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91
■ 290화. 신성모독 (2) □ ᓚᘏᗢ
스스로를 제논이라 굳게 믿고 있는 청년, 제논(짝퉁)은 징조도 없이 등장한 여인을 보며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금의 평야를 고스란히 담은 머리카락, 그 평야를 품은 푸르런 하늘처럼 빛나는 눈동자.
루미너스 교단의 상징인 ‘흰색’의 수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인의 굴곡진 몸매를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새어나오는 성스러움과 은은하게 풍기는 라일락 향기까지.
손만 잡아도 때가 묻을 것 같은 순수함과 자비로움. 은은하게 웃는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에 응어리졌던 악감정을 모두 해소시킨다.
제논 일대기 속에 등장하는 성녀, 릴리가 세상에 나타난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성녀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자태.
이에 제논은 여인의 부름에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 하고 멀거니 바라봤다.
스스로를 소피아라 부르던 엘프 여인을 보았을 때도 이정도 아름다움은 느끼지 못 했다.
탁!
그사이 그에게 붙잡혔던 엘프 여인이 다급히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녀도 난데없는 성직자의 등장에 당황스러웠지만 저 사칭과 떨어지는 일이 우선이다.
하지만 제논은 엘프 여인이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여태까지 수많은 미녀들을 만나고 재미있는 관계까지 맺었지만 눈 앞의 여인만큼 아름답진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신성하며, 또 순수한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정신도 못 차리고 벙찌기만 했을 터.
하지만 남자, 제논은 아니다. 그는 라일락 향기가 코로 비집고 들어오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큼. 큼. 실례지만 누구시죠?”
제논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재빨리 감추기 위해 고개를 스윽 돌리며 질문을 걸었다.
질문을 하면서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미녀들을 만났음에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게 정말로 운명 같은 것인가.
‘설마 저 여자가···?’
제논은 헛기침을 하면서 앞의 여인을 힐끔거렸다. 동시에 제논 일대기에 묘사되었던 릴리의 외모를 떠올렸다.
릴리는 ‘백합’이라는 뜻에 어울리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다.
그대신 체형은 완벽하게 부합하고 있다. 평균 이상의 키와 순백의 수녀복으로도 숨길 수 없는 아름다운 몸매.
이 여자다. 이 여자는 제논 일대기 속 성녀, 릴리가 확실하다. 남자는 그리 단정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라졌던 음습한 감정이 다시금 꿈틀거리면서, 순백의 여인과 대비되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 실례했습니다. 제 이름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 님을 모시는 신자입니다.”
제논의 질문에 여인, 케이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몸에 달라붙는 재질의 수녀복이라 그런지, 허리를 숙이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더욱 부각된다.
노출은 하나도 없는데 야하게 느껴지는 왜일까. 제논은 케이트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색기에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하지만 색욕에 물든 것도 잠시, 그녀의 이름을 듣고나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라면 분명···’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이 이름은 작가, 제논보다는 아니지만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다.
몇 달 전, 세이비어를 넘어 전세계를 경악케 만들었던 타락한 추기경 사건.
그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자 현재 세이비어에서 가장 큰 명성 및 세력을 떨치고 있는 여인.
기둥마저 흔들리던 세이비어의 멱살을 질질 끌고 가는 중이고,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자면 교황과 맞먹는 입지를 지녔다고.
원래 루미너스 교단에 ‘성녀’ 같은 직위는 없었지만, 케이트의 공적이 공적인지라 새로이 만드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중이다.
진심을 다해 루미너스를 경배하는 신자이자 차기 교황 혹은 성녀로 추앙받는 중인 추기경.
무력이라고는 일체 없는 릴리와 달리 무력이면 무력, 신앙이면 신앙. 무엇하나 빠진 게 없는 팔방미인 그 자체.
제논은 신문과 소문으로 접했던 유명인이 바로 코 앞에 등장하자 가슴이 거세게 요동쳤다.
