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01
■ 300화. 재판 (2) □ ᓚᘏᗢ
나의 커밍아웃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럴 거면 굳이 정체를 숨기면서 질질 끌 필요가 있냐고 묻겠지.
이건 미네르바 제국도 마찬가지. 테르스 왕국에 비해서 꿀릴 게 문화를 제외하고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저자세로 나오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내 집안 배경이 탄탄하다 해도, 아버지가 붉은 사자로 위명이 높다고 해도 왕녀의 뺨을 때린 건 논외로 둬야 된다.
만약 미네르바 제국에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테르스 왕국은 더욱 단결할 것이고 타국 또한 비난을 날릴 테지.
헬리움의 세실리, 알븐하임의 아르웬, 세이비어의 케이트. 이 세 명이 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지만 함부로 나를 감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대외적으로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르웬밖에 없고, 만약 그들이 나를 감싼다면 의심을 품을 게 뻔하니까.
공과 사는 명백히 구분해야 된다는 말이 있듯,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의 이미지는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니다.
이해 관계만 맞는다면 손을 잡을 수도 있고 대립할 수도 있는 관계. 제아무리 아카데미에서 친한 관계였다고 한들 국제 사회는 냉정한 법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1차 세계대전이 어떤 식으로 발발됐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 또한 누누이 언급했듯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은 최악의 숙적이다.
그러니 제국 쪽에서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도 우리끼리 해결하자라는, 무언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미네르바 제국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한들, 서로가 전면전으로 나서게 된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할 뿐더러 제국은 스타비르크 지역도 신경 써야 된다.
괜히 전쟁을 치렀다가 스타비르크가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으니까. 사실상 가불기에 걸린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제논임을 밝힌다면 위의 상황들이 무의미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될 뿐더러 편하게 해결될 테니.
어찌 보면 내 명예와 위상을 이용해 횡포를 부리는 거지만 횡포는 테르스 왕국 쪽에서 먼저 부렸다.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 내 성격이 원래부터 이랬다. 평소에는 무뚝뚝하다가 특정 부분을 건드리게 되면 울컥하는 성질.
특히 전생에서 부모님을 사고로 한 번에 잃은 트라우마가 내 안에 깊숙히 박혀있다. 내가 여태껏 정체를 밝히지 못한 이유도 내가 아닌 가족들 때문이다.
나를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족’을 건드리거나 그 가족의 관계자를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나와 몸까지 섞은 여자이자 가족이다. 더이상 그녀를 욕 보이게 둘 수는 없다.
설령 고생길이 훤히 펼쳐지는 미래가 다가온다고 해도, 책임을 지기 위해서 끝까지 져야하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가족을 위해 정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제논이라는 이름 하에 가족을 지키는 것. 그것이 기로에 선 나의 선택이다.
“··· ···”
내가 제논이라는 것을 밝히고, 더 나아가 협박 아닌 협박까지 건네자 라오스의 반응은 사뭇 볼만했다.
이 새끼가 제대로 돌았나?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속에는 일말의 의심이 담겨있었으니. 아직 제대로 믿지 못 하는 얼굴이다.
나는 라오스와 말없이 얼굴을 마주하다가 시선을 옆으로 스윽- 옮겼다. 히리야는 내가 제논이라 밝히자마자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어올리지 못 했으며 겁에 질린 강아지마냥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
아무런 정황도 접한 적이 없는 라오스와 다른 사람과 달리 히리야는 원래부터 내가 제논임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체리의 정보와 마리의 능청맞은 대처 덕분에 그녀의 의심이 풀어졌으나 내가 뺨을 때린 순간부터 싹이 발아했을 터.
그리고 지금은 발아한 씨앗이 성장하여 꽃과 열매를 맺기 직전이다.
“방금 저 저가 뭐라고 한 건가?”
“자기가 제논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하하하! 정신이 나가도 제대로 나갔나보군! 감히 제논을 사칭해?!”
“신들이 네 놈을 벌할 것이다!!”
빌드업을 차곡차곡 쌓았음에도 청중들은 놀람이나 경악 대신 비웃음으로 응대했다.
