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93
■ 192화. 꿈 (1) □ ᓚᘏᗢ
체리를 보낸 이후에는 역사관으로 돌아갔다. 약도까지 줬으니 서적이나 읽으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얘. 너 정말 제논이니?”
물론 엘레나가 나를 제논이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 그녀가 보는 앞에서 체리가 나를 향해 제논이라고 했으니 물어보지 않는 게 이상하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자마자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다말고 흠칫거렸다. 이어서 엘레나를 바라보니 호기심이 담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교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야. 그 애가 느닷없이 너를 제논이라 부른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엘레나는 버릇처럼 안경을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체리라는 여학생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성급한 행동으로 인해 내 비밀이 들통날 위험에 처했다.
일단 잡아떼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가 우선이다.
“제가 정말 제논이라면요? 교수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언자나 아니면 미래인인지 물어보려고. 그것도 아니면 공동 연구 같이 할 수 없냐고 부탁하거나.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금지 마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데 역사는 더 잘 알겠지.”
“그것 뿐?”
“얘. 난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아닌 평범한 학자야. 사람들이 모르는 지식을 파헤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역시 천생 학자다운 마인드다. 저런 탐구열 덕분에 학자가 되어 알븐하임 성지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겠지.
게다가 엘프 특유의 종족 특징도 한몫할 것이다. 전에 말했다시피 엘프는 자기가 몸 담은 직종에 평생을 일조하며 다른 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엘레나에게 내가 제논이라는 걸 밝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최고급 노예 아니, 조교를 얻었다며 좋아하겠지.
여태까지 내가 본 엘레나는 적어도 천생 학자이며 비열한 술수를 쓰는 권력자는 아니다.
“그래서 진짜 제논이 맞아?”
“아닌데요.”
물론 그렇다고 비밀을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직 제대로 된 신뢰 관계도 쌓이지 않았는데 선뜻 알려줄 수 없다.
“그거 아쉽네. 그럼 그 애한테는 어떻게 설명할 거야?”
“음…”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체리는 늦어도 5시 쯤에는 도착할 것이다. 보통 오리엔테이션은 일찍 끝나는 편이니.
그러나 체리는 나를 제논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연구실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엘레나도 있어서 문제가 많다.
뭐, 방금 전 이야기를 들었다시피 그녀가 내 비밀을 듣고 무슨 짓을 저지를 거라는 의심은 들지 않는다. 설령 저질러도 아르웬 선에서 멈출 가능성이 높다.
“글쎄요. 일단 오해부터 푸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겸사겸사 머리 잡아당긴 것에 대해 사과도 받고.”
“그 애가 오면 카페 가서 이야기 해.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연구실에서 안 했으면 좋겠거든.”
“연구실은 오로지 연구를 위한 공간이다, 그런 건가요?”
“아주 정확해.”
역시 천성 학자다운 마인드다. 사실 나도 그리 계획하고 있어서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체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미리 골랐던 책을 펼쳤을 때였다.
똑- 똑- 똑-
누군가 연구실 문을 조용히 노크했다. 체리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네. 나가요.”
이에 펼쳤던 책을 도로 덮은 뒤 문을 활짝 개방했다.
“누구… 어?”
“… …”
문을 열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벛꽃향이 날 것 같은 분홍 머리였다. 분홍 머리라면 단 한 명밖에 없다.
“…체리 학생?”
“아, 안녕하세요…”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 그녀였다. 그녀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자 특유의 생기 없는 목소리로 꾸벅 인사했다.
설마 시간을 잘못 봤나 싶어 연구실 안의 시계를 바라보니 정확히 3시다. 첫날인만큼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시간이다.
나는 설마 수업을 생략하고 온 건가 싶어 체리와 마주했다. 그녀는 전처럼 의기소침하면서도 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설마 수업을 빼고 온 거예요?”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황당한 마음에 쓴소리를 하려던 찰나, 시선을 내리니 그녀가 무언가를 소중히 안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종이들로 보이는데 척 보기에도 훼손이 심각하다. 단어 그대로 갈기갈기 찢었다가 접착제로 이어붙은 수준.
그런데도 저리 안고 있는 걸 보면 체리에게 소중한 물건인 걸로 추측된다.
