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425
■ 424화. 요격 (2) □ ᓚᘏᗢ
진의 죽음으로 인해 히르트 혹은 루미너스와 모라가 슬퍼하여 흉년이 발생했다. 듣기만 하면 소위 ‘억까’에 가까운 주장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걸 믿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이 세상은 신의 존재가 명확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신탁이 내려지겠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다.
만약 신이 조금이라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죽도 밥도 안 되는 신세가 돼버리니. 무엇보다 나조차도 설마? 라는 심정을 가진 상황이었으니.
이러한 이유로 내가 신전으로 향하는 건 당연한 수순. 하지만 급한 일은 아니어서 소식을 보자마자 신전으로 가지는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데 굳이 초를 칠 수는 없으니. 게다가 하루 정도 미룬다고 큰일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다음 날이 되자마자 신전으로 출발하려던 찰나.
“아이작~!”
미리 올 거라고 연락을 줬던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가 우리 저택에 도착했다.
외출을 위해 침실에서 대기하다가 문을 열고 등장한 그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실리를 바라봤다.
복장은 언제나 그랬듯이 풍만한 가슴이 과감하게 드러난 붉은색 끈 드레스. 깊게 새겨진 골짜기로 하여금 시선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런 그녀가 두 팔을 펼치며 달려온다. 거대한 봉우리 두 개가 위아래로 출렁이는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와락!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에 정신이 홀린 것도 잠시, 그녀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봤다.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그녀의 머리가 시야에 잡혔다.
어둡게 빛난다는 모순 아닌 모순적인 표현이 어울리는 머리카락. 마족임을 증명하는 뿔까지.
마지막으로 특유의 체취라고 할 수 있는 복숭아 향기가 후각을 자극시켰다. 존재만으로 내 오감을 건드렸다.
“이 향기랑 튼튼한 가슴······ 아이작이 확실해. 정말 보고 싶었어.”
“······그동안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우웅.”
나는 계속해서 얼굴을 비비는 세실리에 피식 웃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뿔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악주기가 슬슬 다가오는 것인지 끄트머리를 제외하고 온통 붉은색이다. 아무래도 방학 도중에 악주기가 올 듯했다.
‘······이거 진짜로 레오나랑 같이 덤비는 건 아니겠지?’
문득 그런 불안감이 들었으나 서둘러 집어넣었다. 지금은 오랜만에 만난 세실리와 교감을 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그녀는 나를 껴안으면서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고, 나 또한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주면서 머리와 뿔을 쓰다듬었다.
이렇게만 해도 그녀의 욕망은 상당 부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후아······ 속에 묵혀있던 게 다 내려가는 느낌······ 역시 아이작이야.”
“힘들었던 건 아니지?”
“아이작을 못 만난 걸 빼면은?”
세실리는 그리 대답하고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외출복 차림의 아델리아가 서 있었다.
우리가 서로 껴안는 동안 옆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머쓱한 미소를 지은 것이, 약간 뻘쭘했던 모양이다.
“아델 씨도 잘 지내셨나요?”
“예. 공주님.”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외출복인 걸 보니 어디 나가려는 건가요?”
나에게 여전히 착 달라붙은 상태로 질문을 건 세실리. 그 대답은 아델리아가 아닌 내가 대신했다.
“응. 신전으로 갈 생각이었거든. 평소에 못 찾아간 것도 있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그렇구나. 그럼 난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듣자하니 리나가 여기에 있다고 들었거든. 어디에 있어?”
“리나는······”
이후로 리나가 기거하는 방을 알려주고, 짧지만 깊은 해후를 끝마쳤다.
“그럼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쪼옥-
그리고 떠나기 직전, 세실리는 나에게 키스했다.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키스.
그것조차 만족했는지 그녀는 입술을 떼자마자 요염하게 혀를 핥으며 나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붉은색 눈동자에 나를 향한 욕망과 더불어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
나 또한 말랑말랑하면서도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맴돌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언제나 한결같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마족의 공주님.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뿔을 만져주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네. 금방 갔다 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줘.”
“물론이지. 아참. 신전하니까 생각나는데 케이트 추기경님은 어디 가신 거야?”
세실리는 마법으로 저택 내부를 파악했는지 케이트의 행방을 물었다.
