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292
■ 291화. 의심 (1) □ ᓚᘏᗢ
갑작스레 등장한 사칭들 때문에 조금 시끄러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금방 사라졌다.
신문과 대충 귀에 들어온 소문에 따르자면 케이트를 위시한 세이비어 쪽에서 철퇴를 내렸다나 뭐라나.
특히 스스로를 제논 일대기 속 주인공, 제논이라며 떠벌리고 다니던 놈은 케이트가 친히 ‘교화’시켰다고 마리에게 들었다.
물론 실명이 제논이나 카이르, 더 나아가 등장인물의 이름인 사람들은 예외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편이니.
모험가나 용병 같은 직종은 가명을 사용하면 그만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등장인물과 비슷한 과거를 지닌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세이비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아무튼 알븐하임의 새로운 문제점으로 부상한 사칭들은 시간이 흘러 모두 말끔하게 해소됐다.
참고로 이건 다른 곳도 아닌 세이비어 및 루미너스 교단이 직접 나서서 처리했는데, 이것조차 처리하지 못 했다면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타락한 추기경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기둥이 흔들리고 있는데 더 심화되었을 터.
사칭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제논 일대기의 명성에 흠집을 발생시킬 수 있다. 실제로 카이르 사칭들이 나타났을 때 어떤 시선을 받았는지 생각해보자.
이대로 방치했다면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사칭들이 쏟아져 나왔을테고 그때면 제대로 된 조치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비어, 그것도 현재 강력한 입지를 자랑 중인 케이트가 직접 나서서 ‘신성모독’이라 외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라졌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제논을 사칭한 남자의 손을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머리채를 잡아서 질질 끌고 갔다고.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이니 약간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광신도적인 면모가 강한 케이트라 한들 그정도로 과격하진 않을테니.
설마 진짜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박살내고 질질 끌고 갔겠어. 악마 숭배자를 조지는 것도 아닌데.
“아이작. 거기 있는 2번 파일 줄 수 있니?”
“여기 있어요.”
“고마워. 아, 그리고 기왕 조사하는 김에 스타비르크 사건 좀 조사해줘. 그 사건이 악마 숭배자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
“네.”
어쨌거나 세실리의 연설과 아르웬의 발표, 사칭 순으로 사건이 지나간 후에는 별 일 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제논 일대기도 중요하지만 학업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지난 학기 이후로 엘레나를 보조하는 일이 부쩍 늘어나서 바쁜 상황이다.
가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고 정황이 구리구리한 사건들이 존재한다. 최근 엘레나는 이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중이다.
평소에는 기록이 남지 않아 의아할 뿐, 쉬이 넘어갈테지만 악마 숭배자가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니.
천성 학자인 엘레나의 학구열을 불태우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쳐난다.
그 대가로 내가 고생하기 시작했지만.
신디도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으나 그녀도 개인 연구거리가 있어서 나 혼자만 고생 중이다.
“흐음··· 스타비르크 독립 전쟁을 통해 악마 숭배자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 있지? 아이작 네 생각은 어때?”
“음···”
나는 엘레나의 질문을 듣고 스타비르크 사건을 떠올렸다. 스타비르크 독립 전쟁은 100년 전, 미네르바 제국의 스타비르크 지역에 발발했던 전쟁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소수 민족의 독립 전쟁이라 볼 수 있겠지. 소수 민족의 독립은 전생의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부류의 전쟁이다.
현재도 틈만 나면 독립을 주장하기에 미네르바 제국의 골칫덩어리로 남게 되었으며 제국민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 스타비르크 지역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그곳이 어떤 곳이냐면 지정학적으로 따졌을 때 한반도와 똑같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위는 대륙과 이어진 천혜의 요새.
더군다나 스타비르크 지역의 바로 밑에는 미네르바 제국의 숙적, 테르스 왕국이 떡하니 존재한다.
미네르바 제국에게 있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인 셈이다.
“전 정상적이라 보는데요?”
“정상적이라고? 무슨 근거로? 미네르바 제국이 심한 압력을 넣은 것도 아니잖아.”
