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545
■ 544화. 참 쉽죠? (4) □ ᓚᘏᗢ
아이작은 모건 왕과 이야기를 끝마친 후에 알현실 밖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모건 왕의 말에 따라 지하 무덤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뒤로 미루었다.
소재가 너무 넘쳐나는 나머지 피와 강철을 뒤로 미루고 문어발식으로 쓸 수도 있었으니까.
모건 왕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 없어했으나 시간은 많다며 너그러이 넘어갔다.
무엇보다 예언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줬으니 악마 숭배자가 치고들어올 여지도 없다.
[바다의 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못한 게 조금 아쉽군.]다만 아쉬운 게 없는 건 아니다. 바로 봉인된 바다의 신의 진짜 이름에 대해 알려주지 못한 것.
아이작이 묻지 않은 것도 있었으나 그것만큼은 루미너스가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초월적인 존재는 그 이름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게 되니까. 특히 신성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존재가 더 뚜렷하게 느껴질 터.
만약 아이작이 바다의 신의 이름을 인지했다면 ‘환영’으로든, ‘환청’으로든 바다의 신이 존재를 드러냈을 것이다.
[그래서, 만족하는가?]모건 왕은 굳게 닫힌 알현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누구 들으라는 듯이 물었다.
아무도 없는 알현실이었으나 모건 왕이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후련한 기분이군.]아니나 다를까. 루미너스의 목소리가 알현실 내부를 가득 메웠다.
모건 왕은 그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뒤쪽을 힐끔거렸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쬐는 햇빛이 한 지점에 모여 강렬한 눈부심을 발산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화신의 몸을 빌리지 않는 이상 직접적인 현신은 불가능한 상황.
그러나 모건 왕이 속박된 궁전은 ‘주술’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었기에 간접적으로나마 현신이 가능했다.
물론 편법을 사용한 거라 필멸자들은 루미너스가 현신하자마자 기절했을 것이다.
[헌데 아까 말한 그 방법은 정말 괜찮은 건가? 실패할 확률이 높아보이는데.]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 안에서 루미너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못 미덥다는 뉘앙스다.
모건 왕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뭐 저딴 방법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아이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작의 미래만큼은 엿보지 못하는 루미너스였기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예언가를 자칭하는 주술사에게도 흔히 사용했던 방법이라네. 악마 숭배자들 내에서도 예언가가 있을 터. 그걸 역이용하면 돼. 다들 이 방법만큼은 못 피했거든.] [아무리 그래도······] [설령 예언가가 없어도 상관없어. 나는 단지 조언을 했을 뿐이야.] [··· ···]다소 무책임한 발언에 루미너스는 불신에 가까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강렬한 빛무리만 존재하여 표정을 살펴볼 수 없었으나 분위기상 그렇게 느껴졌다.
이에 모건 왕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조금 신기하군. 한때 전쟁의 신이라 추앙받던 자네가 영웅도 아닌 학자에게 의지한다니 말이야.]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다.] [평화로운 방법이라······]루미너스의 대답에 모건 왕은 자신의 두 손을 펼치며 시선을 내려다봤다.
반투명한 영체 상태임에도 온갖 흉터와 굳은살로 얼룩진 자신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수천 명의 영혼을 갈아마시며 얻게 된 건 붉은 머리카락과 맹수처럼 빛나는 황금의 눈동자다.
그리고 그 힘으로 저지른 건 잔학무도한 학살과 정복 사업. 루미너스가 선호할만한 전사의 표본이다.
[자네 말대로 힘만으로는 안 된다고 느껴졌겠지. 후손이 쓴 소설과 달리 현실은 매우 가혹했으니까. 그때마다 자네가 짐의 영혼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망가졌겠지.] [··· ···] [만약 모든 일이 자네가 원하는 대로 진행됐다고 쳐.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겐가? 지금처럼 세상을 다스릴 텐가, 아니면 후손이 넘어온 세상처럼 인류에게 선택권을 줄 것인가?]모건 왕의 질문에 루미너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군.]미래를 엿보는 신이 할만한 대답은 전혀 아니었으며.
[정말······ 모르겠어.]실로 인간적인 대답이었다.
모건 왕은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대답에 피식 웃었다.
[그럼 지켜보면 되겠군.]이윽고 그는 아이작이 떠난 알현실 문 쪽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어리버리해서 걱정되긴 하지만.]정말 미덥지 못한 모양이다.
* * *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왜 이리 귀가 가렵지.’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알현실이 아니라 조사를 위해 궁전 곳곳을 둘러보는 중이다.
대신 모건 왕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하 묘지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모건 왕은 지하 묘지에 신들의 과거가 묻혀있을 거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묘지를 파헤치는 순간 넘쳐나는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어도 해소가 되지 않겠지.
