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the Life of a Demon RAW novel - Chapter (94)
마족답게 사는 법-94화(94/385)
마족답게 사는 법 94화
094 녹조 현상 (6)
사흘 후.
루시어스가 도착한 곳은 러드의 지하였다. 수학여행 때 이곳에 와서 키웠던 나무는 여전히 아름다운 광채를 뿜으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깊은 지하까지 내려오는 은색 광휘.
나무가 가져야 했을 원래 모습이었다.
나무 밑에서 잠시 눈을 감고 나무 기둥에 손바닥을 대었다. 이전과는 달리 나뭇결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잠시 들려오는 나무의 목소리도 참 밝고 활기찼다.
그 뒤로 멀쩡히 잘 돌봐 주었나 보군. 눈을 뜨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결을 따라 나무를 쓰다듬는데 뒤에서 기척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전에 자신을 납치했던 여자, 이디스였다.
그녀에게는 타리크의 거취를 포함해 이 근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기적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본인이 장담했던 것처럼 그녀는 꽤 열심히 루시어스를 위해 일해 주고 있었다. 나무의 관리부터 시작해 사막 위쪽의 독기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까지 열심히 보고하고는 했다.
이디스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택 앞까지는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가지.”
일찍이 한 번 안내받은 적이 있던 길을 따라갔다. 저택 지하와 통하는 문 앞에 다다르자 저번처럼 저택의 집사인 베르틴이 나타나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잠시 뒤에 있는 하멜을 흘긋 바라보긴 했지만, 베르틴은 별다른 말 없이 루시어스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가 문 앞에서 도착을 고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루시어스 님!”
“…….”
안에서 튀어나온 타리크가 반가운 표정으로 루시어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루시어스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하멜과 집사는 안으로 발가락 한쪽도 들이지 못했다. 닫힌 문 너머에서 가만히 눈물을 삼키는 집사와는 달리, 하멜은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루시어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리크의 미간이 살풋 일그러졌다.
“불청객이 있네요.”
“신경 좀 쓰십시오. 불청객이어도 객이니까.”
“……뭐, 어쩔 수 없나.”
제 주인밖에 모르는 똥강아지가 뒤에 따라붙는 것 정도는 예상했지.
잠시 중얼거린 타리크가 한쪽으로 가서는 루시어스에게 대접할 차를 손수 우리며 말했다.
“캐터스라는 사막의 식물을 알고 계십니까?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는데…….”
“……알지, 무척 큰 선인장이잖아.”
“맞습니다. 이건 캐터스의 꽃을 통으로 말려서 독성을 제거한 후에 마시는 차입니다. 그리고 이건 캐터스의 과육을 사용해서 만든 스콘이고요.”
이것은 무엇이다, 저것은 무엇이다.
타리크는 신이 나서 묻지 않은 사소한 것까지도 열심히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하멜에게는 차를 내어주기 싫은지 차 한 잔을 든 채로 둘이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멜을 두고 올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도 조용히 캐터스 차를 마셨다.
사막의 꽃이기 때문인지 단맛은 거의 없었다. 사막의 모래향이 나는 듯, 약간 씁쓸하고 시큼했다. 평소에 즐겨 먹는 차 맛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맛이었다.
스콘을 먹어 보라고 난리를 피우기에 그가 내미는 접시에서 스콘을 하나 집어 먹어보았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단맛이 강해서 차와 꽤 잘 어울렸다. 스콘을 한 입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면, 차의 씁쓸한 향기와 스콘의 달콤한 맛이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공들여서 준비했군.’
과자들도 제 입에 맞을 만한 것들로만 준비되어 있었다.
루시어스가 적당히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타리크는 루시어스가 우물우물 과자를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전에는 과자는커녕 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아서 내심 얼마나 서운했는지.
뭐, 그건 제 잘못이기는 하지만.
“맛이 괜찮습니까?”
“적당히 먹을 만하다.”
“다행이네요.”
루시어스가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가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찰랑거리는 찻물에 제 모습이 비쳤다.
문득, 아르놀트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들과 한 번 제대로 마주 보렴.”
의미 모를 짓궂은 장난들은 모두 제게 전하고 싶은 어떤 신호라고 했다.
박수는 한쪽 손으로만 칠 수는 없으니, 한 번 아이들과 마주 보는 게 어떻겠냐고.
때로는 직접 이야기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타리크 라하위스도 그랬을까?
그 짓궂다 못해 미친 행동들이 모두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하고 싶은 말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서임해달라는 것?’
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어스가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이미 당한 게 너무 많아서 도저히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다.
다만.
“이렇게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
“물론 객 행세를 하는 불청객이 있긴 하지만요.”
갑자기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오니 참 당황스럽단 말이지. 대체 속셈이 뭔지 불안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미친 척 달려들면 그게 더 속이 편할 것 같다.
루시어스가 타리크를 흘긋거렸다.
멀쩡한 것처럼 보인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이놈은 이러면서도 곧잘 미친 소리를 해서 자신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고는 했으니까.
눈초리를 받은 타리크가 옅게 웃었다. 표정이 참 없는 마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루시어스 님.”
타리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잡아 끌어가더니 루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그렇지.
가만히 지켜보던 하멜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충성을 맹세할 것 같은 기세였다. 루시어스가 한쪽 손을 들어 일어나려는 하멜을 앉혔다. 그리고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타리크 경,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오해 마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간 겨우 얻은, 사막의 모래만한 신뢰도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 같거든요. 입매가 빙긋 휘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등에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손가락 끝에 살짝 닿았다.
이번 한 번은 참아주자.