엘레나의 의문처럼 미네르바 제국은 스타비르크 지역을 차별하거나 압력을 넣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네르바 제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스타비르크 지역에 열심히 투자하는 중이다.
문제는 스타비르크 지역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못해 민족 자체적으로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것.
비록 드워프보다는 아니지만 기이할 정도로 기술력이 훌륭하며 단결력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삼면이 바다여서 배를 제작하는 능력, 즉 조선기술은 드워프보다 한 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네르바 제국이 스타비르크 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임과 동시에 스타비르크 민족이 독립을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자존을 꿈꾸는, 매우 독특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인간의 나라도 다른 종족처럼 하나밖에 없었겠죠.”
“계속 말해보렴.”
“스타비르크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종족 전쟁이라는, 역사의 분기점이나 다름없는 대전쟁으로 인해 미네르바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가슴 속에 독립을 꿈꾸고 있었겠죠. 사실 명분 자체는 굳이 100년 전이 아니라 종족 전쟁 이후 꾸준히 존재했어요. 애니머즈를 건국한 히크처럼, 나라를 건국할 위인이 없었을 뿐이에요.”
“음···”
엘레나는 내 설명을 듣더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진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엘프인 그녀의 시선에 스타비르크 독립 전쟁, 아니 인간의 독립심은 독특하게 보일 것이다.
내가 가끔 가다 엘프식 공산주의라고 놀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엘프는 전체주의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종족 전쟁처럼 정작 위기의 상황이 덮쳤을 때 분열된다는, 매우 기이한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
다행히 지금은 아르웬의 현명한 정치 덕분에 서서히 하나로 뭉치고 있으나 여전히 불안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종족 전쟁이 터진 건가아?”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디가 특유의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의문을 꺼냈다.
진한 다크 서클에 똥머리는 여전했지만 학위를 딴 이후로 여유가 생긴 건지 전보다 얼굴이 편해보인다.
“어찌 보면 그런 셈이죠. 엘프의 영향권에서 전부 벗어나 하나의 종족으로 대우받겠다는, 인간의 독립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게 종족 전쟁이니까. 스타비르크 독립 전쟁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역시 인간은 알다 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럼 스타비르크 독립은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없다는 거지?”
“마냥 없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만약 스타비르크가 독립하게 된다면 정세가 심할 정도로 복잡하게 흘러갈 거예요. 그 혼란을 틈타 악마 숭배자가 더욱 활발히 활동할테고.”
“한 번 설명해주겠니?”
학자가 듣기에 꽤 재미있는 가설이었던 걸까. 엘레나는 물론 신디마저 눈을 반짝거리며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살짝 당황스럽긴 해도 설명하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 나라에 살았는데 뭐가 어렵다고.
이후로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하니 엘레나와 신디의 눈이 전보다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현실성이 높을 뿐더러 역사의 큰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거겠지.
“그럼 미네르바 제국이 무력으로 진압한다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니?”
“욕해도 돼요?”
“해도 돼.”
“더 좆 될 겁니다.”
베트남 및 아프카니스탄에서 삽질한 미국,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꼴이 되겠지.
아주 적절한 명분이 있다면 모를까, 미네르바 제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스타비르크를 무력으로 밀고 나가진 않을 것이다.
다행히 현재 미네르바 제국은 전성기 로마처럼 현명한 군주들을 배출하는 중이다.
다음 대 황제로 즉위할 레오르트도 괜찮은 능력을 갖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스타비르크가 독립한다면 악마 숭배자들 입장에서도 좋다는 거지?”
“네. 어쩌면 주모자가 악마 숭배자일 수도 있죠. 당장 루미너스 교단의 추기경이 악마 숭배자였는데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예요.”
“좋은 가설 고마워. 네 덕분에 인간에 대해 좀 더 알아간 느낌이야. 너를 조교로 뽑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
“고마우면 다른 조교도 좀 붙여주세요. 저 혼자 자료 조사하기 힘드니까요.”
자료 조사를 하면서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되지만 힘든 건 힘들다. 엘레나 연구실에 있는 자료만 해도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데 다른 교수를 찾아가야 된다.
