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63
■ 62화. 팬레터 (1) □ ᓚᘏᗢ
나는 모든 강의가 끝나자마자 다른 걸 전부 제쳐두고 숙소로 복귀했다. 오늘은 마리와 약속을 잡은 적도 없어서 숙소로 곧바로 직행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숙소로 돌아온 이후에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노트 사이에 꽁꽁 숨겨놓았던 편지 봉투를 꺼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 강의 시간 때 세실리가 나에게 전달한 편지다.
세실리가 내 귓가에 속삭이면서 말하길, 은인을 향한 자신이 진심이 담겨있다고. 돌려 말했지만 사실상 나에게 주는 편지다.
‘펜레터 같은 건가? 아니면 뭐지?’
나는 편지 봉투를 세밀하게 둘러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디 평범한 봉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꽤 두툼했다. 최소 편지가 3장 이상 들어있는 건 확실하다.
그녀는 은인을 향한 진심을 담았다고 했으니 팬레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태까지 내 신분을 꽁꽁 숨겨놓아서 팬레터를 직접 받은 적은 없다. 이탓에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과연 세실리는 이 편지에 무슨 내용을 적었을까. 나는 봉투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게 아니라 책상에 앉아 천천히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명 세실리는 정성을 다해 썼을테니 나 또한 정성을 진심을 담아 읽어야하지 않겠나.
그리고 다 읽는다면 곧바로 답장을 써줄 생각이다. 어차피 10권의 원고를 다 쓴 마당에 여유 시간이 월등히 늘어난 참이다.
찌이익-
책상에 앉아 모든 준비를 마치고 편지 봉투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찢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내 예상대로 곱게 접혀있는 편지가 고이 잠들어있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으로 내용물을 꺼내 천천히 펼쳤다. 종이는 총 3장이었으며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유려한 글씨체가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경모하는 아이작 작가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마족의 은인에게 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영광을 안게 되어서 정말 감격스럽습니다.]첫 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둘재치고 ‘경모’라는 글귀가 매우 신경쓰였다.
‘경모’는 전생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지만, 평소 책을 많이 읽어둔 덕에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거나,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다.
그러니까 세실리는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 즉, 연심을 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약간 뜬금없게도 느껴져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세실리는 말을 놓은 이후부터 친근하게 대하며 짓궂은 장난까지 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한 동생에게 하는 행동에 가깝다. 내가 잘 받아준 것도 있고 세실리의 고민을 일부나마 해소시켜줬으니 그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첫 문장을 한 번 두 번 꼼꼼하게 읽으며 정말로 내가 알던 단어가 맞는지 확인했다. 이 세상에는 공용어를 쓰지만 각 종족마다 의미가 다른 단어가 군데군데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첫 문장에 집중해봤자 나오는 건 없었다. 일단 의문은 접어두고 다음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선 제 마음을 표현하기에 앞서, 며칠 전 결례를 끼친 부분에 관해 사죄하고 싶습니다. 평소 고대하던 은인과의 만남에 그만 흥분한 나머지 실수를 저질렀죠. 그때 은인이 어떤 감정을 품으셨던 간에 제가 무례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읽다보니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편지에서 보듯이 세실리는 상당히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는 것.
그녀가 누구인가. 헬리움의 공주이자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마족이지 않은가.
세상에 끼치는 내 영향력이 막강하다지만 세실리가 고개를 숙이며 나올 필요는 없다. 하물며 헬리움은 현재 다른 국가와 외교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 그녀의 입지는 무궁무진할 터.
나를 은인으로 대우하고 있으니 괜찮지 않나? 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불편하다.
내가 아는 세실리는 장난기가 많고, 속에 아픔을 묻어두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마리처럼 평소와 같이 장난을 치거나 수다를 떨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이 음습한 감정은 도대체 뭘까. 지난 번 세실리가 나에게 존댓말을 했을 때도 이같은 감정이 들었다.
희열에 가까우면서도 절대 잡아먹히면 안 될 듯한 느낌. 평소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한 번 맛보고 난다면 헤어나올 수 없을 듯한 어두운 기분.
나는 머리를 세차게 털어내며 그 감정들을 모조리 떨쳐버렸다. 세실리가 아무리 저자세로 나온다고한들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리가 가장 크게 실망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실망하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갈무리한 뒤 편지에 시선을 두었다. 유려한 필기체와 더불어 세실리의 아름다운 문체가 눈을 즐겁게 만들어줬다.
[은인도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마족은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까지 악마로 취급받았습니다. 반강제적으로 바깥 사회와 단절되고, 우리 마족들끼리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죠. 몇몇 용기있는 마족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는 악마가 아니라고 호소했으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비난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비극을 겪어 악마가 된 마족도 있었지요. 그리고…] [공주인 저조차 이루지 못한 동족의 숙원을 대신 맺게 해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설령 의도를 담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둠밖에 없던 마족들에게 한 줄기 빛을 내려준 건 사실이니까요. 그 빛은 우리 마족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언제나 구름만이 드리웠던 헬리움의 하늘에는 태양이 내려쬐기 시작했죠. 헬리움의 백성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펴졌으며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어둠을 밝힌 이 한 줄기의 등불은 우리 마족의 미래를 밝혀줄 거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편지 내용에는 마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상세하게 적혀있었으며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에 어떻게 변했는지도 묘사돼 있다.
