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21
■ 220화. 새로운 별 (2) □ ᓚᘏᗢ
이 세상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서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남편이 다른 여자, 즉 첩을 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는다면 빼도 박도 못 하게 불륜이다.
그러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평민과 다르다는 일종의 선민 의식이 있을 뿐더러 권력도 막강하여 도덕 관념이 상대적으로 낮다. 권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런 경향은 강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고위급 귀족들은 본인의 권위와 권력을 자각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 도덕 관념의 부재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귀족 사회에서 불륜이 판을 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의외로 소문이 잘 퍼지지 않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누군가 입을 함부로 나불거리지 않도록 조치하면 그만이니까.
물론 비율로 따지자면 높은 것이지, 정략 결혼이라 해도 서로를 아끼는 경우가 많다. 정략 결혼은 일종의 계약 관계로 묶여 있어서 한 쪽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그 손실이 배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
또한 의외로 아내 쪽에서 첩을 들이라고 권유하는 경우가 있다. 아내에게 문제가 있어 후대를 낳기 힘들다거나 아니면 남편의 체력과 애정이 너무 왕성하여(…) 하루하루 받아들이기 어렵다던가.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조금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당장 기초적인 기사 훈련만 받았던 아이작조차 신성력이 있었다지만 첫날밤 세실리를 제압할만한 체력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레오나의 문제로 질투심이 폭발한 마리와 그걸 보며 재미를 느낀 세실리가 협공을 가해도 힘이 좀 들었다지만 거뜬히 버텨냈다. 몸이 성장하면서 아버지, 호크의 유전자가 뒤늦게 발현되었는지 몰라도 그의 신체 능력은 나날이 증가하는 중이다.
잠깐 쓸데없는 말을 했지만, 정작 그 질투심을 느낀 된 마리는 다소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당장 세실리를 받아들였을 때부터 우여곡절이었는데 이제는 그 놈의 문화 때문에 레오나를 받아야 했으니.
심지어 성지식이 전무했다지만 씨앗을 대놓고 달라던 케이트까지 있었다. 대신 그녀는 인간 관계 자체가 다른 의미로 파탄이 나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허나 아이작의 첫번째 연인으로서, 그리고 앞으로 첫번째 아내가 될 사람으로서 불평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먼 미래에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받는 경우가 있겠으나 지금은 아니잖나.
세실리는 그냥 아이작과 연결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중이지만 마리는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아델리아라는 호위기사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 마당에 여자가 늘어나는 건 한사코 사양이다.
낮에는 아이작이 전해주는 진실 어린 애정을, 밤에는 애정이 섞인 쾌락을 한 번 맛 본다면 절대 잊을 수 없다. 그걸 다른 사람과 양분해야 한다니 그녀로서는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만약 다른 누군가가 먼저 알았다면 자신도 비집고 들어가야 될 입장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라는 점이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그 하나 덕분에 다른 여자가 감히 아이작에게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으니.
하물며 아이작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학급 내에서도 유명한 편이다. 1년 전에는 빨간 머리와 금안이라는 독특한 조합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면, 훤칠한 장정으로 성장한 지금은 미모가 물이 오를대로 올랐으니.
오죽하면 한 번 쯤 자고 싶은 남자라고 여학우들 내에서도 소문이 떠돌 정도다. 바쁘게 조교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작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이나 이따금씩 들리는 파렴치한 소문은 마리의 스트레스를 끌어올렸다.
물론 그 스트레스마저 아이작의 얼굴을 보게 되는 순간 눈 녹듯이 사라지지만. 가끔 가다가 아이작의 뺨을 깨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몇 번째 부인?”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신입생은 전혀 예상치 못 했다. 마리는 아이작의 옆에 서 있는 분홍빛 머리의 소녀, 체리를 보며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은 한사코 오해라고, 단지 소개시켜주고 싶은 후배라며 열변 아닌 열변은 토했지만 마리는 물론 그걸 지켜보는 세실리와 리나는 썩 믿지 못 하는 표정이다.
여기서 다른 점이 있었는데, 마리와 비슷한 입장인 세실리는 웃지 못할 상황에 쓴웃음을 지은 반면 리나는 어디까지나 제 3자였으니 흥미롭게 관람했다. 원래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지금의 리나가 딱 그런 상황이다.
그사이 마리는 불만을 가득 담아 팔짱을 끼고는 우물쭈물하는 체리를 위아래로 쳐다봤다. 키는 평범한 편인데… 흉부가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크다.
