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the Life of a Demon RAW novel - Chapter (55)
마족답게 사는 법-55화(55/385)
마족답게 사는 법 55화
055 레녹스 자카르 (5)
팔락, 탁.
서류 넘기는 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더미트는 글자를 하나하나 눈에 담는 루시어스를 옆에서 흘긋 곁눈질하다 하멜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을 받은 하멜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잠시 루시어스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더미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그래 보이나요?”
“레녹스 때문이니?”
“…….”
루시어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더미트는 알만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조금 후회했어요.”
“어째서인지 물어도 될까?”
단순히 좀 더 의욕을 북돋아 주기 위해 걸었던 내기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레녹스가 제게 이길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
1년은커녕, 적어도 3년은 족히 걸릴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레녹스의 실력은 훨씬 더 빠르게 일취월장했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기사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레녹스이기를 바란 적은 없어요.”
“왜?”
“……짓궂으시네요, 더미트.”
루시어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하멜이 어깨를 으쓱였다.
“고운 얼굴에 주름 생기겠습니다. 이미 엎지른 물을 어떻게 합니까. 포기하세요. 그리고 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루시어스 님만 모르셨을걸요.”
“그럴 줄 알았다고?”
“애송이가 생각하는 거야 뻔하죠. 마족 사이에는 친구가 없답니다.”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 루시어스가 몸을 의자에 깊게 파묻혔다.
“먹느냐, 먹히느냐. 그뿐 아닙니까. 루시어스 님은 정말 다른 마족들……, 학생들과 당신이 대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숨겨도 어쩔 수 없어요. 약자에게는 약자의 감이 있거든요. 따를 상대를 찾는 건 당연한 이치인 겁니다.”
하멜이 덧붙였다.
“위에 서는 자라면 더더욱 그렇죠.”
“……그런가.”
“네. 그게 지도자입니다. 바라지 않아도 따르는 거예요.”
상처가 났던 목덜미를 손으로 한 번 매만졌다.
레녹스가 천천히 적응하도록 조절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임이 좋아질 줄은 몰랐다.
예상을 웃도는 성장 속도가 신기하고 즐거우며 기뻤다. 반격하라면 얼마든 반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노력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순순히 당해 주었다. 그 순간엔 레녹스가 무슨 소원을 말할지 기대하기도 했다.
무릎을 꿇고 충성 서약을 할 걸 알았으면 절대 져주지 않았을 텐데.
더미트가 위로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루시어스. 레녹스라면 충분히 좋은 기사가 될 거란다. 마침 일손도 부족했으니 꽤 적절한 시기 아닐까? 이 아비는 오히려 기쁜데.”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하루아침에 레녹스가 파트너에서 기사가 될 줄은 몰랐지.
게다가 뤼디거한테 레녹스를 도구 취급하지 말라며 화내고 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레녹스가 나서서 검이 되겠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더욱 입맛이 쓰다.
루시어스가 턱을 괴고 더미트를 지긋하게 응시하다 시선을 피했다. 더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고는 루시어스를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5장로가 되었을 때, 나도 그랬단다.”
“……더미트가요?”
“언제까지고 작고 어릴 것 같던 네가 갑자기 쑥, 커 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배신감마저 들더구나. ……무엇이든 변한다는 건 그런 거란다. 어색하고, 무섭고, 조금 슬프지.”
토닥, 토닥.
더미트는 여전히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루시어스를 토닥였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루시어스.”
“네.”
“그 후로 우리가 뭔가 변했니?”
루시어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한 더미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자신의 목을 감싼 두 팔은 여전히 든든하고 따뜻하다.
약간 시원하기도 하고.
“아뇨, 아버지.”
“그래, 아들아.”
서늘한 피부가 잠시 뺨에 닿았다 떨어진다. 더미트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루시어스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달라지지 않았다.
장로가 된 후에도 여전히 더미트가 아버지이며 자신이 아들인 것처럼, 기사가 된 레녹스도 여전히 자신의 파트너이며 동료였다.
그리고 더미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자신에게 바랐던 대로.
그는 소중한 친구였다.
“고마워요, 더미트.”
“내가 뭘 했다고. 아들이 현명한 거란다.”
루시어스가 작게 웃었다. 고개를 돌리자 업무를 보조해주던 하멜이 일을 정리한 후 차를 한 잔 마시며 쉬는 모습이 보였다.
레녹스가 곧 깨어날 때가 되었을 텐데.
“하멜, 레녹스가 깨어나면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나?”
“방에 나비를 두었으니 알아서 데려올 겁니다.”
“나비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어필하기에 시켰습니다. 후배도 들어왔으니 전 이제 좀 쉬어야죠.”
말하는 하멜의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아 루시어스가 의아해했다.
“의외로군. 기사를 들이는 걸 싫어할 것 같았는데.”
타리크에게 주제를 모른다며 매번 날을 세우는 것만 봐도 그랬고.
하멜이 잠시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가느다랗게 웃음 지었다.
“물론 감히 주제도 모르고 당신의 마력을 먹어치운 그 오필리아인지 뭔지는 당장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을 만큼 싫습니다.”
“용케 알고 있었네.”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루시어스의 중얼거림에 하멜이 코웃음 쳤다. 그 상황에서 루시어스가 할 행동이야 뻔할 뻔 자인데 모를 리가 있나.