하기야 저게 당연한 반응이겠지. 당장 제논 일대기 속 등장인물을 사칭했다가 끌려가거나 호되게 당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등장인물 제논이 아닌 ‘작가’ 제논이라는 걸 당당하게 밝혔다.
만약 사칭이었다면 끌려가다 못해 신성모독으로 즉결 처형이 되도 할 말이 없는 수준.
나는 쏟아지는 비난과 욕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며 라오스를 바라봤다. 그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정말로 신의 철퇴가 두렵지 않은가?”
역시 그도 쉬이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고 오연했던 전과 달리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해졌다.
하늘색 눈동자도 내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초고본을 힐긋거리는 중이다.
“어째서 두렵겠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전 진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믿지 않았을 뿐.”
“··· ···”
“물론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대로 무시하고 저를 감옥으로 넣으셔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질 일이 걱정된다면, 이 안에 든 걸 한 번 읽어보시지요.”
울컥했던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오스는 내 말을 듣고도 의심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블러핑이라고, 아니면 속임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작가 제논이라 밝히는 순간부터 사실상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거나 똑같다.
아무리 미친 사람이라도 겨우 이런 일에 목숨을 담보로 삼지 않는다. 이때문에 라오스가 망설이는 것일 터.
그는 다시 한 번 내 얼굴과 책상 위의 초고를 번갈아 보다가 내 뒤쪽을 힐긋거렸다. 나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뒤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프리드리히 국왕이 미간을 좁히며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다.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는 걸 보아 내 말이 결코 허투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챈 모양.
뒤이어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긍정을 건네자 라오스가 초고본이 담긴 우편을 뜯기 시작했다.
찌익-
라오스가 우편을 뜯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온갖 욕이란 욕을 퍼붓던 청중들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나는 그가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자 내가 원래 앉았던 자리, 그러니까 아델리아와 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델리아는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복잡미묘한 표정을, 리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깨를 으쓱였다.
이 일은 이제 자신의 손을 벗어났으니 내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 나는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라오스를 쳐다봤다.
“··· ···”
라오스의 하늘빛 눈동자가 기민하게 좌우로 움직인다. 현재 그가 읽고 있는 건 제논 일대기 1권의 초고본.
한때 도난 당했다가 어찌 저찌 돌려받은 걸로 알려진, 현재는 성서로 추앙받는 초고.
단, 초고와 별개로 라오스를 비롯한 테르스 왕족이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리야와 달리 이들은 아무런 떡밥이나 전조도 없이 급발진으로 밝힌 것이었으니. 완전히 믿기보다는 전보다 강한 의심이 나타날 것이다.
“······이게 끝인가? 그대가 제논이라는 증거가?”
예상대로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으나 라오스는 나를 제논이라고 확정짓지 않았다.
허나, 그의 마음 속에 싹트기 시작한 불안감이면 충분하다. 불안의 씨앗은 점차 자라나 속을 갉아먹기 시작할 테니.
나는 그의 질문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한다.
아마 프리드리히와 시선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을 터. 나는 구태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라오스에게만 집중했다.
“그걸로는 부족한가요?”
“조작의 가능성도 있지.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감정에 소질이 없어서 말이야. 만에 하나, 이게 잘 짜여진 가품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원한다면 더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전에 가서 확인시켜줄 수도 있고요.”
“그러면 이건 둘째치고, 당신이 제논인 것과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우리가 저 여자를 같은 핏줄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건가?”
라오스가 ‘너’가 아닌 ‘당신’이라는 경칭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를 보아 그의 마음 속에 불안감의 씨앗이 자리잡힌 건 확실하다.
게다가 그의 말처럼 지금 벌어진 사태와 내가 제논인 건 아무런 상관이 없진··· 않다.
사생아의 인식이 바닥이라고 해도, 아델리아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건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돌려주는 건 아니다. 그건 이미 반 정도 이루었으니까.
“아뇨. 부탁하지 않아도 상황은 알아서 흘러갈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논 일대기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온다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겠죠.”
“… …”
“전 엎드려 절 받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거든요.”
