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9
■ 28화. 모임 (3) □ ᓚᘏᗢ
본래 사람의 첫 인상은 오래 가는 법이다.
첫 인상이 좋다면 특정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 사람에게 호감을 품기 마련이고, 그 반대라면 아무리 그 사람이 선행을 펼쳐도 고까운 시선을 보내 거나 그럴 일 없다고 부정한다.
이른 바 ‘색안경’을 끼게 되는 건데, 이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만큼 사람 관계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잭슨은 나에게 앙심을 품은지라 내가 뭘 하던 간에 싫어할 놈이다.
“아는 사람이야?”
기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니콜이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잭슨이 나를 불편해한다는 것정도는 알아챘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부터가 ‘친구’가 아닌 ‘아는 사람’이었다. 일단은 ‘아는 사람’이 맞긴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은 문학생이야.”
“아~ 그렇구…”
“네 놈이랑 나를 같은 동급이라 생각하지마.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까.”
니콜이 말을 하기도 전에 잭슨의 폭언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 니콜은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잭슨은 방금 전 폭언이 진심이라는 듯, 사뭇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선민사상에 찌들어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할 줄은 나도 몰랐다.
“괜히 기분만 잡쳤군. 이봐, 이거랑 저거는 얼마지?”
“네? 그… 총 합쳐서 27골드 59실버입니다만…”
1골드는 대한민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만원이다. 그리고 1골드는 100실버이니 대충 276만원이라고 보면 된다.
잭슨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도 못마땅한 기색을 보일 뿐, 가격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쯧. 디자인은 형편없는데 쓸데없이 비싸군. 렉스, 가격을 지불하고 따라와.”
“알겠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의상을 대충 벗어던지고 렉스라는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렉스는 잭슨이 바닥에다 내팽겨친 예복을 주섬주섬 주워들었다.
이어서 잭슨이 명령한대로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자루를 꺼내더니 하나하나 셈을 하고 금화를 종업원에게 전달했다.
“여기 28골드입니다. 잔금은 됐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뭐해?! 빨리 안 와?!”
시종이 결코 느린 것도 아닌데 잭슨이 짜증 가득한 고성을 내질렀다. 종업원은 그 고성에 움찔한 반면 렉스는 늘 있던 일이었는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빨리 빨리 좀 다녀. 그리고…”
잭슨은 시종을 갈구고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매서운 눈빛에도 꿋꿋이 마주했다.
한동안 나를 지그시 노려보던 그는 내 옆에 서 있는 니콜을 한 번 힐끔거렸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설마하니 누이와 같이 예복 사러 온 건가? 설마 신입생 모임에 참석할 생각은 아니겠지?”
“맞는데.”
“… …”
다 필요없고 비아냥에는 무뚝뚝한 대답으로 응수하는 게 최고다. 잭슨은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받아치자 눈 밑을 꿈틀거렸다.
잠깐 표정이 깨졌던 잭슨이지만 이내 비웃음을 담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참석하면 알게 되겠지. 고작 네 까짓 게 들어올만한 자리가 아니라는걸.”
“… …”
“가자, 렉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 말을 끝으로 잭슨이 발걸음을 옮겨 멀어지기 시작했다. 렉스라는 시종은 떠나기 전, 고개를 뒤로 돌려 나와 마주했다.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이후로 시종은 본인이 다 미안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죄했다. 주인과 달리 시종이 인성면에서 더 완벽하다.
“…저 새끼 뭐니?”
머지않아 잭슨과 시종이 완전히 떠나갔을 때 즈음, 니콜이 분노와 황당이 두루 섞은 목소리로 물었다. 욕까지 섞은 게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다. 약간 과장해서 그녀는 당장 누구 하나 처죽일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솔직히 나 같아도 형제자매가 다른 사람에게 대놓고 모욕을 받으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나는 잭슨이라는 놈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니콜이 이해해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는대로 알려줬다.
