, 그 상태에서 약간의 자극만 전해져도 마음에 큰 울림을 선물했다.
“우웅…”
“하아…”
나는 검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애원하는 세실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애원하는데 그 어느 남자가 거부할 수 있겠나.
이에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안아줄까?”
“응!”
대답과 동시에 내 품으로 돌진하는 세실리.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나를 꽉 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빈다.
방금 전 뿔을 만져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등을 아래로 천천히 쓸어주면서 체온을 느꼈다.
‘이렇게나 날 좋아하는데 내가 죽으면…’
문득 행복할 수 없는 그녀의 미래가 떠올랐다. 나는 단명종인 인간이고, 그녀는 장수족인 마족이다.
수명의 한계로 인해 내가 늙어 죽어도 그녀는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것이다. 과연 그녀가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마족이 악마로 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마족은 분노를 다스리는 건 도가 텄지만 슬픔은 아니다.
‘…그리워 할만한 추억을 잔뜩 만들어줘야겠네.’
내가 그녀에게도 말한 것처럼 후회보다는 그리운 추억을 잔뜩 만들어 놓아야 그녀도 덜 슬퍼하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세실리의 가녀린 몸을 만끽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지만, 얄궂게도 시간은 멈출 수 없는 법.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를 껴안은 채 안정을 취하다가 얼굴을 마주했다.
세실리는 새색시처럼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
“응. 누나.”
“늘 말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전부 네 거야.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도 돼. 알겠지?”
세실리가 내 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한 말을 꺼냈다. 빈말이 아니라 그녀는 언제든지 나에게 전부를 바칠 각오가 돼 있다.
처음에는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이기에 그런 줄만 알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위해 헌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리와는 다른 의미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여인. 나는 싱긋 웃어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받기만 해서는 좀 미안한데? 누나는 원하는 거 없어?”
“정실 부인?”
“그건 좀…”
세실리에게 흠뻑 빠져들었다지만 마리를 향한 사랑이 식은 건 절대 아니다. 하물며 마리는 지금쯤 독수공방을 하고 있을테니 여러모로 미안한 감정이 들고 있다.
내가 말을 흐리며 쓴웃음을 짓자 세실리가 키득키득거렸다. 뒤이어 특유의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장난이야. 정실 자리는 마리에게 양보해야지. 내가 너와 이어질 수 있던 것도 마리가 양보해준 거니까.”
“고마워. 양보해줘서.”
“고맙기는 무슨. 내가 더 고마운 걸. 쪽.”
세실리는 그리 말하면서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애교에 얕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가끔 궁금하긴 해. 너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 라고.”
“글쎄. 솔직히 달라진 건 없었을 거야. 마리는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기 전부터 나를 좋아했거든.”
“그 말이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일찍 만났으면 좋았다는 거야. 차별 없는 시선과 배려심 깊은 그 마음은 옛날부터 그대로였을 테니까. 아, 물론 어릴 때부터 만나는 게 아니라 3년 정도만 더 일찍.”
마리가 들었다면 대경실색하지 않았을까. 반쯤 장난일 테지만 호시탐탐 마리를 밀어내고 내 옆자리를 노리는 것 같다.
물론 세실리의 성격상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밀어낼 거라고 다짐했으면 진작에 밀어내고도 남았을테니.
서로에게 한 번씩 양보했다는 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조율해야 된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런 말은 마리 앞에서는 가급적이면 하지 마. 원래 의심이라는 게 한 번 피어오르면 끝도 없이 자라는 편이거든.”
“나도 눈치라는 게 있지. 그래도 경각심은 줘야하지 않을까? 아이작을 향한 애정이 식으면 내가 홱- 가져가겠다고. 일부러 질투심을 끌어올리는 거야.”
“음…”
질투하는 마리의 모습이라… 상상만 해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꽉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과연 나를 향한 마리의 애정이 식을지 의문이 든다만 권태기가 왜 있겠나. 세실리는 그런 권태기를 방지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줄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나저나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바람둥이 같은 마인드다.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어물쩍거리다간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차차 알아봐야지. 당장 애정이 식지는 않을 테니까.”
“참고로 아이작을 향한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거라 맹세할 수 있어. 아이작이 없으면 삶이 무료할 것 같아.”
“벌써부터 그런 마음을 느끼면 나중에 어쩌려고?”
“아이작의 자식을 보며 그 마음을 달래야지. 아니면 나와 아이작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보거나?”
“세실리 누나는 계획이 다 있구나?”
“후훗.”
내 감탄 섞인 칭찬에 세실리가 부끄러움을 담아 웃었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더니 욕심을 듬뿍 담으며 물었다.
“혹시 다음 악주기 때는 피임 없이…”
“안 돼.”
“칫.”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세실리는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삽화는? 삽화도 안 돼? 원래 넣기로 했잖아.”
“지금 상황을 보면 곤란하지. 괜히 누나에게도 피해가 갈 수도 있잖아. 굳이 누나가 아니라 누나랑 닮은 마족이 있으면 어떡하려고?”