내 말대로다. 내가 제논이 아니었더라면 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아델리아를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터.
제논이라는 권위과 명성으로 찍어눌러봤자 엎드려 절 받기 정도밖에 안 된다.
애당초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또한 말만 그렇게 하지, 그들은 절대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건 장담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사람이 이 사태가 벌어진 이유를 깨달을 테고, 그러지 않아도 의심을 품겠죠. 굳이 제가 정체를 밝히지 않더라도 제가 원하는 건 이미 이루었습니다.”
내가 설명한 건 모두 사실이다. 옆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며 히리야가 되도 않는 복수를 위해 나를 유혹한 것이다.
전후사정을 모른다면 히리야가 사랑에 눈에 멀어 그릇된 일을 저지른, 비련의 여주인공으로도 비추어질 사건.
하지만 아델리아의 존재 하나만으로 추악하고 속좁은 복수로 변질된다.
이 모든 일이 납득될 수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델리아가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사생아는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자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행을 저질렀으니.
허나 그 기행을 저지른 이유는 대부분 단순하다. 부모 또는 형제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 가족으로 받아들이진 못 하더라도 존재만큼은 인정 받고 싶어서.
그 하나를 못 해줘서 사생아가 삐뚤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델리아처럼 묵묵히 감내하는 경우가 매우 특이한 케이스지.
더군다다 아델리아의 비참한 과거를 들으면 자살하지 않았다는 게 용할 정도다.
“그럼에도 제가 제논이라는 걸 밝힌 이유는… 굳이 감옥에 처박혀서 시간 낭비는 하기 싫었거든요. 무엇보다 제가 가진 패들 중에 가장 효과적인 패죠. 그리고 테르스 왕국에게 선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선택?”
“네. 선택. 저에게 무죄를 내릴 것이냐, 아니면 유죄를 내릴 것이냐.”
전생이었다면 패드립을 쳐도 폭행은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여기는 살짝 다르다.
모욕, 특히 부모를 향한 모욕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제일 심한 모욕이며 심할 경우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이건 계급에 상관하지 않는다. 설령 귀족이 평민에게 부모 욕을 하고, 그 평민이 귀족을 폭행했다고 치자.
아무리 계급 차이가 난다더라도 증거 혹은 증인만 확실하면 정당방위로 인정된다. 물론 대부분 후환이 두려워 귀족의 편을 들 뿐이지 법 자체는 인정된다는 뜻.
“히리야 왕녀님께서 제 호위 기사에게 모욕을 했다고 인정하시면 재판은 이대로 종료되고, 그게 아니라고 확신하신다면 앞으로 저에게 내려질 판결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
“어떡하시겠습니까?”
나는 지금 아델리아의 출생을 인정하라는 질문을 간접적으로 던진 거나 다름없다.
이대로 인정하게 된다면 테르스 왕가의 명예에 먹칠이 가해지고, 부정한다면 명예를 지킬 수 있겠지만 뒷감당을 해야 될 것이다.
명예냐, 아니면 국익이냐.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테르스 왕국에는 균열이 발생할 터.
아델리아가 테르스 왕가의 사생아라는 것도 진실이고, 내가 제논이라는 것도 진실이다. 난 무엇 하나 꿀릴 게 하나도 없다.
아델리아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한 순간부터 그들은 자가당착에 빠진 거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 ···”
나는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동안 아델리아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그녀에게 이런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고 말은 해놓았으나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다.
다행히 아델리아도 완전히 마음을 털어놓았는지 쓴웃음만 지을 뿐,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 화답했다.
테르스 왕가가 자신을 인정하든 말든 나의 전속 메이드이자 가족으로 남겠다는 표현. 이제 보니 미련을 완전히 털어놓은 듯하다.
“정말인 건가? 저 여자가 프리드리히 전하의 핏줄?”
“하늘색 눈동자만 보면 확실한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평소 전하와 왕비님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청중들, 그러니까 귀족들도 썩 믿지 못 하는 반응이다. 심지어 나에게 우호적인 변호를 했던 카마르 백작마저 섣불리 신뢰하지 않는 모습.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남은 건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갈릴 것이리라.
