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02
■ 301화. 재판 (3) □ ᓚᘏᗢ
나를 향한 판결이 내려졌다. 내가 제논인 것과 별개로 이번 사태의 원인은 내가 히리야의 뺨을 때리면서 발발한 것이다.
허나 정체를 밝히면서 내심 불안해졌는지 히리야에서 원인을 제공했다고 판단. 나머지 판결은 미네르바 제국측에서 처신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아무래도 아델리아의 출생과 더불어 나의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까지 합쳐지니 프리드리히도 막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 번 가슴 속에 박혀든 의심의 싹은 점점 성장하여 스스로를 옭아매기 시작할테니까. 제논 일대기 22권이 발간된 순간부터 그 줄기는 서서히 목을 죄어올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여유롭게 아카데미를… 다닐 수 없겠지. 아직은 의심 단계여도 정체를 밝혔으니 소문이 점차 바깥으로 흘러나올 터.
귀족과 연줄이 있는 신문사가 그 소문을 덥썩 받아먹게 되는 순간부터 진짜 시작이다. 이번 재판에서 정체를 밝힌 건 전초전 혹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긴장하고 있는만큼 테르스 왕가도 똥줄이 타겠지. 재판 당시에는 블러핑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훗날에 도장을 쾅! 찍어버릴 예정이다.
우선 그 소문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신문에 내 이름이 거론될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다.
“아이작.”
“응?”
“고마워. 정말로.”
재판이 모두 끝난 후 미네르바 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돌아온 손님방. 잠깐 쉬기 위해서 침대에 몸을 던졌을 때 아델리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에 고개만 슬쩍 들어올리니 아델리아가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애정, 고마움, 미안함 등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있는 표정. 그러나 나를 향한 애정만큼은 확실하게 드러났다.
재판 당시 존재를 다시 한 번 부정당했으나 지난번처럼 정신이 무너지지 않고 올곧게 버티는 모습.
미련은 있을지언정 트라우마는 떨쳐낸 듯한 그녀의 성장에 미소를 지었다.
“누나. 잠깐 이리 올래?”
손짓까지 하며 가까이 오라고 지시하자 아델리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여전히 애정 어린 미소가 걸려있다.
이윽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내 품에 안기도록 만들었다.
아델리아도 이런 일을 예상하기로 했는지 새된 소리도 지르지 않고 매우 부드럽게 안착했다.
“내가 말했잖아. 난 끝까지 누나 편이 될 거라고.”
“그래도 고마워. 니콜을 만나고, 너를 만난 게 최고의 행운이야. 여태까지의 불행이 널 만나기 위한 거라고 해도 될 것 같아.”
“나도 나에게 평생을 바칠 기사를 만났지.”
그렇게 우리 둘은 한참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다.
은근하면서 미묘한 분위기는 흐르지 않고 오로지 힐링을 위한 포옹.
“하아···”
아델리아는 그 포옹이 만족스러웠는지 나른한 신음소리까지 입 밖으로 내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가 아이를 달래주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재판은 끝났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제논 일대기로 인해 문화가 발전되는 지금, 테르스 왕국은 서서히 암흑기를 걸어갈 예정이다.
외부의 침략을 받은 제국은 재건할 수 있지만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제국은 회생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최악의 발악으로 아델리아나 나에게 해코지를 가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여태껏 정체를 숨김으로서 얻던 이익이 모두 사라지고 귀찮은 일, 특히 악마 숭배자 같은 직접적인 위협이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나에겐 아델리아를 비롯한 든든한 조력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결코 나의 울타리를 뚫을 수 없을 것이리라.
똑똑똑-
얼마나 서로를 껴안고 있었을까. 우리 둘은 노크 소리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몸을 떼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본방까지 치르고 싶지만 여기는 테르스 왕국. 아무리 욕심을 들어도 참아야 될 때는 참아야 된다.