“케이트 추기경이라면… 익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타락한 추기경을 몰아내고, 손수 나서서 악마 숭배자들을 처치하는 대심문관. 누구보다 가장 먼저 세상을 깨끗히 만드는 성직자라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분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랍니다.”
“그분?”
그분이라 하면 루미너스를 말하는 건가.
제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내자 케이트는 전보다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빛을 더럽히는 쓰레기를 청소할 뿐, 세상에 빛을 내려주시는 분은 한 분밖에 없어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아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제논. 그러나 곧이어 불쾌함이 엄습하여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녀가 언급한 사람은 따로 묻지 않아도 제논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자신이 아니라 ‘작가’ 제논.
자신은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머리는 잘 돌아간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어째서 저 여자는 자신이 아닌 작가, 제논을 존경하는 건가.
어차피 그 작가가 모티브를 삼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이름과 더불어 출생, 더 나아가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들까지.
작가가 쓰는 것들은 곧 자신이 이룩할 업적인데 어째서 그를 존경하는 것인가.
스스로를 제논이라 굳게 믿고 있던 남자는 그런 불만을 담아 케이트에게 말했다.
“아까 전에 네가 말했지? 제논이라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네.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라서요.”
제논이 말을 놓다 못해 오연하게 대해도 케이트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로 말투가 묘하게 거칠어졌는데, 제논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잘 찾아왔어. 내가 바로 네가 찾던 제논이야. 아, 혹시나 해서 덧붙이지만 그런 글쟁이따위가 아니라 진짜 제논이지.”
“…글쟁이?”
작가를 폄하하는 단어, 글쟁이라는 말에 케이트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가 도로 올라갔다.
찰나의 순간이어서 제논(이라 우기는)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지금은 그저 케이트를 동료로 편입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성녀였으니.
커플링이었던 진? 그건 천천히 찾아도 늦지 않는다. 하물며 모티브일 뿐이지, 실제로 둘이 연인이라는 건 증명되지 않았지 않은가.
이렇게만 따지면 본인도 그에 부합하며 모순 그 자체다. 하지만 그쪽으로 돌아갈 머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주인공이었으니까. 책 속의 이야기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므로 뭘 하든 간에 용서가 될 것이다. 세상을 구할 영웅의 말을 누가 감히 거부하겠는가.
“혹시 글쟁이 제논을 찾으러 온 건 아니지? 나를 찾아온 게 맞지?”
“…네. 그렇습니다. 직접 확인하니 그 분을 사칭하는 게 아니었군요.”
“내가 왜 사칭 같은 걸 해? 나야 말로 진짜 제논인데. 그딴 사칭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라고.”
제논은 특유의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케이트에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라일락 향기와 전신을 감싸는 듯한 성스러움.
갖고 싶다. 제논 일대기의 릴리처럼, 케이트를 동료로 영입하여 모험을 떠나고 싶다.
방금 전에 붙잡았던 엘프 여인은 이미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지 오래다.
이끌림. 여행을 다니면서 이정도의 이끌림을 느낀 건 케이트가 처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터.
이에 그는 사심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으며 케이트 앞에 당당히 섰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외모는 물론 몸매가 발군이다. 수녀복을 입었음에도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중이다.
설마 자신을 위해 이런 복장을 입고 온 것일까. 말 그대로 제논을 찾기 위해서?
혼자만에 착각에 빠져있던 제논은 몰려오는 흥분감에 숨을 몰아쉰 후,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성녀답게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미소가 오로지 자신을 향해 있다.
스윽-
제논은 음습한 마음을 제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서서히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은 케이트의 새하얀 뺨.
더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색을 물들이자. 그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자신은 제논이니까. 앞으로 세상을 구할 영웅 중의 영웅이니까.
가슴 속에 추악한 욕망이 자라나는 것도 인지하지 못 한 채, 그가 케이트의 뺨을 손을 얹기 직전.
툭!
케이트는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냉정하게 그의 손을 내쳤다. 단호하디 단호한 손길이었으나 미소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
제논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분명 접촉을 허락하는 분위기인데 이리 내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그사이 케이트는 그의 손길을 뿌리쳤던 손을 더럽다는 듯이 툭- 툭- 바닥에 털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몸에 손 댈 생각하지 마세요.”