“잭슨이라고, 나를 싫어하는 놈이야. 듣자 하니 어디 돈 많기로 유명한 백작가 출신이라던데?”
“돈 많은 백작가라면… 케리손?”
“어? 맞아. 어떻게 알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지. 케리손은 부유함으로 따지자면 제국 내에서도 10위 안에 들거든.”
케리손 백작가가 유명하긴 유명한 모양이다.
“근데 왜 저 놈이 너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나는 일단 니콜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줬다. 첫 수업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집적거렸던 잭슨을 시작으로 그 다음에 이어진 일들까지.
그 대신 세실리와 리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예쁜 여학생들’이라고 둘러댔다. 니콜도 그 두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테니 괜히 언급했다간 내가 골치아픈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아무튼 그 때문에 설명이 좀 길었지만 니콜은 전부 다 이해했는지 간단하게 요약해줬다.
“…그냥 저 놈 혼자 지랄하는 거네?”
“그런 셈이지.”
니콜의 말처럼 잭슨은 혼자서 열폭하고 있는 거다. 본인이 호감을 품던 여자들이 나와 친하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더군다나 그 여자들은 잭슨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수준이다.
물론 포기하지 않고 가끔 기회가 될 때마다 말을 걸지만 세실리도 그렇고 리나도 사무적으로 대한다. 특히 저번에 자리 배치 건으로 잭슨을 향한 호감도가 더 떨어졌지 않았을까.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데 딱 잭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아이작. 만약 쟤가 너를 직접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면 누나한테 말해. 누나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알겠지?”
그사이 니콜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과 마주했다.
걱정이 듬뿍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어…”
잭슨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면 리나가 먼저 손을 쓰지 않을까. 아니면 나와 친한 마리가 처리해줄 수도 있다. 마리는 잭슨과 달리 권위의식이 없을 뿐이지 무려 백작을 ‘따위’로 만들어버릴 공작가의 딸이니까. 그러나 내가 가르쳐주기 전까지 니콜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에 니콜은 내가 눈을 데록데록 굴리기만 하자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분노에 찬 얼굴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었으며 상냥한 미소만이 담겨있었다.
“설마 누나한테 문제가 생길까봐 대답을 못 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마. 누나도 인맥이 좀 있거든.”
“…알았어.”
“그럼 이제 옷을 사볼까? 저기요?”
“아,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니콜의 부름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여종업원이 후다닥 달려왔다. 말끔한 피부와 더불어 어리숙해 보이는 인상이다.
“얘한테 입힐 옷이 필요해서 그런데 빨간색 정장이 있나요? 얘 머리색과 최대한 비슷한 색으로.”
“음… 선홍빛 정장이라… 잠깐만요. 우선 치수부터 잴 게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내 예복을 맞추는 일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종업원이 줄자를 가져오자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에 종업원은 흠칫하더니 내 눈치를 보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몸에 손을 대도 될까요?”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까 손님은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하셔서…”
“… …”
이놈은 오기 전에도 진상을 부리고 갔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대답했다.
“…전 괜찮으니까 그냥 해도 돼요.”
치졸한 계급 사회 같으니라고.
* * *
주말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심신의 피로를 달래기도한다.
그리고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는 주말을 리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고나서 처음으로 사귄 인간 친구였으며 취미도 맞으니 그녀에게 리나만큼 편안한 상대는 없었다.
비록 리나가 제논 일대기 8권의 내용을 발설하여 다투기도 했지만, 리나가 먼저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세실리도 리나와 거리가 멀어지는 건 한사코 사양했기에 리나의 사과를 받아줬다.
“자. 여기 있어.”
고풍스러운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어느 카페 안.
리나는 동그란 탁자 위에 책 한 권을 올려놓으며 맞은편의 세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책의 정체는 다름아닌 최근 출판된 제논 일대기 8권이었다.
