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88
■ 187화. 2학년 (1) □ ᓚᘏᗢ
모든 사건이 정리되자 시간은 전처럼 빠르게, 그리고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흘러갔다. 다만 아르웬이 발언한 ‘미래를 약속한 사람’으로 인해 조금 시끄러워지긴 했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라는 건 약혼자 즉, 나이대가 20대 정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묻혔다.
만약 아르웬이 인간이었다면 모를까, 그녀는 장수종으로 유명한 엘프다. 몇 십년 정도를 ‘잠깐’이라 치부하는 종족.
더군다나 오래 전에 만났다는 부가 설명까지 했으니 나이대를 추측하는 건 다시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남은 건 헬리움으로 돌아가 세실리와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 뿐.
마리도 아카데미 개학을 위해 저택으로 복귀했다. 도중에 세실리가 헬리움으로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다시 한 번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했다.
욕심은 나지만 훗날 정식적으로 초대를 받을 때 가겠다고. 나를 향한 독점욕은 있으나 은근히 배려심이 넘치는 그녀다웠다.
그리하여 남은 시간동안 헬리움에서 세실리와의 오붓한 데이트를 하면서 다음 권을 위한 집필을 하는 사이, 아카데미 개학 하루 전 날이 다가왔다.
세실리는 아카데미에서 만나자며 나를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나 또한 마지막으로 키스를 해주며 애정을 표시했다.
아카데미로 향하기 전 원한다면 직접 텔레포트로 데려다 줄 수 있다고 했으나 예의상 거절했다. 이번에는 아델리아랑 같이 아카데미로 갈 계획이다.
“어때? 괜찮아?”
그리고 다시 돌아와 현재. 나는 앞으로 호위기사가 될 아델리아와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단련으로 가꾸어진 각선미를 온전히 드러내는 가죽 바지와 흰색 셔츠. 그 위에 걸친 조끼까지.
셔츠의 소매 부분도 살짝 걷어올려 자유로운 모험가 같은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 조교생 시절 대충 아무거나 집어 입었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응. 엄청 잘 어울려. 아델 누나는 몸매가 좋아서 뭘 입든 간에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래? 칭찬 고마워. 내 몸매가 좋긴 하지.”
아델리아는 내 칭찬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우쭐거렸다. 저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여지껏 많이 보아서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그녀는 이제부터 나의 호위기사로 활동할테니 이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을 필요가 있다. 철제 갑옷은 불편한데다가 아카데미 내에서 사용 불가다.
단, 진검은 사용할 수 있었으나 내 목숨이 위협받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 쓸 일은 없다.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물론. 수업을 제외하면 항상 곁에 있어야 되며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따로 다닐 수 있다. 단, 따로 다닐 때는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그 외에는 호위기사 전용 숙소에서 머물러야 된다.”
“잘 알고 있네.”
“내가 너보다 아카데미를 오래 다녔어. 이정도야 쉽지.”
호위기사는 필수가 아니라 귀족가에서 원한다면 대동시킬 수 있다. 리나와 마리에게 호위기사가 없는 걸 보면 선택이라 걸 알 수 있다.
아카데미는 치안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유명하고 2학년까지는 미친듯이 공부만 하는 편이다. 딴 길로 샐 염려는 거의 없다.
이 탓에 호위기사를 대동하는 인원 또한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라 눈길만 주고 끝날 것이다.
“우리 귀염둥이는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았다고 했지? 그럼 바로 조교가 되는 거야?”
“응.”
아델리아의 말마따나 2학년이지만 추천 학생으로 임명 받아 조교로서 엘레나 교수를 보좌할 것이다.
이제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무학생도 2학년부터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듣는다더라. 무학생들에게 1학년은 적응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또한 무학생은 기사와 마법사로 분류되어 듣는 수업은 다르지만 역사만큼은 공통으로 듣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 문학생과 배우는 게 달라서 각 시간별로 나누어 듣는 편이다. 그러니 나는 교수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조교 역할을 하면 된다.
“무학 조교는 몰라도 문학 조교는 나도 잘 모르겠네.”
“별 거 없어. 그냥 교수의 잡일을 처리하거나 토론을 도와주면 끝이야.”
“너 말고 다른 조교는 본 적이 있어?”
