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82
■ 281화. 억까 (4) □ ᓚᘏᗢ
모두들 인터넷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분명 있었던 게 갑자기 사라지는, 그야말로 황당한 일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도 몹시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다. 둘 다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똑같으니까.
현재 내가 그런 상황을 겪고 있다. 분명 없었는데 있다는, 심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머지않아 발매될 제논 일대기 21권에 나오는 마족의 악마화. 정확히는 내면의 악을 굴복시켜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
제논 일대기 속 알븐하임, 그러니까 엘븐하임의 악마 침공 당시에 두 엘프 영웅이 보여준 ‘합일’을 기억하는가?
그 당시에도 합일은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었다. 판타지 세상이니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상상 속에서 나오는 설정.
그런데 너무 위험한 나머지 소실된 금지 마법이란다. 심지어 합일 당시 펼쳐졌던 증상을 이론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
이것만 해도 충분히 어이가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명확히 ‘존재’했던 설정 아니, 마법이다.
선례가 존재하는 것과 선례를 만드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는 경향을 가슴 속 깊숙히 갖고 있다.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선뜻 발을 떼는 사람이 잘 없다.
그렇기에 이왜진과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왜진은 선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걸 밝히는 것이니.
세계수 뿌리의 오염, 악마 숭배자들의 존재, 헬리움의 결사단체 리퍼, 엘프의 합체, 타락한 추기경 등등.
여태까지 제논 일대기를 발매하면서 많고 많은 이왜진이 터졌지만 선례를 만드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마력 기관은 어떻게 설명할 거니?]‘그건 지구에도 있던 거잖아요. 양수기도 발명된 걸 보면 발명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을테고.’
나의 말마따나 마력 기관, 그러니까 증기 기관은 지구에서라도 존재하고 있다. 그래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지다.
하지만 악마화, 그러니까 마족이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는 건 선례가 없다.
악에 잠식되어 이성을 완전히 잃고 미쳐 날뛰는 경우는 있어도, 세실리가 나에게 보여줬듯이 이성을 유지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악마화도 악마화지만, 내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어떻게 제가 묘사한 거랑 똑같을 수가 있죠?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세실리가 나에게 말해줬다. 내면의 악은 제논 일대기에 등장한 진처럼 이미지 컬러가 완전히 반대였다고.
흑발적안의 마족과 달리, 내면의 악은 백발벽안이었으며 흰자위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심지어 악마화가 된 세실리의 모습조차 책의 묘사와 똑같았다. 아무리 문화의 차이가 있다지만 이정도면 신이 나를 억까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모라에게 찾아가 따지고 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진짜로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 하는 회귀자냐고.
이번 일은 선을 넘는 걸 넘어 소위 억까라고 불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하지만 내면의 악은 어디까지나 심상 속에 들어있는 감정이야.]‘심상이라고요?’
[응. 한 번 머릿속으로 내 모습이 어떤지 상상해보렴. 신화 서적은 많이 읽어봤잖니?]나는 뜬금없는 모라의 제안에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일단 고분고분 따랐다.
여태까지 읽었던 신화 서적에 따르자면 모라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녀다.
여기에 더해서 장난을 잘 칠 것 같이 생긴 미모까지. 말 잘 듣는 말괄량이처럼, 싱글벙글 웃는 미소가 어울리는 외모다.
[실제로는 좀 더 예쁘게 생겼지만 한 번만 봐줄게.]아. 그러시군요. 그림을 상상해도 보이는 모양이구나.
[아무튼 상상하는대로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지?]‘네.’
[심상이라는 건 바로 그런 거야. 본인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는 거지. 내면의 악 또한 마찬가지고.]‘그런 거라면···’
[세실리 그 아이가 상상하는대로 내면의 악의 모습이 바뀐다는 뜻이란다.]세실리가 악마화를 하면서 나에게 고백했다. 내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너무 궁금한 나머지 원고를 훔쳐봤다고.
그 후로 폐관수련에 돌입했으니 시기적으로도 딱 맞는다. 그리고 모라가 설명해준 대로 내면의 악이 심상으로 구현되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억지라는 건 변함이 없는데요?’
[억지는 내가 아니라 그 아이가 한 거지, 난 아무 잘못 없는데?]‘없다면서요!’
[당장은 없다고 했지,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았어.]대화가 되돌이표마냥 빙빙 도는 건 착각인 건가. 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마른세수를 했다.
일단 데스칼과 의논을 나누긴 하겠다만 그가 받을 충격은 나보다 훨씬 강할 터. 또한 21권 발매 이후 연설까지 할 것이다.
