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95
■ 94화. 아델리아 (1) □ ᓚᘏᗢ
누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묻는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혈연(血緣)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혈연은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피로 이어져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보다 못 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패륜(悖倫)이라는 단어처럼 가족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덕목과 책임이 있는 법이다. 그걸 어기는 순간 패륜아가 되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큰 죄를 짓는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족 간의 책임을 저버리는 이들은 이 세상에 셀 수도 없이 많다. 게다가 계급 사회라는 특징과 인권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중세에서는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사생아를 본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팽겨치는 건 기본이고 작위를 이어받기 위해 가족끼리 골육상잔을 벌이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혈연끼리의 싸움은 가급적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욕심에 눈이 멀게 되면 혈연이고 뭐고 없다.
이처럼 혈연은 남보다 못 한 걸 넘어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미련으로 남는 경우가 훨씬 많다.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긴장을 넘어 불안해 하고 있는 아델리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는 물론, 입술마저 정처없이 떨리는 중이다.
식은땀까지 흐르는 걸 보아 누가 봐도 심각한 불안 증세를 겪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 털털했던 아델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동일인물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나 떠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세 명의 남녀들. 전시회에 참석한 테르스 왕국의 왕족들 때문일 것이리라.
눈동자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마저 하늘색인, 마치 푸른 하늘을 연상시켰으며 왕족 특유의 기품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붉은 머리라… 마이샬 가문의 자식인가?”
미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져 선듯 말을 못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중얼거렸다.
작게 말한 것도 어니고 내가 들리게끔 중얼거린 거라 덕분에 입을 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나는 붙잡았던 아델리아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물론 손을 놓으면서도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는지 입이 열었다 닫았다를 연신 반복하고 있다.
이를 보아 그녀와 테르스 왕족들 사이에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다는 건 명백하다.
“잠깐 실례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개최한 마이샬 가문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테르스 왕국의 하늘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흠. 테르스 왕국의 정당한 계승자, 라오스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한다.”
내가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하자 남자는 고저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하는 도중에도 그의 시선은 정확히 아델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뒤이어 라오스의 옆에 있던 여인도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소개했다.
“히리야 듀커드 폰 커쳐스. 라라.”
그러면서 자기가 어깨를 붙잡았던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히리야.
소녀도 히리야의 부름에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다급히 행동에 나섰다.
“앗. 응! 만나서 반갑습니다. 테르스 왕국의 3왕녀, 라라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합니다.”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를 지닌 소녀가 드레스의 양 끝을 살짝 잡아 올리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낭랑한 목소리와 귀여운 외모가 합쳐져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그녀의 예법이 신경 쓰였다.
타국의 귀족이라고한들 라라는 엄연히 왕족이어서 공손하게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라오스와 히리야처럼 대충 이름만 밝혀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히리야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눈 밑을 꿈틀거렸지만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는 걸로 대응했다. 보아하니 라라가 실수를 저지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아이작이라고 했나? 다급하게 개최한 전시회치고는 구조가 상당히 잘 짜여있던데?”
모든 인사가 끝나자 라오스는 내 앞으로 다가오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다가오면서도 옆의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주는 건 여전했다.
나는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살짝 놀란 것도 잠시 살짝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반말을 사용하는 건 라오스가 왕족이었기에 그닥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왕족이 타국의 귀족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자리에서다.
이번 전시회는 공적인 자리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개념이라 말을 놓아도 외교적으로 손실을 보는 건 없다.
“감사합니다. 사실 황궁에서 모두 지원해준 거라 우리 가문이 한 건 없지만요.”
“솔직해서 좋네. 너도 반쯤 관광객이지?”
“반쯤이 아니라 그냥 관광객입니다.”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재치가 있구나.”
“칭찬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런데…”
라오스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가 슬그머니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어려웠는지 아델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녀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는데, 아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망설임, 두려움, 고민, 긴장 등등.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두루 섞여있어 함부로 정의할 수 없었으며 식은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있다.
보기만 해도 상태가 안 좋음을 넘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라오스는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델리아가 짓던 미소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초면에 미안하지만 이 여자랑 무슨 사이야? 아까 사이좋게 손까지 잡고 있던데… 혹시?”
“아뇨. 그냥 친한 누나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다정하게 손까지 잡고 있던데?”
“저희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정말로 아니었기에 칼같이 선을 그을 수 있었다. 아델리아의 손을 잡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흐음… 그래?”
