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87
■ 286화. 사칭 (1) □ ᓚᘏᗢ
세실리의 연설 이후로 모두가 우려하는 점이 하나 있을 것이다. 말은 쉽지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는 게 어디 쉽겠냐고.
그 내면의 악을 이기지 못하여 마족이 저주받은 종족이라 칭하는 건데 가능한 이야기겠냐고.
사실 위의 말 모두 맞는 말이다.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된 세실리조차 사흘이라는 시간동안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는데 전념했다.
그 여파로 견고하게 설계돼 있던 수련장이 거의 반파되었을 뿐더러 완전히 받아들이느라 욕망까지 채워졌다.
이렇듯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는 일은 매우 고단하고 위험한 일이나,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우선 내면의 악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내면의 악은 마족이 태어남과 동시에 가슴 속 깊숙히 품고 있는 것으로, 악마의 잔재나 다름없다.
마족이 극렬한 감정 변화를 겪을 시, 내면의 악이 증폭되어 악마가 된다. 이 원리가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마족이 악마가 되는 경우가 몹시 드물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닌 말로 단순히 짜증 나는 일이 있거나 말다툼을 통해 악마로 변하는가? 그랬다면 헬리움은 진작에 무너졌거나 악마들의 소굴로 전락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대와 세대를 거치고, 모라의 신성력 덕분에 내면의 악이 마족을 시시때때로 괴롭히는 현상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므로 눈 앞에서 가족이나 사랑하는 연인을 잃는, 말 그대로 참혹한 비극을 겪지 않는 이상 악마로 변하는 일이 없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내면의 악을 억지로 끌어내어 굴복시키는 전제조차 성립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나마 악주기에 내면의 악이 꿈틀거리는 걸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으나, 그걸 증폭시키는 일은 몹시 까다롭다.
심지어 모라가 말했듯이 내면의 악은 심상 즉,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직접 대면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명상 즉, 지금까지 미덕으로 삼았던 ‘절제’가 반드시 요구되는 일이며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사춘기, 그러니까 소악마 시기에 돌입한 어린 마족들이 뭣도 모르고 내면의 악을 굴복하겠다고 설쳐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면의 악은 수 세기 동안 모라의 신성력으로 희석되었기 때문에 ‘고작’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대면조차 할 수 없고, 오직 극렬한 감정 변화만이 열쇠가 되는 법이다.
물론 이렇다 해도 부모님의 양육 난이도가 높아지는 건 매한가지. 또한 세실리의 나를 향한 마음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여튼 세실리의 연설은 마족에게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부여해준, 일종의 결집력 강화다.
안 그래도 단합력이 끈끈했던 마족이었는데 여기서 더 강해졌으니 그들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리라.
자칫하면 전생의 무슨 당처럼 극단적으로 변하거나 우월의식으로 점철될 수도 있지만, 현재 마족은 자만심보다 자신감에 가까웠기에 당장 고려할 점은 아니다.
‘근데 아르웬은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세실리의 연설이 끝나고 다음 날. 헬리움의 도움을 받아 아카데미로 복귀한 나는 신문에 실려있던 아르웬의 말을 여러번 곱씹었다.
릴리스의 모티브가 세실리라면, 엘리샤의 모티브는 자신이라는 그녀의 말.
엘리샤는 모두 알다시피 카이르의 연인이자 제논 일대기 속 엘프 여왕이다.
의회에게 시시때때로 견제를 받을 뿐더러 결국에는 사랑하는 인간 남자, 카이르에게 제대로 고백조차 하지 못 하고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엘프.
세세히 따지고 보면 모티브가 된 건 틀린 말이 아니다. 의회는 원로원이 모티브였으며 주변인들에게 들은 걸 토대로 엘리샤를 묘사했으니.
더욱이 제논 일대기에서도 종족 전쟁이 발발했을 뿐더러 다크 엘프마저 추방당한 상황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만든 소설이므로 모티브가 되었다는 게 마냥 헛소리가 아니라는 뜻.
그러나 인물이나 단체면 몰라도 스토리는 어디까지나 내 상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걸 모티브로 삼았다고 해야 될지,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될지 여러모로 애매한 상황이다.
‘견제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되나?’
현재 헬리움의 주가는 나날이 폭증하는 중이다. 이미 그전부터 인식이 떡상하고 있을 뿐더러 세실리의 연설을 통해 날개를 달아버렸다.
엘프 입장에서는 자신과 대등한 마족을 견제해야 되니 저런 발언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심지어 내가 저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편지를 쓰기에도 난처하다. 모티브가 된 건 엄연한 사실이었으며 아르웬도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으니.