심지어 무슨 퀘스트도 아니고 자료를 빌려달라 요청하면 그 교수가 다른 부탁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덕분에 하루하루 내 지식이 풍족해지는 중이나 몸이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내 고초를 알아주었는지 엘레나는 내 투정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지금 한 명이 조교로 신청했어. 혹시 레오나라고 알고 있니?”
“레오나요? 혹시 그 밤색 머리 여자?”
“응.”
나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알다시피 레오나의 목표는 졸업장이다.
특정 학과에 들어갈 필요 없이 4년만 재학한다면 졸업장을 주는데 어째서 역사학과에 오는지 모르겠···
‘···나 때문이구나.’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 아마 나와 붙어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역사학과에 오는 거겠지.
나야, 같이 일할 노예, 아니 조교를 얻는 셈이니 상관없으나 과연 그녀는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었다.
굳이 나 때문에 관심도 없는 학과에 들어올 필요는 없다. 아무래도 나중에 따로 만나봐야 할 듯하다.
“탐구열도 괜찮고 성적도 좋아. 역사에도 꽤 관심이 많은 것 같고. 너처럼 유능한지는 몰라도 폐는 안 끼치겠지.”
“교수님께서 괜찮으시다면야. 다른 사람은 없어요?”
“눈여겨보는 학생은 있지만 아직은 몰라.”
엘레나는 그리 말하며 방금 전 내가 설명해줬던 가설을 노트에다가 필기했다.
학자답다고 해야될지 유려한 필체라기 보다는 알아보기 쉽게 각이 지고 또박또박한 필체.
나는 그녀가 필기를 하는 동안 독서를 하기 위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차피 남은 수업도 별로 없고, 5시가 될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요령이었다.
“그런데 아이작.”
“네?”
“너 정말 제논 아니지?”
“··· ···”
필기를 하면서 무심하게 질문을 날리는 엘레나.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학기에 체리가 나에게 앵기는 걸 보고 그녀는 알게 모르게 의심하는 중이다.
여태까지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었으나 한 번 의심을 품은 이상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두고 있을 터.
체리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유연하게 넘길 수 있다.
“제가 제논이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미래에 어떤 역사가 펼쳐지는지 알려달라고 할 거야. 그걸 토대로 논문을 만드는 거지.”
“날로 먹으려는 심보 때문이라도 안 알려줄 것 같은데요?”
“그럼 어쩔 수 없고.”
엘레나도 개의치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거릴 뿐,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신디는 아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고.
내가 이들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역사 외에 거의 관심이 없는 천성 학자들.
하지만 논문을 날로 먹으려는 건 진심이라 밝히기가 애매하다. 방금 전 스타비르크에 대해 설명을 요청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 그럼 들어가보도록 할게요.”
“그래. 내일 보자.”
“잘 가아···”
5시가 되자마자 엘레나의 무심한 인사와 신디의 흐물거리는 배웅을 받고 숙소로 돌아갔다.
아카데미 개학 전과 그 후만 해도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터졌지만, 지금은 조용한 일상이 유지되는 중이다.
게다가 사칭 사건도 나와 간접적인 연관이 있을 뿐이었지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없었다.
그덕분에 22권을 작성하는 건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었으며 최근에 이렇다 할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모라가 나에게 알려준 ‘기로’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은.
‘히리야도 조용히 있는데 대체 무슨 선택을 한다는 거지?’
나는 가슴 속에 의문을 가득 안은 채 숙소로 돌아갔다.
* * *
아이작이 알쏭달쏭한 심정으로 숙소로 돌아가고 있을 쯤, 한 여인이 아이작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 중이었다.
혹여 미행 당한다는 걸 들키지 않도록 중간중간 숨었으며 그 행동은 매우 능숙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행인조차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이, 이런 일을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여러 번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덜컥-
이윽고 아이작이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여인. 여인은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숨겼던 몸을 온전히 드러냈다.
하늘처럼 푸른 머리카락과 눈동자.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미모는 감출 수 없다.
이와 더불어 늘씬한 키와 제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몸매까지.
테르스 왕국의 제 2왕녀이자 아델리아의 배다른 여동생, 히리야.
