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412
■ 411화. 기인 (2) □ ᓚᘏᗢ
나는 기척도 없이 등장한 중년인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암살자마냥 바로 뒤까지 접근한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나와 마리가 너무 신나게 떠들어서 눈치를 못 챈 것도 있지만, 앞의 중년인이 인기척을 하나도 내지 않은 게 가장 컸다.
게다가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옆에는 묵직해 보이는 인상의 기사가 당당히 서 있었다.
갑옷이 아닌 평복 차림이었으나 허리에 매어져 있는 검을 보면 그가 호위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떤가?”
“어······”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넸던 중년 남자를 멀거니 쳐다봤다.
저번에 만났던 아이케르가 토르를 닮았다면, 앞의 중년인은 수염 기른 캡틴 아메리카에 가깝다.
그렇다 해서 은거 기인마냥 수염을 무성히 기른 게 아니라 잘 정돈되어 중후한 멋이 한층 돋보였다.
게다가 수염을 길러서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잔주름이 거의 없어서 상당히 젊어보였다.
‘복장도······’
하물며 복장도 예사롭지가 않다. 평범한 예복이 아니라 제복에 가까웠으며 붉은색 망토까지 착용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높으신 분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는 외모. 게다가 머리카락과 수염이 빛에 반사되어 황금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와 한동안 마주하다가 설마하는 심정으로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리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장난스레 웃더니 이윽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인사했다.
드레스의 양 끝을 잡고 조용히 들어올리는 인사.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하는 예법이다.
“제국의 하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존중을 가득 담은 그녀의 인사를 듣자마자 직감했다. 역시 앞의 남자는 내가 예상하던 사람이 맞다고.
레오르트나 리나에게 공적인 부분으로 인사할 때는 제국의 ‘태양’이라 부르지만, 방금 전 마리는 하늘이라 칭했다.
다시 말해 황태자와 황녀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미네르바 제국의 황제, 베리트 우르미 재클리스 미네르바.
“아! 제, 제국의······!”
“됐네. 자네가 아니라 내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크게 당황한 내가 예법에 따라 인사하려던 찰나에 황제, 베리트가 손을 흔들며 곧바로 만류했다.
이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옆에서 마리가 쿡- 쿡- 웃음을 흘렸다.
당최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인지라 어안이 벙벙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래서 대답은?”
“예?”
“내가 무릎이라도 꿇는다면 되살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네.”
머리가 여전히 어질어질한 상황에서 베리트가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넸다. 덕분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무릎을 꿇는다.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을 뿐더러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고작 소설 속 캐릭터를 살리겠다고 무릎을 꿇겠다니. 괴리감이 어마어마하다.
진·릴리 커플 지지자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하니 황제마저 그쪽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지. 그것과 별개로 무릎까지 꿇을 정도는 아니잖아.’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 나는 다급히 황제가 아닌 곁의 호위 기사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제의 호위 기사는 보통 먼 과거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신뢰로 꽁꽁 묶여있는 관계.
그 예상대로 호위 기사는 내 곤란한 시선을 받자마자 헛기침을 하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무릎을 꿇겠다는 말은 삼가해주십시오. 상대가 제논이라고 한들 폐하께서 무릎까지 꿇을 건 아닙니다.”
“이 자의 말 한 마디에 성전이 선포될 수 있다만? 그대는 미네르바 제국이 헬리움과 세이비어의 합공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것과 말이 다르잖습니까. 단지 무릎을 꿇는 걸 지양해달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까.”
“에잉. 쯧쯧.”
호위 기사가 따박따박 맞는 말만 꺼내놓자 베리트도 혀를 쯧쯧거릴 뿐, 따로 나무라지는 않았다.
나는 모습을 보며 살짝 얼떨떨해졌다. 호위 기사와의 관계가 돈독한 건 확실하나 근엄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뒤이어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무릎을 꿇는 것 말고 다른 건 어떤가?”
“폐하.”
“알았네. 알았어. 그만하도록 하지.”
베리트는 너털웃음을 흘리고는 목을 풀기 위함인지 헛기침을 했다.