슬쩍 옆에 있는 세실리의 가슴을 쳐다보니 거의 막상막하일 정도. 두 사람 다 교복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다.
마리의 가슴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니고 평균보다 큰 편이나 이 둘은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다. 뭘 먹으면 저렇게 커지는 걸까.
심지어 당당히 부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레오나조차 언듯 보기에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다. 덕분에 무언가 깨달은 마리는 아이작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이작은 가슴 큰 여자 좋아해?”
“갑자기 그 질문은 왜 나오는 거야?”
“일단 대답부터 해.”
“······좋아하지.”
역시 거짓말은 진짜 못 한다. 아니, 이제는 다 들키니까 안 하는 거겠지.
마리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한 아이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렇게 솔직한 점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얼굴은 부가 요소고.
어차피 방금 전 몇 번째 부인이냐는 질문도 그냥 장난 삼아 한 거다. 일종의 복수라고 해야 될까. 요즘 그에게 여자들이 너무 많이 꼬인 나머지 질투심 때문에 살짝 골려 준 것이다.
단, 체리의 상태가 조금 심상치 않은 것만 빼면은. 마리는 뺨을 긁적이며 쑥쓰러워하는 아이작에게서부터 시선을 옮겨 체리를 쳐다봤다.
분홍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본다면 미네르바 제국 내에서도 철학 가문으로 유명한 로즈베리 가문이 확실하다. 레킬리스 가문이 눈처럼 새하얀 머리로 유명하다면 로즈베리는 분홍색이었으니.
그런데 뭐랄까. 눈동자에 생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의욕이 없다고 해야 할지 어두침침하다. 체리의 사정을 모르는 마리는 그냥 원래부터 그런 건가 싶었다.
“체리라고 했지? 신입생이라고?”
“네, 네에···.”
목소리 자체는 외모처럼 예쁘지만 의욕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마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정을 잘 모르니 개인의 성격인갑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우선 아이작이 소개시켜준다고 했으니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 늘 가던 곳으로 가는거지?”
“그러자. 체리?”
“네에···.”
아이작의 부름에 체리는 눈치를 살금살금 보다가 그들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래도 그들이 먼저 앞서 나가고 자신이 뒤를 따라갈 생각인 걸로 보였다.
아카데미에 내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조를 내걸고 있으나 권위만큼은 어쩔 수 없다. 마리는 레킬리스 공작가 영애, 리나는 황녀,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였으니.
마리는 그걸 보며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으나 지금은 리나가 있다. 체리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옆에 서라는 건 리나를 무시하는 일이다.
그 결과 체리는 일행의 뒤를 졸졸졸 따라가는 형식이 되었다. 중간중간 말을 걺으로서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살짝 눈에 걸리는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아기새마냥 아이작의 뒤만 따라라고 있다는 것. 거리를 벌린 것도 아니고 조금만 가까이 가면 밀착이 될 정도로 접근한 상태다. 살랑거리는 아이작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잡고 싶어서 손까지 꼼지락거리고 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하게 여길만한 모습에 마리는 물론, 세실리마저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아이작과 리나는 서로 대화하는 중이라 체리의 밀착 접근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에 마리와 세실리는 누가 뭐라고 할 것없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그녀들인만큼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챘다.
저 체리라는 소녀, 분명히 아이작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들이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당장은 아이작의 소개가 있어야 되니 잠자코 있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추궁으로 들어갈 것이다. 두 여인은 그런 마음을 지닌 채 늘 애용하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식당에 막 도착하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마리가 먼저 작업(?)에 나섰다.
“아, 맞다. 아이작. 하나 부탁해도 될까?”
“무슨 부탁?”
“강의실에 펜을 놔두고 온 것 같아서. 리나랑 같이 가면 무슨 펜인지 알 거야.”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리나에게도 눈치를 주는 마리다. 뜬금없이 지목되었지만 리나는 무슨 상황인지 영민하게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이지? 알았어. 나랑 아이작이 같이 가서 찾고 있을게. 없으면 그냥 올게.”
“없으면 다행인 거지. 체리라고 했지? 너는 우리랑 같이 기다리자.”
“아, 저···.”
갑작스레 아이작과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와서 불안했던 것일까. 체리는 마리와 아이작을 번갈아보면서 망설였다. 지진이 나는 것처럼 흔들리는 분홍빛 눈동자가 썩 애처로웠다.