혼혈 사태 당시 아르웬이 혼혈임을 고백했던 것처럼, 세실리도 백성들에게 악마화를 보여줄 터.
내가 예상했던 것과 한참 동떨어져버린 상황에 어떻게 해야 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가까운 미래에 너를 포함한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건 없으니까.]‘지난번에는 저보고 위기가 있다면서요?’
[그건 사적인 위기. 나랑 오빠가 언급한 위기는 너의 미래 자체에 위협이 될만한 거야.]신들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다. 그걸 이용하여 아끼는 신자에게 언제 위기가 다가오는지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신성력에 따라 애매한 신탁을 내려줄 수도, 아니면 나처럼 직설적으로 알려줄 수도 있다.
또한 위기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갈리니 만능에 가까운 건 절대 아니다.
그래도 당장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위에 위협이 될만한 건 없다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저 말은 즉, 세실리가 연설을 할 때 헬리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한들 그녀에게 악영향이 가해질 일은 없다는 의미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미래를 아는 것 자체만 해도 미래에 큰 영향을 주게 돼. 그걸 감안하고 너에게 미래를 알려주는 거지.]‘타임 패러독스를 말씀하시는 거죠?’
[지구에서는 그렇게 부르나 보네. 네가 알고 있는 게 맞을거야. 무한한 ‘선택’ 속에서 하나를 골라 현재의 너에게 알려주는 것. 그 선택을 통해 미래라는 줄기가 생성되어 사건이 발생하는 것. 우리는 그걸 ‘운명’이라 부르고 있지.]‘···복잡하네요.’
한낱 필멸자 주제에 모라와 같은 초월자를 이해하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전생에서도 타임 패러독스는 모순 투성이었기에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공간이라면 모르겠다만 신화에서조차 ‘시간’은 신만이 겨우겨우 간신히 다스릴 수 있는 힘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시간을 되돌리고, 느리게 만들거나 빠르게 조작하는 신이라 해도 ‘흘러가는 시간’ 그 자체만큼은 막을 수 없다.
‘아무튼 세실리 누나가 사람들 앞에서 악마화를 시전해도 문제는 없는 거죠?’
[문제없어. 오히려 마족들은 기뻐할걸? 마족들은 본인이 시한폭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항상 불안감을 달고 다니거든. 내면의 악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세실리가 명확한 선례가 되어줄 거고.]출생과 동시에 저주받은 종족, 그게 바로 마족이다. 마족에게 있어서 내면의 악은 본인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든 원흉이다.
이 탓에 제대로 된 감정 표현조차 힘들었을 뿐더러 이종족과의 만남을 다소 꺼리고 있었다. 이건 제논 일대기 출간 후에도 마찬가지.
다행히 현재는 전시회를 기준으로 상당 부분 완화되어 다른 종족과 정답게 어울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본인들 스스로가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면은 악을 완전히 배제한 채 평범한 인류처럼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마족에게 있어서 평생의 숙원이겠지.
‘세실리 누나가 어떤 연설을 할 지가 궁금하네.’
그리고 세실리가 연설을 통해 그 숙원을 완벽히 해소시켜줄 것이다.
다만 아르웬의 연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일 확률이 높다. 악마화까지는 좋으나 시기가 문제였으니.
헬리움의 귀족들은 물론 국민들이 보기에 세실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면의 악을 억눌렀는지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이게 바로 관건이다. 어떤 방식으로 의문을 해결하냐에 따라 연설이 성공적으로 끝날지, 아니면 찝찝함으로 남게 될지 갈릴 터.
아르웬은 본인부터가 혼혈에다가 내가 도와줘서 망정이지, 이번 헬리움의 연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마땅히 없다.
[그건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재미있는 상황이 나올 뿐이지.]‘···모라님?’
루미너스도 아니고 모라가 저리 말하니 너무 불안하다. 어머니의 헬리움 방문이라는, 명확한 선례를 남겨놓았는지라 더더욱.
하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될까. 모라는 이번에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는지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어차피 내가 말해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말 안 할게.]‘···마음대로 하세요.’
이제는 대꾸할 여력도 없다. 나를 아껴주는 건 맞지만 장난기가 세실리보다 심하다보니 상대하기 골치 아프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다소 지쳐있는 음색으로 모라에게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어야 하는 건가요? 이제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발생하는 상황인데.’
[한두 번 정도는 발생하지 않을까?]‘모라님도 확정을 짓지 못 한다는 거예요?’
[네 선택에 따라 미래가 바뀌니까. 그래도 귀찮은 일이 생길 뿐이지 위협이 될만한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그럼 다행이네요.’
