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92
■ 191화. 2학년 (5) □ ᓚᘏᗢ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비명을 지르지 못 할만큼 소름이 돋는 경험은 많다.
전생에서는 집에 돌아오고 불을 켰는데 바퀴벌레가 내 눈 앞으로 날아온다던가 아니면 부모님께서 내 컴퓨터를 사용한다던가 등등.
현생에서는 허당끼 넘치는 내 실수로 마리에게 증기 기관차 그림을 보여준 것. 다행히 그때는 어린애가 그린 것처럼 그려서 들키지 않았다.
뭐, 지금에 이르러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거라 큰 의미는 두지 않는다. 대신 얼굴색이 실시간으로 변한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제논 작가님?”
그리고 다시 돌아와 현재, 나는 심장이 철렁- 하는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다름 아닌 앞의 분홍 머리 여학생, 체리로 인해.
어째서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던 간에 위기라는 건 변함이 없다. 붉은 머리카락은 늘 언급했듯이 몹시 드물다.
얼마나 드무냐면 다이아몬드보다 극히 희귀하다는 광석, 미스릴보다 찾기 어렵다. 과거에 멸망한 왕가의 상징이라는 속설도 있던데 알 바는 아니고.
“제논?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와?”
“그, 글쎄요?”
당장은 얼버무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체리와 단 둘이 있으면 모를까, 옆에 엘레나도 있는데다가 복도에는 강의가 끝난 학생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엘레나의 의문에 바짝 긴장한 상태로 대답하며 체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린 채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눈을 하고 있다.
아까 편지에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했던가. 평소 그녀의 팬레터에 열심히 답장을 해주고 있었으니 우연히라도 머리카락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을 유리병에 보관하고 있다는 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이런 말 하기에는 그녀에게 미안하나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건 분명하다.
이에 침을 꿀꺽 삼킨 뒤, 아직까지 내 머리를 붙잡고 있는 체리에게 상냥히 물었다.
“체리 학생? 왜 절 보고 제논 작가님이라고 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빨간색.”
내가 그리 묻자 체리는 유리병에 담겨있는 머리카락을 가까이 보여주며 짧게 대답했다. 한 올밖에 되지 않지만 선명한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단답형이었으나 무슨 의미로 빨간색이라고 하는 건지 알 것 같다. 편지 속에 나온 머리카락과 내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서 그런 거겠지.
그러나 여기서 그녀가 눈치채지 못 한 게 하나 있다. 나는 잠깐 생각하는 척하다가 체리에게 질문했다.
“아까 편지 속에 이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했죠?”
끄덕- 끄덕-
“그럼 제 머리카락과 이 머리카락 색이 서로 똑같아서 저를 제논이라 단정 지은 건가요?”
끄덕- 끄덕-
내 연이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체리. 그러면서도 내 머리카락을 꽉 잡은 채 놓지 않고 있다.
나는 어딘가 기대를 하는 듯한 체리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잡고 있는 머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체리 학생. 체리 학생이 보는 것처럼 저는 머리가 길잖아요? 여기 있는 건 짧은 머리카락이고.”
“…아?
그렇다. 내가 체리에게 답장을 보냈을 때는 모라가 나에게 장난을 치기 전, 머리 길이가 평범했을 때다.
허나 지금은 허리까지 내려올만큼 머리가 길어진 상태. 여자들도 최소 몇 개월은 길러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를 가질 수 있는데 남자는 오죽할까.
체리도 그 점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눈을 느릿느릿 깜빡거리더니 내 머리카락의 길이와 병 속의 머리카락을 서로 비교했다.
“그리고 붉은 머리는 저 말고도 세상에 많아요. 단순히 색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제논 작가님으로 단정 짓는 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지 않을까요?”
“… …”
내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지적하자 내 머리를 붙잡았던 체리의 손아귀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또한 안 그래도 생기가 없던 눈동자가 더욱 어두워지기까지.
그 반응에 불안해지려던 찰나, 체리는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가?”
“… …”
“빨간색은… 거의 없는데…”
사람이 이토록 섬뜩할 수도 있는 건가. 나는 체리의 중얼거림을 듣고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제논이 아니었다라면 모를까, 진짜라서 쉬이 넘길 수도 없다. 어떻게든 체리를 떼어놓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이 상황을 종결시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체리 학생? 체리 학생은 다음 수업이 없는 건가요? 오리엔테이션이라도 들어야 할 텐데?”
상황을 옆에서 관망하고 있던 엘레나였다. 그녀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특유의 사무적인 어조로 체리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즉, 엄한 사람 붙들어매지 말고 수업이나 들으러 가라는 뜻. 그 말에 체리가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동안 엘레나와 시선을 교환하던 그녀는 이내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에요?”
“응?”
“사무실…”
연구실을 말하는 건가. 보아하니 의심을 거두지 않아 나를 찾아올 요령인 것 같다.
엘레나는 질문을 듣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할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일단 거절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체리라는 여학생은, 내가 거절해도 따라 올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어쩌면 다음 수업을 생략하고 뒤를 밟을 수도 있다.
나는 복잡해지는 상황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복잡한 심경으로 입을 열었다.
“…약도 그려드릴테니 그쪽으로 오세요. 역사관이라는 건물이에요.”
“감사합니다…”
체리가 감사 인사를 전한 뒤에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과 마법필을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얘는 내 머리를 언제 놓아줄 생각인 걸까.
내가 그 생각을 하면서 수첩에 약도를 그리고 있을 때, 앞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보나마나 체리겠지만 강해도 너무 강하다.
그에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자마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물고기마냥 흐리멍텅한 눈빛은 여전했으나, 왠지 모르게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으니. 시선은 정확히 내 손을 향하고 있다.