이에 아델이아는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나에게 떨어지고 문을 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거 참 성질 급한 사람이네. 도대체 누구지. 설마 라라인가.
한 번밖에 못 만났으나 아델리아를 정말 좋아하는 그녀였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
다른 왕족은 몰라도 테르스 왕가의 마지막 양심인만큼 호의적으로 대해줄 생각이다.
“누구시죠?”
“아, 아델리아···?”
“어?”
하지만 문 밖으로 들려온 목소리로 라라가 아니다. 비록 잠겼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히리야다.
어째서 그녀가 내가 쉬는 손님방으로 찾아온 것일까. 나는 아델리아가 당황하여 내 눈치를 보는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이어서 문을 활짝 개방하니 문 너머로 히리야의 모습이 전부 드러났다. 아카데미에서 봤던 때와 달리 다람쥐마냥 한껏 위축된 모습의 그녀가.
체격은 호리호리하지만 아델리아 못지 않게 키가 큰 편이어서 작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당당하고 오만했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뭐가 두려운지 벌벌 떨고 있는 소동물만 남아있을 뿐.
재판 때도 보긴 했으나 막상 직접 마주하니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히리야 왕녀님?”
“저, 저···”
내가 부르자 말까지 더듬거리는 그녀. 나는 이대로 방치했다간 시선이 끌릴 수도 있다 판단해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히리야가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델리아는 그녀를 무심한 눈길로 쳐다봤다.
오히려 히리야가 아델리아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 했으며 마주치지 않기 위해 회피하고 있다.
여러모로 반전된 상황. 과연 히리야는 무슨 말을 하기 위해 나에게로 온 것일까.
조금, 아니 많이 기대된다.
“일단 여기 앉으…”
“죄, 죄송합니다.”
“시… 네?”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권유하기도 전에 히리야가 먼저 사죄했다. 이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것이 아닌가.
하늘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처지고 표정 또한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몸을 보아하니 이건 확실하다.
히리야는 두려워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제논이라는 것을 완전히 믿고 있다.
나는 히리야의 뒷통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아델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델리아도 히리야가 다짜고짜 머리부터 박을지 몰랐던 모양이다.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히리야 왕녀님.”
“네, 네.”
“일단 고개부터 드세요.”
내 말에 히리야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린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그녀의 표정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과 지진이 난 것마냥 흔들리는 하늘색 눈동자.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까지.
극도의 불안 증세를 띄고 있다. 1년 전, 전시회에서 테르스 왕가와 만났던 아델리아처럼.
반면 아델리아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으며 오히려 아무 생각이 없어보인다. 당장은 의문만 잡혀 있을 뿐.
나는 불쌍하게 떨고 있는 히리야를 말없이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떠세요?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요.”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떨지 마시고, 저를 똑바로 쳐다봐주세요. 히리야 왕녀님.”
“… …”
나의 ‘상냥한’ 부탁에 히리야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가끔 가다 시선이 오락가락했으나 내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
평소 자신만만했던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얌전해지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보인다.
히리야는 주제를 모르는 게 아니다. 주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태도가 이렇게 변한 것이다.
“왕녀님.”
“네, 네.”
“그렇게 아델 누나가 싫었어요?”
“… …”
내 질문에 히리야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 향한다. 아델리아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혈육이었으나 보기 좋게 버려지고, 나와 만나게 되어 새로운 가족을 꾸렸다.
헌데 시간이 지나 그 혈육 중 하나가 자존심을 전부 버리고 사과를 한다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심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델 누나에게 필요한 건 왕위도, 권력도, 재력도 아니었어요. 단지 가족으로서 정만 필요했죠. 하지만 히리야 왕녀님을 비롯한 왕가는 정을 주기는커녕 학대와 모욕을 일삼았죠.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 이제부터 언니라… 아니, 아델리아 님이라고 부를게요! 제발 용서를…!”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이 여자야. 히리야는 내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무릎을 꿇더니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아델리아가 내 여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제논이 아니었더라면 히리야는 변하지 않았을테니.
