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45
■ 244화. 타자기 (1) □ ᓚᘏᗢ
이 세상의 ‘문자’는 영어와 흡사하지만 ‘문맥’ 자체는 한국어와 다를 게 없다.
내가 이 세상의 언어를 빨리 깨우친 이유도 언어가 다를지언정 문맥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언어만 외우면 끝이거든.
만약 타자기가 발명된다면 작업 속도가 배는 빨라질 거라 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문맥이 같으니 그냥 내가 상상하는대로 타이핑 하면 끝이니까.
언어 문제? 그건 익숙해지면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전생에서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타이핑할 때 조금 헤맸을 뿐이지, 적응한 이후부터는 물 흐르듯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가르츠에게서 전달받은 타자기 겸 복사기라 할 수 있는 기계, 워드.
전원을 켠 상태에서 타이핑을 한다면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문자가 출력되고, 종이만 있다면 그 문자를 인쇄할 수 있다.
마법에 특화돼 있으면서 드워프 못지 않게 제작에도 일가견이 있는 마족만이 만들 수 있는, 오직 글 쓰기를 위한 물건.
가르츠는 이 기계를 내가 원하는 대로 부르라고 말해줬다. 왜 제작자가 아닌 내가 이름을 붙이냐고 물으니 오직 나를 위한 물건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간편하게 ‘타자기’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전생에 있던 걸 그대로 갖다 붙인 거라 평범해 보이지만 가르츠는 마음에 들어하더라.
비록 단순한 타자기에 불과하지만 성능을 보자면 시대를 한참 뛰어넘은 오버 테크놀로지다.
산업 시대를 넘어 근대에나 나올법한 물건인데 제아무리 마법과 혼합되었다지만 성능이 말도 안 되었으니.
덕분에 이 세상의 마법이 어떤 잠재력을 지녔는지, 그리고 마족이 작정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특히 타자기 같은 경우는 나에게 있어서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없다. 빈말이 아니라 학업을 병행해도 보름에 한 권씩 발매하는 게 가능하다.
방학 기간이라면 쉬지 않고 작성할시, 열흘에 한 번씩 낼 수도 있다. 애당초 손으로 작성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발간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가르츠를 통해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것.
전생의 기억을 빌려 이런 이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가르츠가 곧바로 헬리움으로 돌아가 기능을 추가해준다.
맨 처음에는 숫자를 적는 키가 이상한 곳에 배치돼 있을 뿐더러 백스페이스도 비슷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조언 끝에 전생과 매우 흡사한 타자기가 탄생했다. 말이 타자기지, 그냥 키보드나 다름 없다.
유일한 단점이라고 한다면 키압 정도. 내 손가락 피로를 고려하여 키압을 매우 낮게 설정한 것 같으나 그만큼 잘못 누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손으로 쓰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무슨 기계식 키보드마냥 찰진 소리까지 나는 건 욕심이지.
어쨌거나 여러 개선을 거쳐 탄생한 타자기는 현재 내 작업 속도에 불을 붙여줬다. 이미 반 정도 적었기에 남은 분량은 전부 타자기를 사용했다.
타다다다- 타다다-
타자기 특유의 타이핑 소음이 기숙사 내부를 조금씩 메운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는 눈 앞에 문자들이 좌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이 타자기는 원리만 과학적일 뿐, 기계가 아닌 대부분 마법으로 제작한 것이기에 소음은 그리 크지가 않았다.
키감 또한 ‘누른다’는 느낌만 들고 그 외에는 밋밋한 편이다. 내 조언을 통해 개량을 거쳤으나 프로토타입이라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다.
그러나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타자기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오버 테크놀로지다. 특히 기계가 아닌 마법의 비중이 크다는 것 또한 타자기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타자기를 전문가 못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띠잉-
불과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나는 페이지를 다 채웠다는 알림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아래에 위치한 빈틈에다가 원고지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복사기 특유의 위잉- 소리와 함께 타자기 위로 종이가 빠져나왔다. 따끈따끈한 느낌과 함께 원고지를 가득 메운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페이지의 기준은 철저하게 원고지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원한다면 글자 크기를 줄일 수 있다.
‘진짜 편하다.’
나는 페이지에 혹시 모를 오탈자가 있는지 빠르게 파악한 후,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이미 책상에는 원고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상태다.
타자기는 그 효능도 효능이지만 가장 놀라운 건 바로 오타 검수 관련이다.
전생의 타자기는 오타가 발생할시 그 종이를 버려야 한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으나 이 타자기는 홀로그램 형식으로 출력되기에 문자를 미리미리 제거할 수 있다.
인쇄가 된 후에도 문제가 없다. 복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도 리무버로도 깔끔히 지워진다.
물론 5분이 지난다면 지워지지 않는다는 건 똑같지만 5분이라도 충분하다. 나에게 있어서 평생의 보물로 삼을만한 물건이다.
이렇다 보니 개량된 타자기를 선물받고 불과 5일이 지났을 쯤. 너무 흥분한 건지 아니면 신난 건지 몰라도 19권을 모두 집필했다.
마지막으로 꼼꼼히 오탈자 검수하는 건 잊지 않았으며 확인까지 끝낸 후에는 우편 봉투에 넣었다.
아. 넣기 전에 자필로 쓴 편지를 넣는 건 잊지 않았다. 반까지는 자필로 작성하다가 갑자기 반듯한 글씨체로 바뀌니 상황 설명을 해야 된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편지는 예의상 자필로 꾸준히 쓸 계획이다. 이건 일종의 감성이라 봐야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20권도 한 번 써볼까?’
왠지 더 쓰고 싶어진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기지개를 폈던 나는 타자기 쪽을 바라봤다.
손으로 썼을 때는 피로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으나 타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계속 쓰고 싶어졌다.
