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63
■ 262화. 양날의 검 (1) □ ᓚᘏᗢ
‘철학’은 문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다. 어쩌면 근본 중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문학이다.
과학, 논리, 정치, 사상, 종교, 언어, 심리 등등. ‘왜?’라는 본질을 파고듦으로서 사람의 지식과 깨달음을 더욱 깊게 만든다.
만약 철학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나라는커녕 문명조차 제대로 가꾸지 못 했을 것이다. 설령 문명을 가꾸었더라도 철학을 다루지 않는 이상 발전을 기대해서 안 된다.
허나 철학이 마냥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건 아니다. 가장 큰 예로 여태까지 사골처럼 우려먹고 있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주인공, 히틀러가 있겠다.
히틀러의 잔악무도하고 비인도적인 철학은 놀랍게도 그 유명한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 또한 공산주의의 아버지 마르크스가 기원이다.
이처럼 철학은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이며 문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곳보다 문명이 몇 세기 이상 발달한 지구조차 철학이 없다면 도태될 것이다.
이 세상도 철학의 중요성은 두말 할 것 없다. 특히 무인이나 마법사, 그리고 성직자에게도 철학은 무시무시한 영향을 끼친다.
여느 소설에서 나올 법한 ‘깨달음’이 바로 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것들이 아니더라도 한창 발전 중인 이 세상에서 철학의 지분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네르바 제국의 철학가문, 로즈베리 백작가는 제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곳처럼 군사력이 강하거나 자본력이 강한 건 아니지만 로즈베리 백작가는 제국을 발전시키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기여했다.
심도 깊은 철학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잡은 건 기본이고 가장 큰 업적은 귀족과 평민의 차별 및 간격을 대폭 줄인 게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아버지가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남작은커녕 기사조차 되지 못 했을 정도. 그만큼 과거의 미네르바 제국은 평민을 향한 차별이 만연한 사회였다.
하지만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반감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철학은 왜? 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하기에 당연한 것들과 필연적으로 싸워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었으니.
쉽게 말해서 주변에 적이 많다는 뜻이다.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말발이 강하고 논리적인 탓에 재수없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조차 아테네 시민들에게 재수없다는 인상을 받았으니 말 다했지. 사실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 저 사람 다 붙잡고 철학적인 질문을 셀 수도 없이 날린 부분이 크다.
아무튼 이런 이유 탓에 로즈베리 백작가는 레킬리스 공작가처럼 권력만 없고 권위만 존재하는 가문이다. 공격해봤자 이득을 볼 건 하나도 없었기에 지금까지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인물은 언제나 썩기 마련. 철학은 그 특징상 절대 썩지 않지만 사람이 썩는다.
특히 로즈베리 백작가는 내부 분열이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하여 싸움 자체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히틀러나 스탈린의 예시처럼 잘못된 철학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만해지기 십상이다. 오만에 빠져든 철학자는 철학의 근본을 깔끔히 무시한 것이나 똑같다.
무엇보다 철학자가 자식 교육을 잘 시킨다는 법 또한 없지. 그 부모가 잘못된 철학을 받아들여 오만해진 경우라면 더더욱.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각자 주문했던 음료를 하나 하나 올리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내 앞에는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메리카노가 올려졌다.
그 앞에는 각각 진한 향을 풍기는 커피와 홍차가 올려졌다. 나는 그 음료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여전히 변장을 통해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체리와, 그와 반대로 분홍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중년 남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무슨 분홍 머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저건 어쩔 수 없는 ‘유전’이다. 내 머리카락이 빨간머리인 것처럼 중년 남자 또한 마찬가지.
게다가 분홍 머리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다. 중년 남자의 이름은 레티시 블라썸 로즈베리.
분홍 머리에서 보다시피 로즈베리 가문의 가주이자 체리의 아버지되는 사람이다.
“··· ···”
레티시는 음료가 나와도 험악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달리 푸른색 눈에는 강렬한 적대감이 담겨있다.
나 또한 그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했다. 우리 둘처럼 체리도 조신하게 앉아있을 뿐 그 어떤 말조차 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발전되는 마이샬 영지에 새로이 세워진 카페. 그것도 방음실이 존재하는 카페다.
구도를 보다시피 현재 방에는 레티시 백작, 체리, 마지막으로 나만 자리에 앉아있다. 마리와 아델리아에게는 잠깐 양해를 구하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부탁했다.
마리도 아델리아와 개인적인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며 흔쾌히 수락했고, 아델리아는 내 지시였기에 군말없이 따랐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달그락-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은 방에서, 드디어 레티시 백작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의 행동을 세세히 관찰했다.
중년의 나이답게 약간 주름진 손이었으나 울긋불긋한 힘줄이 유난히 돋보인다. 자세히 보니 흰색 예복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탄탄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철학가문이라 들었는데 겉보기에는 기사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풍채다. 개인적으로 따로 훈련을 하는 건가.
또한 분홍 머리라 해도 수염을 단정하게 기르고 머리 스타일마저 깔끔하여 미중년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내가 그의 인상을 천천히 뜯어보고 있을 때 레티시 백작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입에 갖다 대었다.