케이트는 악마 숭배자의 천적으로써 내 곁을 지켜야 하는데 없으니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케이트 씨는 잠깐 할 일이 있다며 본국으로 귀환한 상황이야. 때마침 겨울 방학이니 나도 돌려보낸 거고.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온다 했으니 방학 도중에 돌아오긴 할 걸?”
“그래? 그럼 다른 사람들은? 아르웬 여왕님도 잘하면 올 수 있다고 들었어.”
“마리랑 레오나는 늦어도 사흘 안에 도착할 거야. 축제도 없는 데다가 완결도 냈으니 여유 시간도 많고.”
“축제가 없다라······”
세실리는 축제가 없다는 내 말을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
그러다가 나를 힐끔거리더니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저거 분명 장난기가 돌았을 때 나오는 반응인데.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금방 돌아올게.”
“아냐. 루미너스 님은 몰라도 모라 님은 투정을 부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걸? 느긋하게 얘기하다가 와도 돼.”
루미너스와 달리 말이 많은 모라. 더 웃긴 건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전에 찾아간지 오래 되었을 뿐더러 두 분 모두 나를 어여삐 여겼으니까.
게다가 모라는 세실리 이상의 장난기로 인해서 무슨 짓을 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여성화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악신으로 묘사해야지.’
내 머릿속을 읽었다면 그 주제를 꺼내지도 않겠지. 나는 세실리가 나가자 준비를 모두 끝낸 후 아델리아와 함께 나섰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우리 영지에서 케이트의 호위는 필요없다.
루미너스와 모라의 신전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다른 곳과 달리 신성력의 농도가 막강한 곳이니.
물론, 이대로 나갔다가 괜스레 시선이 끌릴 수도 있었으니 후드를 쓰고 갈 예정이다.
붉은 머리카락이 워낙 눈에 띄어서 말이지. 아델리아도 후드를 쓰고 갈 예정이다.
“음? 어머니?”
“어머. 아이작.”
복도를 걷는 도중에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마주쳤다. 헌데 어머니의 복장은 영 이상하다.
이상하다기보다는 어디 장례식이라도 가는 건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계셨다.
모자 또한 검은 장미가 달려있는 것이, 누가 보아도 장례식으로 향하는 복장이다.
‘그나저나 정말 잘 어울리시네.’
머리카락도 짙은 남색이라 전체적으로 검은색 계통의 복장이 잘 어울리셨다. 외모마저 끽 해봐야 20대 중후반처럼 느껴지고.
“어디 가시는 거예요? 혹시 친척 중에 누가 돌아가신 건······”
“아. 그건 아니란다. 이 엄마가 익히 알던 사람이 모라 님의 품으로 돌아갔거든. 그래서 준비하고 있던 거고.”
“저런.”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누군지 몰라도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걸 보면 귀족일 확률이 크다.
그동안 어머니는 나와 아델리아의 복장을 보더니 특유의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신전으로 가는 거니?”
“네.”
“그렇구나. 아, 그러고 보니 세실리 공주님이 도착했는데 만났어?”
“방금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어머니와 간단한 대화 이후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은 영지 광장에 있었으나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저택에서 나오고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아, 이제 마을이 아니라 엄연히 문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축제가 끝나고 예술가들이 내려놓고 간 작품들이 길거리에 전시돼 있고, 그걸 보러 온 관광객들을 위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만 하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도시로 탈바꿈된 상황이다. 심지어 그 농사마저 인력이 대폭 늘어나 규모가 늘어났다.
‘성직자들도 많이 와서 순례길이 되는 중이고.’
이건 루미너스 교단이 아니라 모라 교단을 말하는 거다. 모라 신전은 헬리움을 제외하면 극히 일부 지역에만 세워져 있다.
때문에 순례자들이 애를 먹고 있었으나 우리 영지, 그것도 미네르바 제국의 수도 근처에 세워짐으로서 순례가 원활해졌다.
루미너스 교단과의 충돌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정반대의 성향이라지만 태생이 쌍둥이인지라 갈등 자체를 피하고 있다.
나는 흐뭇함에 입꼬리를 올리면서 루미너스 신전으로 향했다. 일단 루미너스와 대화를 마친 후 모라에게 갈 예정이다.
[오랜만에 오는구나, 아이야.]개인 예배실에 들어가 기도를 하자마자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루미너스의 목소리.
