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350
■ 349화. 히르트 (2) □ ᓚᘏᗢ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보면 각자 차이가 나도 대부분 ‘거인’인 경우가 많다.
위압감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체격만큼 표현하기 쉬운 건 없을 테니. 필멸자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위압감.
여기에 ‘자연의 신’은 창조신이라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으며 자연 그 자체다보니 크기도 클 수밖에 없다.
당장 자연하면 떠오르는 게 드높은 하늘이며, 능히 뻗어있는 대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였으니.
이 세상의 자연의 여신, 히르트도 이 범주에 속해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드디어 만났구나, 아이야.”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앉은 히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인사한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짙은 호감이 담겨있었다.
나는 무례라는 것도 모르고 떨리는 눈동자로 히르트와 마주했다. 루미너스와 모라조차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했는데 히르트는 직접 등장했다.
은밀한 부위를 나뭇잎으로 겨우겨우 가렸으나 그 어떤 음심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이처럼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만 들 뿐이지.
허나 그것조차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사그라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히르트는 자연의 여신.
‘자연’ 앞에 인류는 약하디 약한 존재다. 태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드는데 자연의 여신 앞에서는 오죽할까.
나는 빙글빙글 웃는 히르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히르트 님?”
“왜 그러니?”
“정말로 히르트 님··· 이신가요?”
바보 같은 질문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막상 내 입장이 되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무려 신이다. 그것도 창조신이나 다름없는 자연의 여신.
루미너스나 모라처럼 목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라 직접 현신까지 했으니 내 심정이 어떠할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너무 당황스러워 뭘 해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았다.
“모, 모든 이의 어머니이자 보배로운 자연의 여신, 히르트시여! 천사의 후예가 인사드립니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을 때 아르웬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원래 나와 팔짱을 끼고 있었으나 어느새 풀고 바닥에 납작 업드린 것이 아닌가. 몸이 조금씩 떨리는 건 덤이다.
제아무리 알븐하임의 여왕이라 해도 신 앞에서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할 터. 이건 나라고 다르지 않다.
내가 제논이라한들 그녀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제서야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나도 곧장 넙죽 엎드리기 위해 자세를 낮추었으나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스윽-
“···히르트 님?”
“굳이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단다. 더욱이 넌 아직 이곳에 익숙치 않을테니까.”
히르트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꾸욱- 누르며 자애롭게 말했다.
그러면서 살살 쓰다듬는 것이, 흡사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이다.
실제로 그 행동만으로 긴장되었던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좀 더 쓰다듬어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레오나가 내 손길을 만끽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일까. 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미소지었다.
“자연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얘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후훗.”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히르트가 인자한 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그녀는 내 머리에서 손가락을 떼고는 아르웬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이제 일어나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단다.”
“네, 네···!”
히르트의 지시가 아닌 다정한 부탁에 아르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히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부담감을 주기 싫었는지 싱긋 웃는 얼굴로 살살 달래줬다.
“고개를 들렴. 긴장할 필요는 없단다.”
“하, 하지만···”
“네 생각처럼 나는 자연의 여신. 그리고 자연은 ‘자의적으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단다. 네가 무례를 범해도 나는 직접적으로 벌할 수 없지.”
루미너스, 그리고 모라와 확연히 대비되는 점이다. 히르트는 쌍둥이 남매신과 달리 벼락을 떨구거나 인위적으로 천벌을 내릴 수 없다.
설령 내린다고 한들 천벌을 내려줄지도 미지수이며 그 강도가 얼마나 강한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히르트가 저 말을 꺼낸 이유는 무례를 저질러도 된다가 아니라, 편하게 대해달라는 의미에 가깝다.
아르웬도 그 뜻을 받아들였는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치를 보는 게 흡사 다람쥐 같다.
히르트도 그런 그녀가 귀여웠는지 아까 전처럼 싱긋 웃어줬다.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말은 했다만, 자그마치 신인만큼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는데 오래 걸렸구나. 나는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니?”
아르웬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히르트가 나에게 말했다. 자애로운 목소리와 별개로 투덜거리는 말투다.
루미너스와 모라를 반반씩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전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히르트 님은 다른 두 분과 달리 뵙기가 어려워서요.”
“그것도 그렇지. 신전을 세워도 큰 효력은 없었을 테니까.”
히르트는 내 변명 아닌 변명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다른 두 신들처럼 신전이 있으나 큰 효력은 없다. 그냥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것밖에 없으며 신성력도 받지 못 한다.