라오스는 단호한 내 대답을 듣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믿어주는 건지 아니면 넘어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오는 피해는 없는 것 같다.
“알았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구나?”
“네. 그나저나 아델 누나랑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내가 그리 질문하자 아델리아가 놀랐는지 아래로 떨구었던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라오스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목구멍이 막혀버린 듯, 입술이 열렸다 닫았다 반복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도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아델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무슨 사이냐고?”
아델리아 뿐만 아니라 라오스에게도 그닥 좋은 질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묻자마자 라오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며 바로 정색했으니까.
마치 그녀와 엮이는 것조차 싫다는,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지뢰를 밟은 건가 싶을 정도로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이에 속으로 잘못됐다고 예감하고 있을 때, 라오스는 불쾌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때마침 아델리아도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참이라 시선이 딱 마주쳤다.
“… …”
라오스와 정면으로 마주한 아델리아는 고양이 앞에 선 쥐마냥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뻐끔거리던 입조차 꾹 다물린 채 식은땀만 줄줄 흐르는 중이다.
저러다가 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으로 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델리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라오스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불쾌했던 표정을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라오스와 달리 아델리아의 표정은… 세상이 무너졌다는 표현조차 부족했다. 심장이 덜컹- 하며 떨어졌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으며 눈의 초점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만 해도 충분할 터인데 라오스의 잔인한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옆에 아델리아가 있는데도 능청스럽게 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우리는 이런 여자 몰라. 애초에 오늘 처음 보는 걸?”
“… …”
“보아하니 평민인 것 같은데 너도 적당히 데리고 놀아. 비록 제국의 귀족이지만 왠지 너는 마음에 들거든.”
“…알겠습니다.”
감히 왕족 앞에서 거절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라오스는 내가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아델리아의 초점이 이미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지만, 라오스는 그녀에게 독설을 퍼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제를 알아야지. 안 그래?”
“… …”
덕분에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아델리아의 초점이 다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윽고 놀라운 일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끄윽… 윽…”
가슴 속에 묵혀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분출된듯,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이 아닌가.
입술마저 꽉 깨무는 걸 보면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지만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는지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는 모습이다.
가족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은 이 세상에 없을 터. 그녀는 본인은 가족에게,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부정당했으니 그 충격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리라.
이에 나는 폭발하기 직전인 아델리아에게 손을 천천히 뻗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안정시켜야 된다는 마음에서 발로한 행동이었지만…
타닷!
“어? 아델 누나!”
내 손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도망치는 것이 한 발 빨랐다. 나는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향해 급히 불렀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 모여있는 인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두 통과하며 헤쳐나갔다. 이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래서 평민들이란… 예의라는 걸 모르는군.”
“… …”
“분위기를 망쳤다면 사과할게. 요즘 평민들이 기어오르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거든. 아무리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했다지만 지켜야 할 건 지켜야지. 안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델리아가 떠나갔던 방향을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
라오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닥 신경 쓰지 않았는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조언 아닌 조언을 건냈다.
“너도 가급적이면 그 애랑 얽히지 마. 그리고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고. 그럼 이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나를 지나치는 라오스. 그가 내 곁을 지나치자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히리야와 라라도 따라갔다.
히리야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친 반면, 라라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이윽고 그들이 완전히 지나쳤을 때 뒤에서 라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언니. 저 오빠 정말 예쁘다. 그치? 언니보다 예쁜 거 같아.”
“조용히 해.”
“나중에 저 오빠랑 같이 놀면 안 돼?”
“라라.”
“히잉.”
유독 철이 없어 보이는 라라의 행동거지를 보건데 막내라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듬뿍 먹고 자라난 모양이다. 방금 전 떠난 아델리아와 완전히 딴판이다.
나는 전시회를 구경하기 시작한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금 전 아델리아가 도망갔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수소문을 하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갈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전 잘 모르겠습니다.”
“울면서 뛰어갔다고요? 아, 아까 저기로 간 건 봤는데…”
“저쪽 건물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아델리아의 외모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수소문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골목길 근처에 다다랐다.
골목길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으며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원래 우리 영지에는 이런 골목길조차 없었는데 아무래도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보니 생긴 모양이다.