언제 들어도 따뜻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다. 마음이 절로 평온해진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알븐하임에서 이후로 처음이다. 애초에 바깥으로 거의 나서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우리는 언제나 잘 지내고 있단다. 악의 기운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고, 세상은 웃음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으니.]‘한동안 문제는 없겠죠?’
[전에도 말했듯이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없을 거란다. 하지만 대비하는 게 좋을 거란다.]나는 루미너스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시간이 흐를수록 악마 숭배자가 발악성 공격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작정하고 하늘에서 메테오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지난번처럼 주술로 내 영혼을 건드릴 수도 있다.
물론 메테오를 요격할 수 있는 실력자와, 카운터인 아리엘이 곁에 있으나 안심은 금물이다.
‘알겠어요. 그래도 가까운 미래에 위협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일단 하나는······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건데······’
[정말로 네 책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분노하신 거냐고?]내가 망설이자 생각을 읽었는지 루미너스가 대신 말해줬다. 평범한 사람이면 몰라도 신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이에 나는 조용히 네······ 라며 답했다. 루미너스도 내 감정을 읽었는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가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말거라, 아이야. 제국에 발생한 가뭄과 네 책은 아무 연관이 없으니까.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일 뿐,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란다.]‘정말로 아니죠?’
[그럼. 우리가 너희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걸 알잖니.]그렇다면 믿을 수 있다. 나는 한시름 놓은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이왜진과 함께 억까를 너무 많이 당하다 보니 이런 것조차 일일이 확인받아야 한다니.
물론 그 책임의 반 이상이 나에게 있었으나 나도 많이 억울했다. 특히 이중에서 가장 억울했던 건 단연코 세실리의 악마화라 할 수 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그러렴.]‘아리엘은 성장하는 아이인가요? 그러니까 신체적으로요.’
아리엘이 알에서 태어난지 약 4개월 정도가 흘렀다. 아직 아이라 그런지, 아니면 천사라 그런지 성장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똑같다. 머리 위의 새싹도 여전하고, 등 뒤의 날개는 밝아졌을지언정 커지지 않았다.
설마 몇 년이 흘러도 똑같은 건가 싶었으나, 루미너스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천사는 정신이 신체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신체가 정신을 따라가거든.]‘신체가 정신을요?’
[그래. 그 애의 정신이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신체가 성장할 거란다. 특히 깨달음이라도 얻는 순간 몸에 밝은 빛이 나면서 몸집이 커지겠지.]무슨 포켓몬인가.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역시 천사는 천사구나 싶었다. 필멸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다 큰 어른조차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양육 난이도가 극악에 가까울 수도 있다.
아무래도 아리엘을 향한 관심을 더 늘려야 할 듯하다. 애가 갑자기 삐뚤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나니까.
‘······혹시 천사도 사춘기가 있나요?’
[사춘기는 ‘인격’이 존재하는 이상 모든 존재가 겪는단다. 초월자라 해서 다를 게 없지.]‘아이고.’
천사의 사춘기는 얼마나 심할지 벌써부터 어질어질하다. 특유의 강력한 힘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잘못하면 어긋날 수도 있다.
물론 사춘기를 막기 위해 힘으로 대항하는 건 정말 잘못된 행동이다. 가출이라도 해버리면······ 상상도 하기 싫다.
‘······알겠습니다. 잘 해야겠네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아이의 심성은 본질적으로 선하니까.]‘감사합니다.’
그러면 다행이다. 확실히 힘을 주체할 수 없어서 사고를 치는 경우는 있어도, 악의적으로 저지르지는 않는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도 그걸 알고 있어서 그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퍼주는 것이고.
특히 사랑을 먹어 아리엘이 해맑게 웃을 때는 세상 모든 근심이 녹아버린다. 정말 마법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질문. 루미너스 님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도 완결됐겠다, 제가 쓰자고 했던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그 최악의 전쟁 말이구나.]‘네. 혹시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라도 있을까요?’
전에 루미너스가 말한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쓰는 순간 드워프 세 명이 전차를 끌고 올 것이라고.
그 전차는 전쟁의 패러다임을 뒤흔들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이다.
1년 전에 루미너스가 나에게 한 말인데 그동안 바뀐 게 있는지 궁금하다. 1년 사이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으니.