그냥 물 흐르는대로, 의식이 흐르는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왜진이 터지는 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자기실현적 이왜진은 이번이 처음이라 멘탈이 터져버린 모양이다.
모라에게 억하심정을 풀면서 멘탈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것 같지만, 아직 남아있는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세실리가 나를 환생자로 단정 지어버렸다는 것.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는 속담처럼, 본인이 억까를 했음에도 내가 환생자인 걸 알아차렸다.
아르웬의 발언 이후부터 알음알음 의심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확정지은 것이다.
물론 껄그럽다거나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은 언젠가 가족들에게 밝힐 생각이었으니.
하지만 부담스러웠다. 멀리 가지 않아도 케이트가 나를 숭배하는 수준인데 세실리도 이와 비견될 정도로 과해졌다.
마족을 구원하기 위해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성자라니, 신들이 무리를 했기에 넘어올 수 있는 거라니 등등.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만 좌르륵 나열하고 있어서 섣불리 밝히기가 애매하다.
[그냥 말하지 그러니? 어차피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도 힘들텐데.]‘일단 세실리 누나한테만 말할 생각이에요. 나머지는 천천히 밑밥을 깔아야죠.’
[아르웬 그 아이는?]‘아르웬도 저를 환생자라 생각하는 거예요?’
[음··· 그 애는 좀 복잡하긴 하지. 평행세계라고 아니?]평행세계가 왜 갑자기 나오죠.
[그 애는 제논 같은 영웅이 나타나지 않은 제논 일대기, 그러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네가 이쪽으로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중이란다. 엘프 여왕과 카이르의 이야기, 그리고 제논과 메리의 이야기를 모두 겪었다고 생각하는 중이지.]‘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네가 여태까지 그 애에게 보여준 호의를 잘~ 생각해보렴. 착각을 하나 안 하나 궁금하네.]비꼬는 거야, 아니면 놀리는 거야 뭐야. 아무튼 아르웬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나로서는 기가 찰 뿐이다.
다양한 의미로 높아진 나의 위상과 아르웬의 착각, 그리고 환생했다는 떡밥이 절묘한 시너지를 이루어 저렇게 된 것일까.
더군다나 아르웬은 알븐하임의 여왕이니 더욱 몰입했을 것이다. 아주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다.
나는 머리가 점점 지끈거림을 느끼다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앞으로 무념무상으로 글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아… 알겠어요. 포기하는 게 편하겠네요.’
[잘 생각했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인 건 알고 있지?]‘당연히 알고 있죠. 아, 하나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말해보렴.]‘세실리 누나처럼 마족이 내면의 악을 쓰러뜨리면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 궁금해요.’
[그건 어떤 악마의 후예인지에 따라 달라. 그 아이 같은 경우는 서큐버스의 후예라서 몸매와 분위기가 좀 더 농염해지지. 겸사겸사 정기 흡수에 특화된 몸으로 변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알다마다. 어제 세실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제대로 쥐어짜였다.
이런 말을 하기에 민망하지만 세실리의 안은 전보다 더욱 진화된 상태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3분 카레가 된 느낌이다.
여기에 대해서 악주기 당시와 못지 않은 체력과 욕망까지. 만약 신성력을 미리 받지 않았다만 하루 내내 잠만 잤겠지.
‘그럼 매일매일 그렇다는 소리인 건…’
[그건 아니야. 악을 굴복시킨다는 건 그 힘을 얻는다는 뜻이거든. 그 힘에 욕망도 포함돼 있어서 그런 것 뿐이지.]‘악주기는 전처럼 똑같이 진행되나요?’
[웬만한 건 다 똑같아. 악마가 되었을 때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 빼면은.]혹여 세실리가 매일매일 발정 상태에 있을까봐 무서웠는데 천만다행이다. 진짜로 그랬다면 모라가 진지하게 경고했겠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의 일을 천천히 설계했다.
설계라고 해봤자 머지않은 미래에 세실리가 펼칠 연설을 빼면 마땅히 없다.
환생자라 고백하는 것도 지금부터 천천히 밑밥을 깔면 된다. 느닷없이 나 환생자요, 라고 하면 이상할테니.
이후로 모라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신성력을 받고 돌아갈 찰나였다.
[아참. 한 가지 조언하자면 곧 있을 미래에 큰 분기점이 찾아올 거야. 너에게 꽤 중요한 분기점이겠지.]‘분기점이요?’
[응. 분기점이 다가오고, 네가 내린 선택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겠지.]‘안 좋은 미래인가요?’
내 불안한 질문에, 모라는 매우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 다 고생을 좀 할 거야. 위기는 없겠지만, 많이 바쁘겠지.]‘언제쯤 오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이어서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 달 후에.]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