전에 말했듯이 히르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기우제 같은 주술의 힘을 빌려야 된다. 때문에 신전은 전생처럼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다.
“지금 만났으니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겠지. 아이야.”
“네.”
“이 세계는 살만하니? 적응 자체는 쉬웠겠지만 상식 면에서 꽤 힘들었을 텐데.”
나는 괜찮다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아르웬을 힐끔거렸다. 일부로 그랬는지, 아니면 창조신이라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저 질문은 내가 다른 세계로 왔다는 걸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리고 아르웬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추측하는 중이다.
그 추측을 확신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니 격렬한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아르웬은 히르트의 질문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쳐다봤다.
토끼처럼 떠진 눈에는 경악과 놀라움 등. 다양한 감정이 두루 섞여 있다.
“아참. 이건 말하면 안 됐었나?”
히르트도 뒤늦게 본인의 실언을 깨달았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이 동그래진 걸 보아 고의가 아닌 실수인 듯했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어차피 아르웬이 의심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큰 타격은 없다.
무엇보다 완결 이후에는 전생의 이야기를 쓸 텐데 조금 일찍 알려줬다고 치부하면 될 것이다.
“아뇨. 괜찮아요. 아르웬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어요.”
“여, 역시··· 그대는···”
“만약 싫다면 시간을 되돌려 줄 수 있단다. 정 아니면 기억을 없애거나.”
아르웬이 경악하건 말건 히르트는 창조신다운 제안을 건넸다. 하지만 둘 다 끌리는 제안은 아니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얘기하도록 하자. 나는 히르트의 커다란 얼굴과 마주하며 편안하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어쨌거나 히르트 님을 포함한 다른 두 분의 배려 덕분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요. 전에 없던 명예를 누리는 건 물론이고 사랑하는 여자들과 이어졌으니까요.”
“다행이구나. 만약 네가 불행하게 살았다면 우리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겠지.”
악마 숭배자의 트롤링 때문에 지구의 영혼이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루미너스의 설명에 따르자면 불교에 등장하는 ‘윤회’에 거스르는 짓이라 지구의 신들이 난리를 피웠다고.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인 것이, 전생의 나는 평범하디 평범한 웹소설 작가였을 뿐더러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부모님을 사고로 한 순간에 여읜 이후로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렸으니.
전생의 상식이 있음에도 이 여자 저 여자 받아들이는 것도 이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나한테 묻고 싶은 건 없니?”
“히르트 님은 더 없으신가요?”
“내가 너를 만난 이유는 별 거 없단다. 한 번 보고 싶었거든. 덤으로 해야 할 게 있다만 그건 마지막에 할테니 편히 물어보렴.”
“그럼···”
하나 있다. 원래 루미너스나 모라에게 직접 물으려던 질문이었으나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제가 이 세상의 이름을 작명하려고 할 때 히르트 님께서 막으셨잖아요? 그건 왜 그런 거죠?”
제논이 이 세상의 이름을 소리치며 아군의 사기를 돋구는 명장면. 그 이름 하나를 정하려던 찰나 히르트가 고의적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으나 다시 생각보면 절대 아니다. 그거 하나 때문에 지진까지 일으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으니.
“그건 우리 신들의 불문율이란다. 세상의 명칭을 자기 이름으로 짓지 말 것. 그것만으로도 신성력을 독식할 수 있거든.”
“자연의 여신이자 창조주인데도요?”
“자연이기 때문에 그런 거란다. 자연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사람이 살기가 힘들어지거든. 매일매일 폭풍우가 몰아치고, 하늘에서는 벼락이 비처럼 쏟아지며, 화산이 틈만 나면 폭발한다고 생각해보렴. 더불어 나는 자연 그 자체이기에 조절조차 할 수 없지.”
“오···”
끔찍하다기보다는 대단하다. 자연이 신성을 퍼먹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반드시 기억해야겠다.
잘 생각해보니 신화의 최고신들도 세상의 명칭을 자기 이름에서 따오지 않았다. 그런 이유가 숨어들어 있었다니 역시 신기하다.
히르트가 지진을 고의적으로 일으킨 이유도 알 것 같다. 제논 일대기에 그런 명칭이 나왔다면 분명 히르트가 신성을 독식했을 터.
나는 감탄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신들의 이름에서 따오기보다는 내가 직접 창작하는 게 더 낫겠다.
“다른 질문은 없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는 모두 대답해주마.”