단지 그런 하잘것없는 물건 때문에 주인과 언쟁하기 싫어 말없이 넘겼을 뿐이다.
하멜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찻잔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적어도 레녹스 녀석은 자기 분수를 모르진 않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반대한다고 영원히 서임을 하지 않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네 판단 기준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설명하자면 입만 아픕니다. 자, 나비가 심부름을 잘 했군요.”
터벅터벅 걸어간 하멜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삐잇!”
열린 문 틈새로 나비가 호다닥 루시어스에게 뛰어오더니 칭찬해달라는 듯 발치를 빙글빙글 돌았다.
잘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무릎 위에 앉히자 나비가 기분 좋게 울었다.
그럼 이제 레녹스랑 이야기를 좀 해볼까. 시선을 돌리는데 레녹스가 성큼성큼 들어와 루시어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하멜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등을 보이며 말했다.
“이걸 당장 지워 주십시오.”
“……네?”
“……?”
“삐?”
“당신의 기사가 될 생각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멜 장로님.”
정적이 흘렀다.
“…….”
“…….”
아주 짧고도 깊은 정적이.
말문을 잃은 루시어스가 설명을 바라듯 더미트를 바라보았다. 더미트도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닫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꿈뻑이던 하멜이 루시어스를 흘긋이더니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녹스 자카르. 기사 서임은 무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알고 있을 텐데?”
하멜이 오만하도록 눈매를 가늘게 뜨며 레녹스를 내려다보았다. 레녹스가 질세라 답했다.
“특별법 제3조 5항의 기사 서임을 보시면, 상호 동의 없는 서임은 자격 박탈 사유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호오. 자격 박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고?”
“기사 서임은 장로에게 내려지는 마신의 권능.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여?”
“…….”
“나를 죽이겠다?”
서약이 사라지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기사가 죽거나, 장로가 죽거나. 혹은 장로 직위를 찬탈당하거나.
서임의 부당함이 자명하다면 마왕이나 장로들이 나서서 해당 장로의 직위를 박탈시킨다. 즉,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된다는 뜻이다.
레녹스가 눈을 부릅떴다.
“필요하다면.”
“푸, 흡……. 하하하하!”
몸을 부들부들 떨던 하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더미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레녹스가 자신의 손등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5장로의 직인. 자신이 그의 소속이 되었다는 증표였다.
“허언이 아닙니다. 제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장로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아아, 알지. 알고말고.”
하멜이 웃음을 겨우겨우 삼키며 답했다. 레녹스의 눈매가 점차 짙게 가라앉았다. 마치, 깊고 깊은 심해처럼.
루시어스가 미간을 짚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할 때, 더미트가 중재에 나섰다.
“레녹스. 네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우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는 게 어떨까?”
“……더미트 님.”
“그럼 늦었지만, 이 저택의 주인으로서 가솔들을 소개하도록 하지. 우선 식구가 된 지 얼마 안 된 계약 마수, 나비.”
“삐잇!”
나비가 울음소리를 내며 더미트에게 다다닷 달려갔다. 그가 발치에 얼굴을 부비는 나비를 두 손으로 안아 들어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마찬가지로 계약 마수인 하멜.”
“후후.”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아들이자 마계의 다섯 번째 장로인.”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더미트에게서 하멜의 소개를 받은 레녹스가 당황스럽게 시선을 굴렸다. 표정이 전혀 다른 의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루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루시어스 켄드릭. 너의 주인이다.”
“……예?”
“네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지.”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아무런 사고도 할 수가 없다.
입을 뻐끔이는데, 루시어스의 기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마족처럼.
차분했던 분위기에 서리가 내려앉고, 조용했던 목소리에 위압감이 실린다. 무심한 듯 자애로운 눈동자가 섬짓할 정도로 날카롭게 빛난다.
“레녹스 경. 계속 그대로 서 있을 생각인가?”
털썩.
레녹스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오른 손등에 찍힌 보랏빛 인장이 보였다.
서류에서 곧잘 보던 인장이었다.
루시어스가 5장로라고?
말도 안 돼.
전혀 하지도 못했던 가정이었다. 차라리 하멜이 5장로라는 것이 더 신빙성 있었으니까.
‘대장군께서 방금 뭐라셨지?’
아들이자 5장로인 루시어스.
계약 마수인 나비. 그리고 마찬가지로…… 계약 마수인 하멜.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어느새 위압감을 모두 거두고 평소처럼 편한 분위기로 돌아온 루시어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테니 편하게 앉아서 뭐든 물어봐도 된다.”
“……루시어스, 정말 네가?”
“맞다. 내가 5장로지. 더 말이 필요한가?”
“……아니, 아니야.”
손등의 직인, 대장군의 증언, 그리고 조금 전의 증명.
대체 무엇이 부족해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재증명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는 장로였다.
마계의 다섯 번째 장로.
헤아리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장로님이셨구나.’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더니, 정말 약속을 지켜 주었구나.
옆자리를 달라는 소원에, 아직 성장도 다 하지 못한 햇병아리 마족에게 기사 자리를 주었다. 이보다 더한 호의와 신뢰가 어디에 있을까.
“5장로님을 뵙습니다.”
손등에 있는 문장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