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2
■ 31화. 모임 (6) □ ᓚᘏᗢ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이자 아카데미 문학 신입생, 마리는 현재 기분이 정말 좋았다.
원래 옛날부터 모임 같은 행사에 나가는 건 죽도록 싫어하는 그녀이지만, 언젠가 가문에게 도움을 되기 위해 항상 만반을 준비를 갖추는 편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어도 그걸 녹일 수 있는 경험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가문에서 배운 이념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경험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되었기에 마리도 마지못해 나섰다.
그래서 메이크업은 착실하게 할지언정 되도록 빨리 끝나기를 바랬지만, 오늘만큼은 어디 부족한 점이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평균 1시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던 메이크업 과정이 무려 3시간을 넘겨버렸다.
그 대신 공을 들인 메이크업이 잘 먹혔고, 저택에서 갖고 온 드레스도 어디 모난 부분 없이 말끔했다. 마리도 스스로의 아름다운 모습에 만족하며 선뜻 모임에 나섰다.
“어머! 혹시 레킬리스 가문의 영애 아니신가요?”
“네.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해요.”
“전 히르투 가문의 제니아 클턴 히르투라고 해요.”
“히르투 가문이라면… 아! 혹시 매드 자작의?”
“네! 역시 아시는군요. 만나서 정말 영광에요, 마리 님.”
“제니아 님은 무학이셨죠?”
모임에 나가는 길에 마리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나 그녀는 무난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공작 가문의 출신인만큼 14살 때부터 ‘사교회’에 나선 덕에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그녀가 아는 누구처럼 ‘가면’을 써서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다. 천성이 연기를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이미 사교회 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다.
레킬리스 가문의 영애, 마리는 활발한 성격을 가졌다고.
나쁘게 말하면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지만 뒷배가 뒷배인지라 대놓고 험담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속이 뻔히 보이는 달콤한 말로 아부를 떨기 바빴다.
마리는 그런 부류가 정말로 싫었다. 속에는 칼을 숨기고 겉으로는 알랑방귀를 뀌는 가식덩어리들이. 언젠가 본심을 드러내어 이득을 얻으려는 승냥이들.
‘또 이런 기분. 정말 싫어.’
비록 마리는 연기를 못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표정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챈다는 점이랄까.
친근하게 대하는 제니아라는 학생에게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떻게든 고위급 귀족과 연줄을 이으려는 계산적인 행동.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마리는 지금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걔는 그런 기분이 한 번도 안 들었는데.’
마리는 제니아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최근에 인연을 가진 붉은 머리의 남학생을 떠올렸다. 멀리서도 눈에 띌만한 선홍빛 머리카락과 맹수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첫 만남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같이 지내면 지낼 수록 그가 가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설령 거짓말을 해도 얼굴에 모두 다 드러나는데다가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대답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았다.
‘가끔 뭔가를 숨기는 것 같지만…’
그건 개인적인 비밀이지, 마리가 싫어하는 가식은 절대 아니다. 누구처럼 남의 개인사를 이 잡듯이 뒤지는 그녀의 취미가 아니다.
어쨌거나 마리는 머릿속으로는 최근 관심이 간 남학생을, 겉으로는 제니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인가 모임이 진행될 예정인 대강당 앞에 도착했다.
“벌써 도착했네요. 아쉬워요.”
“안에 들어가서도 얘기하면 되죠.”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대신 저도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여기는 헤어져야할 것 같네요.”
“아…”
제니아가 진심으로 아쉬워하던 말던 마리는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어서 빨리 그의 옆에 가서 평소처럼 잡담을 떠들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과연 그는 무슨 복장을 입고 모임에 나섰을까. 8골드도 되지 않은 싸구려 예복을 샀다지만 왠지 그가 입으면 뭐든지 잘 어울릴 것 같다. 키가 평범한 대신 마른 체격 덕분에 옷발을 잘 받을테지.
이어서 마리는 아쉬워하는 제니아를 뒤로 하고 대강당에 발을 디뎠다. 수많은 사교회를 거친 그녀에게도 대강당 내부는 꽤나 잘 꾸민 편에 속했다. 눈이 높은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감탄할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대강당보다 더욱 중요한 게 남아있었다.
‘빨간 머리… 빨간 머리… 빨간 머리…’
마리는 대강당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누구도 아닌 빨간 머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 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찾는 게 우선이다.
이윽고 마리의 기민하게 움직이는 시선에 빨간 머리가 포착되었다. 빨간 머리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여인도.
‘…세실리?