책으로 쓴다면 그나마 해소할 수 있겠지만 그리 된다면 피와 강철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괜스레 도굴꾼이라 오해받을 수도 있고.’
지금은 보는 시선이 많은 탓에 성급히 들어서면 안 된다. 세이비어의 눈길을 끄는 순간 기록이란 기록은 다 빼앗길 수도 있었으니.
타이밍이 중요하다. 게리오스 왕국은 영토가 너무 넓은 나머지 탐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릴 터.
특히 궁전이 존재하는 수도 쪽은 세이비어 쪽에서 최대한 막고 있을 것이다. 이건 지하 묘지도 마찬가지.
탐사대의 손길이 궁전으로까지 뻗어나가기 전에 피와 강철을 마무리하고, 그 틈을 타 지하 묘지의 기록을 전부 탐색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주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당연하게도 엘레나 교수님과 그 일행들이고.
“아이작 님.”
“··· ···”
“아이작 님?”
“아? 네?”
머릿속으로 천천히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니 케이트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건 왕과 대화가 끝날 때까지 알현실 밖에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던 그녀.
“혹시 그 원령이 이상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알현실 밖으로 나오고나서 아무런 말도 없이 상념에 빠져있다보니 걱정된 모양이다.
안 그래도 모건 왕을 향해 적의를 표하던 케이트였으니 걱정은 더욱 배가 됐을 터.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가 이내 빙긋 웃어줬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케이트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네. 정 못 미더우면 루미너스 님께 여쭈어보셔도 될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전 아이작 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루미너스의 이름까지 대자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한다. 여러모로 루미너스에게 의지하는 모습.
과연 케이트는 루미너스가 한때 전쟁의 신으로서, 그것도 아버지를 몰아내고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걸 아는 순간 어떻게 변할까.
이유가 있다면서 조용히 기다릴까, 아니면 혼란스러워하며 신앙심이 흔들리게 될까.
무엇이든 간에 케이트로서는 인생 최대의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한 번 반응을 살펴볼까?’
대놓고 알려주는 건 아니고 살짝 간만 볼 예정이다. 예방주사라 보면 되겠지.
다만 타락한 추기경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케이트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조언만 했을 뿐인데 곧바로 세이비어의 타락을 눈치챘으니 말 다했지.
나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기에 궁전 내부 곳곳을 살펴보기로 정했다. 케이트도 말없이 내 곁을 따라왔다.
“여기는 도서관인 모양이네요. 사서들이 필사적으로 기록을 남기려던 곳.”
“네.”
“케이트 씨는 책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제가 내는 책을 빼고요.”
“음······ 최근에는 없습니다. 로라뿐만 아니라 악마 숭배자들에게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을 구원하느라 바빴거든요. 그래도 아이작 님의 서적은 꼬박꼬박 정독하고 있습니다.”
나는 서재에 잘 보관돼 있는 두루마리 중 하나를 고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케이트는 악마 숭배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의 구원으로 바쁜 몸이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도 시간을 쪼갠 셈이다.
‘이건 못 읽겠네.’
두루마리를 펼치니 고대어로 나열된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물에 흠뻑 젖어 손실된 탓에 해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에는 다시 두루마리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두루마리들 대부분이 복구가 필요하겠지.
복구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에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정했다.
“케이트 씨.”
“말씀하세요.”
“케이트 씨는 죄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질문에 케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순수한 처녀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녀가 저런 반응을 지으니 귀엽게 느껴진다.
저 귀여움 안에 악마 숭배자의 머리통을 가볍게 부수는 잔혹함이 있다는 게 포인트다.
“죄악이라면······ 제논 일대기에 등장한 칠죄종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뇨. 아뇨. 그건 아닙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제논 일대기 때문인지 다들 죄악하면 칠죄종을 떠올린다.
“제가 말하는 죄악은 말 그대로 죄악입니다. 죄악이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흠. 그러면 케이트 씨는 살생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나요?”
“네. 하지만 저는 천벌 받아 마땅한 벌레들만 죽일 뿐입니다. 루미너스 님께서 그 죄에 대한 명분이 마땅하면 구원을 해주시죠.”
“어쨌거나 살생이 악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다는 거군요.”
케이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표정이다.
나는 궁전 내부를 둘러보면서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아까 말했듯이 죄악의 기원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죄악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 세상도 마찬가지일 터. 나는 그것에 대해 의문을 넣어주고 싶었다.
“그 죄악이 죄악이라 단정지은 존재가 누구죠?”
“루미너스 님을 포함한 신들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들이 죄악을 죄악이라 칭한 건지 궁금하지 않나요?”