“맞잖아요…”
“무, 뭐가요?”
그리 중얼거린 그녀는 약도를 그리는 페이지가 아닌, 수첩 뒷부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걸 보고 뭔가 싶어서 수첩을 뒤집었다.
수첩 뒷면에는 내가 제논 일대기와 관련된 기록이 아닌, 단순하디 단순한 기록밖에 없었다. 가령 오늘 할 일이라던가 아니면 중요한 약속이라던가 등등.
이것만 봤을 때는 곧바로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다음에 이어진 체리의 말을 듣고 아차할 수밖에 없었다.
“글씨체…”
“… …”
“편지랑 똑같아…”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글씨체 또한 다른 법이다. 아예 작정하고 대필을 해도 수많은 노력이 뒤따른다.
그리고 나의 글씨체는 어머니에게도 칭찬받을만큼 수려하다. 손으로 소설을 쓰다보니 글씨체라도 예쁘게 쓰자는 마음으로 노력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글씨체로 인해 덜미를 붙잡히다니, 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보기와 달리 기본적인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 편인 듯하다.
쫘악-
나는 체리의 확증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약도를 찢어서 그녀에게 전달했다. 내가 약도를 건네주자 그녀는 보물을 받은 것처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쥐었다.
표정 또한 전과 확연히 달라진 상태였는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뺨도 미미하게 붉어졌다. 하지만 죽어버린 눈빛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형이 웃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으나 최대한 내색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기로 오면 돼요. 적어도 6시까지 있을테니 수업을 모두 끝내고 오세요. 알겠죠?”
“네…”
“체리 학생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니라고 해둘게요. 저 그런 사람 아니니까.”
혹시 몰라 마지막까지 부정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미 반쯤 들킨 것 같지만 최대한 잡아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체리는 그런 내 강한 부정을 반대로 긍정이라 여겼는지 음침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와 세실리 못지 않게 몸매도 훌륭한데 저 눈빛이 다 깎아먹고 있다.
뒤이어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텁-
체리가 느닷없이 내 오른손을 붙잡아 멈춰세웠다. 머리를 붙잡은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해도 몸이 덜컥거리는 건 매한가지다.
결국 인상을 살짝 구기며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바라보자 오른손에 기묘한 감각이 느껴진다.
오른손 중지 손가락 가운데 부분에 나 있는 굳은살. 옛날부터 꾸준히 가지고 다니던 펜혹을 그녀가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펜혹…”
“… …”
“저도… 있는데…”
체리는 그리 말하면서 본인의 오른손을 보여줬다. 섬섬옥수처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돋보였으나 그중 괄목할 점은 바로 중지 손가락.
그녀도 나처럼 중지 손가락 중앙 부분에 펜혹이 존재했다. 편지에서 보았던 것처럼 글을 자주 쓰는 걸까.
허나 그보다도 체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든 웃고 있으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차가운 말을 내뱉으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데 모질게 대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줬다.
“체리 씨도 펜혹이 있는 걸 보면 많이 노력했나 보네요.”
“아…”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하다 보면 성과가 있을 거예요.”
내 말이 따스한 위로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 포기만큼은 하지 마세요. 알겠죠?”
체리의 눈동자에 약간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 * *
“하악… 하악… 하아…”
아이작과 엘레나가 떠나고, 체리는 다음 수업도 참가하지 않은 채 곧바로 어디론가 다급히 달려갔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바람이 휘날리고, 쓸데없이 커다란 가슴 때문에 달리는 것조차 버거웠으나 그럼에도 묵묵히 두 다리를 움직였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녀를 보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긴 했으나 제 갈 길을 가며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체리가 도착한 곳은 여학생 전용 숙소.
“하아… 하아…”
곧이어 입학식 날에 배정받은 숙소로 들어간 그녀는 문을 굳게 닫고 호흡을 갈무리했다. 풍만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반복하고, 급히 달려온 탓에 분홍색 머리카락도 땀에 달라붙었다.
이어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체리는 고개를 선선히 들어올렸다. 방금 전보다는 밝아진 듯한 눈빛으로 서둘러 방 내부를 둘러봤다.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대변하듯이 정리는 하나도 돼 있지 않았고, 심지어 아카데미를 입학할 당시에 입었던 옷 또한 아무데나 널부러져 있다.
교복이 아닌 사복이 보관돼 있는 가방도 마찬가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후에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부스럭- 부스럭-
홀린 듯이 가방을 샅샅이 파헤친 끝에 나온 건 다량의 종이였다. 그런데 상태가 영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갈갈이 찢었다가’ 접착제로 이어붙인 것 같달까. 심지어 발로 거칠게 짓밟은 흔적까지.
겉으로 보기에도 훼손이 심각하다. 이어붙은 것조차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
“… …”
체리는 한동안 숨을 헐떡거리며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소설을 쓰기에 적합한 원고 형식의 종이다.
그리고 그 원고에는, 한 편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훼손이 워낙 심각하여 제대로 읽기는 힘들지만,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과 애정이 담겨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그 노력과 애정을 누군가가 무자비하게 찢어버렸다는 것 또한.
[이딴 쓰레기 같은 걸 쓸 시간에 철학 서적이나 한 권 더 읽으려무나.]원고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 친다. 그 목소리에 그녀의 작은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흑… 으흑…”
노력과 애정, 그리고 마음까지 모두 잔인하게 찢어발겼던 그 날이 떠오르자 체리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속에 묵혀놓았던 모든 감정을 밖으로 토하는 것처럼, 물방울은 뚜렷한 줄기가 되어 턱에 송글송글 맺혔다.
“제발…”
애원에 가깝게 중얼거린 그녀는.
“맞다고… 맞다고 해주세요…”
절벽 끝에 선 사람마냥 구슬피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