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79
■ 178화. 함정 (2) □ ᓚᘏᗢ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방심’을 하게 되면 골로 간다. 중요한 순간에서는 더욱.
그건 엘프에게도 통하는 상식이다. 특히 엘프, 그것도 구세대에 속한 세대는 타종족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강하다.
다만 인간이 엘프에 비해 대체적으로 약한 편에 속하고, 더 나아가 엘프는 그럴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오만한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는 생각이다. 인간 중에서도 엘프 전사장과 비등한 실력을 가진 괴물이 등장하고, 태생적으로도 엘프와 비견되는 마족도 있다.
중요한 임무를 진행하기 위해서 변수를 하나 하나 고려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물론 그 변수에서 전사장급 인간과 그 이상의 마족을 포함시키는 건 생각치도 못 했겠지만.
“이 3명이 끝이에요?”
“그래. 출판사에서도 3명이라 했고, 그 다크 엘프 처자도 이 3명이 끝이라고 했으니.”
“어머니는 지금 괜찮죠?”
“중간에 깼지만 다시 자고 있을 게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뒤에 앞을 바라봤다. 책상 앞에는 3명의 엘프 남녀가 밧줄로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아까 보았을 때는 엘프답게 수려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 머리카락 색이 다른 것도 신기하고.
허나 이들은 우리 저택에 침입하다 못해 내가 제논임을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납치 계획까지 세운 악질이다. 미네르바 제국의 법률, 그리고 시대상을 고려하면 즉결 처형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런데 아이작. 꼭 네가 제논이라는 걸 드러냈어야 했어?”
엘프 침입범 3명 중 2명을 손쉽게 제압했던 세실리가 의문을 담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들이 실시간으로 납치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이 그녀다. 듣자하니 텔레파시를 엿들었다고.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앞의 엘프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차피 내가 제논이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챘을 거야. 방심을 했을 뿐이지 멍청한 건 아닐 테니까. 함정을 파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얼추 예상했을 걸?”
“그래도 너무 위험한데… 이 사람들이 네가 제논이라는 사실을 누설하면 어떡하려고?”
“그때는 진짜로 귓속의 폭탄을 터뜨려야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맹약’이 있잖아?”
“아.”
주종관계를 설립할 때나 쓰이는 마법, ‘맹약’에 대해 언급하자 세실리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알다시피 맹약은 레인의 처벌 당시 아르웬과 세실리가 맺은 적이 있다.
맹약은 계약서에 쓰여있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을’에게 큰 페널티가 전달될 뿐더러 ‘갑’도 눈치챈다. 이로 인해 숨기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노예제가 존재하여 인간 사회에서도 자주 사용되었으나 시대가 점점 지나면서 사라졌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며 노예들이 단체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적도 있고 이판사판으로 봉기를 일으킨 사건도 있다.
맹약은, 그만큼 효력이 뛰어나며 쓸데없는 행동을 막게 해주는 효력을 발휘한다.
“헛점을 이용할 수 없도록 잘 이용해야겠지. 예를 들자면 제논의 정체에 대해 발설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이야. 맹약을 깨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처음에는 심장에 큰 고통이 따르고, 억지로 깨려고 들면 작동이 정지돼. 응급처치를 한다면 살릴 수 있겠지만 발설할 생각은 절대 못 하겠지.”
“그럼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글이나 암호로 전달하는 건?”
“그것도 걱정 마. 너의 정체와 연관된 것들은 전부 맹약에 어긋나게 할 수 있어.”
세실리가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안심이 된다. 설령 맹약이 아니더라도 시리스를 붙여서 허튼 짓을 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 이건 아르웬과 따로 협의를 봐야겠지.
어쨌거나 고대하던 물고기까지 낚아올렸겠다, 남은 건 사후 처리다. 까고 말해 이 엘프들을 소리없이 처리해도 큰 문제는 없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그저 추적대가 당했구나, 라며 생각하고 또다른 추적대를 보낼 테니까. 근원을 처치하기 전까지 이 싸움은 어느 한 쪽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알았어. 그럼 남은 건… 이 사람들은 언제쯤 정신 차리는 거야?”
