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553
■ 552화. 도장 (1) □ ᓚᘏᗢ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
세간에 아이작의 약혼녀로 널리 알려진 여인.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남자, 아이작은 특이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특별한’이 아니라 ‘특이한’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빨간 머리에 금안을 지닌, 정말 귀여운 남자로만 생각했다.
‘그때부터 훌륭한 꽃이 될 싹수가 보였지.’
역사를 좋아하고 유약해 보여도 배려심이 깊은데다가 거짓말을 못하는 남자. 정말로 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박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다른 귀족들은 자신의 외모와 가문을 보며 알랑방귀를 뀌기 바빴는데 아이작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아, 물론 남자는 남자인지라 관심을 주긴 했다. 하지만 그 안에 음흉한 욕망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가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신기해서 그런 거라고.
여기에 거짓말은 어찌나 못하는지 독심술로 파악하지 않아도 전부 드러났다.
“아이작.”
“으, 응?”
“뭐 숨기는 거 없지?”
“그냥 모른 척해주면 안 돼?”
지금도 봐라. 거짓말을 못해서 아예 이실직고를 하지 않는가. 어리버리한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마리는 그런 아이작의 반응을 오묘하게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어줬다. 어쩐 일로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더니 이럴 줄 알았다.
비록 아리엘처럼 속마음을 완벽히 읽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위해서 ‘이벤트’를 하려는 것 정도는 간파했다.
과연 그 이벤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정도로 긴장하지 않을 테니.
‘이런 애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고?’
마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걷기 시작한 아이작을 힐끔거렸다. 밖으로 나온 탓에 새들이 그의 어깨 및 머리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가 제논인 걸 알고 나서 교제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제논이라 했을 때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당시 제논은 나이가 지긋하고 경험이 많은 현자로 추정되고 있었으니. 아이작처럼 새파란 소년이라고 생각치도 못했다.
그래서 아이작네 아버지의 경험담을 빌려 글을 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작네 아버지, 호크 듀커르 마이샬이 붉은 사자라 위명이 높다지만 모험가가 아닌 기사였으니.
전투에 한해서는 조언을 빌렸겠지. 그러나 제논 일대기는 모험물이다.
깊이면 몰라도 다채로움만큼은 호크조차 부족하다.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이니 가능했던 거야.’
그 의문은 최근에서야 비로소 밝혀졌다. 그건 바로 아이작이 다른 세상에서 건너 온 영혼이었다는 것.
악마 숭배자의 소환 실수로 아이작의 영혼이 이곳으로 넘어왔으며, 신들조차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전생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걸 듣고 격이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으며, 아이작의 불행한 과거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물론 아이작은 필사적으로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라며 해명했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군복무 시절에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기까지. 주관이고 나발이고 객관적으로 봐도 불행한 삶이다.
‘이러니 다가오는 사람을 못 내치는 거겠지.’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알게 모르게 애정을 갈구하는 면모가 있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친한 사람에게 쓴소리 한 번 못하고, 어지간한 분노가 아니면 터뜨리지 않는다.
특히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면 어떻게든 호감을 표시한다. 문제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시너지를 이루어 여자를 꼬신다는 것.
안 그래도 개성이 강한 미모를 지닌데다가 특유의 배려심 덕분에 온갖 여자가 꼬였다.
세실리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레오나까지.
‘리나는 머지않았고······ 케이트랑 체리도 조만간이네.’
아이작의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자위해도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외모라도 못 났다면 모를까, 하나 같이 개성 넘치는 미녀들이다.
몸매도 마찬가지. 자신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특히 세실리)이 워낙 압도적이다.
옛날이었다면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왕창 떨어지다 못해 바닥을 찍었을 터.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점차 바뀌었다. 아이작을 홀로 독차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우선 혼자의 힘으로 절대 밤을 버틸 수 없다.
신들에게 온갖 축복을 받는데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체 재능이 뒤늦게 개화한 덕분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실수라지만 신성까지 섭취했으니 체력(정력)이 몇 배로 상승했을 터.
최소 두 명 이상이 있어야 아이작을 쓰러뜨릴 수 있다.
‘남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 차라리 허락한 사람이랑 하는 게 낫지.’