아마 지금쯤 머릿속으로 온갖 상황을 굴리고 있겠지. 내가 제논인지 아닌지부터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데 아델리아도 고려해야 된다.
“어째서지?”
“네?”
“어째서 저 여자를 감싸는 건가?”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와중에 라오스가 나에게 질문을 걸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담겨있다.
나는 그 의문에 눈을 끔뻑거렸다가 빙긋 웃으며 시원하게 답변해줬다. 솔직히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다.
“제가 좋아하고, 또 저를 좋아하는 여자니까요.”
“··· ···”
“관망할 바에야 책임을 지는 게 더 낫습니다. 마음에 입은 상처는 그리 쉽게 낫는 법이 아니라서요.”
이번 일을 계기로 아델리아에게 확실한 믿음을 줄 수 있겠지. 사랑으로 묶인 신뢰보다 더 강한 마음은 없다.
내가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난 결코 내 사람이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내린 선택이자 결정.
라오스는 내 대답을 듣고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히리야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입도 벙긋하지 않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는 중이다.
이쯤되면 라오스도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진짜로 제논이라는 것을. 국익을 위해서라도 아델리아의 존재를 받아들여야겠지만···
“아니.”
라오스가 아닌.
“그 천한 년은 내 자식이 아니다.”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는 끝까지 아델리아의 존재를 부정했다.
내 귀에 속속 박혀들어오는 그의 답변에 등을 빙글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완고함과 오연함이 깃들어 있는 눈빛. 한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옹고집.
‘왕’으로서 구축해 놓은 ‘명예’를 버릴 수 없다는 결연한 표정.
명예에 죽고 사는 이 시대의 왕답게, 프리드리히 국왕은 불확실한 국익보다 확실한 명예를 선택했다.
눈 앞에 명확히 존재하는 오점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까지.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나에게는, 예상은 했지만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확실하십니까?”
“설령 그대가 제논이라 해도 내 선택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고작 그 명예 하나 때문에?”
“··· ···”
프리드리히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답변했다. 침묵은 긍정의 또다른 표시.
역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다. 여기는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나는 복잡함이 깃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간헐적으로 떠는 중이다.
이런 상황은 예측하고 있었으나 막상 입으로 들었으니 충격이 어마어마할 터.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했다.
“···그렇다면 프리드리히 전하. 당신에게 고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도.”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숨을 몰아쉰 이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앞으로 테르스 왕국에서, 제논 일대기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탐내던 문화를 빼았고.
“다시는 테르스 왕국에게 힘을 주지 않을 것이며.”
라이벌인 미네르바 제국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여기 있는 분들 모두 전하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단호히 경고했다.
제논 일대기 22권은 조만간 미네르바 제국에서 발매될 예정이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테르스 왕국에도 발매가 될 터.
그러므로 23권부터 발매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암시장에서 돌아다닐 테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프리드리히 전하.”
“말하라.”
“전하께서는 분명 현명한 왕이십니다. 제이로스 혁명으로 인해 발발한 균열을 가다듬었으며, 대외적인 이미지도 훌륭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분을 삭이며 몇 번이나 삼키던 말을 그의 앞에서 꺼냈다.
“적어도 제 눈에는 본인의 잘못과 과오를 책임지지 않고 부정만 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는군요.”
“··· ···”
꽉!
나의 촌철살인에 프리드리히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팔걸이가 부서질 정도로 움켜쥔 걸 보아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
겉으로 본다면 왕을 향한 모욕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델리아를 부정한 걸 보면 완전히 확정지은 건 아닐 테지만, 내가 제논이라는 의심을 품고 있을 테니. 그 불안함이면 충분하다.
안으로는 기껏 쌓아놓았던 명예가 차근차근 무너질 것이며, 겉으로는 제논 일대기 판매 중단의 여파와 귀족들의 분쟁이 벌어질 테니.
프리드리히 국왕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선택 중에 최악의 수를 둔 것이다.
그깟 자존심 하나 때문에.
“자, 그러면···”
나는 순식간에 고요해진 좌중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에게 무슨 판결을 내리실 건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