특히 드워프 세 명이 자동차를 타고 영지에 찾아왔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겸사겸사 최초의 음주 운전 및 교통 사고까지 냈고.
[부작용이라······ 이걸 부작용이라 해야 될 지 모르겠구나. 마법을 이용해 정화해버리면 그만인지라······]‘마법 개사기네.’
[다 들린단다.]‘아.’
속마음을 그대로 말한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속으로 그 말을 한 거지.
괜스레 무안해져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때, 루미너스가 어떤 일을 염려하는지에 대해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다른 곳은 몰라도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는 슬슬 산업 혁명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단다. 양수기를 이용해 마력 기관을 발명한 것도 그 예시지. 단지 ‘영감’이 없었을 뿐이지, 네가 그 소설을 발매하는 순간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거란다.]‘··· ···’
‘환경 오염이라······’
이해가 쉽게 가는 설명이다. 실제로 산업 혁명이 터지고나서 근 200년 동안은 환경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여력도 없고, 오직 발전에만 모든 걸 쏟아붓고 있던 시간이었으니까. 게다가 최악의 전쟁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환경은 뒷전으로 미뤘다.
그나마 평화로운 시기에서 도달해서야 환경 오염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됐으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모든 문명이 석탄과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량을 서서히 멈추는 게 아니라, 당장 멈춰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문명이 발전하는 건 좋단다. 신으로서, 필멸자들의 성장은 곧 우리의 기쁨이니. 하지만 우리도 자식인지라 어머니가 병들어 가는 건 보기 힘들 것 같구나.]‘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환경 오염에 대해서도 반드시 적도록 할게요.’
[정말 고맙구나. 아참. 그리고 글을 쓸 때 모라가 꽤 큰 도움이 될 거란다. 지금 찾아가보렴.]‘모라 님이요?’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일까. 잠깐 의아해지긴 했어도 그의 말에 따라 곧장 모라의 신전으로 향했다.
[안 도와줄 건데?]‘······모라 님.’
[루미너스 오빠를 먼저 찾아간 벌이야. 절대 안 도와줄 거야. 흥. 칫.]그리고 모라와 접신하자마자 그녀의 피곤한 성격을 몸소 체감했다.
[악! 왜 때려?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
[알았어. 알았어! 난 장난도 못 치나······ 너 나중에 두고 봐.]‘푸흡······’
물론 루미너스에게 꿀밤이라도 맞은 건지 귀여운 소리를 냈지만. 나는 최대한 웃음을 참으려 했으나 결국 참지 못했다.
그사이 나에게 토로하듯이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루미너스 님도 그렇고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분들이다.
[에휴. 내가 빛의 신이었으면 좋겠네. 그러면 너도 오빠보다 나를 먼저 찾아왔을 텐데.]‘신의 자리는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거야.]‘히르트 님도요?’
[어머니의 경우는 살짝 달라. 우리는 태어난 후에 그 역할을 부임 받는 반면, 어머니는 자연과 생명이 존재하고 나서 탄생하셨거든.]신화다운 신화라 할 수 있는 탄생 설화였다. 대체로 자연과 관련된 신은 저런 방식으로 태어나는 편이다.
나는 그 설화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조용히 질문했다.
‘그러면 바다는······’
[··· ···]‘어······ 제가 뭘 말하려고 했죠?’
[그, 글쎄? 나는 모르지.]진짜로 뭘 물으려고 했더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자 넘겨버렸다.
금방 잊은 걸 보면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을 테니. 우선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나를 도와주는지부터 알아야 된다.
‘루미너스 님께서 모라 님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글 쓰는 데에 있어서요.’
[나도 들었어. 혹시 네가 쓰려는 전쟁에 대해서 다 기억하니?]‘음······ 얼추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능력자도 아니고 모든 걸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신 인과관계는 다 기억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어떤 이유로 터졌는지, 또 그 이유가 왜 발생했는지. 히틀러가 언제 나치당을 세웠는지 등등.
또한 스탈린그라드와 태평양 전쟁,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같이 유명한 전투는 대체로 기억하는 편이다.
그 외를 몰라서 그렇지. 원래부터 역사를 좋아하여 하나 하나 세세히 읽었지만 지금은 거의 소실되었다.
