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the Life of a Demon RAW novel - Chapter (184)
마족답게 사는 법-184화(184/385)
마족답게 사는 법 184화
184 형제 (5)
성에서 보는 달은 유난히도 가깝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루시어스는 밤의 적막을 즐기며 두 개의 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불 삼아서 쓰려고 했던 일기장은 여전히 텅 빈 채였다.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기를 쓰려고 펜을 쥔 손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형제처럼 보였지.”
레녹스와 이켈, 그리고 로진은 무척이나 좋은 삼형제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대체 왜, 그들은.
레녹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
뤼디거의 자식 교육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녹스와 다른 형제들의 사이도 소원할 거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형제의 사이는 훨씬 친밀했다. 그들은 레녹스가 어렸을 적부터 막냇동생을 끔찍하게 아꼈다.
“…….”
그들이 레녹스가 아카데미에서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그들 또한 뤼디거처럼 레녹스가 ‘뤼디거 자카르의 아들’이기에 당연히 홀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잠도 안 오는데, 바람이나 쐴까.”
선선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정원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면 이 답답한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루시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로진의 훈련을 봐주고 난 후, 몸을 개운하게 씻고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밤바람을 쐬고 있었다.
밤이 내려앉은 정원은 참 각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햇볕을 받아 싱그럽게 빛날 때와는 달리 밤의 정원은 무척이나 매혹적이며 고혹적이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매력이 몽마와 참 비슷하지 않은가.
미소 짓는 이켈의 표정이 어딘지 씁쓸했다. 그러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으로 혼자 나오는 루시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시어스……?”
달구경이라도 하러 나왔을까.
루시어스는 정원 중앙에 있는 분수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켈이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보면 별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켈은 적잖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밖으로 나왔지?’
주변에 레녹스가 없던 탓이다.
뤼디거 자카르의 성은 미로나 다름이 없는 구조였다.
정확히는 그런 마법을 걸어 두어 잘못 발을 들인 자는 두 번 다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시종들도 일을 시작하기 전 몇 달간 성에 적응하는 훈련을 시켜야 했고, 이번처럼 외부에서 청소 업체를 부르기라도 하면 시종들이 꼭 한 명씩 붙어 길 안내를 해줘야 했다.
“……?”
레녹스가 안내만 해 주고 들어갔나?
잠시 고민해보던 이켈이 고개를 저었다. 성의 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잘 알고 있는 레녹스가 소중한 파트너를 그냥 버려 둘 리가 없었다.
꼭 주변에 머무르려고 했겠지.
이켈이 잠시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다가 루시어스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력이 좋은 학생이라고 했으니 성의 미로를 뚫고 잘 나간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같은 요행이 반복되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나.
안내역이라도 해 주는 게 좋겠지.
게다가 낮에는 함께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느라 성 구경도 제대로 시켜주지 못하지 않았나.
늦은 밤이기는 하지만 정원이나 유리온실을 보여 주는 것도 꽤 좋아할 것이다. 루시어스는 식물을 참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이켈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루시어스에게 다가갔다. 루시어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인사해 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 밤바람을 쐬려고 했는데 루시어스가 보여서요. 성이 워낙 넓으니 길을 잃을까 걱정스러워 안내라도 해 줄까 합니다.”
“그런 것 치고는 머리가 젖어 있는데요. 제가 걱정되어 달려오셨습니까?”
루시어스가 이켈에게 옅게 웃음 지었다. 정곡을 찔렸는지 자신의 덜 마른 머리카락을 한 번 만지작거린 이켈이 머쓱하게 웃었다.
“눈썰미가 참 좋으시네요.”
“…….”
“오늘 즐거우셨습니까?”
“……네.”
조금 전까지 그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루시어스는 이 이상 살갑게 대할 수 없었다.
루시어스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켈은 무척 정중한 마족이었다. 루시어스가 말을 편히 놓으라 했는데도 동생의 파트너에게 그럴 수는 없다며 계속 예의를 차릴 정도로.
그리고 늦은 밤에 동생의 파트너가 성안에서 길을 잃을까 염려에 한달음에 달려올 정도로.
그런 그가 도대체 왜?
이켈은 루시어스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는 루시어스의 옆에 앉아 손을 뒤로 짚었다.
고개를 들자 흘러가는 구름이 달빛을 잠시 가리는 것이 보였다. 밤하늘이 잠시 어두워졌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네요.”
“그렇게 보이십니까?”
“식당에서부터 그랬죠. 참 물을 것이 많아 보였는데 묻지 않더라고요. 레녹스를 배려해 준 거죠?”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루시어스가 이켈을 바라보았다. 이켈이 루시어스에게 가볍게 고갯짓했다. 선선한 바람을 가르며 둘이 정원을 걸었다.
“혹시 저희 형제가 왜 레녹스를 도와주지 않았는지 궁금하십니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래도 성에 오고 나서 형님들께서 얼마나 레녹스를 귀히 여기는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레녹스를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켈은 조금 놀란 듯 숨을 삼키다가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그에게 언뜻 자책감이 엿보였다.
“……레녹스가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마기가 혼탁해졌고, 야위어졌고, 약해졌으니까요.”
“…….”
“아마 그대로 뒀으면 3차 성장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죽었겠죠.”