“그건 뭐예요?”
“아. 이, 이건…”
내가 종이를 가리키며 묻자 몸을 크게 움찔거리는 체리.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겁에 질린 다람쥐 같다.
나는 이대로 가다가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자리를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카페로 가죠. 교수님?”
“그래. 오늘은 수업도 없으니까 카페 갔다가 곧바로 쉬어.”
“감사합니다. 체리 학생? 잠깐 따라와줄 수 있나요?”
“네…”
엘레나에게서 허락 받은 이후에는 체리와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콰악-
“…빨간색.”
“… …”
그런데 얘는 왜 아까부터 내 머리를 붙잡는 것일까. 마리와 세실리의 말에 따르자면 자기보다 머리결이 좋아서 계속 만지고 싶다던데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같으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아무리 그래도 남의 머리를 잡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호통치고 싶다. 하지만 체리의 정신 상태가 영 아니다 보니 카페에서 조곤조곤 타이를 생각이다.
결국 체리는 하나로 묶은 내 머리를 붙잡은 채 졸졸졸 따라오는 모양새가 되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애용하는 카페로 이동했다.
주변에서 행인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긴 해도 깔끔히 무시했다. 저런 시선은 자주 받아봐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빨간 머리와 분홍 머리가 떡하니 있는데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겠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어서오세요.”
“개인방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카페에 도착한 후에는 커피까지 주문하고 개인방으로 들어섰다. 체리는 카페는 처음인지 쭈볏쭈볏거렸다가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단 둘이 독대하게 된 상황. 나는 여전히 가슴에 종이를 안고 있는 체리를 쳐다봤다.
막상 일을 저질렀지만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나아갈 용기가 없었는지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가끔씩 올려 나와 눈을 마주치긴 해도 그게 끝이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다보니 어느새 주문했던 커피까지 나왔다. 나는 달달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면서 체리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 이에 마셔도 된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자 그제서야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을 뻗는 와중에도 종이는 품에 소중히 안고 있다.
“맛있어요?”
“…네.”
체리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 맛있으니 다행이긴 하다만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카푸치노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뒤 커피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소리 한 점 없는 개인실에 크게 퍼졌다.
뒤이어 두 손으로 깍지를 끼어 턱 밑을 받친 후, 긴장하고 있는 체리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그 종이라도 보여주려고요?”
“…제논 작가님… 맞아요?”
미사여구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체리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특유의 죽은 눈이 섬뜩했으나 외모 자체가 워낙 화려하여 간신히 중화시켰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레 굴었다. 첫만남이니 완전히 신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글쎄요. 내가 제논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체리 학생의 가문에 알릴 생각이신가요?”
“가문…”
‘가문’이라는 키워드가 언급되자 체리의 눈빛이 더욱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거기에 더하여 실 끊긴 인형처럼 고개를 천천히 숙이기까지.
그걸 보고 한 가지 깨달았다. 체리에게 있어서 ‘가문’이라는 단어는 지뢰나 다름없다는 것을.
자신의 가문을 싫어하는 귀족은 은근히 많다. 그러나 체리처럼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가문과 관련된 사정이 있다는 걸 재빨리 눈치채고는 서둘러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그래서 제가 정말로 제논이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정말 맞아요?”
다행히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는지 체리가 떨구었던 고개를 느릿느릿하게 들어올리며 물었다. 증거는 곳곳에 나왔으나 스스로 확신을 못 내리는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체리는 본인의 가문을 극도로 싫어하고 있다. 방금 전 그 반응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제논임을 밝혀도 가문에게 알릴 일은 지극히 낮다. 정신 상태가 저러니 입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을 것 같고.
하지만 대놓고 밝힐 수 없다. 일단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체리 학생. 편지에 붉은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했죠? 게다가 편지의 필체와 제 필체가 똑같다고 하셨고.”
“…네.”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부족해요.”
“부정은… 안 하시네요.”
체리의 조용하면서도 예리한 지적에 나는 미소만 지어줬다. 말만 그렇지 사실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이다.
이미 반쯤 들킨 마당에 격렬하게 부정하면 오히려 더 큰 의심만 살테니 이렇게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 낫다.