그리고…
-끄으윽… 흐으윽…
누군가의 흐느낌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고요한 골목길 특징 덕분에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얼추 계산한 후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가면 갈 수록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골목길 깊숙한 곳에 도달했을 쯤, 나는 바닥에 쭈구려 앉은 채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꺼흑… 흐윽… 으어엉…”
“… …”
“너무해… 너무하다고… 인사 정도는…. 끄윽… 할 수 있잖… 히끅…”
언제나 당당하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아델리아가 눈물을 터뜨리고 있다. 감정을 억지로 그러모았던 둑이 완전히 박살난 것처럼, 본인의 슬픔을 모조리 토해내는 중이다.
나는 통곡에 가까운 수준으로 오열하는 아델리아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 했는지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냥… 그냥… 한 번… 히끅! 꺼으윽… 흑…”
“… …”
“흐어어엉…”
저러다 탈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슬프게 우는 아델리아.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계속해서 눈을 닦기 바빴다.
나는 조금은 진정시켜줘야겠다고 판단하여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건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이다.
손수건은 특별한 문양 하나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손수건이었지만 지금의 아델리아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누나.”
“흐윽… 끄윽…”
“아델리아 누나.”
“으윽… 어?”
묵혀놨던 감정을 약간이나마 쏟아냈는지 아델리아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통곡을 했으면 눈이 퉁퉁 부어있었으며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움을 차마 숨기지 못 한 채 말없이 아델리아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델리아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이게 필요할 거 같아서요.”
“…날 따라온 거야?”
내가 내민 손수건을 받지 않고 자기 질문만 하기 바쁜 아델리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뒤이어 그녀는 약간 혼란스럽다는 눈빛으로 나와 손수건을 번갈아보더니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자신감 넘치던 평소와 달라도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방금 전 가족에게 존재를 부정당한 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나를 대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중이다.
“그냥 받아요.”
“으, 응…”
내가 그리 말하자 아델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눈물콧물 범벅이었던 본인의 얼굴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패앵!”
“… …”
그래도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아델리아는 손수건에 코까지 시원하게 풀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 손수건은 가져가지 않고 버리는 게 좋을 듯했다. 어차피 집에 널리고 널려있는 것이 손수건이었으니.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아델리아는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는지 코를 훌쩍거렸다. 얼굴 상태는 깨끗해졌지만 눈은 퉁퉁 부어있고 코는 술에 취한 것마냥 빨개진 상태였다.
“…고마워. 못 볼 꼴을 보였네.”
“아니에요. 그런데 아델 누나. 아까 그 테르스 사람들이랑은…”
“훌쩍. 맞아. 내 가족들이지. 그것도 피가 반만 섞여있는.”
피가 반만 섞여있다. 이 말은 즉슨, 아델리아가 사생아라는 의미다.
계급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사생아가 있는 건 별로 이상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사생아라니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이처럼 각팍한 대우를 받는 것도 이상하고, 아델리아가 그들에게 미련을 가진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까 전 라오스가 아델리아를 없는 사람 취급한 걸 보았을 때 분명 좋지 않은 과거가 있을 터. 보통 사람이었다면 혈연을 끊어도 모자를텐데 아델리아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우리 어머니는 매춘부였어. 그리고 아버… 지는 혈기왕성한 시절에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지.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나고.”
“테르스의 왕이면…”
“평소 로맨티스트이니 뭐니 하면서 유명한 그 사람 맞아.”
테르스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첩을 둘만한데 오로지 왕비 한 명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왕.
금슬이 얼마나 좋은지 첩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슬하에 자식이 4명이나 두었다. 심지어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자식을 더 낳으려고 했으나 왕비가 너무 힘들어하여 더 낳지 않았다고.
그런데 그런 왕에게 사생아가, 그것도 그 사생아가 아델리아라는 건 놀랍기 그지 없는 사실이었다.
“넌 모르겠지만 하층민의 삶은 매우 비참해. 만약 내가 어머니 밑에서 그대로 자랐다면 몸을 팔면서 살았겠지. 얼굴도 예쁘겠다, 꽤 고급지게 팔렸을거야.”
“… …”
“어머니도 그걸 알고 있어서 나를 아버지에게 데려갔어. 어떻게든 그런 삶은 피하기 위해서. 하지만 보다시피 뭐…”
아델리아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라오스가 아델리아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 것과, 히리야가 라라의 접근을 막았던 것. 이것만 해도 아델리아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비록 창녀의 삶은 피했지만 가족에게 멸시와 경멸을 받는 생활을 했겠지. 어쩌면 학대까지 받았을지도 모른다.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사이 아델리아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이가 되자 쫒겨나듯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야. 그래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가족으로 인정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안 될 거라 직감한 거네요.”