루시어스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타리크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른 건.”
“물론 공식적으로 저를 부른 건 루시어스 님이 아니라 3장로님이시지만, 루시어스 님께서 제 이름을 꺼내셨겠죠. 아닙니까?”
타리크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았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맛보고 싶었던 그 기적과 다시 조우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 날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온 세상에 색채가 덧입혀졌던, 그 꿈결 같았던 10년 전의 일은 거짓이 아니었다.
1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타리크가 그동안 루시어스에게 관심을 둔 이유는 그의 넘치는 생명력이나 수려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강함을 대가로 빼앗겼던, 세상이라는 빛을 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눈에 온 세상의 찬란함을 눈에 담았던 그 순간 타리크는 더없는 충만감과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알아 버린 색채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세상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마족을 잊을 수 없었다.
곁에 서고 싶다.
옆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루시어스는 한사코 자신을 거절했다. 서임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외면했고, 후에는 만나 주지도 않았다.
어쩌다 마주쳐도 루시어스는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찬란했던 세상은 다시금 회색조로 변해갔고, 회색조의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리고 검게 변해갔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처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결심했다.
그가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곁에 두겠다고.
사막이라는 새장에 가두겠다고.
러드의 지하로 옮겨 둔 나무처럼.
하지만…….
“제가 탐탁지 않으실 텐데도 관용을 베풀어 주셨으니, 오늘은 이 정도만 바라겠습니다.”
어쩌면 조금 성급했는지도 몰라.
그의 입매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삐뚜름하게 비틀려 있던 평소의 웃음과는 달리 무척 부드러운 미소였다.
“나중에 또 제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물론 다음에는 이 정도의 ‘상’으로 만족하지 않겠지만요.”
“오늘처럼 고분고분하면 다시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지.”
“그렇습니까?”
항상 침침하게 일그러져 있는 눈동자가 유난히 또렷하게 루시어스를 비추었다. 그의 눈매가 다소곳하게 휘었다.
“오늘은 편히 다과를 즐기다 가세요. 거기 객 행세를 하는 불청객도 함께요.”
아, 역시. 내가 택한 그다워.
* * *
레온타인에게서 온 답례품들은 참 질이 좋았다. 게다가 이번 일을 해결해 준 것이 여간 고마운지.
글쎄 집무실을 꽉 채울 정도의 보물들을 보내 왔다.
루시어스는 책상에 얌전히 앉아 어떤 물건이 들어왔는지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는 레녹스와 하멜을 바라보았다. 흘긋, 옆에 있는 상자를 본 루시어스가 슬며시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루시어스 님.”
“우리가 알아서 다 볼 테니 거기 있어라.”
“……그래도 뭔가 돕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괜찮아.”
물건을 점검하고 분류하랴, 가져다 놓으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이는 데 가만히 있으려니 괜히 좀이 쑤셨다.
루시어스는 뭔가를 하는 것 대신 하멜이 내려 주었던 차를 다시 호록 기울였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서 고롱고롱 자는 나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3장로님께서 이렇게 뭘 많이 보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좋은 물건이 꽤 많이 들어왔습니다. 보시겠습니까?”
하멜이 레온타인이 보낸 물건 중에서도 가장 질이 좋은 보석을 가져와 루시어스에게 보였다.
해저 깊숙한 곳에서 가장 정순한 바다의 정기가 모여 만들어진다는 아쿠아마린이었다. 그리고 얻기 힘들다고 소문이 난 마수 베히모스의 뼈도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무기를 한두 개쯤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에 전하께 받은 스타 루비도 있지 않은가. 무기가 아니더라도 좋은 아티팩트가 될 것이다.
‘뭔가 만들까?’
잠시 고민하던 루시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는 아인이 있고 레녹스에게는 오필리아가 있으니 당장은 필요가 없었다.
서포트를 할 때 사용할 만한 스태프를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스태프를 자주 쓸 일은 없을 테고.
우선은 잘 보관해 뒀다가 나중에 쓸 일이 생기면 써야겠다. 루시어스가 함을 닫아 두자 하멜이 다시 가져갔다.
“우선 창고에 보관해 두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나비에게 뭔가 선물해 주고 싶기는 한데.
“뭔가 갖고 싶은 건 없니?”
“삐우……?”
“흠, 좋은 생각이 안 나는구나.”
“삐이.”
고민하며 나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잠이 깼는지 고롱고롱 울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을 할짝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나비를 바라보던 루시어스가 아, 하고 하멜을 바라보았다.
“하멜, 그러고 보니 요즘 립톤 선생은 어떻지?”
“립톤 선생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새 뭔가 보고할 만한 게 생기지 않았나 해서.”
“음…….”
하멜이 정리를 하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레녹스도 궁금한지 하멜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립톤 선생이라면 그 또한 자주 상담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선생이었다.
“전과 달라진 건 딱히 없습니다. 정체가 들킨 게 아닌지 걱정이었는데……. 사실 진짜 알고 있더라도 소문낼 생각은 없는 것 같거든요.”
“립톤 선생님이라면 믿어도 된다. 그렇게 입이 가벼운 분이 아니시니까.”
레녹스가 하멜의 말에 의견을 달았다.
하멜과 레녹스가 그를 그렇게 평가한다면 참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루시어스의 시선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가 선생으로서 아카데미에서 근무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까지는 어떻게 잘 버텼지만 스승의 날을 거치며 하멜과 가까워진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가장 먼저 궁금해할 것은.
‘슬슬 하멜의 종족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이들이 생길 때가 되긴 했어.’
바로 그의 종족이었다.
‘……왠지 낌새가 안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