“음…”
그러고 보니 엘레나 교수에게 신디 같은 조수는 있어도 조교는 본 적이 없다. 다른 역사 교수들은 두 세명 정도 있는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아무리 역사가 인기 없는 종목이어도 한 두명 쯤은 있을 법한데 여태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나는 곰곰이 유추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혼자 지내도 상관없는 것이, 역사라는 과목을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도 있다.
“아니. 없어. 교수님의 연구실에 자주 방문하기도 했는데 한 번도 못 만났네.”
“그래? 흐음… 뭐, 상관없겠지. 머리는 그대로 하고 갈 거야?”
헬리움에서 지내는 동안 모라 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신성력을 듬뿍 넣어주셨다. 덕분에 날개까지 자랐던 머리가 허리까지 쭈욱 내려와서 기겁했다.
아무리 그래도 허리까지는 아니지 않냐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씨알도 안 먹히더라. 잘라도 다시 자라는 건 덤이다.
덕분에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씻고 나서 세실리와 다정하게 서로의 머리를 빗어줬다. 나름 신선한 경험이라 마냥 나쁘진 않았다.
관리하기는 더럽게 귀찮았지만. 앞으로 나 혼자 이 빌어먹을 머리카락을 관리해야 된다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아마도. 잘라도 다시 자라니까.”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니지? 신전에는 갔어?”
사정을 잘 모르는 아델리아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모라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이실직고했다.
“그… 사실 신전에 갔다 오고 나서부터 이랬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헬리움에서 지낼 때 잠깐 신전을 갔다 왔거든. 그 후로부터 이렇게 된 거야.”
내가 그리 말하자 아델리아의 선명한 하늘빛 눈동자에 아까보다 강한 의문이 자리잡았다.
하기야 신전에 갔다 왔는데 머리카락이 길어졌다는 건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보통 신전은 성직자나 환자들이 가는 곳이니.
허나 내가 루미너스와 모라의 신전을 방문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둘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것. 특히 모라는 장난꾸러기에 텐션이 루미너스보다 높았다.
“음… 그러고 보니 헬리움은 루미너스님이 아니라 모라님을 신봉하던가?”
“응.”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모라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하나 봐.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거든. 마음에 들어하는 신도들에게 몇몇 특징을 부여하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 머리가 길어진다던가, 키가 커진다던가, 아니면 꽃향기가 난다던가.”
“루미너스 님도 그래?”
모라는 내가 그 당사자이니 그렇다 쳐도 루미너스까지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응. 귀염둥이 너는 역사를 좋아하니까 루미너스 님이 무슨 꽃을 좋아하시는지 알고 있지?”
“라일락 꽃을 좋아하시잖아.”
“맞아. 만약 신도에게 라일락 꽃 냄새가 나면 그 신도는 루미너스님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는 의미야. 이때문에 공물로 라일락 꽃을 바치는 경우가 많고. 이때문에 루미너스 신도들은 라일락 꽃 향수를 많이 쓰는 편이지.”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흠칫하고 서둘러 내 팔에 코를 갖다 대었다. 루미너스가 라일락 꽃을 좋아한다면, 모라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그러니 나에게 복숭아 향기가 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실리에게서도 복숭아 향기가 나는 마당에 나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땀도 나지 않은 상황이라 나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기는 힘들었다. 세실리와 마리는 그냥 내 냄새가 좋다고 했지 정확히 무슨 냄새인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킁. 킁킁.”
“…뭐하는 거야?”
내가 몸 구석구석 코를 박고 냄새를 맡자 아델리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냥 내 몸에 복숭아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서. 모라님은 복숭아를 좋아하시잖아. 머리도 길어진 마당에 체향도 달라지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내 말에 아델리아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하늘빛 눈동자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뭔가 말하고 싶은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뒤이어 그녀는 한동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다짐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자기가 직접 맡는다거나 그런…
“마, 마리 공녀님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욕심이 들었으나 선을 철저하게 지켰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고마워.”
“고, 고맙기는. 간단한… 거잖아.”
애써 웃고 있지만 씁쓸함만큼은 감출 수 없었는지 입매가 흐물거렸다. 어쩌다 보니 유혹하는 모양새가 되었는지라 나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기 위한 주제가 필요하다. 때마침 적절한 것도 있으니 자연스레 넘어가면 될 것이다.