“맞아.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인정해줄 거라… 고… 끄읍…”
말을 하는 도중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아델리아가 입술을 앙 다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을 닮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난 그냥… 평범한 가족처럼… 히끅. 놀고 싶었을 뿐인데…”
“… …”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힘들어? 나쁜 새끼들…”
뚝- 뚝-
손수건으로 닦을 생각도 나지 않는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분노에 주먹까지 꽉 쥐는 걸 보아 비참한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이러다가 훗날 자살을 하는 게 아닐지 싶어 걱정된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후 조용히 말했다.
“누나.”
“흐윽… 왜에…”
“그 사람들에게 미련을 가진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에요?”
아델리아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응… 어머니가… 히끅! 이렇게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 하셔서…”
“… …”
“심지어 지금 어머니가 끄윽! 어떻게 된지도 몰라… 왕녀가 된다면 당당하게… 흐극. 찾아가고 싶었는데…”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일까. 귀족으로 태어나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성장한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아델리아의 인생이다.
어쩌면 니콜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이유도 그녀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입학 전까지만 해도 가족에게 육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았을터이니 니콜은 아델리아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만약 니콜마저 자신에게 관심을 끊는다면 몰려오는 외로움에 버티는 게 힘들겠지. 나는 아델리아가 흐느끼는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그동안 노력했다는 말이 허투가 아닌 듯, 그녀의 손은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
“더이상 자신이 없어졌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또…”
얼마나 심한 학대를 받았는지 아델리아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뇌리에 각인된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를 차근차근 좀먹고 있다.
나는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그녀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딱딱하면서 차갑기 그지 없는 감각이 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내가 손을 잡으면서 온기가 전달되어서인지 아델리아는 떨림을 멈추고 고개를 선선히 들었다. 엉망진창으로 변한 그녀의 얼굴은 의문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이작?”
“괜찮아요. 누나. 울지 마세요.”
아델리아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은 어떤 위로를 해줘도 그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있어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전생에서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멍을 때리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친구들은 내가 삶을 붙잡게 해준 원동력이 되어줬다.
만약 그 친구들마저 없었더라면 난 진작에 자살하고도 남았다. 사람은 혼자일 때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지만 단 하나의 버팀목이라도 있다면 지독하리만큼 끈질기다.
나는 아델리아에게서 손수건을 가져오며 그녀의 눈을 살살 닦아줬다. 아델리아는 거부하지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누나에게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 알겠어요. 그리고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마땅히 없고요. 지금은 그저 위로를 해줄 수밖에 없네요.”
“… …”
“무엇보다 누나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이 에뻐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비록 도와줄 수는 없어도 제가 옆에 있어줄테니까.”
마지막으로 눈꼬리에 묻어있는 눈물까지 닦아준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말을 끝맺었다.
“알겠죠?”
“… …”
“그러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눈물로 토해내고 내일부터는 제가 아는 아델 누나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늘 그랬듯이 저를 귀염둥이라 불러주고요.”
아델리아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늘색 눈동자에 짙은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우는 건지 아니면 웃는 건지 모를 기괴한 미소였다.
“이, 이렇게?”
“…지금은 그냥 우는 게 낫겠네요.”
“미, 미안…”
곧바로 시무룩해지는 아델리아. 나는 다채로운 표정 변화에 피식 웃었다가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쓰레기통에 넣을 생각이다.
“자, 잠깐만.”
“네?”
“그 손수건… 내가 빨아서 줄게.”
내가 뒷주머니에 넣기 직전 아델리아가 내 손목을 덥썩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의문을 가지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요? 손수건은 저택에 널려있어서.”
“그래도 나 때문에 더러워진 거잖아. 적어도 내가 책임은 져야지. 안 그래?”
“그렇다면야…”
나는 수긍하면서 아델리아에게 손수건을 돌려줬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더니 두 손으로 소중하게 붙잡았다.
“고마워. 꼭 나중에 돌려줄게.”
“네.”
“그리고… 아이작.”
“네?”
아델리아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전처럼 특유의 활기찬 미소를 지었다. 눈은 부어있고 코 끝은 붉어져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확실했다.
이에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쯤, 아델리아가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힘이 나는 것 같네.”
“고맙기는 무슨.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배려심 덕분에 그 애가 너랑 사귀는 거구나. 이제 알겠어.”
아무래도 마리를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누나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죠.”
내 말에 아델리아가 확신하듯이 말했다.
“그런 게 맞아.”
그녀는 여전히 손수건을 두 손으로 소중히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