세실리는 탁자 위에 올라간 제논 일대기 8권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으로 잡았다. 뒤이어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확인했다.
잠시 후, 리나가 전달해준 책이 진짜라는 것까지 확인한 세실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책을 덮었다. 리나는 그녀의 행동에 다소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날 못 믿어서 검사한 거야?”
“응. 책 커버만 바꾼 걸 수도 있잖아. 요즘에는 그런 사기 행위가 성행한다고 들었거든.”
“그 말, 나한테 상처가 되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당연히 장난이야, 장난. 리나가 나에게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약간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지만 리나는 꾹 참았다. 자신이 세실리에게 저질렀던 죄악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지는 와중에 누군가 결말을 발설해버리면 분노하길 마련이다. 설령 실수로 말했다고한들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도 리나는 제논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세실리에게 알려줬다. 세실리가 당연히 8권을 읽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다.
이후로는 세실리가 드물게 화를 내고, 리나도 기분이 나빠져 언쟁까지 벌였다. 다행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해를 했다만 그 뒤로 세실리는 리나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
“후우… 알겠어. 그리고 당부하는데, 내가 8권을 대신 구매해줬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 알겠지?”
“물론이지. 이 비밀은 무덤까지 안고 갈게.”
리나는 8권을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세실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녀가 무덤에 들어갈 때 즈음이면 아마 자신의 후손도 같이 들어가지 않을까.
잠깐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됐지만 리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8권이 아니라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묻는거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할만해?”
“아직은 문제없지. 리나가 도와주는 걸?”
“아무리 나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혹시 신경쓰이거나 궁금한 점은 없어?”
세실리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간 사회에서 생활하는 건 처음이다. 다행히 마족의 문화는 인간의 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아 지금까지는 무리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가다가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가장 큰 예시가 바로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면 마법은 금지이기에 리나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궁금한 건 딱히 없고 신경 쓰이는 거라면… 모임?”
리나의 질문에 세실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툭- 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리나는 한쪽 눈을 살짝 치켜떴다. 세실리도 리나를 따라 신입생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한 참이다.
“모임? 모임은 왜?”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궁금해서. 신입생 모임은 문학 뿐만 아니라 무학생들도 오잖아.”
“맞아. 그래도 제논 일대기는 꼭 들어갈 걸? 이건 확신할 수 있어.”
“확실히 네 말대로 제논 일대기가 빠지면 섭하지.”
제논 일대기는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모임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다. 하물며 최근에 신권도 발매되었으니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실리는 모임 때 무슨 옷을 입고 갈 거야?”
“난 헬리움에서 갖고 온 드레스가 있어서 그거 입고 갈 생각이야.”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 수 있어?”
“어떻게 생겼냐면…”
세실리는 리나의 질문에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옷을 묘사하는 것 정도야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다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다.
리나도 세실리가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실리가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리나의 얼굴은 놀람을 넘어 점점 멍해졌다.
더 나아가 종래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졌는데, 리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중간에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정확하게 세실리의 가슴 쪽. 사복을 입은 지금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다.
리나는 그로부터 시선을 살짝 더 들어올려 세실리의 얼굴과 마주했다. 설명을 모두 마친 세실리는 태연한 표정 그대로였다.
“…정말로 그런 걸 입고 모임에 참석할 생각이야?”
“응. 문제있어?”
“아니. 문제는 없는데…”
리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세실리가 설명해준 드레스의 외관은 분명 단조롭다.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너무 단조로워서 문제라 해야 할까. 리나는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야하지 않을까?”
그에 세실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난 뭘 입던 간에 야할 걸?”
“… …”
직설적인 대답에 리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의 말마따나 저 몸매라면 어떤 드레스를 입던 간에 야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가 입고 나올 드레스는 파격적이라할 만큼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지 않을까? 노출이 너무 심한데…”
“리나가 뭘 걱정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거든. 무엇보다…”
세실리는 말을 잠깐 흐리더니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사람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