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99
■ 98화. 기묘한 인연 (4) □ ᓚᘏᗢ
세실리가 싱긋 웃으며 묻자 오른팔에서부터 오소소 돋아난 오한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체내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몸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다.
하마터면 입도 벙긋 못할 정도로 몸이 굳었지만, 그 기분을 억지로 털어내고 오한의 출처로 의심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웬이 있는 쪽이었다.
그러나 아르웬은 세실리와 만나자마자 크게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표정도 그렇고 그녀의 반응만 본다면 이 오한의 범인은 결코 아르웬이 아니었다. 싱긋 웃는 세실리는 더욱 아니고.
‘뭐지? 대체 누가…’
그렇다면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이 기분이 모두 착각이라는 것일까. 나는 오돌토돌 솟아난 닭살에 두 팔로 몸을 감쌌다가 문득 의아한 점이 생각났다.
세실리는 아르웬에게 이 분이 아니라 ‘이 분들’이라 칭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아르웬 한 명밖에 없다.
세실리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 가르츠처럼 몸을 숨기며 따라다니는 경호원이라도 있는 것일까. 세실리는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만큼 내가 못 보는 것들을 볼 수 있을 터.
나는 아르웬과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방긋 웃는 세실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모르는 척 할 생각이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누나? 아르웬은 혼자인데.”
“흐응. 그래?”
내가 모르는 척 하자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샐쭉 웃었다. 그러면서 아르웬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팔짱을 끼며 흥미롭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드레스 때문에 가슴이 부각되었는데 팔짱까지 끼니 더욱 도드라졌다. 나는 자꾸만 아래로 가는 시선을 힘겹게 올렸다.
그사이 세실리는 아르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생긋 웃어줬다.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미안. 내가 잠깐 잘못 본 모양이네.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겠어요.”
“그럼 이 분은 누구니? 맑은 기운을 보니 엘프인 것 같은데.”
다시 돌고 돌아 세실리는 아르웬이 누구인지에 나에게 질문했다. 그에 아르웬을 슬쩍 쳐다봤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표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살짝 드러난 입은 꾹 다물려 있다.
아르웬은 오늘 처음 만났을 뿐더러 세실리는 그녀가 엘프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 나로서는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그냥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에요. 내가 책을 고르고 있을 때 옆에서 도와줬거든요.”
“그것 뿐이야?”
“전시회도 구경할 겸 맛있는 것도 사줬어요. 여기 딸기 사탕 보이죠?”
내가 딸기 사탕을 언급하자 세실리는 아르웬의 손 쪽을 바라봤다. 아르웬의 손에는 딱 한 입 먹었던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다.
이어서 세실리는 약간 섭섭하다는 목소리로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안 사주고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는 사준 거니?”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사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세실리는 그리 답하고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면 올 수록 내 오른편에서 싸늘한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에 고개를 돌려 아르웬을 확인해도 그녀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아니면 착각에 불과한지 도통 모르겠다.
저벅-
마침내 세실리가 아르웬의 우리의 앞에 당당히 도달했다. 정확히는 아르웬의 앞에.
아르웬의 키는 나보다 작고, 세실리는 길쭉한 기럭지를 자랑하여 니콜처럼 키가 큰 편이다. 그런 신장 차이로 인해 세실리가 내려다보고 아르웬이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기묘한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세실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르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실리라고 합니다.”
굳이 자기가 헬리움의 공주임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 했는지 간단하게 이름만 밝힌 세실리다.
그래도 은연 중에 흘러나오는 기품과 카리스마로 하여금 그녀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웬은 세실리의 아름다운 외모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웬이라 불러다오.”
목소리는 작았다지만 전혀 위축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경계가 묻어나온다고 해야 할까.
존댓말을 한 세실리와 달리 아르웬은 하대하여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엘프와 마족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과거를 기준으로 엘프는 인간을 하등종족으로 보았다면 마족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보았으니까.
천사의 후예인 엘프와 악마의 후예인 마족. 이것만 봐도 사이가 어떤지 각이 나온다.