설령 정체를 들킨다고 한들, 나에게는 든든한 조력자들이 곁에 있다. 레킬리스 가문의 딸, 마리와 약혼 관계를 맺었으며 심지어 리나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체리가 입을 함부로 떠벌릴 성격이 결코 아니나 그녀의 가문에서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그녀의 상태를 보면 로즈베리 가문이 어떤 곳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그것도 체리 학생의 판단이죠.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 그러면…”
내 능청스러운 답변에 확신이라도 내렸는지 체리가 다급한 표정으로 허둥지둥거렸다. 그녀는 자기 품에 안은 종이를 힐긋거렸다가 입을 앙 다물더니 예의바르게 내밀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흔적은 그렇다 쳐도 발자국까지 있는, 말 그대로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종이다.
나는 체리가 조심스레 내민 종이 뭉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게 뭐냐는 듯이 체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종이를 건네받았다. 손상이 심하여 모르고 있었는데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원고지였다.
그래. 내가 제논 일대기를 집필할 때 꼭 사용되는 원고지. 그리고 그 원고지 안에는 체리 특유의 따스한 필체로 하나의 글이 작성돼 있었다.
[붉은 노을을 다시 한 번.]뭐지. 이 감수성 터지는 제목은.
퍼즐처럼 접착제로 이어붙인 탓에 글씨가 조금 망가졌으나 제목만큼은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제목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맞은편의 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있다.
“설마 이거 체리 학생이 쓴 거에요?”
끄덕-
체리는 내 질문에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원고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갈기갈기 찢겨졌다가 힘겹게 붙인 거라 읽는 건 약간 힘들었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것까지는 아니다.
다만 첫 장에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걸 보아 어떻게 된 경위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분명 그녀의 가문과 깊이 연관돼 있는 문제일 터.
소설 지망생의 원고지를 짓밟는다는 행위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꿈 그 자체를 박살내는 것이니 체리의 정신이 붕괴될만도 하다.
‘분명 철학 가문이라 했을 텐데…’
어째서 로즈베리 가문은 체리를 압박하다 못해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일까.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소설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처음에는 제목처럼 따스한 감성이 담긴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편지에서 보았던 것처럼, 체리 특유의 달달하면서 따뜻한 필력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단연코 눈에 띄는 설정이 하나 있었으니…
‘…뭐야? 회귀물이네?’
체리의 작품, 붉은 노을과 다시 한 번은 놀랍게도 회귀물이었다.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겪은 여자 주인공이 죽기 직전, 특정한 계기로 과거로 돌아간다는 흔하디 흔한 회귀물.
전생에서는 진부한 클리셰 중 하나이긴 해도 이 세상에는 회귀물이라는 장르 자체가 없다. 이런 발상을 한 것 자체부터가 체리의 비범함을 대변해줬다.
게다가 로맨스에 잘 어울리는 감성적이고 따스한 필체로 하여금 여주인공을 보다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심리 묘사가 아주 일품이라 넋 놓고 바라볼 정도.
이것뿐이랴. 철학 가문 출신답게 여러모로 잡다한 철학도 포함돼 있다. 사람을 깊은 생각에 빠뜨릴만한 주제가 명확하여 등장인물의 개성을 보다 더 강하게 묘사시켰다.
마지막으로 로맨스 소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의 등장과 만남까지. 전개가 살짝 빨라 의아한 부분이 있긴 해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저… 체리 학생?”
“네, 네?”
체리가 쓴 작품, 붉은 노을과 다시 한 번은.
“다음 권 없어요?”
누군가에게 짓밟힐만한 작품은 절대 아니었다.
“… …”
체리는 내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들은 게 진짜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 듯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원고지를 가리키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요? 체리 학생이 쓴 게 확실하죠?”
“… …”
“저기…”
“으흑…”
그녀의 이름을 재차 부르려던 찰나, 체리의 분홍빛 눈동자에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수도꼭지를 튼 것마냥 눈물만 흘리고 있어 살짝 꺼림칙했다.
“흐윽… 흐극…”
“… …”
나는 순간 당황한 것도 잠시, 체리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다행… 이다…”
“… …”
“안 밟혔어… 안 밟혔다고… 흐윽…”
눈물을 흘리는 탓에 얼굴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체리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