[내가 그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어. 나는 어둠과 안식의 여신. 혹시 ‘주마등’이라고 알고 있니? 안식이 들기 직전 여태까지 겪은 경험 및 기억이 한순간에 지나가는 현상.]‘당연히 알고 있죠.’
[그걸 이용하면 돼. 신성력으로 살짝 비틀면 원하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거든.]‘정말이에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감았던 눈을 뜰 뻔했다. 그 정도로 놀라운데다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주마등을 인위적으로 이용한다니. 제아무리 판타지 세계관이라지만 가능키나 할 지 의문이다.
그런 내 의심에 모라는 전보다 자신감이 듬뿍 찬 음성으로 당당히 말했다.
[물론이지.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단지 잊혀지는 것뿐이니까. 내가 범죄자의 영혼을 처벌하는 방식도, 그 기억을 무한히 되돌리는 거야.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지. 아니면 피해자의 기억을 덧씌워서 역지사지를 체험시키던가.]‘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는 루미너스와 달리 정신 쪽으로 연관돼 있다.
PTSD로 고생 중인 사람들 혹은 폐인을 말끔히 치료시키거나, 악마의 병이라 일컫는 치매까지 완치시키는 등.
허나 정신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요구된다. 그래도 현재 모라의 신도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 나아지고 있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정보를 알려줄 수 있어. 단! 네 머리에 없는 기억이라면 시도조차 못한다는 점. 그 점은 명심해줘. 알겠지?]‘감사합니다. 기억을 되살리면 유효 기간은 언제까지인가요?’
[유효 기간은 없어. 되살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거든. 그냥 기억력이 좋아졌다고 보면 돼.]정말 좋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나에게 정말 훌륭한 도움이다.
[도움이 됐다면 내가 원하는 것도 들어줄 수 있니?]‘여성화 말고요. 그랬다면······ 알죠?’
[쳇. 그럼 자주 찾아와줘. 알겠지?]‘안 그래도 자주 찾아갈 생각이에요.’
원활한 집필을 위해서 모라의 도움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까지 되살릴 수 있다니.
안 그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황이어서 매일 밤마다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음······ 그런데 있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뭔데요?’
[네 머릿속에 든 전쟁 있잖아. 그중에 태평양 전쟁? 그거 바다 한가운데서 벌어진 거지?]‘네.’
태평양 전쟁은 모두 알다시피 일본과 미국의 한 판 승부나 다름없는 전쟁이다.
또한 승기가 결정적으로 연합국 쪽으로 쏠리게 된, 아주 중요한 승부처다.
항공모함을 필두로 수많은 전함들이 오고 가며, 하늘은 전투기와 폭격기로 가득 채워진 전쟁.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 아니다. 이건 차차 해결되겠지.]‘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없어. 우리 세상은 해양 몬스터 때문에 바다 위에서 전쟁을 하는 건 좀 힘들거든.]‘아.’
그런 거였구나. 납득이 가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세상은 해양 몬스터의 존재로 인해 해전은커녕 항해조차 어렵다.
전설의 크라켄마저 존재가 명확히 인식돼 있으며, 이것보다 더한 몬스터가 있다는 소리도 있었으니.
‘다른 세상 이야기이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요?’
[그렇······ 겠지. 아무튼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렴. 나는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늘 감사합니다.’
이후로 잡다한 이야기를 끝낸 후 신전 밖으로 나섰다. 신전 밖으로 나서니 기다리고 있던 아델리아와 딱 마주쳤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그것보다······ 저것 좀 볼래?”
아델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한 쪽을 가리켰다. 이에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축제라도 열리는지 수많은 인파가 마을 광장에 모여있었으니.
복장이 죄다 검은색이라는 게 이상했지만, 마을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람들도 때아닌 관광객들에 격렬히 환영해주면서 호객 행위를 하거나, 물건을 열심히 팔고 있다.
“무슨 일이지? 오늘 무슨 축제라도 열리나?”
“글쎄?”
그러다 때마침 사람 한 명이 모라의 신전으로 올라왔다. 나는 그 사람을 잠깐 멈춰 세웠다.
“실례합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죠?”
“오늘 혹시 축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뇨.”
그럼 뭐야. 내가 의아해하는 동안 그 사람은 신난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입니다.”
“······예?”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