그러나 아이작을 만나기 전과 다르게 어느 정도의 사고는 돌아가는 상황. 체리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 먼저 들어갈게.”
“알았어. 빨리 갔다 올게.”
시간은 벌었다. 마리는 아이작과 리나가 멀리 걸어가자 손을 흔들어줬다.
뒤이어 체리를 보더니 상큼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권유했다.
“그럼 들어갈까?”
“네에···.”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체리였지만 마리의 권유에 잠자코 따라갔다. 이어서 늘 그렇듯이 방음이 확실한 방을 잡은 후에 각자 자리에 앉았다.
마리와 세실리가 중간 자리를 비운 채 나란히 앉았고, 체리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아이작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합석하게 되어 자존감이 뚝- 떨어졌는지 체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걸 본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세실리는 그저 물끄러미 쳐다봤다. 첫인상부터 느낀 거지만 자존감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 아이가 어떤 경위를 통해 아이작을 의지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마리는 점점 더 솟아나는 의문에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체리라고 했지?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 로즈베리 가문은 나도 익히 들어봤어. 철학으로 유명한 가문이지.”
“······네.”
가문을 언급하자 몸을 흠칫 떨면서 대답한 체리. 아래에 내려간 두 손은 치마자락을 꽉 붙았다.
마리는 멀리서 보아도 힘이 들어갔다는 건 알 수 있었기에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과거, 공작가로 찾아온 로즈베리 백작과 대면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어디에서 볼 법한 평범한 귀족이었다.
귀족의 프라이드를 지녔으면서도 매사에 본인의 철학을 넣으려는 독특한 남자. 그런데 체리의 반응이 저렇게 격할 정도면 아버지로서의 자격은 그닥인 것 같다.
“아이작과는 어떻게 알게 됐니?”
“······편지.”
“응?”
“편지에… 빨간색 머리카락이 있어서…”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바로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편지에 빨간색 머리카락이 들어있었다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겨울 방학 때 아이작의 저택에서 잠깐 지내는 동안 수북히 쌓여있는 팬레터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옆에 있는 세실리도 마찬가지고.
그 편지 중에 눈 앞의 체리가 보낸 편지도 포함돼 있었다. 아이작이 말하길 꾸준히 보내는 팬들 중 하나라고 했던가.
그녀를 위해 답신을 했건만 역시 덤벙대는 성격이 어디 안 간다고, 그때 머리카락이 들어간 모양이다.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어서 약간 황당했다.
“설마 너 아이작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마리의 당황 섞인 질문에 체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리의 긍정에 마리와 세실리가 서로를 바라봤다.
어떻게? 라는 의문이 섞인 표정들이 각자의 눈동자에 비춰졌다. 겨우 편지지에 머리카락 한 올이 나왔다고 확신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단서가 부족하다.
“겨우 머리카락 한 올 가지고?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아니, 그전에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어?”
“······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체리라는 소녀에게서 꺼림칙함이 느껴진다. 보통 같으면 버리고도 남는 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니,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다.
정말로 스토커가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하다. 마리는 약간 다급해진 투로 연이어 질문했다.
“겨우 그것만으로 알아차린 건 아니잖아. 그치?”
“······필체.”
“필체?”
“편지와 아이작 님의 필체가 똑같았어요···.”
아이작의 필체는 귀족답게 유려하고 작가답게 세심한 편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명확했으며 대충 휘갈려 써도 기품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썩 정상적이라고는 말 못 한다.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그 필체 하나만으로 확신을 한다니.
점점 체리라는 소녀가 정상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다. 마리가 말문이 막혀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였다.
테이블 아래에 있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체리는 고개를 들어 두 여자와 마주했다. 그리고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당초 아이작 님이 반쯤 인정하셨어요. 제 원고를 보시고 재미있다고, 그리고 도와주겠다고 하셨거든요.”
“응? 원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작가였니?”
원고라는 말이 나오자 마리는 물론 세실리마저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이번에 체리를 소개시키려 한 이유인 듯싶다.
체리는 두 여자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보다가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고개를 도로 숙였다. 그래도 말은 하고 싶었는지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제 원고를 보지도 않고 갈갈이 찢어버리고, 짓밟았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이어붙여서 제논 님에게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죠···.”
“······잠깐만. 버티고 있었다고?”
“네··· 만약 아이작 님이 제논이 아니었다면 아마···.”
뒷말은 하지 않았으나 마리와 세실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챌 수 있었다. 저렇게 기운 없는 목소리와 어둠이 짙게 깔린 눈동자가 그걸 반증하고 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소녀다. 아이작이 일부러 정체를 밝힌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다.