서로가 품고 있는 기운이 상극에 상극이다보니 가까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낀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다행히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고나서 엘프도 여느 종족처럼 마족을 향한 시선이 누그러졌지만, 태생적인 불편함은 감추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르웬이라… 평범하지만 좋은 이름이네요. 악마 전쟁 시절 활약한 엘프 영웅의 이름이죠?”
“알고 있구나. 그리고 그대의 이름도 좋은 편이니라. 성스럽다는 뜻을 갖고 있으니.”
“칭찬 고마워요.”
일단 첫 인상은 서로 괜찮은 듯했다. 세실리도 아르웬이 하대하는 걸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하고.
하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비록 마족을 가장 많이 핍박한 종족이 인간이지만, 엘프는 태생적으로 상극이라 무슨 말이 오고 갈지 모른다.
“여기에 계속 있지 말고 작품이라도 구경할까요?”
내가 긴장의 끈을 유지하고 있을 때 세실리가 온화한 목소리로 아르웬에게 제안했다. 하기야 여기에 계속 서 있는 것도 이상하다.
아르웬도 그 점에는 동의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다.
아무래도 저건 먹기 힘들 것 같…
“얌.”
“… …”
…지 않고 딸기 사탕 하나를 베어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세실리에게 고정돼 있는 것이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세실리도 아르웬이 뜬금없이 딸기 사탕을 베어물자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 이윽고 아가씨처럼 품위있게 웃음을 흘렸다.
약간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아르웬의 귀여운 외모가 그 부분을 가려주어 특유의 귀여움을 증폭시켰다.
“미안하구나. 달콤한 냄새가 나를 자극한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딸기 사탕을 우물거리던 아르웬은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키면서 대답했다.
뒤이어 나를 한 번 힐긋거리더니 세실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구나. 난 여기까지 있도록 하마.”
“전 정말로 괜찮아요. 아이작 너도 그렇지?”
나는 세실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때까지 본 아르웬의 성격은 절대 나쁘지 않았으며 반대로 생각이 깨어있다.
그러니 세실리가 마족이어도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너희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불편할 것 같다. 둘이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불청객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 …”
“하지만 그대가 나에게 보여준 호의는 잊지 않도록 하마. 정말 고맙구나.”
아르웬은 가슴 중앙에 오른손을 올리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우아하면서 자애로움이 묻어나오는 인사였다.
나는 그녀의 인사를 받고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나 또한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미 그녀가 귀족인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으니 이정도는 해줘야 예의일 것 같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마. 아참. 딸기 사탕이 정말 맛있으니 그대도 어서 먹어보거라. 얌.”
아르웬은 나에게 농담을 하면서 딸기 사탕을 한 입 더 베어물었다.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어린 아이 취급하지 말라더니 하는 행동은 끝까지 한결 같았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딸기 사탕 하나 더 사줄까?”
“끝까지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구나.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느니라. 그때는 내가 그대에게 호의를 보여야겠지. 언제일지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조만간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대처럼 역사에 열정이 있는 자는 흔치 않으니 어쩌면 성지에서도 볼 수 있겠지.”
“성지라…”
그러고 보니 엘레나 교수가 언급한 적이 있다. 추천 학생으로 역사학에 입문한다면 자신이 알븐하임의 성지로 데려갈 것이라고.
어쩌면 그때 다시 한 번 아르웬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2~3년 내로 알븐하임에 방문할 수도 있어. 그때 인연이 닿는다면 만날 수 있겠지.”
“그거 좋은 소식이로구나.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훗날 성지에 그대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도록 하마. 그럼.”
아르웬은 그 말만 남기며 뒤로 한 발짝 두 발짝 물러섰다가 등을 돌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이윽고 머지 않아 아르웬은 인파들 사이로 섞여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나와 같은 독서광에다가 생각이 깨어있는 엘프여서 대화가 잘 통했는데 이대로 헤어지니 좀 많이 아쉬웠다.
“아쉬워?”
아르웬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 옆에서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 아름다운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답했다.
“…조금은요?”
“저 분이 마음에 들었나보네.”
“취미도 비슷하고 엘프치고는 생각이 열려있었거든요. 그리고 마법도 보여줬…”
잠깐만. 나는 문득 생각난 점이 있어 세실리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그에 세실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누나도 마법 보여줄 수 있어요?”