자주 들리는 풍문이다. 정력이 너무 왕성한 남편을 버티지 못한 아내가 다른 여자를 데려온다는 이야기.
보통 같으면 질투가 날 법하겠지만 의외로 치정 싸움으로 돌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아내가 끝까지 다른 여자를 들이지 않다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다시 말해 감당할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확실히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아이작이 다른 쪽에 눈길을 돌릴 일도 없고.’
아마 모두 알 것이다. 마리 쪽에서 아이작의 훌륭한 정력을 밝힌 사건을.
그 기사 하나로 마이샬 영지에 어마어마한 수의 편지가 발송됐다. 대부분 첩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딸을 받아달라는 편지였다.
당연하게도 아이작의 어머니, 안나는 칼 같이 거부했다. 욕심 가득한 제의는 절대 받지 않을 거라고 언론에 밝힌 건 덤.
애당초 눈길이 돌아갈만한 제의도 없었다. 아이작과 마이샬 영지는 가질 걸 다 가진 상황이었으니.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상황인데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음······”
“······왜 그래?”
잠깐의 생각을 거친 마리는 아이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그녀는 아이작을 살펴보기 바빴다. 원래도 키가 큰 편이었는데 신성을 섭취한 이후로 더 커졌다.
외모도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평생동안 얼굴만 씹어먹으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아이작.”
“응.”
“잠깐 고개 내려봐.”
“이렇게?”
“앙!”
“아악!”
그래서 뺨을 깨물었다. 저 잘생긴 얼굴과 어벙한 표정이 합쳐지니 참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세상을 구한 영웅이란 말인가. 그냥 덩치 큰 펭귄이지.
보통 영웅하면 고귀하고 만인이 우러러 보는 존재인데 아이작은 전혀 아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고, 거짓말을 못 하며, 사랑스럽고 잘생긴 펭귄이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잡아먹고 싶지만 덩치가 커져도 너무 커졌다. 혼자 먹으면 체할 정도로.
“아야야. 깜짝 놀랐잖아.”
“왠지 볼이 더 부드러워진 거 같은데? 신성을 먹어서 그런가?”
“글쎄.”
“그러니 한 입 더! 아앙!”
“악!”
그러니 다른 포식자와 함께 먹어야겠지.
지금은 모처럼의 데이트인만큼 독자치할 생각이다.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 오늘의 아이작은 마리,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으니.
“짹! 짹짹!”
“구구구!”
푸드득-
마리가 아이작의 뺨을 깨물면서 어깨와 머리에 안착한 새들이 화들짝 놀라 멀리 날아갔다.
진짜로 포식자의 위세에 눌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아이작은 두 번이나 깨물린 뺨을 만지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살살 물어달라는 눈빛은 덤이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은 반응에 마리는 실실 웃으며 그에게 바짝 밀착했다.
“아이작.”
“응. 말해.”
“난 네가 어떤 이벤트를 준비하든 간에 기뻐할 거야. 난 너랑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 ···”
마리의 진심 어린 말에 아이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는다.
뒤이어 그는 마리와의 팔짱에 더욱 힘을 주면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현재 그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곳은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거리.
그것도 과거, 아이작이 악마 숭배자에게 습격을 당했던 거리다.
‘생각이 있으니까 여기를 데이트 코스로 잡은 거겠지?’
마리도 그 사건을 알고 있다. 아이작의 안전불감증을 드러낸 사건.
하지만 오늘 당당히 외출을 한 걸 보면 자신감이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아니면 신들에게 미래를 들었거나. 아마 자신의 미래를 통해 안 거겠지.
어쨌거나 오늘은 아주 뿌듯한 데이트가 될 것 같다. 이럴 줄 알고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쳤다.
흰색 민소매 드레스를 입어 여름 특유의 시원함을 완벽히 드러냈으니.
‘얘도 바짝 준비했네.’
마리는 팔짱을 낀 채로 아이작의 복장을 면밀히 살펴봤다.
여름용 흰색 와이셔츠에다가 검은색 면바지.
와이셔츠 손목 부분은 살짝 걷어올렸으며 바지도 발목 부근이 훤히 드러나 시원한 이미지를 풍겼다.