“지금 깨울까?”
“응.”
따악-
세실리는 내 부탁을 듣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으으음…”
“으음…”
머지않아 포박된 엘프들이 침음성을 흘리며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침실은 촛불 몇 개로 의지하고 있어서 시력을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밧줄 자체는 평범한 밧줄이었으나 세실리가 마법으로 마나를 못 쓰게 만들어 반항할 여지도 제거해놓은 상태다.
“으… 머리가… 어?”
“무, 뭐야? 내가 왜…”
“… …”
포박되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당황한 두 엘프 남녀와 달리 중앙의 엘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라는 표정으로 밧줄로 포박된 상황을 확인했을 뿐, 반응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자면 다른 두 엘프와 달리 홀로 행동했었다고. 아마 저 금발의 엘프가 리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이게 대체… 나는 분명…”
“너, 너희들은 또 뭐야?”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우리를 발견했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바둥거리던 여자 또한 고개를 들어 우리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탁한 금발의 남자까지 우리에게 시선을 옮겼을 때, 나는 그들의 앞에 나서서 쪼그려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내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흠칫거렸다.
“다, 당장 밧줄을 풀어라, 인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뻔뻔한 건지 아니면 엘프답게 오만한 건지 갈색 머리의 여자 엘프가 다급히 강요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뒤에서 아버지가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통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한 엘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피식거리며 팩트를 갈겼다.
“무슨 짓이긴. 우리 저택에 무단 침입한 도둑놈들을 잡은 거지.”
“… …”
“그리고 대충 뭘 찾으러 왔는지 알 것 같고.”
“…네가 제논인가?”
엘프 여자가 아닌 리더로 추정되는 금발의 엘프가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자 양옆의 부하들도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텔레파시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마나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다.
결국 부하 중 한 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으로 사실을 전달했다.
“이, 이 남자가 제논이 분명합니다. 책상 위에 초고와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렇군.”
부하와 달리 리더는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다. 텔레파시도 불능일텐데 무슨 꿍꿍이라도 꾸미는 건지 모르겠다.
세실리와 아버지도 그 점을 눈치챘는지 슬금슬금 움직였다. 가장 먼저 세실리는 내 옆에 섰고, 아버지는 엘프들의 뒤에 서셨다.
허튼 수작이라도 부리면 곧바로 제지하겠다는 표현이다. 정말이지 든든하다 못해 왠지 모를 자신감마저 차오른다.
그사이 추적대의 리더는 내 곁에 다가온 세실리를 보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설마 헬리움의 공주?”
“절 아세요?”
“모를 리가. 연설 때 멀리서 본 적이 있지.”
아르웬의 연설 당시 세실리도 함께 참석했었다. 그때 입국 심사대에서 말 같지도 않은 실랑이를 하다가 엘프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고.
엘프 리더는 세실리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발언을 꺼냈다.
“역시 제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군. 그러니 이런 짓까지 할 수 있던 거겠지.”
“흐응. 글쎄요. 더러운 짓을 한 엘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신지?”
“… …”
괜히 신경을 건드렸다가 몇 배로 돌려받았다. 그러게 적반하장도 정도껏 해야지.
“아무튼, 당신들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싫으시다면 안 알려주셔도 돼요.”
“…칼라스.”
“나머지 둘은?”
“마엘.”
“레나.”
포박되어도 자존심만큼은 굽히기 싫었는지 단답형으로 대답한 엘프들.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그러나 조만간 저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천천히 빌드업을 쌓으면 그만이고. 급한 건 저들이지, 내가 아니니까.
저들의 안위는 지금 내 손아귀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선 이 질문부터 할게요. 도대체 왜 저를 찾고 싶어서 안달이에요? 제가 당신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너의 지식은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회유를 하려고 했지.”
“회유?”
“우리들을 도와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었다.”