“마법?”
“네. 아까 아르웬은 물방울을 만들더니 요리조리 움직였거든요. 누나도 할 수 있죠?”
세실리는 마족, 그것도 다음 대 마왕으로 예정되어있다. 그러니 마법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터.
내가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감을 품자 세실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눈매까지 접으면서 웃더니 살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작 님은 무슨 마법을 원하시려나?”
“일단 주변에 피해가 없고 잔재주 수준인 거?”
“잔재주 수준이라…”
스윽-
세실리는 말을 흐리더니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잘 관리하여 보들보들함이 아닌, 고된 훈련으로 딱딱해질대로 딱딱해진 굳은살이 느껴졌다.
그에 내가 의문을 품으며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대체 뭐를… 으헉!”
슈욱!
나는 몸의 균형이 위로 향해 급격히 쏠리자 새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이, 이게 뭐…! 빨리 내려주세요!!”
“왜? 나한테는 잔재주 수준인데?”
“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으니까 빨리!!”
세실리가 마법으로 나를 하늘 위로 날려보냈으니까. 그녀도 마법을 통해 하늘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내가 푸른 하늘에서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모습이 웃겼는지 세실리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아이작.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아니?”
“알고 자시고 이렇게 빌게요!”
“싫은데? 귀여우니까 잠깐 이렇게 있자.”
“누나!!”
결국 30분 동안 하늘을 날아다녔다.
* * *
아이작과 헤어진 아르웬은 그 이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작품을 관람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이작이 대신 사줬던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었다.
이미 2개를 먹어서 남은 건 3개밖에 없었으나 아르웬에게는 충분했다. 그녀는 달달한과 상큼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탕을 입 안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시럽 특유의 단맛과 딸기의 상큼함이 입 안에 퍼져 아르웬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을 선사했다.
“여왕님. 정말로 그대로 두실 건가요?”
아르웬이 딸기 사탕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 불만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은신 상태에 있어 그 누구도 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 아르웬을 따라온 다크 엘프, 레인이다.
조금 전 세실리가 자신의 존재를 간파하자마자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어 아이작을 춥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니? 우리는 관람을 하러 온 것이지, 싸우러 온 게 아니란다.”
“하지만… 여왕님도 아시잖아요. 현재 그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엄청 위험하다는 걸.”
“… …”
아르웬은 레인의 설명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세실리를 떠올리고 있을 뿐.
레인의 말마따나 현재 세실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극히 위험했다. 원래 마족은 평상시에 인간과 별 반 다를 바 없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장 큰 예로 악마로 변하기 직전일 때다. 끔찍한 사건을 겪어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 한다면 마족에게 검은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건 종족을 불문하고 느껴지는 것이고, 마족과 상극인 엘프는 보다 더 세밀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세실리에게서 풍기는 검은 마나의 농도도 악마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위험한 수준이다.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단다. 아마 악주기가 찾아온 것이겠지. 그래도 인내심은 강한 것 같으니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란다.”
“여왕님이 그렇다면야… 그러면 그 빨간 머리는요?”
“아이작은…”
아르웬은 아이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고 호의를 보여줬던 인간 아이.
이 세상에 극히 드문 빨간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로 하여금 그 얼굴을 아른거리게 만들었다.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녀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마족의 공주와 인연을 가졌다라…’
세실리가 헬리움의 공주라는 건 아르웬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세실리도 자기가 누구인지 얼추 짐작한 것 같고.
아이작 때문에 그렇지, 괜히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어서 성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아르웬은 두 남녀의 관계가 어떻게 돼 있는지 고민하다가 레인을 힐끔거렸다. 레인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이작은 그저 평범한 인간인 것 같더구나. 나도 느꼈잖니? 마나를 다룰 수 있지만 그뿐이지,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 마족과 어울리는 걸 보면 절대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굳이 우리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단다. 지금은 전시회가 중요하니까. 그리고 너에게도 딸기 사탕을 사준 인간이잖니.”
“…알겠어요.”
레인은 아르웬의 타박을 듣자마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 모습에 아르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 일 없어야 할텐데… 보험을 들어놓아서 다행이지.’
기묘한 만남은 여기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