모두 알고 있겠지만 제논 일대기 속 색욕, 릴리스는 세실리를 모델로 삼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림 실력도 늘릴 겸 겸사겸사 삽화로 넣을 계획이었으나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제논 일대기가 반쯤 예언서 취급을 받는 이상 삽화를 넣었다간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미래에 칠죄종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라며 박해를 가할 수도 있다.
너무 나간 생각이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마녀 사냥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알았어. 그럼 삽화는 아예 넣지 않을거야?”
“아마도? 그래도 완결쯤에는 오해가 다 풀리겠지. 아마 그때쯤 넣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릴리스뿐만 아니라 다른 칠죄종도 마찬가지고.”
“완결은 언제쯤 되는거야? 스토리를 보면 이제야 본격적인 도입부인 것 같은데.”
“많이 남았지. 최소한 반년은 걸릴 걸?”
“반년밖에 안 걸려?”
“아.”
이 여자 마족이었지. 당장 1년조차 짧게 느껴지는 마족이니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어느새 반년이 흘러가 있을 것이다.
“일단은 그래. 중간에 큰 사고만 없으면 반년 정도 걸릴거야. 추천 학생으로 임명됐으니 시간도 많거든.”
“사고라면… 무슨 사고?”
“대충 뭐…”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고민하다가 연재가 지연될만한 사고에 대해 꺼냈다.
“내 손이 크게 다친다던가? 다른 데가 멀쩡해도 손이 다치면 연재가 지연될 수밖에 없지.”
“손이라…”
세실리는 말을 흐렸다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결의가 담긴 붉은색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아이작의 손을 다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가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야.”
“에이. 그정도까지는…”
내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세실리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는 내 오른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포개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 손으로 우리 마족을 구원했는데 응당 그래야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할 거야.”
“… …”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친다면 내가 더 아플 것 같아. 비록 항상 곁에서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복수는 철저하게 해줄게.”
다른 누구도 아닌 다음 대 헬리움의 왕으로 예정돼 있는 세실리가 저 말을 하니 믿음이 간다. 손짓 몇 번으로 산을 날려버릴 수 있다고 했으니 복수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일 터.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그녀의 마음가짐이다. 저런 말을 하는데 그 누가 반하지 않을까.
나는 결의로 가득 채워져 있는 세실리의 붉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세실리도 내가 미소를 짓자 따라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누나. 누나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는 것 같아.”
“고맙기는. 정말 고마우면 바지나 벗어.”
“갑자기 또?”
“괴롭혀지고 싶단 말이야. 결계까지 쳤으니 안심해도 돼.”
“에휴. 알았어. 알았어.”
세실리의 마음 속 불은 밤이 아니라 낮에도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 * *
빛 한 점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 속.
그 공간 속에서 두 명의 남자가 동그란 테이블을 기준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암흑이 지천에 깔려있어서 제대로 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익숙하다는 모양새로 말을 주고 받았다.
“여기 오늘 편지. 사장이 집에서 부친 걸 보면 꽤 중요한 모양이야.”
“흠.”
남자가 테이블 위에 단순한 편지지를 올리자 맞은편의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으나 황금빛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빛을 뿜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맹수의 눈이 빛나는 것처럼, 그의 눈은 강렬한 빛을 내보이고 있다.
이에 금안의 남자가 편지를 전달된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크흠. 큼.”
갑작스레 헛기침을 하는 전달자. 금안의 남자는 편지를 잡다 말고 몸을 흠칫했다.
이어서 스르르 고개를 들어올려 전달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전달자는 금안의 남자와 시선을 잠시 교환하다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툭툭- 툭-
“그러고 보니 요즘 생활은 괜찮나? 딸이 높은 티어의 기사단에 입단했다며.”
전달자는 버릇인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근황에 대해 물었다.
그것을 체크한 금안의 남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아직 소식은 없다네. 그러는 자네는? 자네 아들은 어떻지?”
“지금쯤 고생하고 있겠지. 안타깝게도 재능이 별로여서 말이야.”
툭- 툭- 툭- 툭툭-
대답을 하면서도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멈추었다.
금안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전달자가 올린 편지를 품 속에 고이 넣었다. 이제 슬슬 갈 때였다.
“아무튼 늘 고맙네. 귀찮을텐데 이런 수고를 해주다니.”
“고맙긴 뭘. 자네에게 빚진 게 얼마인데.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성격 참 특이하군. 난 이만 가보겠네.”
“몸 조심하게나.”
금안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전달자 또한 벌떡 일어났다.
“당분간 이 일을 못할 수도 있겠군.”
그리 중얼거린 남자는 머리를 벅- 벅- 긁적였다.
한편 그에게서 편지를 전달받은 금안의 남자는…
‘엘프가 미행하고 있다라… 보아하니 좋은 일이 아니군.’
전달자가 말이 아닌 손가락으로 보냈던 신호를 유추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이작이 저택에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다면 큰일이 났겠군. 일단 내 선에서 처리할 수밖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자가 하이에나들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이작? 그리고 세실리 공주님? 갑자기 저택에는 왜…”
“헬리움에만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버지 얼굴도 뵐 겸 같이 왔죠.”
“안녕하세요. 호크 남작. 아, 이제는 시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