이어서 잔잔하면서도 나긋나긋한, 그럼에도 무거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나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짐.”
옆에서 호위 기사가 또다시 지적했다. 이번에는 호칭 문제다.
베리트는 또다시 쯧, 하며 혀를 차고는 말을 고쳤다.
“짐은 미네르바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베르트 우르미 재클리스 미네르바라고 한다네. 제논과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네.”
“아,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하늘과 마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리트의 인사에 나도 황급히 예법을 담아 인사했다. 여러모로 인상 깊은 만남이다.
동시에 궁금증이 생긴다. 베리트는 무슨 이유로 정원에 온 것일까.
우리가 정원으로 간다는 건 따로 알려주지도 않았다. 오직 객실에 머물고 있는 아델리아만 알고 있다.
베르트도 내가 황궁에 왔다는 건 알고 있을 테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만남은 정말로 우연이다.
“마이샬 경의 아들답게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로군. 레킬리스 공녀와도 정말 잘 어울리네.”
“화, 황송합니다.”
나는 예의를 한가득 담아 감사를 전했다. 여태까지 만났던 지도자들에 비해서 상대하기 어려웠다.
아르웬은 전부터 친분을 맺었고, 데스칼은 마족이라 그쪽에서 나를 은인으로 대우했다.
하지만 베리트 같은 경우는 그런 것도 없이 첫 만남이라 예의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리나의 정략 결혼 상대?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 아직 제대로 된 말도 나누지 않았다.
즉,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잘 보일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나? 보아하니 내 이리로 올 줄 알고 데리고 온 것 같다만.”
내 인사를 받은 베리트가 마리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 말에 나 또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마리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베리트의 물음에 화답했다.
“네. 맞아요. 폐하께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정원으로 오시잖아요?”
“너 설마······”
“이런 인연도 나쁘지 않잖아?”
내가 설마하며 묻자 마리가 혀를 삐죽 내밀며 앙큼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이미 다 계산해놓은 모양이다.
그에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는 동안, 베리트도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점잖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에 장난기가 많이 늘었구나. 그만큼 여유가 늘어났다는 거겠지.”
“네.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났거든요.”
그리 말하며 내 팔을 꽉 붙잡는 마리. 말랑한 감촉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과 별개로 황제가 앞에 있는데 애정 행각을 펼치는 그녀의 당당한 행동이 썩 당혹스럽다.
하지만 베리트도 허허 웃기만 하지 불편하다거나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적으로 친분을 다져놓은 상태거나, 마리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한창 좋을 때지. 리나는 몰라도 레오르트 그 놈은 서둘러 제 짝을 찾아야 되는데 말이야.”
“어라? 이미 리나가 말했나요?”
“그건 아니다만 그 정도 감각도 없으면 이 자리를 보존하지 못 했겠지.”
베르트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도 리나가 정략혼으로 나에게 온다는 걸 얼추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해지는데다가 눈치가 보인다. 이에 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날렸다.
“······괜찮으십니까?”
“무엇을? 자네도 예상하고 있던 거잖나. 얼굴이라도 못 났다면 진심으로 걱정했겠지. 그 반대라서 천만다행일세.”
“··· ···”
무어라 더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말문이 막히는 화법이다. 더이상 이것에 관해 말하기 싫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달까.
황궁으로 향하기 직전, 리나가 말려들기 쉬우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하기야 황제 자리는 거저 먹은 게 아닐 테니 말에 한해서는 결코 정신을 놓아서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 더군다나 내게 처음으로 건넸던 말조차 제논 일대기에 관한 질문이다.
“여기 있지만 말고 조금 걸으세나. 자네는 여기가 처음일 테니 내가 딱 좋은 곳을 알려주도록 하지.”
“낚시하러 가시는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마리 너는 알고 있겠구나.”
그리하여 기묘한 나와 마리, 그리고 황제 베리트와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됐다.
여러모로 기인에 가까운 언행을 보여주는 베리트인지라 긴장의 끈을 놓기가 어려웠다.
자칫 방심했다가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었으니.
“그나저나 진이 죽는 건 기정사실인 겐가?”