나는 무릎을 꿇고 추하게 비는 히리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히리야 님. 만약 제가 제논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처럼 빌었을까요?”
“흐윽… 흑…”
“당신이 아델 누나를 조금이라도 가족처럼 여겼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제발…”
히리야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흐느낄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그녀는 운이 더럽게 없는 케이스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설령 착한 아델리아가 용서하더라도…
‘…그럴 일은 없겠네.’
혹시 몰라 아델리아를 쳐다보니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히리야를 싸늘히 내려다 보고 있다.
평소에는 그토록 원하던 언니라는 호칭.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평생동안 아델리아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니.
있는 정 없는 정 전부 다 떨어져 나가는 게 당연하다. 더군다나 방금 전 재판에서 대놓고 존재를 부정당했으니 혐오감마저 들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히리야를 용서할 생각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냥 생각이 없다.
그녀의 뺨을 때림과 동시에 정체를 밝히면서 응어리졌던 속은 풀렸고, 테르스 왕국은 침체기를 걸을 테니.
“제 가족을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죠, 히리야 왕녀님. 당신이 쏘아올린 공 덕분에 제 정체를 밝히게 됐으니 막심한 손해를 안게 된 셈이에요. 테르스 왕국이 암흑기를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아, 안 돼요! 제발! 제발 존속만큼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당장 몇 십년 전에 국가의 기둥이 흔들렸던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해서 일까. 내 말에 혁명이 떠올랐는지 히리야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외쳤다.
솔직히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 테르스 왕국은 결집력이 강하다. 이건 국가로서 큰 힘이 되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
나의 편지 몇 통과 더불어 앞으로 발간될 제논 일대기 22권을 테르스 왕국민들이 접했을 때, 과연 그들은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화룡점정으로 나의 정체를 만인에게 밝힌다면 테르스 왕국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최악의 경우 히리야가 우려하던 대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멸망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왕가를 견제하던 귀족들이 득세하여 또다른 왕족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왕권 교체. 혹은 혁명.
현재 히리야가 가장 두려워 하고 있는 미래이자 본인의 안위도 걸려있다.
“노, 노예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노리개가 되어도 상관없어요! 모, 못 믿으시면 지, 지금 당장이라도…!”
불안 증세가 제대로 도졌는지 히리야가 떨리는 손으로 옷을 급하게 벗기 시작한다. 드레스가 아닌 제복이라 혼자서도 벗기 편하다.
이에 내가 당황하여 그녀를 만류하려고 할 때, 보다 못한 아델리아가 먼저 그녀를 멈춰세웠다.
“그만하세요, 히리야 왕녀님.”
“어, 언니… 아니, 아델리아…”
“전 당신의 언니가 아닙니다. 전 그저 아이작 님의 충실한 전속 메이드일 뿐. 더이상 테르스 왕가와의 인연은 없습니다.”
“으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 챈 것인지 히리야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나는 어떻게든 용서받기 위해 별의 별 짓을 하는 히리야를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리야 왕녀님. 전 당신의 몸은 필요없어요. 제가 여색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당신보다 훌륭한 여자를 곁에 두고 있거든요.”
뭐, 히리야도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아름다운 미녀다. 그러나 여태까지 깎아놓은 호감도 때문에 받아줄 계획은 없다.
딱 한 가지, 나의 노예가 아니라 아델리아의 노예가 된다면 상관없겠지. 아델리아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학대와 모욕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식이다.
그리고 어차피 히리야가 원하지 않더라도 훗날 테르스 왕가 쪽에서 보낼 게 뻔하다. 그게 히리야일지 아니면 라라일지 모르겠다만 둘 중 하나겠지.
그때는 라라를 받는 게 좋다. 라라는 테르스 왕가에 남은 유일한 양심으로, 그 양심이 아무것도 모른 채 사라진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무엇보다 아델리아를 유일하게 가족으로 대해준 사람이 라라다. 지금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걸 보면 적어도 라라는 지켜줘야 된다.
