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turn a dimensionpover correctly RAW novel - Chapter 30
29화-첫 담당 (07)
세상이 아주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차원이동자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본뜰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 쿤의 머릿속에 든 생각 역시 뚜렷했다.
죽는다.
오직 그 한 단어만이 메아리쳤다.
위험하다거나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죽음 외에는 그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원이동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톱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저를 향했다.
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독한 정적과 함께 정말 끝났다 생각할 때, 갑자기 얼굴에 빗줄기가 떨어졌다.
쿤은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봤다. 차원이동자의 긴 목이 뒤로 꺾이더니 이내 그 육중한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쿵-
진흙이 무릎까지 튀었다.
정적도 잠시, 천둥과 함께 갑자기 숨이 토해졌다. 쿤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아…….”
쿤은 가슴을 들썩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거대한 차원이동자가 미동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주춤거릴 때,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했군.”
쿤이 퍼뜩 고갤 돌렸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뒤에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판테테 재킷과 짧은 회색 머리칼. 거기에 새하얀 가면.
“키리기스 씨?”
“앞으론 좀 더 뒤를 보는 게 좋겠어.”
키리기스는 천천히 쿤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꼿꼿하게 선 허리와 반듯한 걸음걸이. 거기에 여유로운 보폭까지.
거센 폭우 속에서도 키리기스는 마치 저택 카펫 위를 걷는 것처럼 묘한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는 쿤의 앞까지 오더니 입꼬리를 유려하게 말았다.
“괜찮나?”
묵직한 저음이 정신을 일깨웠다. 뒤늦게 몸이 잘게 떨렸다. 쿤은 떨림을 멈추기 위해 제 손을 움켜쥐었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으면 큰일 날 뻔했군.”
키리기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용을 보면 걱정하는 것 같은데, 말투가 묘하게 아쉽다는 투였다.
쿤은 제가 많이 놀라 착각한 거라 여겼다.
“덕분에 살았어요. 근데 여긴 어떻… 우악!”
누군가가 제 팔을 확 잡아당기는 탓에 뒤로 자빠질 뻔한 쿤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뒤를 돌아봤다. 보보가 그 하얀 얼굴을 한층 더 하얗게 한 채 키리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X모양 동공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경계를 잔뜩 품었다.
쿤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보보는 키리기스 밑에서 판테테 일을 배웠다고 했다. 같은 지부라 함께 일을 한 적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마치 스승이나 팀원이 아닌 적을 대하는 것 같았다.
반면 키리기스는 보보가 이러는 게 재밌는지 좀 더 진한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
“루가 부탁하더군. 위험한 것 같으니 대신 가달라고 말이야.”
“젠장, 왜 하필…….”
“하은이 연락을 못 받은 거겠지.”
“그렇겠죠. 그게 아니면 절대 키리기스 씨께 연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보가 콰득 이를 깨물었다.
쿤은 보보의 살기가 저를 향하는 것이 아님에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반면 키리기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쓰러진 차원이동자를 발로 가볍게 밀었다.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날 하은 대타로 만든 건 어이없지만, 이왕 온 거 제대로 도와주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마지막이니까요.”
“그래?”
“예. 나머지 역시 저랑 쿤 씨가 알아서 할 수…….”
“보보.”
키리기스가 돌연 보보의 이름을 불렀다.
보보가 흠칫 떨며 입을 다물었다. 쿤 역시 키리기스의 기백에 눌려 숨을 삼켰다.
보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
“손이 망가졌군.”
“예?”
놀란 건 보보가 아닌 쿤이었다.
쿤은 반사적으로 보보의 손을 확인했다. 키리기스의 말대로 양손이 다 엉망이 되어 있었다.
뼈마디는 다 까졌고, 손가락 몇 개는 퉁퉁 부어 있었다. 소맷자락도 찢어졌는데 드러난 팔목 역시 상처투성이였다.
계속 내리는 비가 보보의 피를 씻겨주지 않았다면 손과 옷자락 전부가 피칠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엄청 아팠을 텐데…….
그저 엄청나다고만 생각했지, 보보가 다쳤을 거란 건 예상 못 했다.
쿤의 얼굴 사색이 되자 보보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뒤로 숨겼다.
“신경쓸 것 없습니다.”
“그러면 참 좋겠지만, 내 입장도 있어서 말이야. 일단은 돌아가지.”
“괜찮습니다. 이것도 처리해야 하니…….”
순간 보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젠장…….”
보보가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키리기스는 쓰러지는 보보를 받았다. 그리 작은 체격이 아님에도 키리기스의 팔에 안겨 있으니, 소년과 성인 남성 같았다.
“…수면 마법인가요?”
조금 전의 차원이동자, 그리고 지금의 보보. 둘 다 아무런 외상 없이 쓰러졌다. 키리기스의 마법 외에는 설명이 안 됐다.
키리기스는 가면을 고쳐 쓰며 웃었다.
“글쎄.”
묘하게 의미심장한 태도였다.
그가 정말로 수면 마법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마법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쿤은 질문을 그만하기로 했다.
쿤이 질문을 삼키자, 키리기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눈치가 빠른 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키리기스는 보보를 어깨에 들쳐 멨다. 처음 보보가 절벽을 오를 때 쿤을 들쳐 멨던 것과 똑같았다.
“가지.”
“차원이동자들은요?”
“내 하인들이 알아서 회수할 거야.”
