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the Life of a Demon RAW novel - Chapter (1)
마족답게 사는 법-1화(1/385)
마족답게 사는 법 1화
001 루시어스 켄드릭 (1)
적막이 흐르는 실내.
사락, 사라락.
나지막이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가 맴돌았다.
붉은 휘장이 걸린 집무실, 창가를 등진 넓다란 책상 앞에서 누군가 신중한 손길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손길의 주인은 놀랍게도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듯 앳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린 외견답지 않게 서류를 훑는 손길이나 시선이 매 차분하고 진중했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찰랑거리는 은발.
글자를 짚으며 굴러가는 금색 눈동자.
석상처럼 표정 없이 굳게 다물린 입술이 얼음 조각처럼 차갑다.
“…….”
얼마 동안 고요가 이어져 왔을까.
문득 소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루시어스 님.”
갑작스레 고요함을 깨는 인기척이 들려와서였다.
인기척의 사내, 하멜이 조심스레 말했다.
“즉시 마왕성으로 오라는 마왕 전하의 명령입니다. 장로님들을 전부 소집하셨습니다.”
모든 장로를 호출했다고?
냉랭했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기도 잠시.
‘마왕 전하의 명령’이라는 말에 소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의 이름은 루시어스 켄드릭.
마계의 단 다섯뿐인 장로 중 일인이었으며, 제5장로가 바로 그의 신분이었다.
“갑작스런 호출은 여전하군.”
루시어스가 귀찮은 듯 무심하게 옷깃을 가다듬으며 읊조리자, 하멜이 기다란 눈을 빙긋 접으며 다가와 리본을 반듯하게 매만져 주었다.
“호출 사유에 대한 전달은 없었나?”
하멜의 손길을 받으며 루시어스가 물었다.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썩 석연치 않은 대답.
살며시 미간을 구긴 루시어스가 나직이 불평했다.
“망할 놈의 마왕, 또 무슨 꿍꿍이지.”
하멜이 루시어스의 등 뒤에서 허리까지 닿는 은빛 머리카락을 올려 묶으며 화두를 이었다.
“짚이는 구석이 없으십니까?”
“글쎄…….”
알 듯 말 듯, 루시어스는 말끝을 흐리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로가 되고 어느덧 2년.
그간 마계에서는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그렇지만 단언코.
이렇듯 마왕이 모든 장로를 ‘긴급 소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계 역사상 최강으로 손꼽히는 마왕이 개입하면 사안의 무게를 떠나 어떤 문제라도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그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갑작스런 소집이라니…….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그럴듯한 사정이 쉬 짚이지 않는다.
걸음을 옮기며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지던 가운데, 어느새 마왕성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다.
“루시어스 님, 곧 마왕성입니다.”
“그래.”
두 마족이 게이트 위에 올라서고, 곧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 * *
마법진이 발동되며 뿜어져 나왔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마왕성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왕성 앞을 지키는 문지기가 루시어스 장로를 알아보고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루시어스가 가볍게 목을 까딱여 인사를 받고 하멜을 대기시키자, 문지기가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구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움직였다.
서서히 문이 밀리며 드러난 알현실의 전경. 그리고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다섯 개의 시선.
‘모두 도착해 있었나 보군.’
강력한 마기를 두른 이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루시어스는 그중 홀의 중심, 가장 높은 곳의 옥좌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림자가 드리운 진홍빛 눈동자와 흑단처럼 흘러내린 칠흑의 머리칼이 돋보이는 남자.
그에게서는 다른 넷과 격을 달리하는 품격과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루겔 르완 바알 벨제뷔트.’
수많은 마왕 후보자들을 찢어발기고, 단번에 마왕좌에 오른 역대 최강의 마왕.
“바알 벨제뷔트께 경애를.”
루시어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군, 5장로. 일어나거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그리고 장로님들.”
그는 고개를 들어 제 앞의 마왕과 네 장로를 눈에 담았다.
‘1장로 마리엘라 르완부터 2장로 뤼디거 자카르, 3장로 레온타인 네거스, 4장로 이레네 페오까지.’
평소 정기 소집에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3장로와 4장로까지 소집에 응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래에 집무실에 박혀 영토를 돌보느라 중앙의 일에 다소 소홀했는데, 그사이 뭔가 큰일이라도 있었나?
단순한 마왕의 변덕이 아닐까 싶었건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허투루 여길 게 아니었다. 마왕이 사전에 회의 안건을 알리지 않은 것도 기밀 유지 때문인 듯했다.
일의 심각성을 통감한 루시어스가 굳은 표정으로 제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5장로까지 모두 모였으니 서둘러 회의를 시작하시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선수를 친 건 뜻밖에도 1장로이자 마왕의 손아래 누이인 마리엘라였다.
조심성이 강하며 신중한 성격인 그녀가 이렇듯 하지 않던 재촉을 하다니.
이번 호출 사안이 대체 무엇이건대?
“그렇습니다, 전하. 본론을 빨리 알아야 5장로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4장로인 이레네 역시 날개를 한번 강하게 퍼덕이며 호응했다.
이레네나, 마리엘라뿐만이 아니었다.