마리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헬리움의 공주이자, 아카데미에서 인연을 맺었던 여자.
그 여자는 현재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은 채, 붉은 머리의 남학생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도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다정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 …”
순간적으로 마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저렇게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니 뭐랄까… 정말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을만큼.
이에 마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 * *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나온 이유는 평범한 여자도 화장으로 꾸미면 아름답게 변하는 경우가 흔하여 나오게 된 일종의 격언이다.
허나 남자들은 아무렴 상관없다고, 예쁘면 그만이지라며 웃어넘긴다. 실제로 여자친구의 쌩얼이 못 생겼다고 헤어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대부분 헤어지자고 통보한 남자를 욕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자가 화장으로 예뻐진 경우에 한해서고, 민낯조차 아름다운 여자는 오히려 화장이 미모를 덮는 일이 빈번하다.
더구나 지금의 세실리는 얼굴이 아니라 다른 곳에 더욱 눈길이 간다.
“아이작 얼굴 엄청 빨개졌어.”
“… …”
나는 장난기가 돈 목소리로 말한 세실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 열이 너무 올라서 그런 걸까, 내 얼굴이 빨갛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 하겠다.
‘진짜…’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끙- 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욕망을 간신히 억제했다.
내가 고자도 아니고 세실리의 이런 모습을 보자니 남자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라면 내 심정을 이해해줄 것이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그것도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서 야릇한 장난을 치는데 그 어떤 남자가 반응하지 않겠나.
지금으로써는 남자의 상징이 고개를 우뚝! 세우는 것만 필살적으로 막는 편이 좋다. 나는 달뜬 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우… 누나…?”
“왜?”
“…옷이 조금… 과하지 않아요?”
“뭐가 과한데?”
몰라서 묻냐. 아니, 일부로 저러는 게 확실하다.
나는 장난기를 유지하며 묻는 세실리에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옷이 좀…”
“야하다고?”
“…네.”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나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렸다. 손을 내리자마자 세실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간다.
내가 현자도 아니고 본능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사이 세실리는 왔다 갔다거리는 내 시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살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굳이 안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실례잖아요.”
“이런 옷을 입었는데도 실례라고 말하면 오히려 그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마족은 대부분 사교회에서 이런 옷을 입는 편이야. 특히 남자들은 욕망에 솔직하잖아? 욕망을 얼마나 절제하는지 알아보는거지.”
그거참… 바람직한 현상이구나. 나는 그녀의 알려준 설명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이런 옷을 입는다면 험담을 내뱉겠지만, 확실히 세실리가 입으니까 다르게 느껴졌다. 색기와 더불어 본래부터 갖고 있던 품위가 기품으로 승화되어 그녀의 매력을 더 크게 발산시켰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눈을 쉽게 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계속 그렇게 다니실 거예요?”
“응? 물론이지. 설마 아이작은 다른 사람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볼까봐 걱정하는 거야?”
“… …”
“말없이 얼굴만 붉어지는 걸 보니까 내 말이 맞나보네.”
세실리가 요놈, 요놈하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혈압이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기분이다.
나는 이러다가 코피라도 흘릴 듯하여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방금까지 뭐 하고 있었어요?”
“처음 본 사람들이랑 얘기하다가 왔는데?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어. 남자던 여자던 대부분 욕망에 젖은 시선을 보냈거든. 확실히 인간은 욕망에 솔직하더라.”
평온한 말투와 달리 내용은 썩 불쾌했다. 나는 인상을 살짝 구기며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아무리 마족의 생활상이라지만…”
“아이작. 인간의 잣대를 함부로 다른 종족에게 대입시키지 마. 우린 우리의 방식이 있고, 인간의 인간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 …”
“우리 마족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원하지만, 남들이 강요하는 걸 받아들이면 그건 흉내에 지나지 않을거야. 네가 저번에 말한 것처럼 마족은 마족답게 살아가야지.”
세실리의 따끔한 충고에 입이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인간의 방식을 다른 종족에게 들이미는 행동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어쩌면 이런 내 행동이 그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아니야. 이것도 네 배려심이 작용한 거겠지. 그 배려심이 느껴져서 기분은 좋네.”
내 사과에 세실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었다. 나 또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응?”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세실리는 물론이고 나 또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실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녀가 팔짱을 낀 채 당당히 서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몰라도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미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새하얀 백발과 더불어 영민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마리?”
“왜 불러?”
마리의 이름을 입에 담자 아리따운 미녀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는 약간 멍해진 얼굴로 마리의 모습을 훑어봤다.
