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62
■ 261화. 다사다난 (3) □ ᓚᘏᗢ
마리와 아델리아를 대동하고 마을 중심부로 향하니 예상했던대로 리나와 히리야가 기다리고 있다. 주변에 호위 기사가 없는 걸 보아하니 멀리서 지켜보는 듯했다.
히리야는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제복을 입어 본인의 성정을 확고히 드러낸 반면, 리나는 제국의 황녀답게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푸른색 드레스와 묶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화려함과 별개로 외출용 드레스인지 치마 길이가 짧은 편이다.
대신 가슴골을 은연히 내비치는 형식의 복장이라 풍만한 리나의 가슴이 돋보인다.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리나도 상당히 큰 편이라 할 수 있기에 자신감이 넘칠만하다.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에는 저 드레스가 아닌 지금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오겠지.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훨씬 낫다.
나는 리나와 히리야를 서로 번갈아보다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예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아. 우리가 빨리 온 건데 뭘.”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이후로 예정대로 안내원 역할을 이행했다. 안내원 역할을 받았다만 실상은 별 거 없다.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면 끝이다.
히리야만 없었다면 존댓말을 하지 않고 편하게 말을 놓았겠으나 어쩔 수 없이 존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마리도 마찬가지.
불편한 점이 많긴 해도 리나가 방패막이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주고 있다. 리나가 없었다면 아마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히리야도 대놓고 아델리아를 꼽을 줄 수가 없었기에 묵묵히 영지 곳곳을 둘러봤다.
중간중간 아델리아를 곁눈질로 노려보긴 했다만 그것 뿐이었다. 아델리아도 히리야의 따끔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자리 배치조차 히리야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배정된 상황이다. 마리-나-리나-히리야 순이다.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리나 선에서 차단하니 잠자코 안내나 받을 수밖에 없다.
“저 건물은 뭐지? 다른 곳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만.”
“아. 이번에 저희 영지로 이주하게 될 출판사입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 직원들까지 이주한다고 들었습니다.”
“흠. 제논 일대기와 계약된 유일한 출판사라···”
그렇다고 질문 자체를 막진 않았다. 불순한 의도가 담긴 질문만 막는 것이지 전시회와 연관돼 있는 건 막지 않았다.
히리야는 유독 돋보이는 규모를 지닌 출판사 건물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로서는 드물게 진중한 표정이었으며 하늘색 눈동자에는 호기심 또한 깃들었다.
아무래도 제논 일대기와 계약된 유일한 출판사이다보니 자연스레 호기심이 든 모양이다. 뒤이어 그녀는 시선을 내게로 옮겨 질문했다.
“사장과 만난 적이 있나?”
“네.”
“어떤 사람이지?”
“신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나오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히리야. 그녀는 다시 출판사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영지는 볼 때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제논의 출생지에다가 신전까지 세워지고 이제는 출판사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을 텐데 신기해.”
“··· ···”
지나가듯이 말한 거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제논의 출생지라는 메리트 하나로 전시회가 개최되고 더 나아가 신전과 출판사까지 세워졌다.
히리야의 눈에는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걸로 보이겠다만 내가 편지로 입을 턴 것도 있다. 덕분에 아버지가 서류에 깔려계시지.
하지만 여기서 아무 말도 없으면 히리야가 의심을 품게 된다. 리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우리 제국도 떨떠름하긴 해.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우리 제국에 제논이 태어났으니까. 이대로가면 문화 강국인 테르스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
리나의 은근한 도발에도 히리야는 코웃음치며 같잖다는 듯이 답했다.
“흥. 어림도 없지. 제논의 이름값이 뛰어난 탓에 많은 예술가들이 제국에 찾아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제논이 아직 제국민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거지. 문화란 본디 자국의 것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공연, 음악, 조각, 문학 등등. 미네르바 제국의 대부분의 문화는 사실상 우리 테르스에서 기초가 되었지.”
“그런 걸로 따지면 문화의 시발점은 엘프인데 모든 문화가 엘프 거라는 뜻?”
“뿌리가 같다고 해서 모든 가지가 똑같지 않고, 모든 가지에 열매가 달리는 건 아니지.”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이 서로 앙숙임과 동시에 라이벌이라는 걸 재차 각인시켜주는 두 사람의 대화.
리나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정치를 했기에 말빨이 좋은 건 알고 있었으나 천성 무골인 히리야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리나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으니.
무엇보다 말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무기는 ‘팩트’다. 히리야의 설명처럼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는 대부분 테르스 왕국에서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종족 전쟁 당시에도 테르스 왕국은 존재했으며 인간 연합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대했다.
하지만 사후 처리를 잘못한 탓에 미네르바 제국이 탄생하는 건 두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외교에서도 패배하여 미네르바 제국이 더 큰 영토를 갖게 됐다.