회유는 지랄. 내 책을 검열하겠다고 선포하던 새끼들이 회유를 입에 담으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실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칼라스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런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를 검열하려고 했어요? 그 짓거리까지 했는데 회유를 입에 담다니 정말로 간사하네요.”
“검열은 우리가 한 게 아니다. 여왕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
이제는 하다못해 거짓말까지 하는 칼라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엘프가 더러운 짓을 하지 않다는 소리. 그거 다 개소리라는 것을 칼라스를 통해 알게 됐다.
나는 헛바람을 내뱉었다가 싸늘한 목소리로 칼라스에게 말했다.
“여왕은 무슨. 당신들 원로원한테 명령을 받아서 온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개소리군. 우리는 여왕에게…”
“피렌 게리트 스톰워커.”
“…!”
원로원의 수장이자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엘프의 이름을 입에 담자 칼라스의 눈에 크게 떠졌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냐는 표정이다.
다른 엘프들의 표정도 그와 비슷했다. 마엘은 아예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고 레나는 자기가 들은 게 진짜인지 분간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내가 피렌을 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생각이 복잡해질 것이다. 처음부터 내 손바닥 위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던 간에 나는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이끌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 늙은 엘프가 당신들에게 명령을 내렸잖아. 제논을 찾으라고. 아니야?”
“그, 그걸 어떻게… 아니, 당신은 대체…”
“내가 알려줄 이유는 없지. 아무튼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나에게 들킨 순간부터 너희는 버려진 개나 다름없다는 걸. 이대로 돌아간다면 소리없이 사라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귀가 잘리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귀가 잘리는 형벌은 너희 엘프들에게 있어서 죽는 것보다 더한 형벌이라며?”
아르웬에게 피렌 대의원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다. 원로원의 수장으로서 권력이 어마어마하게 막강하며 그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는 것까지.
종족 전쟁 이후 원로원이 존속마저 위태로울 때 억지로 회생시킨 이가 바로 피렌이다. 그당시 피렌은 원로원 중에서도 각광받는 인재였으며 이제 막 하늘로 날아오를 시기에 종족 전쟁이 발발했다.
당연히 피렌으로서는 원로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싫었을 터. 한 번 맛 본 권력의 맛은 마약보다 끊기가 힘들다.
그리고 현재 피렌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아르웬을 시시각각 견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온갖 암중모략까지 펼치는 중이다.
이 엘프들이 맨 처음 사인본을 확인하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온 이유도, 아르웬이 깜빡하고 침실에 놓았던 연설물은 특정 경로로 입수했기 때문이다. 아르웬도 뒤늦게 눈치채고 소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된 상황이었고.
엘프가 더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는 건 전쟁에서나 통용되는 말일 뿐, 권력 앞에서는 인간이든 엘프든 다 똑같다.
“그러니까 내가 제안할게. 설마 여기서 충성심이니 뭐니 하면서 원로원에 붙지는 않겠지? 뭐가 되었든 간에 목숨이 제일 중요한 거야. 너희 엘프들은 특히 귀가 더 중요할 거고.”
“고, 고작 그런 협박으로 우리를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고작 인간 따위가!”
꼴에 자존심이 남아있는지 레나라 소개했던 엘프 여인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두려움에 먹혔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표정으로 쳐다봤다. 레나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점점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여기서 바로 귀 잘라줄까? 귀가 잘린 상태로 알븐하임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히끅.”
내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협박하자 딸꾹질을 하는 레나. 분위기가 분위기이다 보니 이런 사소한(?) 협박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가해지는 압박감은 충분하다.
마나도 사용할 수 없고 앞뒤로 두 마리의 사자가 아가리를 벌린 채 떡하니 기다리고 있다. 자칫하다간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다.
만약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 여기는 수인이었다면 차라리 죽여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들은 엘프. 명예고 나발이고 목숨이 먼저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너희들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어. 세실리 누나도 있으니 마법으로 수작조차 못 부리겠지. 몸까지 묶여있는 너희는 이도저도 아닌 신세라고. 알겠어?”