뒤이어 한 모금 마시고 맛을 음미하다가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달그락-
“자네가 체리를 이곳으로 초대했다고?”
찻잔을 놓자마자 날아오는 묵직한 질문. 통성명은 첫 만남 당시 나누었으니 본론부터 들어가는 모습이다.
레티시 백작은 엄연히 작위를 이어받은 귀족. 그러니 반말을 해도 상관없으나 한껏 예의를 차린 말투다.
이에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체리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음료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단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있을 뿐. 표정이라도 알고 싶었으나 그러기도 힘들었다.
어쩌면 괜히 자기 때문에 내가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존감이 극도로 낮은 체리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는 체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레티시 백작과 마주한 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이유로?”
“체리가 좀 더 다양한 문화를 접하기를 바랬으니까요.”
이건 진실이다. 체리는 현재 ‘메리’라는 필명으로 소설계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는 중이다.
회귀물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더불어 로맨스가 가미된 로맨스 판타지. 그녀의 책은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파란을 몰고 오는 중이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와 달리 체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민. 소재가 훌륭하다고 한들 막히는 부분, 즉 슬럼프가 머지않아 올 것이다.
그 슬럼프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더 나아가 지금보다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전시회에 초대한 것이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그래서일까. 레티시 백작은 내 말을 듣자마자 눈쌀을 찌푸리더니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무슨 권리로?”
오. 전형적인 꼰대 아버지의 질문이로군. 이 질문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바이기에 빙긋 웃으며 받아쳤다.
“새가 하늘을 날고 싶은데 도와줘야지, 어찌 막겠습니까?”
“··· ···”
내가 미소 지으며 명료히 받아치자 레티시 백작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이 새끼 봐라? 라는 표정이다.
나는 그 사이 얼음이 담겨있는 찻잔을 올리며 한 모금 마셨다. 후덥지근한 날씨였는데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한결 나아지는 것 같다.
참고로 얼음이 왜 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로 퉁치겠다. 이것 또한 생활 속에 녹아든 마법이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래. 자네 말대로 새는 날개짓을 통해 하늘을 비상해야 되지. 강에서 수영을 하는 게 아니라.”
레티시 백작은 내가 찻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달그락- 소리가 들리자마자 공격했다. 나는 저 말을 듣고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레티시 백작은 본인의 딸이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체리의 원고를 찢어버리다 못해 짓밟았던 이유가 있다.
정녕 저런 사람이 철학자가 맞긴 한 건가. 어쩌면 그릇된 신념을 지닌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하나 하나 상세히 파악해야겠지. 나는 레티시 백작의 청명한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백작님의 말씀대로 새가 수영을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백작님. 오리를 보시다시피 새라고 해서 수영을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수영을 해야 되는 종류도 있지요.”
“그렇다 해서 오리도 날개짓을 통해 하늘을 날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다. 시기에 따라, 그리고 계절에 따라 날아올라 장소를 옮겨야 하지.”
레티시 백작의 말이 맞다. 로즈베리는 철학 가문이며 체리 또한 철학 교육을 배워야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과하다는 게 문제다. 만약 레티시 백작이 체리의 꿈을 존중했다면 모를까, 모조리 박살냈다는 게 그의 실책이다.
이에 나는 말아올렸던 입꼬리를 유지하면서 맞은편의 레티시 백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하나만 질문하겠습니다. 날개짓을 강요하기 위해 오리의 다리를 제거하면 그 오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
레티시 백작은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단호히 말했다.
“죽겠죠.”
“··· ···”
“굳이 새가 아니어도 다른 동물을 비롯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를 강요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면, 결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세간에는 이걸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죠.”
처음 만난 상대에게, 그것도 나보다 높은 귀족에게 하는 말이라 보기에는 예의가 눈꼽만큼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떡하니 존재하고 있다.
제논 일대기가 아닌, 레킬리스 공작가라는 거대한 뒷배가. 제논 일대기는 최후의 최후의 카드로 쓸 예정이다.
나는 레티시 백작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없자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어차피 주도권은 항상 이쪽에 있다.
과연 말이 통하는 상대일지, 아니면 꼰대 그 자체인지가 관건일 뿐. 일단 그도 철학자일 테니 내 말을 통해 체리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지 얼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갈색 머리카락으로 변장을 했는데도 자기 딸인 걸 단번에 알아본 사람이다. 절대 관심이 적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너무 과도한 탓에 애가 망가졌을 뿐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전보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며 그에게 질문했다.
“로즈베리 백작님. 백작님도 체리가 소설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헌데 백작님께서는 그런 체리의 꿈을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짓밟았죠.”
“··· ···”
“전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전에.”
레티시 백작은 조용히 입을 열더니 날카롭게 뜬 눈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자네는 무엇이길래 이러는거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누구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레킬리스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유명하니까.”
데릴사위가 아니라 마리가 나한테 오는 건데. 하긴 표면적으로는 내가 공작가로 향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나는 딱히 수정할 마음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레티시는 전보다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자가 어째서 우리 딸에게 관심을 갖는 건지 모르겠군. 무슨 이유로 우리 딸에게 접근한 거지?”