판테테도 아니고 하인들이 회수한다고?
“그래도 돼요? 그러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쿤은 거기까지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키리기스가 가면 너머로 저를 비웃는 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정도로 허술할 리 없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 여우 군.”
여우 군?
쿤은 반갑지 호칭에 떨떠름하게 답했다.
“예.”
“박쥐 군의 눈동자가 붉어졌더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빗물이 계속 입술을 적시는데도 사막에 있는 것처럼 입안이 바싹 말랐다.
“뭐 아는 게 있나?”
“…아뇨, 아무것도요.”
“정말로?”
“눈동자 색이 바뀐 것도 몰랐어요. 남의 눈동자 색을 일일이 확인할 만큼 눈썰미가 좋진 않거든요.”
쿤은 그리 답하며 키리기스의 눈치를 살폈다.
쿤의 추측이지만 오즈벨 지부의 판테테들은 보보가 흡혈 일족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키리기스의 질문도 궁금해서 묻는 것보단 확인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쿤은 모른다는 답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보보와의 약속이었고, 그가 바란 바람이었다. 쿤은 이를 들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쿤은 키리기스에게서 오는 이 께름칙한 느낌을 떨굴 수 없었다. 저도 불편하고 보보도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일단은 입을 다무는 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전 아는 게 없어요.”
쿤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키리기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왜일까. 쿤은 이것이 키리기스가 처음으로 내보이는 진짜 미소라 생각되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니 다행이군.”
키리기스는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숙소 방향으로 걸어갔다.
옆에 쓰러진 녀석을 비롯한 차원이동자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물어본다고 답을 해줄 키리기스도 아니고, 별도의 도리가 없었던 쿤은 긴 한숨을 내쉰 뒤 그를 뒤따랐다.
숙소로 돌아온 쿤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녹턴이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뛰듯 걸어왔다.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보보는?”
“병원에 갔어요.”
숙소 앞까지 온 키리기스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보보를 실어 넣었다. 그리고 쿤에겐 병원에 다녀올 테니 어서 숙소로 들어가라 말했다.
쿤은 그제야 키리기스가 저를 숙소까지 바래다준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녹턴은 쿤을 현관에 세워둔 뒤 수건을 챙겨왔다.
“감사합니다.”
쿤은 이를 받아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얼추 닦고 실내화로 갈아 신자 부엌 쪽에서 루가 나오는 게 보였다.
뒤이어 사강이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내려왔다. 샤워를 하고 왔는지 편한 실내복에 젖은 머리를 탈탈 털던 그는 쿤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뽀는 어딨어?”
“키리기스 씨가 병원에 데려갔어요.”
“엥?! 많이 다쳤어?”
사강은 거기까지 말하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 입을 다물었다. 미간이 좁혀지고 눈썹이 들썩이는 걸 보니,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혹시 뽀 마법 썼냐?”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사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쿤을 흘겨봤다. 그 대답을 믿지 못하겠단 투였다. 그는 쿤을 더 떠볼까 말까 고민하다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안 다쳤으면 된 거지 뭐.”
“사강 씨랑 루 씨도 안 다쳐 보여서 다행이에요. 근데 차원이동자를 그대로 둬도 되나요?”
“왜 그대로 둬? 선생이 사람 시켜서 회수 안 했어?”
“자기 하인들이 알아서 회수할 거라곤 하셨는데, 그래도 되나 싶어서요.”
“괜찮아. 걔들 다 전문가야. 마법사도 많고, 기사 출신도 많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 그럼 이제 뭘 하나요?”
“뭘 하냐니? 끝났으니 쉬어야지.”
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졌다. 사강이 헛소리를 하는 걸 처음 듣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 감이 안 서긴 처음이었다.
“정말로 끝난 거예요?”
쿤이 버벅거렸다. 대놓고 드러나는 감정에 사강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 뭘 더 하는데. 차원이동자 처리도 끝났고, 원래 신참은 보고서 안 쓰고. 그럼 다 끝난 거지.”
“…….”
당혹스러웠다. 판테테 일이 항상 역동적이거나 아름답진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쿤에게 오늘 하루는 인생에서 손꼽을 수 있을 만큼 힘든 날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차원이동자에게 죽을 뻔했다.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죄일 만큼 두려운 경험을 겪었다.
그런데 그 끝이 이렇게 허무하다니.
이 와중에 사강은 루와 녹턴에게 배가 고프니 뭐라도 먹자는 이야기를 건넸다. 너무나도 태연한 세 사람의 모습에 쿤은 오늘 제가 겪은 일과 위험조차 허무하게 느껴졌다.
마음도 머릿속도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예상 못한 허무한 결말에 밤잠을 설친 쿤은 보보가 오면 정말로 이게 끝인지, 앞으론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런 쿤이 들은 건 보보가 열흘은 입원해야 한다는 비보였다.
다쳤단 건 알았으나 그 정도일 줄 몰랐던 쿤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과일바구니와 음료 세트를 사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보보가 입원한 병원은 영주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으로 오즈벨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판테테들의 치료 역시 이곳에서 전담으로 맡았다.
본관을 지나 판테테만이 머물 수 있다는 별관으로 간 쿤은 직원에게 보보의 병실을 들은 후 2층으로 향했다.
‘205호에 계신다고 했는데.’
쿤은 별관 복도를 따라 걸으며 205호를 찾았다. 누군가의 언성이 들린 건 205 팻말을 발견할 때였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