다만 그 영향 탓인지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는 테르스 왕국의 문화가 다수 섞여있다. 군사력은 막강하나 쉽사리 테르스 왕국을 점령할 수 없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테르스 왕국 쪽에서 역사를 들먹여 팩트로 조지게 되면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는 ‘명분’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니까. 미네르바 제국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가지려고 발악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설령 제논이 미네르바 제국민이라 해도 문제가 많지. 헬리움은 물론 세이비어 교국에서 가만히 둘까? 이름값이 너무 높아진 것도 문제가 될 거다.”
“··· ···”
리나는 히리야의 부가 설명을 듣고 말없이 나를 힐긋거렸다. 밝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에는 복잡함과 불안한 심경이 담겨있다.
리나를 비롯한 제국의 입장에서 나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대어다. 그러나 그 크기가 너무 커진 나머지 낚시대는커녕 그물에 걸리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대어가 아닌 배의 크기를 한참 웃도는 고래. 다른 쪽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어차피 테르스 왕국은 안 갈 거지만.’
이미 테르스 왕국의 인성은 확인한 지 오래다. 차라리 미네르바 제국 쪽이 훨씬 낫지.
나는 리나의 불안한 눈빛에도 걱정 말라는 듯이 싱긋 웃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리나도 내 표현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었는지 흔들리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히리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입 털기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기에 묘하게 집중이 된다.
“게다가 제논 쪽에서 전부 거절한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에 개최되고 있긴 해도 전시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니까. 이러한 포부를 지닌 사람이 어느 한 쪽에 소속될 거라는 생각은··· 솔직히 말해 들지 않는군.”
“그럼 히리야 왕녀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어느 한 쪽에 치중되지 않으면서도 제논이 편안한 생활을 하는 방향으로요.”
히리야의 설명을 듣고 있던 마리가 궁금해졌는지 질문을 날렸다. 나와 약혼을 맺은 이상 나에게 발생하는 일은 그녀에게도 필히 영향을 끼칠 터.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내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리였기에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현재 상황에서도 적절한 질문이기도 하고.
히리야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전부 거부하거나, 아니면 전부 받아들이거나. 이게 끝이지.”
“··· ···”
“헬리움은 받아들이든 말든 제논을 구원자로 칭송할테니 큰 의미는 없겠지. 그래도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할 거다.”
그거 이미 진행 중에 있는데. 심지어 세실리는 이미 내 연인이 된지 오래다.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마리의 표정을 슬쩍 확인했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지만 눈 밑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와 더불어 옆사람이 보지 못 하도록 손으로 내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옆사람은 몰라도 뒤에 아델리아가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 정체를 모르는 히리야조차 저런 말을 하니까 울컥한 모양이다.
“사실 전부 다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테고 제논 입장에서도 훨씬 나을거다. 서로 공평할 뿐더러 분쟁도 잘 발생하지 않을테니까.”
“··· ···”
문제는 히리야가 한 술 더 떴다는 것. 그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에 저런 말을 하고 있다.
여기만 해도 마리의 분노를 한층 더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하다. 허나 그렇다 해서 대놓고 표출할 수 없었으니 속으로 달래기만 할 뿐.
오늘 밤에 편히 자기는 그른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허벅지를 꼬집던 마리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더이상 질문했다가는 히리야에게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그만하라는 무언의 표시다.
그동안 리나는 히리야의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특유의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는 테르스 왕국에서 지원할 건 다 지원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까랑 말이 좀 다른 것 같은데?”
“만약 우리 왕국을 선택한다는 가정 하에 말한 거다. 물론 그럴 일은 0에 수렴하겠지.”
“그럼···”
리나는 잠깐 말을 흐렸다가 나를 힐긋거렸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장난기가 들어있다.
그 장난기에 살짝 불안해질 때쯤, 리나가 히리야를 향해 폭탄 발언을 투척했다.
“만약 제논이 너를 원한다면, 기꺼이 결혼할 용의는 있어?”
“뭐?”
“리나?”
리나의 질문에 히리야는 물론, 나와 마리 또한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뒤에 있던 아델리아마저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의도를 담아 저런 질문을 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애당초 나는 히리야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
아니. 그 전에 아델리아를 모질게 핍박한 전적이 있던 테르스 왕국과 엮일 마음 자체가 없다. 왕족의 인성이 개차반인데 받아들였다간 내가 다 피곤해질테니.
리나도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을텐데 어째서 저런 질문을 날린 것일까. 나는 당황도 잠시 가슴을 추스리며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봤다.
이윽고 머지않아 리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히리야는 우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썩 구미가 당기지 않는군. 난 물건처럼 팔려나갈 생각이 없다.”
“제논이 원하는데도?”
“아까도 말했지만 나 말고 라라도 있다. 그리고 나는···”
히리야는 뒷말을 삼킨 채 나를 힐긋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나가 빌드업을 차근차근 쌓아 히리야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인 것이다. 현재 히리야는 알량한 복수심으로 약혼자가 있는 나에게 집적거리고 있다.
그런데 방금 전 히리야 스스로가 이리 말했다. 제논이 원하는 건 왕국 차원에서 다 들어줄 거라고.
다시 말해 제논이 히리야를 원한다면 그녀는 불만 없이 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복수는 자연스레 이루지 못 하게 되겠지. 내가 제논이라는 부분?