전생의 키보드만큼 찰진 느낌은 없었지만 감각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느낌이 정말 좋다.
최근 5일 동안 빨리 타자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않은가. 그 생각과 내 집중력이 합쳐지니 무려 5일만에 반 이상의 분량을 채워 19권을 모두 집필했다.
20권의 줄거리도 모두 구상했으니 타이핑만 하면 끝일 터.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두 손을 뻗었다.
‘전시회 전에 20권을 낸다는 생각을 하면 되겠지.’
어차피 당장 할 것도 없고 미리미리 작성해도 나쁠 건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신성력을 받을 수 있으니 이득이다.
하물며 20권은 내가 작성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바로 진의 아버지, 식탐을 관장하는 벨제부브가 제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5권에서 짤막하게나마 언급되었던 마족의 나라도 등장한다. 그 이름은 판데움이며, 현실의 헬리움을 기반으로 삼을 예정이다.
‘원래라면 약간 우울하게 묘사하려고 했지만…’
레인의 처벌 건도 그렇고 겨울 방학 때 방문했을 때도 그렇고 헬리움은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곳이다.
어딘가에 있을법한 범죄 도시마냥 우중충하거나 개판 오분 전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행복한 미소를 띈 채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음식은 조금 취향에 엇나갔지만. 그건 그들의 문화였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도시를 혼란으로 몰고 간다는 게 좀 꺼림칙하지만…’
20권은 진과 릴리가 판데움으로 직접 찾아가서 국왕과 직접 만나는 스토리다. 허나 판데움의 상황은 그리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이미 식탐, 벨제부브가 술수를 부린 탓에 실종되는 마족의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으니.
마족이 실종되는 이유는 몹시 단순하다. 벨제부브가 본인의 힘을 늘리기 위해서다.
벨제부브는 ‘식탐’이라는 죄악에 걸맞게 힘을 흡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과정이 단순하면서도 끔찍하다.
상대방의 심장을 뽑아 입으로 먹으면 그 힘이 고스란히 소화되어 자신의 것이 된다. 심장은 예로부터 힘의 근간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사실 판데움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은 어디까지나 연막에 불과하다. 벨제부브는 이것보다 더 큰 계획을 꾸미고 있다.
그건 바로 판데움에 살고 있는 마족 전부를 ‘악마화’시키는 것.
마족들을 납치하여 힘을 비축하는 것 또한 계획의 일환이다. 벨제부브는 릴리스처럼 악마가 된 마족이 아니라 태생부터가 악마다.
당연히 검은 마나 또한 순수하지 않고 매우 더럽고 사악한데, 이걸 판데움 전체에 역병처럼 퍼뜨린다는 무시무시한 계획이다.
제아무리 세대와 세대를 거치고, 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마족의 기원은 악마. 언제든지 악마로 변할 위험이 있다.
마족은 절망이나 슬픔 같은 비극을 겪어야만 악마가 되지만, 사크란의 예시처럼 질척한 어둠을 흡수했을 때도 악마가 된다.
그 계획을 눈치채자마자 주요 인물들이 사크란을 떠올리게 되며 곧바로 저지에 나선다.
마음 같아서는 제논과 메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계획은 이미 발동된지 오래.
벨제부브는 외부와의 연락을 모조리 차단할 뿐더러 텔레포트까지 사용 불가 상태로 만드는 치밀함까지 선보인다.
결국 진과 릴리가 동분서주하면서 막는 것이 20권의 주요 스토리다.
‘와. 벌써 이만큼이나 썼어?’
잠깐 휴식을 위해 멈췄으나 원고가 벌써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손조차 피로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기계의 힘이라는 건가. 이 속도라면 보름에 한 권씩 내는 일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마약 같은 중독성을 자랑하는 타자기의 성능에 감탄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하나 들었다.
헬리움에서 나를 위해 수고를 들여 이런 타자기까지 제작했는데, 나 또한 그들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줘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가르츠에게는 사인본을 전달했다. 그것도 1권부터 지금까지 나온 책들 전부.
사인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뻐하던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나 이건 가르츠 개인의 선물이지 헬리움을 위한 선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물이 좋을까. 나를 위해 타자기까지 발명했으니 그에 맞는 보답을 해야겠지.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카이르 외전을 쓴 것처럼, 진•릴리 외전을 쓰도록 하자. 여태까지 언급만 되었지 어째서 이 둘이 서로에게 연정을 품었는지 상세히 나오지 않았다.
인간과 엘프의 사랑 이야기도 적은 마당에 마족이라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솔직히 겉으로 안 그래도 속으로는 섭섭해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외전을 20권 이후에 발매해야 하나? 아니면 같이 발매해야 하나?’
20권의 결말에서.
‘욕만 주구장창 얻어먹을 것 같은데…’
진은 벨제부브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들음과 동시에 심장을 꿰뚫린다.
* * *
혹시 모를 후폭풍이 우려되었기에 잠깐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세실리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지.
이에 다음 날이 되자마자 잠깐 세실리를 부르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타자기가 마음에 들어도 너무 마음에 들었으며 헬리움에 보답하고 싶다고.
내가 가장 잘하는 글을 통해 보답할 수 있지만 그것 외에 다른 건 필요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실리는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어.”
“그게 뭐야?”
세실리는 내 질문에 빙긋 웃더니 특유의 요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달 뒤부터 나랑 할 때마다 피임약을 안 먹으면 돼.”
“… …”
그 말을 듣자마자 지체없이 시선을 올려 그녀의 뿔을 확인했다.
어느새인지 몰라도, 그녀의 뿔이 끄트머리를 제외한 채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난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으니 후손을 낳아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어. 그게 좀 앞당겨졌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지. 그리고 아이작의 아이잖아?”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쳇.”
세실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