더욱이 아르웬은 착각할만한 요소들이 즐비해 있다. 우선 다른 세상, 그러니까 영웅이 없는 제논 일대기 세상에서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한 세상에서 자신을 모티브로 삼은 등장인물과 스토리가 나온다? 지구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상으로는 철썩같이 믿겠지.
하물며 레인의 초고 도난 사건와 혼혈 사태 때도 호의를 보여줬다. 착각할 여지가 많아도 엄청 많다.
‘그런 거라면 카이르가 누구인지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세실리와 아르웬. 두 여자는 태생부터 시작하여 성장 과정까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책 속의 등장인물을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걸 넘어 미래의 일로 확정하고 있다는 것.
그런 거라면 본인의 연인 또한 찾아야 정상이겠지만, 아르웬은 몰라도 세실리는 나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어쩌면 아르웬도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카이르를 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과거가 불투명하게나마 밝혀진 릴리스와 달리 엘리샤는 카이르와 과거를 함께 지냈다.
특히 카이르는 ‘약화된 강자’라는 클리셰 때문에 패배했지만 제논 일대기 세계관 기준으로도 수준급 무력을 보유 중이다.
반면에 나는? 신성력을 갖고 있다지만 하드웨어(체력)만 더럽게 강한 인간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육체 재능이 뒤늦게 발휘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무술조차 배운 적이 없어서 활용을 못 하고 있다.
‘그래도 선전용으로는 잘 써먹겠지.’
이 세상의 사회 문화는 중세에 가깝지만, 매일매일 발간되는 신문을 보자면 르네상스 그 이상의 문화를 갖고 있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내 기준으로 언밸런스한 문명 덕택에 선전에 제대로 성공한다면 그 국가의 결속력은 한층 더 단단해진다.
특히 성서라며 추앙까지 받고 있는 제논 일대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면 그 효과는 배로 강해질 터.
‘이젠 정치적으로 이용해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며 신문을 펼쳤다. 신문을 펼치자마자 다양한 주제로 갑론을박이 오고 가는 중이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제논 일대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걸 꺼려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당장 나조차도 제논 전시회와 우리 영지를 위해 편지로 입을 털고 있는 마당에 꺼려 한다면 내로남불이지.
[현재 모라 교단의 신도들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중이다.] [헬리움의 잠재력과 더불어 세이비어에서 타락한 추기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로···] [루미너스는 전사에게 활력을 주고, 모라는 전사에게 안식을 선사한다.]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모라를 신봉하는 게···]특히 헬리움은 이번 연설을 통해 얻은 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종족도 종족이지만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바로 ‘종교’.
헬리움은 모라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세이비어처럼 국민들 대부분이 모라를 신봉하는 중이다.
세이비어 입장에서 자신들과 대응되는 헬리움을 견제해야 하나 상황이 넉넉하지가 않다.
몇 개월 전에 타락한 추기경이 실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세이비어에 의문을 품은 성직자들이 대폭 늘어난 상황.
여태까지 모라는 빛과 대응되는 어둠의 신에다가 마족이 신봉하여 인간들이 꺼려 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신문에서 보다시피 모라를 신봉하기 시작한 인간의 숫자가 서서히 늘어나는 중이다.
이 세상은 특정 종교만 믿어야한다는 법이 없어서 루미너스와 모라, 두 신을 동시에 믿어도 상관없다.
특히 아버지처럼 PTSD로 고생하는 군인이나 전사들에게 모라의 신성력이 좋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는 중이다.
‘전투에 나설 때는 루미너스의 가호를, 정신적으로 고생할 때는 모라의 가호를 받는 식인가?’
아무튼 간에 많은 수의 인간이 모라에게 신앙심을 품기 시작했으니 세력도 커질 것이다.
어쩌면 먼 훗날, ‘종교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념 갈등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다른 곳도 아닌 알븐하임에서 손 놓고 있진 않겠지.
알븐하임은 본인들의 과오로 인해 뿌리가 같았던 다크 엘프가 떨어져 나갔던 아픔이 있었으니.
정말이지, 세실리의 연설 하나로 세상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는 중이다.
그동안 나는 뭐 하는 중이냐고? 뭐하긴, 글이나 써야지.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제논 일대기 22권을 작성하면서 중간중간 오해를 풀기 위한 편지를 작성할 뿐.
다행히 현재 세상은 제논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집중하는 중이다.