내가 접근한 게 아니라 체리 쪽에서 접근한 거다. 그러나 이걸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다.
체리는 특유의 음습한 추리력(?)을 통해 내가 제논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나 또한 끝까지 잡아떼고 싶었지만 체리가 자살이라도 할까봐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밝힌 거고.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레티시가 착각할만도 하다. 어쩌면 약혼녀가 있음에도 여자나 밝히는 망나니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슬쩍 체리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일단 체리는 뒤로 하고 레티시 백작과의 대화가 우선이다. 나는 그와 마주하며 반 정도 거짓이 섞인 진실을 꺼냈다.
“우연히 체리의 글을 본 적 있습니다. 정말로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었죠.”
“··· ···”
“그리고 그 글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제논 일대기만큼이나.”
스윽-
본인의 글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럴까. 의기소침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체리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왔다.
두 눈은 아직까지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지만, 아까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모습이다. 워낙 어둡다보니 미세한 밝기로도 차이가 확연하다.
레티시 백작도 체리에게서 반응이 나오자 미간을 꿈틀거렸다. 왜인지 몰라도 못마땅하다는 반응이 역력하다.
나는 서로 상반되는 부녀의 반응을 확인하다가 이어서 말했다.
“체리의 글은 제논 일대기처럼 간결하지만 따스한 문체가···”
“그만. 그만하면 됐네. 대충 어떤 사정인지 알 것 같군.”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레티시 백작이 말을 끊어버렸다. 나는 하는 수없이 입을 다물며 그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레티시 백작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체리를 힐긋거렸다. 보아하니 그녀와 관련된 말을 하는 듯했다.
이윽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티시 백작의 무겁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자네는 철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철학말입니까?”
“그래. 철학.”
무슨 생뚱맞은 질문인 걸까. 나는 질문의 저의를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으로 답변했다.
마음 같아서는 ‘백작님보다는 모를 겁니다’라는 대답을 하고 싶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자 레티시 백작은 그럼 그렇다는 듯이 코웃음치더니 가소롭다는 뉘앙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특정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이지. 우리 가문은 미네르바 제국이 세워졌을 때부터 철학을 파고들어 나라의 근간을 지탱했다.”
“··· ···”
“나는 선조들이 보여준 철학과 탐구 정신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깨달았지. 철학에 정해진 길은 없지만 적어도 공인된 길은 걸어야 한다는 것을.”
저게 뭔 소리야. 그냥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 아닌가.
누누이 언급하지만 철학에 정해진 길은 물론이고 공인된 길조차 없다. 왜? 라는 근본을 해소하는 것이 철학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것이 과학적 검증이든, 논리적 검증이든, 아니면 사회적 검증이든 상관없다. 철학은 그 하나만으로 수많은 사상과 신념을 품기 마련.
그리고 사상과 신념은 어지간해서는 거대한 사건을 겪지 않는 이상 꺾기 힘들다. 허나 이건 잘못되고 심히 어긋난 철학이다.
철학은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고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결정적으로 증명해야 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공인된 길을 체리에게 걷게 하는 건가요? 설령 체리의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걸 희생으로 부르겠다. 다리가 부러져도 분명 다시 일어나겠지.”
“··· ···”
답이 없구나. 아니지. 그냥 전형적인 꼰대구나. 저런 말을 딸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말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사실 전생에서도 흔히 볼법한 부모의 종류다. 자식의 의지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잘못된 교육 방식으로 억압하는 부모들.
그 자식의 미래는 불 보듯이 뻔하다. 도망치듯이 독립하거나 삐뚤어지거나.
최악의 경우, 부모의 압력에 이기지 못 해 자살하거나. 체리는 바로 그 직전까지 도달했다.
나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 백작은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납득했다고 판단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납득한 모양이군. 이제 알았으면 내 딸에게서 떨어지게나. 괜히 이상한 바람을···”
“백작님. 제가 감히 하나만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넣어··· 음?”
레티시 백작은 내가 말을 끊자 1차적으로 당황하고, 방긋 웃는 내 얼굴을 보고 2차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꼰대에게는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겠으나 레티시 백작은 철학자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뜻을 알 수 있겠지.
나는 떨떠름해 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는 타살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나를 물로 보는 건가.”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백작님의 생각처럼 타살은 남이 사람을 죽이는, 즉 살인에 해당하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이어서 체리를 바라보면서 말을 잇는다.
“누군가 고의로 죽이는 게 아닌, 주변의 억압을 이기지 못해 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이건 과연 자살일까요···”
다시 한 번 레티시 백작을 바라보면 질문의 끝을 맺었다.
“아니면 타살일까요?”
“음···”
레티시 백작은 내 질문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본인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억압의 정도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타살이라고 볼 수 있겠군.”
“어째서죠?”
“사람은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리면 죽음을 도피처로 생각하게 되니까. 사람의 정신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거든.”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하마터면 백작님께서 살인범이 되실 뻔했는데 다행이군요.”
그 말과 동시에 가만히 지켜보던 체리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