“아참. 이거 받아.”
“이거는…”
“호출용 마석. 웬만해서는 내가 직접 누나의 숙소로 갈테지만 일단 받는 편이 나을 같아서.”
나는 아델리아에게 어린이 주먹만한 푸른색 돌덩어리를 건네줬다. 만약 내가 필요하다면 저 마석에 푸른빛이 일렁일 것이다.
아델리아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호출용 마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꽉 말아쥐었다. 이어서 다른 손으로 소중히 감싸며 가슴에 갖다 대기까지.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아마 그녀는 지금도 내가 준 손수건을 간직하고 있을 터.
본인은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를 향한 순수한 마음이 은연 중에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아델리아는, 지독한 외사랑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호위기사님.”
어느새 파란만장했던 1학년이 지나가고.
“…응.”
이전보다 더욱 파란만장해질 2학년이 시작되었다.
* * *
루미너스가 아이작을 칭송하여 신성교국, 세이비어가 그를 성자로 추대받기 시작한 사건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칠죄종’의 개념을 전파하여 신학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무려 루미너스가 직접 인정할 정도로 아이작이 이룩한 위업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 아무리 우연이라 한들 공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에 세이비어는 아이작을 찾기 위해 추기경까지 순례길에 올릴 정도로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추기경의 이름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태생적으로 강력한 신성력을 갖고 태어난 덕에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으며 일신의 무력 또한 뛰어나 대심문관을 겸하는 중이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20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그녀는…
콰직!!
도시 지하에 숨어있던 악마 숭배자의 뚝배기를 시원하게 박살내는 중이었다.
“히, 히이이익…! 괴, 괴물!”
“괴물?”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 쓴 악마 숭배자가 두려움에 떤 목소리로 말하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하인 탓에 암흑이 깔려있었으나 에메랄드빛 눈동자만큼은 밝게 빛나는 중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 둔탁한 메이스로 악마 숭배자의 머리를 깬 탓에 피가 튀겼어도 수려한 외모는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피가 튀었기에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쩌억-
머리통을 박살낸 메이스를 서서히 들어올리자 끈쩍한 피와 살점들이 뚝- 뚝- 떨어진다.
메이스를 회수한 여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악마 숭배자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괴물은 구원할 수 있다. 하지만 악마는 아니지. 악마에게는…”
“오, 오지 마! 제, 제발…!”
악마 숭배자가 애원하든 말든, 여인은 경쾌한 미소를 짓더니 메이스를 높게 치켜들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천벌 뿐.”
콰직!!
다시 한 번 메이스를 시원하게 내려치자 악마 숭배자의 머리는 수박을 으깬 것마냥 시원하게 터져나갔다.
피와 살점, 그리고 끈적한 뇌수가 얼굴에 묻었으나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 따위가 감히.”
투두둑-
여인은 그리 중얼거리며 메이스를 한 번 시원하게 털었다. 바닥에 피를 비롯한 갖가지 오물들이 흩뿌려졌다.
그녀는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사방에 널부러진 악마 숭배자들의 시체를 훑어봤다. 하나 같이 머리가 사라진 것들밖에 없었다.
일말의 자비조차 보이지 않은 잔혹함이었으나 이들은 악마 숭배자.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하려던 작자들이다.
당연히 그 희생자들은 이 근방에 있던 희생자들. 최근 실종 신고가 너무 많이 들어온 탓에 조사를 했더니 악마 숭배자가 숨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했으면 더 큰 피해를 낳았겠지.’
그녀는 악마 숭배자들이 제물을 바치던 제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제단 근처에는 희생자들의 유골들이 쌓여있다.
인신공양은 생명력을 대가로 힘을 얻는 금기 중의 금기. 제물을 바치면 그 제물은 곧바로 앙상한 뼈가 된다.
‘루미너스시여. 부디 이들에게 안식을…’
미처 구하지 못한 희생자들을 애도한 후, 여인은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것처럼 등을 돌렸다. 나머지는 후발대가 전부 정리해 줄 것이다.
이윽고 제단실 밖으로 나오자 미리 정리하고 있던 인원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중 지시를 하던 한 여자와 딱 눈이 마주쳤다.