“··· ···”
케이트는 커다란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내 질문을 듣고 약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광신도지 멍청한 게 아니다. 뒤이어 케이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들께서 죄악을 저지르셨다는 말입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어째서 신들이 죄악을 죄악이라 단정지었겠습니까?”
“··· ···”
케이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틀린 말이 없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대부분 악행을 저질렀으며, 그 악행이 나쁘다는 걸 필멸자들에게 인지시켰다.
하지만 신화는 최초의 철학. 신화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에 나는 케이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방주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케이트 씨. 저는 신들께서 숨기신 진실을 약간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신들께서도 허락하신 부분이고요. 그리고 저는 언젠가 그 이야기를 내놓으려고 합니다.”
“··· ···”
“분명 수많은 반발이 나올 테죠. 하지만 루미너스 님께서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으며, 그걸 반면교사 삼아 필멸자들의 정신적 발전을 원한다고. 본인들의 이야기를 풀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물론 구라다. 루미너스는 저렇게 말한 적이 없다. 전부 내가 꾸며낸 이야기일 뿐.
그러나 신화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케이트 씨도 천천히 준비를 하셨으면 합니다. 신들께서 저지른 죄악에 흔들리지 않고 그걸 기반으로 삼아 발전할 수 있도록. 신들이 어째서 죄악을 죄악이라 단정 지었는지 골똘히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과업을 내리는군요.”
의외로 케이트는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쓴웃음만 지었다. 욕까지 얻어먹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어줬다. 나를 향한 굳은 신뢰가 돋보인다.
“알겠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 님의 말씀대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를 원망하지 않으시나요?”
“원망을 왜 하는지 모르겠네요. 신들의 죄악을 밝힌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행위. 달리 말하면 신들께서도 아이작 님을 굳건히 신뢰한다는 뜻이지요. 신들께서 신뢰하는데 그들의 종자인 제가 어찌하여 믿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할 말이 없어질 차례였다. 아무리 광신도여도 루미너스를 향한 믿음만큼은 진실이다.
이어서 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잔잔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작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하고 싶은 게 생각났습니다.”
“그게 뭐죠?”
“아이작 님의 일생을 제 손으로 쓰는 것.”
“예?”
내 일생을 쓰다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트는 가슴에 얹은 손을 천천히 내 쪽으로 옮겼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내 가슴 중앙에 안착했다.
악마 숭배자를 토벌하면서 딱딱하게 박힌 굳은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이작 님께서 행한 일들은 세상을 구원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아이작 님께서 없으셨다면 악마 숭배자는 끝까지 날뛰었겠지요.”
“··· ···”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신들의 죄악을 대신 고백하는 건 어지간한 신뢰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부터 성자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스스로 성자라 고백하게 된 셈이죠.”
“아.”
설마 그렇게 되는 건가. 확실히 케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신조차 골머리를 앓고 있던 악마 숭배자를 대신 족쳐버리고, 더 나아가 죄악마저 대신 고백하게 만든다.
이게 신이 신뢰하는 성자가 아니면 뭐냐. 예언가는 몰라도 성자는 이제 빼도박도 못하게 될 상황이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케이트가 말을 함으로써 전부 지워졌다.
“그러니 저 또한 아이작 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아이작 님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겠죠.”
“··· ···”
“오늘부로 아이작 님과 같은 길을 걷겠노라 루미너스 님께 맹세하겠습니다. 비록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신앙심으로 반짝이는 푸른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한다. 부담스럽다 못해 숨이 막힐 듯한 시선.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니다. 본래 케이트는 불안 요소였으니까.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우며 부드럽게 웃어줬다. 동시에 내 가슴에 올렸던 케이트의 손을 살포시 잡아줬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죠?”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예정이다. 적어도 신화를 집필할 때는 이미 같은 배를 탄 것과 다름없으니까.
케이트는 내가 부탁을 들어준다고하자 입꼬리를 더욱 말아올리더니 내 손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이윽고 군살 하나 없는 배, 그것도 아랫배에 손을 얹더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가 된다면, 저에게 씨앗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맹세를 할 수 있도록.”
“······맹세요?”
“네. 아이작 님과 같은 길을 걷겠다는, 저의 맹세입니다.”
이제는 정말 빼도박도 못하겠구나. 어이가 없기보다는 헛웃음이 나왔다.
종교적인 의미를 대폭 첨가한 고도의 빌드업. 실로 놀라운 지략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케이트로서는 그게 빌드업인지 전혀 모르고 있겠지. 그녀는 정말 순수한 의미로 저런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씨앗을 요구하던 케이트는.
“그 맹세,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기어코 나를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