“뭐?”
“제 몸은 그 분을 위한 것. 그 분이 저를 안을 때까지 전 청결을 유지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제논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콱 찌푸렸다.
그 분을 위한 몸. 다시 말해 짝퉁이 아니라 작가, 제논을 위한 몸이라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안을 때까지 청결을 유지한다는 건, 자신을 더러운 놈으로 취급한다는 거겠지.
어째서냐. 고작 글쟁이 따위보다 앞으로 세상을 구할 영웅에게 안기는 게 더 낫지 않는가.
적어도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케이트.”
“제 이름이 아니라 추기경님이라 불러주시길.”
“하, 참나.”
이제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거부한다. 제논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가 그녀와 똑바로 마주했다.
케이트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서 더 열받는다.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내가 제논인데 접촉조차 거부한다고?”
“당신이 제논인 건 맞겠죠. 하지만 그 분과 동일선상에 놓지 마세요.”
“어이가 없네. 따지고 보면 그 놈의 업적도 나 덕분에 생긴 건데?”
“···예?”
이것만큼은 흘려들을 수 없었는지 케이트가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인자하게 올라갔던 미소는 사라지고, 푸른색 눈동자에 의문이 자리잡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그녀뿐만 아니라 멀찍히 구경하고 있던 행인들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생각해 봐. 네가 그 분이라 칭하는 글쟁이는 나를 모티브 삼아 제논 일대기를 작성했다고. 이해가 가?”
“··· ···”
“표정을 보아하니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네. 그럼 천천히 설명해줄게. 나를 모티브 삼아 제논 일대기라는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어. 그러니 그 놈이 이룬 건 전부 다 내 덕분이라는 거지.”
그가 말하는 요지는 이거다. 모티브인 자신이 있기에 제논 일대기가 등장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논 일대기가 이룩한 업적은 모두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 제논과 똑같은, 혹은 그 이상의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누가 들어도 개소리 또는 궤변이었으나 제논(짝퉁)은 굳게 믿고 있다.
출생과 더불어 이름, 더 나아가 재능까지. 이러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지대한 착각을 낳아버린 것이다.
“사실상 그 놈이 앞으로 내가 이룩한 공적을 가로챈 거야. 다시 말해서 제논 일대기에 적힌 것들은 본래 내가 미래에 달성한 위업들.”
스윽-
방심했던 것일까. 입이 떡 벌어질만한 궤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케이트가 신체 접촉을 허락했다.
남자의 추잡한 손이 그녀의 뺨을 매만진 것이다.
다정하디 다정한 손길이 아닌 추악하고 끈적함이 담긴 불쾌한 감각.
하지만 그런 손길을 인지하는 것도 잠시, 케이트는 멍한 표정으로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키가 자신과 비슷하여 눈높이가 얼추 맞았기에 그의 얼굴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누구처럼 열정적으로 빛나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지도 않았고, 누구처럼 반짝이는 황금의 눈동자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추악하고, 또 이름을 더럽히는 신성모독자만이 있을 뿐. 이에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 행동에 제논의 비열한 미소가 더욱 진해졌으나, 거기까지였다.
꽈악!
“어?”
“이···”
케이트가 남자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조용히 읆조리더니.
“불경한 자가!!”
우드득!!
분노를 담은 외침과 함께 그의 손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바위를 손으로 우그러뜨려 모래로 만들고, 모래를 움켜쥐면 그 안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정도의 악력.
사람, 특히 신체적으로 연약한 인간의 손 ‘따위’는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꽈드드득!!
“끄아아아아악!!”
손이 완전히 으스러지다 못해 종이처럼 너덜너덜해지는 격통에 남자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케이트에게 붙잡힌 손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고, 과일즙을 짜는 것마냥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불경한 자의 피가 손을 붉게 적시는 중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자신의 눈 앞에서 ‘신성모독’을 저지른 죄인을 처치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그 죄인은 현재 고통을 이기지 못해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지르는 중이다.