마리의 눈에는 획기적인 패션이다. 아마 저것도 전생의 영향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안 어울린다는 뜻이 아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저 얼굴에 안 어울리는 패션 같은 건 없다.
‘진짜 평생 얼굴만 뜯어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팔짱만 끼는 것마저 행복한데 결혼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꾹- 꾹- 눌러담고 있다.
최소 아카데미 졸업 이후이며 약 1년 반 정도가 남았다.
그때까지 열심히 피임하면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된다.
‘겸사겸사 세실리도 견제하고 말이지.’
가끔 가다가 정실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말하는 세실리. 물론 어디까지나 반장난식이라 웃어 넘기고 있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세실리는 다양한 부분에서 앞서고 있다.
직위부터 시작해서 여자로서의 매력, 마지막으로 헌신까지.
만약 세실리가 먼저 아이작에게 고백했다면, 첫번째는 당당히 그녀가 차지했을 것이다.
“아이작.”
“응?”
“갑자기 든 생각인데, 세실리랑 교제 발표는 언제 할 거야?”
지금은 큰 의미가 없다. 세실리는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든든한 우군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서로 배려해주며 양보하고 있다. 세실리가 기꺼이 첫번째 자리를 양보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마리는 궁금해했다. 아이작이 언제쯤 세실리와 교제 발표를 하게 될지.
그가 바람둥이라는 건 모든 세상이 알고 있으며 이따끔씩 세실리와의 염문이 퍼지고 있다.
비단 세실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를 바가 없다.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세실리와 아르웬이다.
“그건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서. 염문이 돌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한 거랑 차이가 있잖아. 어차피 지금 밝혀도 상관없을 테고······”
“음······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적어도 지금은.”
“그래?”
아이작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충고를 건넸다.
“혹시 말하지만 끝까지 미루는 건 절대 안 돼. 세실리도 그렇고 아르웬 여왕 님도 그렇고 답답해할 테니까. 니콜 언니가 말했잖아? 쓰레기가 될 바에야 망나니가 되라고.”
“이미 된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애태우지 말라는 거야. 두 사람 모두 장수종인만큼 인내심이 강하겠지만 애가 타는 건 똑같으니까. 알겠지?”
“새겨들을게. 대신 지금은 아니야. 나도 생각이 있거든.”
마리의 충고에 아이작이 부드럽게 웃어주며 눈을 마주쳤다.
온화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게 짙은 애정이 담겨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빛.
마리는 그의 눈과 한참을 마주하다가 시선을 회피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평소 어벙한 아이작이지만, 가끔 보여주는 저 행동은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다. 인큐버스도 아닌데 여심을 흔들고 있다.
“아, 알았어. 생각이 있다면 따라야지. 대신 무슨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조금 있으면?”
“응. 그 전에······”
아이작은 말을 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가 점심 쯔음이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해가 져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녁은 악마 숭배자가 아니더라도 위험하다. 그래서 대부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다. 루미너스도 오늘만큼은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하지 않았는가.
설령 누군가 기습을 준비하고 있어도 상관없다.
‘그러고 보니 가르츠 씨와 만난지도 오래 됐구나.’
여태까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헬리움의 결사단체, 리퍼가 몸을 숨긴 채 자신을 호위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신성을 먹고나서 동물들과 대화가 가능해진 이후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아까 전 새들이 아이작의 머리와 어깨 위에 앉았을 때 리퍼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다.
‘그래. 괜찮을 거야.’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늘은 악마 숭배자가 무서운 게 아니라 다른 게 무서웠다.
마리가 거절할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말실수를 할까봐 두렵다.
“그 전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오늘?”
아이작의 질문에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이어 한참을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데?”
“흠. 기념일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런가?”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냐. 일단 걷자.”
목표지까지 조금 남아있다. 마리가 갸웃거리든 말든 아이작은 발걸음을 옮겼다.
데이트 코스로 잡은 장소는 일종의 가로수길이다. 양옆에 커다란 나무들이 뻗어있는 가로수길.
그리고 그 끝에는 다른 나무보다 훨씬 거대한, 아카데미 설립일부터 굳건히 뿌리를 내린 거목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이 원하던 목표지에 도달하자마자 다리를 우뚝 멈추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마리도 나란히 정지했다.
“짹! 짹짹!”