“아, 케이트 추기경님! 모두 정리하셨나요?”
“네. 나머지는 어떻게 됐죠?”
“현재 교단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교단에서 성직자들을 파견할 거예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여인, 케이트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근 악마 숭배자들의 활동이 거세져서 손이 많이 필요했다.
그 이유를 듣자하니 이미 들킨 마당에 이판사판으로 나오는 중이라고. 제논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었으나 차라리 이게 훨씬 낫다.
희생자가 단기간에 대폭 늘어날지언정 아예 발견하지 못 하는 게 더 심각했으니. 심지어 제논 일대기 전에는 악마 숭배자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악마 숭배자는 물밑으로 암약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급 귀족을 조력자로 둔 자도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뒤를 맡기도록 할게요.”
“예. 그런데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우선 미네르바 제국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제논을 찾아야겠죠. 마음 같아서는 알븐하임으로 가고 싶지만 여왕이 바쁘니 당분간은 순례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음… 정말 찾을 수 있을까요?”
여신도는 부정적인 의사를 드러냈다. 지난번 제논이 성직자에게 도움을 받아 오른손을 치유했다지만, 정확히 콕 집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케이트처럼 순례길에 오른 성직자가 많고, 그만큼 선행을 베푸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세이비어도 그 소식에 순간 혹했지만 단서가 너무 부족하여 바로 포기했다.
이렇다 보니 세이비어도 케이트를 순례길에 올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제논을 찾는 중이다.
신도들은 루미너스에게 힌트라도 달라고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신탁은 애매하기 그지 없었다.
“루미너스 님께서도 찾으라고 그런 신탁을 내려주신 거겠죠. 신은 애매하게 말할지언정 진심과 공물을 바치면 결코 거짓된 신탁을 내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긴 해도…”
“신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저희의 의무입니다. 자매님.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케이트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루미너스를 향한 그녀의 굳센 신앙심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이에 여신도는 순간 흠칫했다가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말 한 번 잘못 잡히게 된다면 어찌될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허리를 펴세요, 자매님. 본래 신뢰가 더욱 깊어지기 위해서는 가끔씩 의심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맹목적인 광신도가 아닌, 한없이 자비로운 목소리로 여신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케이트.
문제는 그녀의 손 또한 메이스와 다를 바 없이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피가 여신도의 어깨에 묻어 새하얀 수녀복을 붉게 더럽혔다.
그걸 미리 짐작한 여신도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피는 세탁해도 잘 빠지지 않아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조언 감사드립니다. 가시기 전에, 케이트 추기경님.”
“네. 말씀하세요. 자매님.”
“추기경 님은 제논을 찾기 위해 스스로 순례길을 나섰다는데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케이트는 세이비어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순례길에 나섰다. 그것도 교황청에 직접 요청까지 했다고.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교단과 연관이 깊은 자들은 얼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을 뿐.
이에 케이트는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더니 그 이유를 입 밖으로 꺼냈다.
“자매님. 자매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제논은 이 세계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루미너스 님도 직접 감사함을 전할 정도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
“업적은 곧 신성력. 만약 그가 원한다면 교황님조차 우습게 보일 정도의 신성력을 갖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저는 그런 제논의 씨앗을 받기 위해 순례길을 오른 겁니다.”
“…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여신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 동안 케이트는 자기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따스한 미소를 지은 것과 달리, 다소 광신도적인 발언을 하나 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루미너스님에게 축복을 받아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골 소녀가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이건 축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죠. 사실상 은혜를 받은 셈입니다.”
“그, 그렇죠. 그런데…”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강한 신성력을 품은 자의 씨앗을 받을 겁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분명 저보다, 그리고 아비보다 훨씬 강한 신성력을 지니게 되겠죠. 그 아이가 성장하여 성직자가 된다면 그만큼 루미너스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이게 바로 제가 루미너스 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방식입니다.”
이쯤 되서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직급은 추기경 겸 대심문관이다.
어지간한 신앙과 신성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위치다. 그 사고방식은 광신도에 꿇리지 않았다.
여신도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문득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떠올랐다.
“그럼 제논이 여자라면?”
“상관없습니다. 저나 제논 둘 중 하나를 남자로 바꿔달라 루미너스님에게 간청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있던 일이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 …”
신탁을 애매하게 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