만약 아이작마저 체리를 외면했다면, 숙소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지 않을까. 정말로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정체를 밝힌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 그랬구나.”
“저러면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저러니 아이작에게 호감을 품은 이유가 설명이 된다. 가문에서 갈갈이 찢겨진 꿈을 고쳐주다 못해 응원해줬을 뿐더러 도움까지 줬으니.
또한 가문에서 얼마나 심한 핍박을 받았으면 애가 저렇게 망가지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사람을 거의 인형 수준으로 만들어놓을 정도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의 압박이 이어졌을 터.
마리는 그녀에게서 딱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작의 여인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다. 이미 너무 많다.
일단 의견은 물어봐야겠지. 마리는 착잡한 표정으로 체리를 응시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너도 아이작의 부인이 되고 싶다거나 그런 소리를 하고 싶니?”
그 물음에 체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이어 동그랗게 말아져있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제가요?”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것과.
“감히?”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그녀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마리는 감히? 라는 답을 듣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기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으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까. 솔직히 욕심을 낼 수 있는데 그녀는 무언가 어긋나 있다.
마리가 살짝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쯤, 곁에서 지켜보던 세실리는 무언가 느낀 거라도 있는 건지 특유의 고혹적인 보이스로 말했다.
“얘. 이때까지 아이작의 뒤를 따라다니던 애가 너 아니었니?”
“네. 맞아요.”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지 당당하게 스토킹을 했다고 자백한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망가져 있다가 겨우겨우 복구된 마음은 결코 정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세실리는 체리의 대답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선물은? 요즘 아이작한테 벛꽃향이 나던데 그거 네가 한 짓이니?”
“가문에서 나오는 벛꽃 수액을 선물했어요.”
“그런데 마음이 없다고?”
“저 따위가?”
다시 한 번 바닥을 드러낸 자존감. 체리는 세실리의 붉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하나 하나 말을 꺼냈다.
“저는 그저 아이작 님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머리카락, 향기, 목소리, 얼굴, 온기 등등.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 …”
“하지만 가져서는 안 되겠죠. 비록 제 필명을 메리로 했지만, 진짜로 이어지는 건 결코 불가능하니까요. 단지 제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하니까.”
“으음…”
사뭇 광기처럼 느껴질만한 무시무시한 발언의 향연에 세실리가 침음성을 흘리며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는 슬슬 무서운 건지 주춤주춤 의자를 뒤로 끌어 물러나고 있다.
세실리는 다시 한 번 체리에게서 시선을 옮기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 보는 것 같네.’
구원을 너무 늦게 받았다.
* * *
한편 마리의 부탁대로 강의실로 향하는 아이작과 리나. 관계 개선을 통해 둘은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서로 서로 편하게 말을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겉으로만 본다면 남작가의 영식과 황녀의 대화였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정도 시선은 무던하게 넘길 수 있다.
아이작도 아이작대로 리나가 편해졌기에 좋았고, 리나 또한 아이작과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관계가 개선되면 사적인 질문도 오고 가는 법. 리나는 훤칠한 장정으로 성장한 아이작을 위아래로 쳐다보다가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그런데 아이작. 허리는 지금 괜찮아? 지난번에는 마리랑 세실리가 같이 덤볐잖아.”
“아, 그거 괜찮긴 하… 잠깐만.”
아이작은 리나의 질문을 듣고 잠깐 과거를 상기했다. 마리와 세실리가 협공하기 전, 리나가 아니라 레오나가 있었다.
리나 또한 자신과 친구들의 성생활에 대해 자주 들었기에 과거와 달리 언급하는 건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질문한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마치 자신의 성생활을 전부 알고 있다는 것 같지 않은가.
이에 아이작은 눈을 끔뻑거렸다가 리나를 쳐다보며 의문을 담아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으, 응?”
“그때 너 없었잖아. 너 말고 레오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자리를 비우지 않았어?”
“아, 그, 그건… 그러니까…”
생각치도 못한 역질문이었는지 리나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지기까지.
아이작은 그걸 반응을 보며 한 쪽 눈을 치켜떴다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리나. 너 혹시…”
“아냐! 안 봤어! 정말이라니까! 내가 변태도 아니고!”
“… …”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던데. 심지어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리나가 진짜 변태도 아니고 훔쳐볼 사람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야겠다.
“휴우…”
옆에서 리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이것도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