나는 편지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귓가에 입을 대며 ‘진심’을 담았다고 했을 때는 약간 불안했지만 지금 그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세실리는 진정한 의미로 진심을 담아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진심은 나에게 여과없이 전달되는 중이다. 비록 의도치 않았다지만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어느 사람이라도 뿌듯해할 터.
‘신문으로 보던 거랑 차이가 엄청나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족인 세실리가 이리 표현하니 더욱 깊게 와닿는다.
신문이나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심지어 세실리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이처럼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실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부분에 집중했지, 본인의 진심을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성이 담긴 말을 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편지를 읽고나니 그녀가 얼마나 힘든 인생을 보냈는지, 또 나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전생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 했던 감동이다.
‘진짜 많이 힘들었겠네.’
100년이라는 세월은 다른 종족이면 모를까, 인간에게는 터무니없이 길다. 세실리는 그 100년이라는 세월동안 동족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노력하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나 편지에 담긴 내용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수준도 되지 않았다.
그 염원은 그녀의 손이 아닌 내 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기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피부가 까맣다는 이유로 끔찍한 차별을 받았던 흑인들이 해방된 셈이랄까.
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무려 3페이지나 달하는 내용이라 전부 읽는데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 마족들이 입은 상처는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차별적인 시선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닙니다. 지금 은인께서 이 편지를 읽는 시간에도 누군가 마족을 차별하고 있을 것이며, 상처입은 마족이 악마로 타락해 피해를 끼치고 있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제논 일대기 덕분에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고한들 세상이 완전히 변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헬리움의 공주로서 모든 마족을 대변해 세상에 알릴 겁니다. 우리 마족도 다른 종족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결코 악마가 아닌 존재라고. 그래야 은인께서도 실망하지 않으시겠죠. 은인께서 내려주신 은총을 통해 우리 마족이 좀 더 밝은 빛을 찾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두 번째 페이지는 세실리가 어떤 포부를 갖고 있는지에 말하고 있다. 이덕분에 입학식 당시 그녀의 연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의 포부를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세실리의 용기있는 행동은 마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평소 나에게 장난을 치느라 깜빡했던 부분이다.
‘비범하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거겠지?’
나는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라 그런지 3분의 2정도만 채워져 있다.
[은인께서 내려주신 은혜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 백년의 세월동안 이루지 못한 마족의 염원을 은인께서 이루어주셨죠. 은혜를 갚기 위해 제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지만 은인께서 원하지 않으시다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현재 은인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힘들겠죠.] [허나 이런 식으로 약소하게나마 제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이 저의 진심이라는 것만 알아주신다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또 행복할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말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은인께서는 부디 건강하고, 또 행복만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은인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이니까요.] [그러면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헬리움의 공주가 아닌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한 마족으로부터.]마지막 페이지는 나를 향한 세실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겠다. 그러나 지금은 내 곁에는 마리가 있으니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지 않겠다.
한 명의 여자로서 모든 걸 바치겠다는 글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보다는 난감해졌다. 지난 번에는 단지 나를 유혹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편지에는 진심이 우러러 묻어나왔다. 세실리는 정말로 내가 원한다면 꺼리낌없이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스읍…”
마리가 이걸 보면 노발대발하겠지? 세실리가 팬레터(?)를 보냈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겨야할 듯하다.
물론 연기를 더럽게 못 하는 내가 숨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들킨다는 마인드로 생활하는 편이 이로울 듯하다.
아무튼 간에 세실리가 정성껏 편지를 적어 보냈으니 나 또한 답장을 해줘야 예의일 터. 나는 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오는 팬레터를 다시 한 번 읽은 뒤에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여태까지 부모님을 제외하면 편지를 보낼 대상이 없을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로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인사말은… 그래. 이렇게 적으면 되겠다.’
나는 전과 달리 즐거운 마음으로 세실리에게 보내줄 답장을 천천히 써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팬레터라…’
세실리처럼 다른 사람들도 팬레터를 작성하지 않았을까? 편지를 쓰다말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논 일대기가 세계적인 히트를 쳤는데도 팬레터 한 장 없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법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조금의 단서를 흘리지 않기 위해 철저히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이렇게 마당에 한 번 부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팬레터가 있는지 확인부터 한 뒤에 부탁할 계획이다.
설령 추적 때문에 아버지가 힘들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버지 외에도 따로 부탁할 사람이 있었으니.
‘조금 꺼림찍하지만 결과는 확실하겠지. 설마 이거 가지고 쫀쫀하게 요구를 하진 않을테고.’
팬레터를 읽고나서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에서 댓글을 읽는 느낌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댓글만큼 작가에게 희노애락을 느끼게 만드는 건 없을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팬레터가 있기를 빌면서 마법필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혹시 마리가 쓴 것도 있으려나?’
왠지 기대가 된다.
* * *
한편, 같은 시각 여학생 전용 숙소.
“푸엣췽! 엣…”
침대 위에서 여유롭게 빵을 먹던 마리는 전조도 없이 터져나온 재치기에 당황스러워했다. 덕분에 침대가 빵 부스러기로 더러워졌다.
“씨잉… 갑자기 왜 뜬금없이 재채기가 나오는 거야? 귀찮게.”
투덜거리면서 특유의 날카로운 촉이 발동되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