그녀는 개학을 함과 동시에 아이작의 뒤를 캐는 중이었다. 심지어 수업조차 적당한 구실로 뺐기에 악영향이 가해질 일은 없다.
‘아직까지는 별 다른 이상이 없는데···’
히리야는 아이작이 들어간 기숙사를 특유의 무표정으로 바라봤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제법 눈에 띄일 법했으나 마법 아이템으로 변장했기에 안심할 수 있다.
다른 사람 눈에는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에다가 눈동자를 지닌 사람으로 보일테니. 다만 아름다운 외모는 바꾸기가 어려워 그냥 놔두었다.
하지만 머리카락만 바꿔도 사람의 인상은 확 달라진다. 더군다나 자신은 테르스 왕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으니 변장의 중요성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분명 저 놈은 뭔가 있어.’
히리야는 기숙사에 시선을 떼지 않고 지그시 노려봤다. 아이작을 의심하게 된 경위는 전시회부터다.
아무리 자국의 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지만 미네르바 제국측에서 아이작을 너무 싸고 도는 정황이 드문드문 존재한다.
미네르바 제국에게 테르스 왕국은 결코 하나로 뭉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지만, 그렇다 해도 결혼까지는 막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으며 사적인 감정은 몰라도 국제 관계란 원래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
고작 남작에 불과한 아이작과, 왕녀인 자신이 정략결혼을 한다면 이득을 보는 건 결국 미네르바 제국이다.
물론, 아이작이 레킬리스 가문의 영애와 약혼을 했기에 보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심을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레킬리스 가문과 결혼하는 것도 아이작에게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가진 건 얼굴밖에 없는 놈인데 대체 뭐지?’
히리야가 보기에도 아이작의 외모는 상당히 훌륭한 편이다. 타오르듯한 붉은색 머리카락과 황금의 눈동자라는, 보기 드문 조합을 갖고 있었으니.
레킬리스 가문의 영애, 마리가 그의 얼굴만 보고 결혼을 했다는 풍문조차 납득이 될 정도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장난에 불과할 뿐, 필시 무언가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지.
‘게다가 헬리움의 연설 때도···’
그녀는 지난번 헬리움에 진행되었던 연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는 분명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붉은 머리가 눈에 띈다고 한들 세 번씩이나 마주치는 건 이상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일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정황을 파악했을 때 결코 우연 같지가 않았다.
아이작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신빙성 높은 가설은 바로···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은 제논이다.’
이거 하나로 여태까지 아이작을 싸고 돌던 미네르바 제국의 행동과 연설 당시 세실리의 반응에 대한 의문이 단번에 해결된다.
그러나 증거가 부족하다. 어쩌면 아이작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호크가 제논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어디까지나 정황만 수두룩할 뿐,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미네르바 제국의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고, 정말로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어서 시선을 교환한 것일 수도 있다.
‘일단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해.’
리나, 마리, 세실리, 아이작. 이렇게 4명이서 같이 다니는 건 수도 없이 목격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그룹이라고.
당장 이것조차 의심스럽지만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만약 그가 진짜로 제논이라면···’
히리야는 그 생각이 들었다가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와 동시에 그럴 일이 절대 없다면서 부정했다.
어차피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더러운 사생아로부터 아이작을 빼앗는 것. 아이작이 제논이고 뭐고 상관없다.
‘그런데 진짜 제논이면 어떡하지?’
그녀는 가슴 속에 싹 트기 시작한 불안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비록 인지하지는 못 했으나 기숙사를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는 중이었다.
본래 의심의 싹이 한 번 틔워지면 무럭무럭 자라나듯이, 불안감도 마찬가지.
아이작이 정말로 제논이라면 자신은 물론, 테르스 왕국마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히리야는 이후로 한동안 기숙사를 바라보다가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서 머리나 식힐 계획이다.
‘아니겠지.’
그녀가 그런 마음을 지닌 채 돌아갔을 때.
스윽-
히리야가 사라지자마자 또다른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홍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벛꽃을 연상시키는 여인.
“···뭐지?”
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스토컨가?”
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