점잖은 척 품격을 따지고 깐깐한 3장로 레온타인은 물론, 무뚝뚝한 척 무거운 분위기를 고수하던 2장로 뤼디거마저 그들과 뜻을 맞추었다.
자신을 제외한 장로들의 재촉에, 마왕이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그대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니, 내 그 뜻을 존중하여 바로 본론을 전달하도록 하지.”
루시어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마왕의 뒷말을 기다렸다.
“5장로,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었지?”
“……?”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은 너무나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자신의 나이는 왜 물어본단 말인가?
루시어스는 당혹스런 마음을 감추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다들 자신과는 달리,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엄숙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루시어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71입니다.”
마왕이 답을 듣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느덧 5장로도 슬슬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가 됐군 그래.”
“……예?”
“그대도 알다시피, 60세 이상의 마족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지. 그것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네. 누구든 평등한 교육을 받는 것이 아카데미의 의의이며 선왕의 뜻이니까.”
마왕의 말에 루시어스의 입술이 소리 없이 뻐끔거렸다.
지금 자신더러 아카데미에 입학하라는 뜻이 아닌가!
마족은 총 3회의 성년식을 치르며, 평균 100살 내외로 3차 성년식을 마친다.
그리고 성년식을 치를 때마다 잠재되어 있던 마력이 폭발하기 때문에 그 폭발력을 감당할 건강한 육체와 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련한 대책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마왕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분명 자신에겐 3차 성년식이 남아 있었고, 60세 이상의 마족이며, 아카데미를 입학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다른 마족과 달리 중대한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루시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전하, 저 5장로입니다!”
터무니없는 지시에 절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로란 직함은 절대 편하고 느긋하지 않았다.
마계의 정책과 방침을 총괄하는 중차대한 정무는 물론이고, 장로로서 위임받은 영토의 대소사까지 총괄하고 통치해야 했다.
안 그래도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건만, 그에 더해 아카데미에 입학하라니!
차라리 당혹스럽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아예 어이를 잃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격한 반응에도 마왕은 미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초승달같이 길게 올라가 있었다.
“5장로는 유능하니 이번 기회에 전도유망한 학생을 키워 주면 좋겠어. 어떤가?”
“전하!”
당혹감에 다시금 외쳤으나 마왕은 말을 뒤집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시어스가 뒤늦게 장로들을 훑었다.
유난히 제게 모이던 장로들의 시선에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만면에 진한 웃음을 머금은 꼴들이 자신만 빼놓고 저들끼리 말을 맞춘 게 틀림없었다.
루시어스는 덫에 걸렸음을 알고 이를 갈았다.
웬 긴급 소집인가 했더니 처음부터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입니다. 장로인 제가 아카데미라니, 대체…….”
“5장로.”
“네.”
마왕의 목소리가 느른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왕좌에 몸을 기대며 턱을 괴었다. 그리곤 느릿하지만 확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최연소 장로인 자네는 누구보다도 더 모범이 되어야 하네. 그 사실은 5장로도 잘 알고 있겠지?”
“…….”
참다못해 그러쥔 루시어스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마왕은 이전부터 제멋대로인 명령을 종종 내렸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명분은 잘도 갖다 붙이곤 했다.
“물론 그대는 마계의 다섯뿐인 장로 중 하나이지. 하지만 마계의 법에는 미성년 마족이 장로일 경우 아카데미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없어.”
“…….”
“아카데미에 가지 않겠다 하면 자네는 짐뿐만이 아니라 선대 마왕의 명령 또한 불복하는 게 되지. 그대는 그만한 죄목을 전부 짊어질 수 있겠나?”
급작스런 소집령 탓에 마왕이 원래 이런 성정임을 잊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 최초의 긴급 소집이라는 타이틀은 그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유희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껏 마계에 무슨 커다란 변고가 생긴 걸까 염려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게 모두 자네를 위하기 때문이지.”
마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법을 바꾸자니 그걸 악용할 자가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거든. 똑똑한 5장로라면 분명 잘 알아주겠지?”
궤변이다.
법을 악용하기 위해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고위 마족에 오르게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열 다툼에 밀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단순히 자기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 내미는 변명일 뿐.
루시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순순히 명을 따를 순 없었다.
“송구하오나 마계에서 실력이 모자란 자는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아카데미에 가지 않기 위해 이 자리를 탐하는 어린 마족은 이전까지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입니다.”
폐부에 가득 쌓인 불만을 입으로 후 불어내자 몸도 머릿속도 한결 편안해졌다.
“명령에 불복하겠습니다, 전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왕의 웃음이 진해졌다.
장로들 역시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기대되는지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무래도 막내 장로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나 본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탁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 사슬이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와 루시어스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장난스럽고 나른한 음성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할 지경이었다.
“알고 있겠지? 약한 자에겐 발언권이 없다, 루시어스.”
“그 정도는 어린 마족이라도 충분히 압니다.”
탕-!
마기를 한데 모아 제 몸을 휘감던 사슬 일부분을 끊어 냈다.
마왕에 대한 명백한 도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그의 보랏빛 마기가 끊어진 사슬 위로 아른거렸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마침 적당한 샌드백이 필요한 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