“감히 네 놈 따위가 그 분을 모독하느냐!! 그 분이 퍼뜨린 빛에 더러운 손길을 뻗치려 하느냐!!”
“으아아가각! 아아악!! 까아윽으악!!”
케이트의 호통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절단이었다면 그나마 고통이 덜 했을텐데 손이 완전히 으스러졌으니.
뼈가 산산조각나다 못해 가루로 변하고, 그걸 보호해주는 살가죽과 근육은 갈기갈기 찢겨진다.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고통에 제논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쫘악!
마치 종이를 찢어버리는 것처럼,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손을 떼어내는 케이트.
손목 위까지 살은 물론, 그 안의 뼈가 완전히 가루가 되었기에 약간의 힘만 줘도 금방 떨어져 나갔다.
물론 이러한 행위조차 강한 근력이 있어야 했으니 그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아악! 아으으악!!”
이제는 손목을 움켜잡으며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는 제논, 아니 사칭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그의 손목에는 끈적한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이대로 간다면 필히 과다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울 터.
케이트는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치는 그를 벌레 보듯이 내려보다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샤아아아-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황금빛에 가까운 빛이 생기더니 이윽고 사칭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성직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자 신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는 능력, 신성력.
루미너스 교단의 신성력은 본래 하얀색이나, 케이트의 신성력은 교황 혹은 아이작에 비견될만큼 강한 터라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가히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으으윽··· 어, 어어···?”
손목을 붙잡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사칭범은 눈 앞에 펼쳐진 ‘기적’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황금빛의 기운이 손목에 서서히 스며들더니 놀랍게도 ‘재생’이 되는 게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치료’가 아니라 ‘재생’이다. 치료는 출혈을 막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재생은 그것을 초월하는 현상.
분명히 손목 위로 없어야 할 부위가, 처참하게 찢어지고 으스러졌던 손이 다시 재생되는 중이다.
씨앗이 발화되어 줄기가 자라나 종래에는 꽃을 맺듯이, 손목에 작게 자라난 손이 서서히 자라난다.
이윽고 손이 완전히 재생되고, 사칭범이 멍하니 그 현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케이트가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미너스의 이름 아래, 당신에게 고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제논이 맞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름에 불과할 뿐, 그 분의 업적은 결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 ···”
“다시 한 번 더 그 입으로 그 분을 모욕한다면···”
케이트는 피로 점철되었던 손을 두어번 털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제논의 이름이 아닌, 제가 친히 다른 이름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루미너스 님의 이름 아래에,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드리죠.”
“나, 나는··· 제논이야. 나는 제논이 맞다고! 네가 뭘 알아!!”
아무래도 경고가 살짝 부족했던 모양이다. 케이트는 사칭이 악에 받쳐 소리치자 전보다 싸늘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저게 무슨 제논이란 말인가. 만약 책 속의 제논처럼 인품이 올바르기라도 한다면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줄 용의는 있었다.
그러나 인품은커녕 실력조차 자격 미달인 밥버러지만이 앞에 있다. ‘제논’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버러지.
악마 숭배자가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쓰레기라면, 앞의 사칭은 빛의 이름을 더럽히는 버러지다.
언뜻 똑같아 보이지만 악마 숭배자처럼 즉결 처단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더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조용히 기도했다.
“루미너스시여··· 부디 이 어리석은 자가 회개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주소서.”
“이 년이 진짜···!”
그녀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실력에 대한 자부심은 확실했는지 쏜살같은 속도.
하지만 상대를 잘못 잡았다. 아무리 그가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고 한들 ‘대심문관’에 비할 수 있을까.
케이트는 몸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그의 돌진을 가뿐하게 피한 뒤, 발을 걸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콰당!
“아악!”
다시 한 번 꼴사납게 넘어지는 제논 사칭범. 그는 곧바로 일어나려고 시도했으나 시도에 머물렀다.
꽈악!!
“아아악!!”