아이작이 손을 가만히 뻗자 새 한 마디가 날아와 가볍게 안착했다.
마리가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때, 아이작은 새가 하는 말을 전달받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 사람들 다 갔어!]‘그래. 고맙다.’
전달 받은 이후로는 손을 들어 새를 멀리 날려보냈다. 오늘 진지한 마음으로 나와서 그런지 동물들은 아이작의 말을 착실히 들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거대한 거목 앞에는 아이작과 마리, 단 둘밖에 없다는 뜻.
고요함 안에 자그만한 풀벌레 소리만이 귀에 꽂히고, 여름의 후덥지근한 기온에도 서로의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이작은 말없이 거목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팔짱을 풀며 마리와 마주했다.
마리도 아이작이 팔짱을 풀자 의문에 찬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거목 앞에는 등불 하나가 세워져 있는 덕분에 서로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리. 아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른다고 했지?”
“어······ 응. 오늘 무슨 날이야?”
그 질문에 아이작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사귄 날.”
* * *
“어?”
내 대답에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생일 혹은 기일이 아닌 이상 기념일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세상이다.
결혼기념일이라면 모를까, 당연히 100일이라던지, 몇 주년이라든지 등등. 그런 건 따로 세지 않는다.
나는 깜짝 놀란 마리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내가 그런 걸 일일이 세고 있으니까 신기해?”
“어······ 음······ 조금? 그래도 네가 어째서 준비를 착실히 했는지 이해가 가. 그것도 너희 세상의 문화야?”
“그런 거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살던 곳에서는 기념일을 챙겼어.”
“그렇구나. 1년 전에 반지를 선물했었지? 오늘은 무슨 선물을 할 거야?”
마리가 한껏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지 뒷주머니 안에 고이 모셔놓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이걸 꺼내기까지 빌드업을 해야 된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하는 프로포즈.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친다.
“······너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선물일 거야. 이건 장담할 수 있어.”
“너한테는 받기만 해서 미안한데······”
“아냐. 절대 아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진심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마리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여인이다.
심지어 다른 여인들을 받을 때마다 그녀를 속상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내 곁에 꿋꿋이 남아줬다.
평생동안 헌신해도 모자른 그녀.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 마리를 건드리거든 무슨 수를 동원하더라도 보복할 것이다.
“마리.”
“응.”
“나와 있으면 행복해?”
“지금도 행복한데? 뽀뽀해줄까?”
내 질문에 마리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되물었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덕분인지 몰라도 미친듯이 뛰던 가슴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그래. 마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나를 사랑해줄 여인이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에 다짐했다. 평생동안 그녀와 함께 할 것이라고. 평생동안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스윽-
“······아이작?”
그 다짐과 함께 내가 한 쪽 무릎을 꿇자 마리가 당황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이어서 나는 뒷주머니에 고이 보관했던 반지, 정확히는 반지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어······ 어어······?”
등불 아래 비추어지는 반지 케이스에 마리가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겠지. 그도 그럴 것이 이 문화는 전생과 다를 게 없었으니.
나는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를 올려다 보다가 내 손바닥 위에 안착한 반지 케이스를 조심스레 개봉했다.
뒤이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건, 푸른색 보석이 박힌 반지.
저명한 세공사에게 부탁해서, 마리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보석으로 주문했다.
“마이샬 가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감히 청합니다.”
“··· ···”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것일까.
마리의 두 눈에 점점 물기가 차오르더니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뻐끔거리던 입도 앙 다물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속내를 표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의 응어리졌던 마음을 전부 풀어줬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용기 있게 나선 발걸음은.
“······네.”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했다.
시간이 흘러도, 절대 퇴색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 * *
“······!”
아이작이 마리에게 청혼하고 약 1시간이 흘렀을 때쯤.
기숙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아리엘은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머리 위의 새싹도 바짝 세워진 것이, 심상치 않음을 단번에 보여주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리엘?”
“으음······”
아델리아가 아리엘을 불렀으나 그녀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엄마랑 아빠 사이에 뭔가 나타난 것 같아서.”
“나타났다고? 뭐가?”
처음에는 습격자인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영혼.”
“영혼?”
“응. 근데 바로 작아졌어.”
“?”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