“히르트 님처럼 다른 분들도 현신이 가능한가요? 보아하니 세계수의 힘을 빌리신 것 같은데···”
“가능하긴 하다만 오지 말라고 했단다.”
“어째서죠?”
한 번 쯤 보고 싶었는데. 특히 모라가 가장 궁금하다. 세실리랑 닮았나 싶어서.
히르트는 내 물음에 빙긋 웃더니 상냥하게 대답했다.
“너는 괜찮아도 이 아이가 버티기 힘들거든.”
“저, 저 말입니까?”
아르웬을 가리키면서. 아르웬은 본인이 지목당하자 당혹스러워했다.
“그래. 너는 이 아이처럼 신성력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지금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자식들까지 오면 기절하겠지.”
“식은땀? 어?”
히르트의 말에 아르웬은 그제서야 자신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세계수의 힘을 빌렸다지만 신은 신. 알게 모르게 심력을 소비하고 있던 탓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루미너스와 모라까지 등장했다면 압박감을 못 이겨 기절했겠지. 덕분에 내 신성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자각할 수 있었다.
“다른 건 없니?”
“히르트 님과 이렇게 얘기하기 위해서는 매번 세계수에 방문해야 되나요?”
“아무래도 그게 가장 편하겠지. 레오나 그 아이에게 빙의해도 되지만 그러면 그 아이가 힘들어할 테니.”
“얼마나 힘들어요?”
“일주일 내내 신열을 앓게 될 거란다. 익숙해지면 상관없지만 너는 그런 성격이 아니잖니?”
물론이다. 레오나가 아플 바에야 차라리 내가 직접 세계수로 방문하는 것이 더 낫다.
“알겠어요. 앞으로 자주 방문하도록 할게요.”
“꼭 그럴 필요는 없단다. 내 의사는 자식들에게 부탁하여 대신 전달할 테니까. 그리고 세계수에게도 무리가 가기 때문에 최대한 자중해주렴.”
악마들을 몰아낸 세계수마저 부담을 느낄 정도라니. 이렇게 마주하는 것조차 힘들다니.
그렇다면 어째서 히르트는 현신까지 한 것일까. 루미너스와 모라처럼 목소리만으로 의사를 전달하면 될텐데 무리를 한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그런 의문을 지니며 말하려던 찰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히르트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편안해지는 미소. 마치 두터운 솜털 위에 몸을 뉘인 듯 안락함마저 느껴진다.
“아이야.”
“네?”
“우리 세상을 위기로부터 구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히르트는 그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두 손을 나에게 뻗었다. 나는 그녀가 행동을 취해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한 손으로는 내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받치더니 자기 얼굴을 향해 가까이 대었다.
이에 눈높이가 같아진 건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는 깊이를 전혀 알 수 없어 사뭇 무섭게 느껴졌다.
우주를 정면으로 맞이한 것처럼 압도되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을 때, 히르트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모든 이의 어머니이자 자연의 여신이 선언하노니···]아까 전과 달리 크게 증폭되는 히르트의 목소리. 귀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에 가깝다.
루미너스와 모라가 했던 것과는 다르다. 단어 하나 하나가 뇌리에 비수처럼 박히는 느낌.
흡사 최면을 거는 것 같아 정신이 멍해질 때쯤, 히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순수한 자연의 축복이 있으리라.]그 말과 동시에 히르트는 나를 얼굴 쪽으로 가까이 대더니.
쪽-
가볍게 키스했다. 다만 크기가 크기다보니 그녀의 입술이 내 얼굴 전체를 감쌀 정도다.
자연의 여신에게 받은 키스는 뭐랄까··· 기이했다. 분명 접촉 자체는 있었는데 이후의 느낌은 전혀 없었으니.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게 크다. 히르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히르트 님?”
“후훗.”
내가 어벙한 표정으로 묻자 히르트가 자애롭게 웃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단순히 무릎을 편 것 뿐인데도 거대한 산맥이 태동하는 것 같은 장엄함을 자랑했다.
“자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둘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구나.”
“··· ···”
“앞으로도 이 세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렴.”
파앗!
히르트는 그 말만 남기더니 순식간에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빛의 입자는 하늘 위로 상승하더니 이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나는 그 광경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문득 히르트가 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쪼그려앉아 있던 자리에는 웬 ‘씨앗’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평범한 씨앗은 절대 아닌 것이, 크기만 해도 성인 남성 주먹보다 훨씬 컸다.
“··· ···”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