케이트가 그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레 붙잡으니. 머리카락이 전부 뜯겨져 나갈 듯한 고통에 제논 사칭이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저항을 해도 전부 부질없는 짓. 워낙 힘이 강한 나머지 저항을 하면 할수록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며, 자신은 제논이라며 거세게 반응한 사칭이었지만.
“손 하나로 부족했나 보군요?”
“··· ···”
케이트의 살인 미소 한 방에 금방 조용해졌다.
알븐하임 광장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더이상 스스로를 제논이라 칭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본인과 케이트만이 알고 있을 뿐.
이와 더불어 카이르 사칭들도 모두 사라졌기에, 알븐하임과 세이비어 사이의 외교적 분쟁도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신문으로만 접하던 아이작의 반응은···
“신비로워졌네.”
전생의 어느 국가를 떠올렸다.
* * *
제논의 이름을 더럽히던 남자를 교화(?)시키고 난 후, 케이트는 몸을 씻기 위해 샤워실로 향했다.
심문은 본래 자신의 주특기였기에 스스로를 제논이라 우기는 정신병자를 교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꿎은 사람을 몰아넣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죄가 있다면 루미너스께서 직접 자신을 꾸짖었을 테니.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건 루미너스는 물론 신들께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의미.
제논의 이름이 더럽혀진다면 그를 지원하는 신들께서도 곤란해진다. 그러니 이런 사칭들은 진작에 제거해야 된다.
쏴아아아-
“··· ···”
샤워실에서 몸을 정갈히 씻던 케이트는 거울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방금 전 ‘심문’을 하던 탓에 얼굴에 피가 튀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녀가 신경 쓰는 건 피가 아니다.
그건 바로 제논의 이름을 욕보이던 버러지가 매만졌던 뺨.
뺨에는 피가 전혀 묻어있지 않고 오히려 깨끗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녀는 뺨에 손을 갖대 대며 살살 문질렀다.
“···더러워.”
긁적-
뺨을 문지르다 말고 손톱으로 긁적거리는 케이트. 고운 인상은 구겨질대로 구겨지고, 자비로운 미소는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졌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벅- 벅- 벅- 벅-
케이트는 광기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뺨을 세차게 긁기 시작했다.
손톱으로 인해 하얀 피부에 스크래치가 발생하고, 더 나아가 피가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다.
누가 보아도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 총명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서서히 사라진다.
‘깨끗해지지가 않아.’
손톱으로 미친듯이 긁적인 탓에 피부가 까지고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녀가 신경 쓰는 건 피도, 상처도 아니다.
그 분을 위해 청결을 유지하던 몸이었거늘, 그 버러지 때문에 더럽혀졌다.
물론 그 분은 더럽혀져도 상관없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 분에 대한 실례이자 모욕이다.
이 세상에 빛을 퍼뜨리는 성자이자 세상을 구할 빛 그 자체다. 어찌 그 분을 모욕하겠는가.
케이트는 빛을 잃은 눈동자로 한참동안 미친듯이 뺨을 긁적이다가, 머릿속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고 싶어.’
그 분의 손길을 통해 더럽혀진 몸을 정화하고 싶다.
그 분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고 싶다.
그 분에게서 씨앗을 받아 이 세상에 빛을 널리 퍼뜨리고 싶다.
‘부디 저를···’
정화해주시길.
케이트는 뺨을 긁던 행위를 멈추었다. 그녀의 신성력이라면 뺨에 난 상처 정도는 가볍게 치료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더럽혀졌다는 상징이었으니. 이걸 없애는 건 그 분만이 가능한 일.
그때까지 이 상처는 남겨놓도록 하자. 그 분을 직접 찾아가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그리고 빨리 씨앗을···’
케이트는 부드러이 웃으며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언젠가 새로운 빛이 탄생하게 될 작디 작은 방.
아직 자신의 차례가 오진 않았으나, 상상만 해도 기묘한 짜릿함이 엄습한다.
이미 이름까지 모두 지어놓았다. 릴리라고, 그의 여동생이자 제논 일대기 속 성녀와 똑같은 이름이다.
“하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받으며, 케이트는 달뜬 신음소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