히리야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녀 입장에서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이 온 것이다.
알량한 복수를 포기하고 제논에게 갈 것이냐, 아니면 제논의 뜻을 거스를 것이냐.
추측에 불과하지만 제논이 남자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로 밝혀진지 오래. 테르스 왕국 입장에서도 일종의 ‘성의’를 위해서라도 라라가 아닌 히리야를 보낼 수밖에 없다.
‘정치는 저렇게 하는거구나.’
히리야가 무리수를 던진 것이 가장 크지만 리나는 그걸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그나마 히리야에게 불행 중 다행인 건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
허나 리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하나를 포기하라는, 일종의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시했다.
현재 나에게 있어서 골치 아픈 부분을 본인이 직접 떼주고 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아델리아도 은혜를 입는 셈이다.
“왜 그래? 혹시 제논이 추측대로 나이 든 현자라는 생각 때문에? 회귀자라는 말도 있으니 어쩌면 잘생기고 젊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
“···그러는 너는. 너는 기꺼이 갈 생각인가?”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가야지. 제국을 위한다면 이 한 몸 정도는 바칠 수 있어. 어차피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우리 리나 진짜 입 잘 턴다. 그 올곧고 오만하던 히리야가 저리 쩔쩔매다니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가.
알고 모름의 차이도 있었으나 리나는 내가 제논임을 몰라도 저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상황과 히리야의 말을 서로 비교하여 찾아낸 ‘모순’을 통해 극딜을 먹였으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여태까지 쌓였던 비호감이 모두 날라가 호감 스택이 착착 쌓여간다.
···문득 그녀의 관음증이 떠올랐으나 이건 넘어가자. 개인 취향은 존중해야지.
“그래서, 대답은?”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거야. 테르스 왕국을 위하는 게 어떤 건지. 어쩌면 제논이 우연히 너를 보고 반할지도 모르지.”
리나는 그리 말하며 나에게 눈짓한다. 나는 그 눈짓에 한 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부정의 표시를 나타냈다.
히리야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확실한 미인이나 인성면에서 불합격이다. 게다가 아델리아도 있는데 반하기는 개뿔 편지 한 통 날리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부정을 표시를 나타냈다가 순간 아델리아가 생각나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현재 무슨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아델리아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이었으니 필시 반응을 보일 터.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전보다 의기소침해진 아델리아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비에 쫄딱 맞아 추욱 늘어진 강아지 같은 모습.
가족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자존감이 상당 부분 결여된 그녀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빨리 아델리아에게 내 정체를 밝히고 싶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선명한 하늘색 눈동자에 의문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그 눈을 보며 싱긋 웃어주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근무 중이라 어떻게든 표정을 숨기고 있지만 다 티가 난다. 그녀만의 매력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중이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어. 다음에 또 봐.”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저도 즐거웠습니다.”
이후로 정확히 2시간이 흘러 리나와 히리야가 제 갈 길을 떠나갔다. 남은 건 이제 세실리와 아르웬 뿐.
세실리와 아르웬의 안내는 점심 시간 이후로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자유 시간이라는 뜻.
나와 마리, 그리고 아델리아는 전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전시회를 관람했다. 지난 전시회처럼 다양한 작품들이 진열돼 있어 눈을 즐겁게 만든다.
이대로 점심 시간까지 이어지면 좋겠다만 커다란 규모의 행사인만큼 다양한 사건사고도 터지는 법.
특히 전부터 우려하던 사건이 터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응? 아이작. 저쪽 봐봐.”
“응?”
“저기 분홍 머리 남자 있잖아.”
마주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앞에 있는 여자··· 설마 체리 아니야?”
“··· ···”
체리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만남이라던지. 분홍 머리가 워낙 눈에 띄어서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마리가 가리킨 쪽을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큰일났다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와 아델리아도 내 뒤를 밟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깟 글에 집중할 바에야 철학 서적이라도 읽으라고 했거늘!”
“··· ···”
“당장 마차를 타고 가문으로 돌아가! 오늘부로 철학서를 제외한다면 책을 읽는 것조차 금지할 테니!”
가까이 가면 갈수록 로즈베리 백작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호통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체리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붐비는 와중에 혼을 내는 건 조금 아니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슬쩍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음?”
내가 끼어들자 로즈베리 백작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건 체리도 마찬가지. 체리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나를 쳐다봤다.
학기 초에나 보았던,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무슨 일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로즈베리 백작이 한 쪽 눈을 찡그리며 퉁명스레 되물었다.
“넌 누구지?”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체리를 바라보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로즈베리 영애의 아카데미 선배입니다.”
그러자 로즈베리 백작이 눈 밑을 꿈틀거리며 체리를 가리켰다. 다름아닌 검지 손가락으로.
딸이 아니라 마치 물건을 대하는 듯한 취급에 마음이 불편해진 것도 잠시, 로즈베리 백작이 나에게 물었다.
“넌 이 애가 체리인 걸 알고 있나?”
“물론이죠.”
“어떻게 알고 있지?”
나는 로즈베리 백작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답했다.
“제가 도와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