“그러니 왕녀님은 필요없어요. 설령 억지로 들어온다고 해도 많이 힘드실 테고.”
“버, 버틸 수 있습니다.”
“정말로요?”
“네!”
“아델 누나가 버텼던 것처럼?”
“네!”
“… …”
동앗줄을 어떻게든 붙잡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히리야. 한치의 망설임 없어서 더 역겹게 느껴진다.
히리야는 여기서 절대 긍정적인 대답을 해서는 안 됐다. 아델리아가 느꼈던 아픔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저런 소리는 못 했을테니.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라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지만 그녀의 지독한 이기심은 여전했다.
그녀는, 자기 안위만 멀쩡하다면 내 뒷통수를 후려갈길 위험 분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윽-
나는 속마음을 꾹 내리누른 채 미소를 지으며 히리야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 행동에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한 건지, 히리야의 얼굴이 조금씩 펴진다.
입술은 여전히 파르르 떨고 있어도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전부 드러났다.
“···히리야 왕녀님.”
“네, 네!”
“그게 아니에요.”
“네···?”
“그게 아니라고요.”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 걸까. 히리야는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뺨을 살살 쓸어주고 있다. 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처럼, 여기서 만족하라는 것처럼.
“왕녀님께서 아델 누나가 받았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했으면,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그런 대답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아델 누나는 한 명의 기사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훨씬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인내했어요. 당신이 대련을 빌미로 아델 누나를 구타했을 때도, 바로 앞에서 부모 욕을 했을 때도, 사랑하는 남자를 눈 앞에서 빼앗길 뻔했을 때도, 제가 당신의 뺨을 때려 테르스 왕국으로 왔을 때도!”
“··· ···”
내가 윽박지르자 히리야가 몸을 크게 움찔거린다. 떨리는 눈동자에 두려움과 공포가 새겨지며, 안색 또한 점점 창백해졌다.
“본인의 잘못이라며, 정말 미안하다고 자책했어요.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본인의 잘못이라 스스로를 채찍질했죠. 그런데 왕녀님은? 아니잖아요. 왕녀님께서는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공감은커녕 자기 살 길을 위해 대답한 것밖에 되지 않아요.”
테르스 왕가는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이자, 형제자매이며, 가족이다. 허나 아델리아처럼 눈 밖에 난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해와 공감은 개뿔 자기 만족과 이익만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악독하게 변할 수 있는 인간 군상.
어쩌다 이런 집안에 아델리아가 꿋꿋이 버티고, 어쩌다 이런 집안에 라라 같은 양심이 태어난 것일까.
벨루아 공국으로 시집을 갔다던 올리비아 1왕녀도 이런 성격인 것일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테르스 왕국의 미래는 어둡기 그지 없다.
“용서를 원한다고 하셨죠? 그럼 앞으로 쭈욱 살아가세요. 아델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 묵묵히 살아가세요. 문화의 나라라고 불리던 테르스 왕국이 고작 이런 일로 멸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프리드리히 전하는 능력이 출중한 현군이니까. 하지만 당신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겠죠.”
“으으···”
벌써부터 암울한 미래가 상상되는 것인지 히리야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다. 그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후회를 드러냈다.
과연 히리야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델리아처럼 버티지 못해 도망칠 것인가.
부디 도망치지 말고 아델리아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미 히리야는 아델리아처럼 마음 속 깊숙히 트라우마가 새겨졌을테니.
“죄송··· 합니다···”
“··· ···”
“정말로··· 죄송해요···”
히리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절까지 하면서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일국의 왕녀가 무릎을 꿇는 걸 넘어 바짝 엎드리게 된 상황.
그런 왕녀를 향해, 나는 참 잔인하게 보일 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줬다.
“안 돼요.”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그냥 버티세요.”
네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