허리까지 길게 길렀던 흰색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묶어 사슴같은 목덜미를 드러냈고, 화장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어른스러운 자태를 뿜냈다.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흰색 드레스 또한 세실리처럼은 아니지만 나름 과감한 편이었다. 어깨를 완전히 드러내어 뇌새적인 쇄골 라인이 선명했으며 적당하게 큰 가슴도 일부나마 노출시켜 성적 매력을 뿜냈다.
마지막으로 공작가 영애에 걸맞게 비싸보이는 장신구를 착용했지만 그녀의 미모에 비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학생으로써의 마리가 활발한 소녀다움을 풍겼다면, 현재의 마리는 세실리처럼 성숙미를 풍기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왜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내 모습이 이상해?”
내가 멍하니 자태를 살펴보는 동안 마리가 다시 한 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선을 슬쩍 회피하고 뺨에 홍조가 이는 걸 보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에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본심부터 입 밖으로 꺼냈다.
“아니. 그… 너무 당황스러웠달까? 너무 예뻐져서 잠깐 못 알아봤거든.”
“…예쁘다고?”
예쁘다는 말에 마리의 뚱했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리고는 내 옆의 세실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나 얼마나 예뻐?”
“네가 저번에 호언장담했듯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응?”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옆의 세실리가 의문을 드러냈다. 슬쩍 표정을 보아하니 한쪽 눈을 치켜 뜬 상태였는데 무언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내 대답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뒤이어 그녀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 채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무뚝뚝하게 답했을 때는 언제고 의의로 입에 발린 말도 잘 하네? 그래봤자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는 거 알지?”
“내가 언제 입에 발린 말을 한 적이 있나? 만약에 했다면 미의 여신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였겠지.”
“차라리 그렇게라도 했으면 뭐라도 있었을 텐데 아쉽네.”
“그럼 지금이라도 할까?”
“됐어. 그나저나…”
나와 잡담을 나누던 마리는 말을 흐리며 내가 아닌 세실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빠르게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세실리는 그… 과감하네? 눈을 어디에다 둬야할지 모르겠어.”
마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던지 간에 세실리를 본다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한편 세실리는 마리의 감평을 듣고 빙그레 웃더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 한 돌발행동을 선보였다.
“응. 마리의 생각도 그렇지?”
은근슬쩍 내 팔을 붙잡아 잡아당기더니 이내 가슴 쪽에 밀착시키는 것이 아닌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어진 동작이라 뒤늦게 대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말랑말랑한 감촉이 팔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자 기껏 내려앉았던 화기가 다시 올라왔다.
“뭐, 뭐 하는…”
“이 드레스를 입으면 아이작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세실리의 대답을 듣고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웠다. 조금 전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다른 대답이다.
특유의 장난기가 깃든 말투를 보아 분명 장난을 치는 것인데 이마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도 세실리의 대답이 어이없던 모양이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 그게 무슨 소리냐는 속마음을 여실히 표현했다.
그에 세실리는 붙잡았던 내 팔을 더욱 강하게 잡아당겼다. 아예 작정했는지 내가 어떻게든 빼내려고 시도해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둥거릴 때마다 말랑거리는 감촉만 선명하게 전달될 뿐이다.
“들은 그대로야. 아이작의 반응이 궁금해서.”
“아니. 세실리 누나? 아까는 분명…”
“…장난은 그쯤하지? 아이작이 곤란해하는 거 안 보여?”
내가 다급히 입을 열기도 전에 마리가 성큼 다가와 세실리가 붙잡은 내 팔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나 일반인에 가까운 마리가 세실리의 근력을 이길리가 만무했다.
그 결과, 두 여자가 내 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세실리는 삽시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장난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팔짱을 끼는 건 욕망을 이겨낸 상대에게 해주는 일종의 포상이야. 우리 헬리움의 오래된 문화지.”
“그건 너희 마족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겠지. 우리 인간들은 지금 네 행동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을 걸? 지금 네가 아이작에게 하는 행동은 연인끼리나 하는 행위라고. 정조를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어.”
“아까 아이작에게도 말했지만 인간의 기준을 다른 종족에게 대입시키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우리 마족도 정조관념은 매우 보수적인 편이야.”
“인간 세상에 왔으니 인간의 법도에 따라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두 여자 사이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리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얼굴을 지은 반면, 세실리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까.
그러나 상관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헬리움의 공주와 레킬리스의 영애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운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개인가.
아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집에 가고 싶다.’
현재 내 심정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