가끔 가다가 이 모든 일이 제논 일대기의 영향이라는 기사도 있었으나 이건 매번 보는 거라 별 감흥이 없다.
‘걱정되는 건 히리야뿐인데···’
나는 신문을 바라보다가 전속 메이드가 아닌 호위 기사로 아카데미에 돌아온 아델리아를 떠올렸다.
본래라면 전속 메이드의 권한을 지닌 채 돌아와도 상관없지만, 전속 메이드는 모시는 사람의 곁을 반드시 보좌해야된다.
이건 권리가 아니라 제국에서 지정한 ‘의무’여서 내가 거절할 수 없다. 무엇보다 아델리아와 같은 방에 있으면 마리가 매우 불편할 터.
그래서 지금은 호위 기사로 복귀해 따로 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연설 당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히리야의 시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분명 무언가 눈치 챈 표정이었는데.
그게 뭔지 헷갈리니 참으로 답답하다. 그녀의 성격상 대놓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런 징조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어찌저찌 피해다니는 중이어도 확신이 선다면 나에게 접근할 터.
어쩌면 같이 좆되보자라는 심정으로 내가 아닌 아델리아를 건드릴 수도 있다.
‘일단 22권이나 쓰자.’
나는 신문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는 가르츠의 도움을 통해 미리 옮겨놓았던 타자기가 올려져 있다.
방학동안 아델리아의 보조 덕분인지 집중에 빠져들어도 1시간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휴식 때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준다면 작업 속도가 더욱 가속되었다.
지금도 아카데미에 돌아오고 22권을 작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4분의 1페이지에 다다랐다.
‘질투의 전투는 꽤 오래 이어질 것 같네.’
원래 구상했던 질투는 찌질한 악역이었으나 아델리아의 허락 이후로 입체적인 악역으로 변할 수 있었다.
주인공, 제논의 완벽한 안티테제임과 동시에 누구라도 공감할만한 과거.
무엇보다 ‘질투’라는 죄악에 잘 어울리는, 세상과 제논을 향한 시기 어린 포효까지. 이 모든 게 어우러져 훌륭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이 정도면 질투를 진주인공으로 해도 되겠는데?’
꽤 괜찮은 연출이 될 것 같다. 최종보스가 진주인공이 되는 클리셰는 이미 사크란을 통해 보여준 적이 있다.
독자들도 질투의 최후를 본다면 그가 진주인공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겠지.
겸사겸사 질투를 대표하는 명대사까지 넣으면 완벽하다. 그리고 전생에서 질투의 캐릭터성에 어울리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신들에게 가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내면의 복수심을 불태워 결국 신들을 깡그리 학살하는 빡빡이 신살자.
[보아라! 빌헬름! 그리고 케스타! 네 놈들의 가족이 돌아왔다! 이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어주마!]평소 감정 변화가 없던 질투가 등장 이후 맨 처음으로 격양된 목소리로 포효하는 외침이다.
혈육을 향한 질투의 증오는 사탄보다 훨씬 강하다. 세상을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을 죽이려 들겠지.
이것만 본다면 질투보다는 ‘분노’에 어울리지 않냐고 할 것이다. 아마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터.
이걸 잘 풀어가는 것이야 말로 내 역량을 다시 한 번 입증할 수 있다. 그만큼 질투라는 캐릭터가 입체적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만약 22권 발매 이후에 히리야가 나에게 온다면···’
나를 완전히 제논이라 단정지은 거겠지. 아직은 의심 단계지만 22권이 발매된다면 확신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지만 모라가 알려줬다.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라고.
무슨 선택을 하던 간에 고생길이 열리는 건 똑같다. 지금부터라도 대비해야 될 터.
‘이제 슬슬···’
밝힐 때도 되었지. 나는 타자를 치면서 피식거렸다.
‘일단 정세가 혼란스러우니 지켜보기만 하자.’
이런 말이 있다. 강 건너 불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더군다나 현재 나, 그러니까 제논은 태풍의 눈에 있다. 주변은 난리도 아닌데 나 혼자만 고요하다는 소리.
‘다음에는 무슨 뉴스가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한 것도 며칠.
[속보! 자신이 바로 카이르의 모티브가 될 사람이라고 우기는 인간 남자가 알븐하임에 나타나···!]세상은 넓고.
[이름을 날리는 모험가 및 용병들이 스스로를 카이르라 칭해···] [현재 이들은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을 향해 구애를 하는 중이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명이 등장하여 알븐하임의 새로운 골칫덩어리로 부상하여···] [과연 이들 중에 카이르가 있을까?]미친 새끼들은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