이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일이 터진 후 뤼디거를 대신해 몇 번인가 사이러스에 방문하기도 했다. 레녹스 때문에 발생한 여러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레녹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아버지, 2장로 때문이었다.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뤼디거 자카르.”
그놈이 정말.
루시어스가 그의 이름을 씹어 먹을 듯 내뱉었다. 잠시 놀란 듯 바라보던 이켈이 빙긋하니 웃었다.
상대가 누구든, 동생을 위해 화내주는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저와 로진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진노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
“명령을 거스르는 순간 레녹스에게 불이익이 갈까 봐 걱정스러웠습니다.”
약점을 쥐고 뒤흔드는 건 아버지께서 가장 잘 하는 일이거든요. 이켈이 조금 슬픈 듯 피식 웃고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레녹스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안색도 좋아지고, 조금씩 웃음도 많아지고.”
이켈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친구가 생겼다고 편지로 말하더라고요.”
“……저, 말입니까?”
“네, 루시어스 켄드릭이라는 친구가 생겼다고 말입니다.”
처음에 연락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유리온실에 도착한 이켈이 문을 열고 루시어스를 안으로 들였다.
손을 한 번 까딱하자 온실에 환한 불이 가득 들어왔다. 꽃들이 그들을 반기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가끔 겨우 오던 편지가 자주 오기 시작했죠. 편지 속에 루시어스의 이야기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주기적으로 형님께 보낸다고 편지를 쓰고는 했는데, 그것인가 봅니다.”
“네, 그 편지들만 봐도 레녹스가 얼마나 루시어스를 의지하는지, 루시어스가 얼마나 레녹스에게 잘해 주는지 알 수 있었어요.”
정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레녹스의 편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루시어스를 시작으로 많은 친구의 이름이 편지에 거론되고는 했다.
이켈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꽃과 풀들을 꺾어 손질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꽃들이 잘 어울리는 다발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꽃은 마계의 달빛을 받고 자라난다는 달무리 꽃이었다.
루시어스의 금안과 닮은 달무리 꽃.
“그래서 루시어스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
“레녹스를 구해 주셔서, 친구가 되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제가 하지 못한 일을 해 주셔서.”
이켈의 마기가 한 번 꽃다발을 훑었다. 생화가 마기를 먹고 바싹 말랐다. 특유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그가 루시어스에게 말린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루시어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목적이 있어 레녹스에게 접근했을 뿐이다. 그에게 감사를 받을 정도로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적어도 지금은 레녹스를 무척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이 꽃다발 정도는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루시어스가 작게 웃으며 드라이플라워에서 은은하게 감도는 꽃향기를 즐겼다. 루시어스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자 이켈이 마주 웃었다.
“앞으로도 부디 레녹스와 친하게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하하, 제가 조금 유난이 심하죠?”
“네, 정말로.”
장난스럽게 대답한 루시어스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녹스가 왜 형님들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습니다. 도와달라고 말했으면 진즉 도와줬을 분들 같아서요.”
“…….”
“그런데 이제 알겠습니다. 레녹스는 이미 형님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대가 깊었구나.
정말 부러운 형제다.
* * *
레녹스는 다음 날 아침 바람이 산들산들하게 불어왔을 때쯤 루시어스의 방에 들어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시중을 들어주었다. 다만 밤새 잘 잤는지 평소보다 좀 더 밝은 낯빛이었다.
루시어스는 레녹스에게 머리카락을 맡기고 편하게 눈을 감았다. 레녹스가 거울 너머로 잠시 루시어스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형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데.”
“……알고 있었나?”
루시어스가 몸을 좀 더 뒤로 기댔다. 눈을 뜨자 레녹스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온실에 불빛이 켜지는 걸 봤어.”
잠시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레녹스는 루시어스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올려 묶어주며 말을 이었다.
“형님들께는 여러모로 죄송해. 걱정이나 시켰으니 참 못난 동생이지.”
“그렇지만도 않던데?”
“이대로 못난 동생이 되지는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거든.”
루시어스는 레녹스가 만져 준 머리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녹스의 이마 위에서 콩,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넌 못나지 않았다.”
“…….”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형님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동생이야.”
“……고맙다.”
레녹스가 옅게 웃었다.
즐거워하던 것도 잠시, 곧 그의 눈꼬리가 아래로 걱정스럽게 축 처졌다.
“그런데 정말 가려고? 형님들께도 말해놨으니 방학 내내 여기서 묵어도 괜찮은데.”
“처음엔 홧김에 그러자고 했지만.”
루시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형님들도 무척 친절하니 그의 말대로 성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동생의 친구라고는 해도 성에서 계속 머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온천에 갔다던 뤼디거 내외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형님들을 봐서 그런지.
“누님이 보고 싶어져서 말이야.”
소중한 의형제, 마리엘라.
도란도란 잘 지내는 형제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그녀가 그리워지더라. 벌써 얼굴을 못 본 지 한 학기가 지났으니까.
“마리 누님과는 발푸르기스의 밤에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같이 시간을 보내면 누님도 좋아하실 거야.”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자문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같이 가도 괜찮나?”
레녹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시어스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새삼스러운 소리를.
“당연하지. 그럼 너도 괜찮다고 하니 연락을 넣어봐야겠군.”
루시어스가 펜과 종이를 가져와 마리엘라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리엘라를 볼 생각을 하니,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