“…우릴 이용할 생각이라면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원로원도 우리를 곱게 보내주진 않겠지. 차라리 여기서 처리하는 게 깔끔할텐데?”
“그러면 낌새를 느낀 원로원 쪽에서 인원을 더 보낼 수도 있어. 그냥 뿌리까지 뽑는 편이 나아.”
“하. 그게 가능하다고 보나? 우리를 미끼로 써도 아무런 이득도 없을 거다.”
“글쎄. 난 다르게 생각하는데?”
나는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칼라스에게 슬쩍 오른손을 보여줬다. 그러자 칼라스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의 말대로 원로원은 수백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치 기구다. 종족 전쟁에서 희대의 트롤링을 벌여도 바퀴벌레마냥 끝까지 존속을 유지하고 있다.
허나 그 반대급부로 종족 전쟁을 기점으로 원로원에 반대하는 세력이 늘어난 상황이다. 하물며 연설 이후로 아르웬을 향한 지지도 대폭 늘어났고.
여기서 도화선에 불만 붙여주면 원로원은 손도 쓰지 못 하고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이에 빙긋 웃으며 칼라스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엘프들 때문에 오른손이 다쳐서 당분간 연재가 불가능하다고. 나를 성자로 추대하려고 안달이 난 세이비어는 물론이고 헬리움까지 합세하겠지. 인간의 나라도 마찬가지고.”
“… …”
“제 아무리 알븐하임이어도 몇 달조차 버티지 못 할 거야. 교역로를 끊어버리는 것만 해도 막대한 손해가 발생하겠지. 그 전에 전쟁이 터질 테고. 이걸 막으려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내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칼라스의 안색은 굳어지다 못해 핼쑥해지기 시작했다. 원로원에서 어떤 대처를 할지 모르지만 100% 확률로 이들을 토사구팽할 것이다.
분명히 독자적인 행동이라며, 본인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겠지. 그야말로 이들 입장에서는 진퇴양난이다.
이렇게 하면 귀가 잘리고, 저렇게 하면 목숨이 날아간다. 신에게 간청해도 죄가 죄인만큼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신들에게 부탁해도 소용없을 거야. 신이 직접 경고했는데도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오히려 천벌을 내리겠지.”
“… …”
“그래서 어떡할래? 나를 도와줘서 원로원을 박멸시킬래, 아니면 그냥 소리없이 사라질래? 사실 너희들이 없어도 큰 상관은 없어. 어차피 원로원 쪽에서 또다시 나를 찾게 될테니까.”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전부 파악했겠지. 남은 건 선택이다.
우리와 협조하여 이런 일을 저지른 원로원을 엿먹일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사라질 것인지.
가급적 전자를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카, 칼라스 님…!”
“요, 요구를 받아들이십시오! 저희가 살 길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마엘과 레나가 다급함이 깃든 눈빛으로 칼라스에게 애원했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고 해도 이렇게 구걸하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사람이다.
명예와 긍지가 강하다고 해도 목숨이 저당 잡힌 상황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괜히 희생을 숭고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칼라스는 부하들의 애원을 듣고 입을 달싹거리다가 나와 똑바로 마주쳤다. 푸른색 눈동자에 나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추어졌다.
“그럼… 우리가 얻는 건?”
“흠?”
“우리가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허허.”
끝까지 뻔뻔한 거 봐라.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아버지까지 실소를 흘리셨다.
나 또한 고개를 떨구며 같잖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냥 귀를 자르고 알븐하임으로 반송하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차오른다.
그러나 이 엘프들은 사건이 모두 종결될 때까지 이용해야 된다. 사실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떨구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칼라스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으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 것이, 분명 이득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이들에게 좋은 점은 있다.
“그래. 있긴 있지. 너희에게도 아주 좋은 거야.”
“그게 뭐지?”
기대를 품으며 묻는 칼라스에게.
“살려는 드릴게.”
“… …”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안 그래? 양심은 어디에 팔아먹었어?”
나는 친절하게 선고를 내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