바로 지금처럼. 몇 걸음 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질문을 꺼냈다.
나는 순간 흠칫했다가 곧바로 침착을 되찾았다. 이미 다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라서 손쉽게 대응할 수 있다.
“방금 그 이야기를 다 들으셨다면 예측하실 수 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거군.”
확신이 가득한 말에도 나는 섣불리 반응하지 않았다. 괜히 이것저것 덧붙였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으니.
내 조용한 반응에 베리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앞을 바라봤다.
참고로 베리트가 앞장 서고, 나와 마리가 그의 뒤를, 마지막으로 호위 기사가 맨 뒤에서 따르는 중이다.
“정말 아쉬워. 짐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었거늘.”
“폐하께서는 어떤 면이 가장 좋으셨습니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꿋꿋이 헤쳐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 비록 모험과 거리가 먼 몸이지만 이야기가 워낙 생생해서 몰입이 가능했다네.”
“황송할 따름입니다.”
입에 잘 안 붙는 단어를 사용하다보니 나 자신이 어색해졌다. 그렇다 해서 황제에게 말을 놓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앞으로 장인어른이 될 수도 있는 분인데 말을 함부로 했다간 큰일날 수도 있다.
최대한 잘 보여야 된다. 베리트가 다소 기인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만 일분일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낚시를 한 적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이 기회에 한 번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재미있을 걸세.”
낚시 그거 한 번 할 때마다 엄청 오래 걸리는 걸로 아는데. 요즘 시국이 시국인데 업무는 안 보이는 건가.
그 생각이 머릿속으로 돌아다니고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뒤의 호위 기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말만 나지막하지만, 귀에 속속 박힐 만큼 또박또박하고 선명한 목소리다.
“폐하. 애석하지만 휴식 시간은 15분입니다. 현재 나라가 많이 혼란스러우니 부디 자제해주십시오.”
“허허. 이 사람아. 사위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 건데 그것도 힘든가?”
“예.”
“··· ···”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에 베리트조차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버릇인지 혀만 쯧쯧거릴 뿐이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도 잘 알고 있다. 현재 미네르바 제국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악마 숭배자와 관련된 사건사고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제국의 위신이 무더기로 깎이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자리를 비운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제논······ 아니, 아이작.”
“예. 폐하.”
“낚시하는 동안 심심할 테니 이야기나 나누세나.”
“알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황제의 근엄과 거리가 먼 분이시다. 이런 말 하기에는 미안하지만 속세에서 벗어난 한량에 가깝다.
물론 어디까지나 언행에 한해서. 언행이 다소 독특해도 겉모습은 누가 보아도 황제처럼 보인다.
‘그나저나 형제는 따로 없으신가?’
이건 살짝 궁금하다. 왕족은 많은 수의 자손을 낳음으로써 대를 유지해야 되는 의무를 갖고 있다.
베르트의 자식이 단 둘인 것도 살짝 의아함이 드는데 그에게는 형제가 있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단, 외동일 가능성도 염두해봐야 된다. 내가 정치에 발을 담군 사람이라면 모를까, 신문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
“아참. 마이샬 경은 잘 지내고 있나?”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베리트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나에게 물었다. 내가 아닌 아버지의 안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듯한 말에 놀랐지만 일단 대답은 해야겠지.
나는 혹여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번 필터링을 거친 후, 긍정적인 투로 대답했다.
“예. 아무 이상 없이 지내고 계십시다.”
“짐과 관련된 말은 한 적이 없고?”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뭔가 거슬리는 질문에 의문문으로 대답해버렸다. 그러자 베리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정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한 번 마이샬 경과 만나야 하는데 늦어지는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있긴 있었지. 그래도 내가 그에게 빚을 진 거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그런 말을 하니까 더 신경 쓰이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거지.
“궁금하면 낚시할 때 알려주겠네. 마이샬 경 성격상 자기가 뭘 했는지 전혀 알려주지도 않았을 테니 말일세. 어떤가?”
“전 상관없······”
“대신 진을 살려주는 대가로.”
“··· ···”
이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