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turn a dimensionpover correctly RAW novel - Chapter 33
32화-별거 아닌 게 별거가 되는 순간 (01)
가뜩이나 잔뜩 쌓여 있던 서류 더미 옆으로 새로운 서류가 줄줄 쌓였다.
“이건 피아논 영지, 이건 켈카르타닌 영지, 그리고 이건 파파루아 영지 보고서예요.”
부용은 활짝 웃으며 혜성의 앞에 서류산 하나를 더 만들어주었다.
혜성은 드물게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음… 난 이럴 때마다 부용이가 루처럼 인생을 대충 살았으면 좋겠어.”
“하하하. 죄송해요. 근데 이거 오늘 안에 다 확인해 주셔야 해요.”
“…오늘까지?”
“네, 오늘까지.”
부용이 활짝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혜성은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이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보고서를 살피는 사이 부용이 쿤에게 말을 건넸다.
“쿤 씨라고 했죠? 반가워요. 부용이에요.”
부용은 그리 말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루나 혜성처럼 엄청난 미인도 아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외모건만 밝고 명랑한 표정 때문일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설마 제가 없는 사이에 새로운 분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매번 일손이 부족하다 해도 충원을 안 해주셨거든요.”
부용의 말에 찔린 게 있는지 혜성이 끼어들었다.
“내가 안 한 게 아니라, 본부에서 안 보내주는 거라니까. 지원자가 없는 걸 어떡해.”
“지원자가 있어도 믿음직스럽지 않으면 안 데려오시잖아요.”
“당연하지.”
“것 봐요. 어라? 근데 쿤은 어떻게 데려오게 된 거예요? 아직 신입 발탁 기간 아니지 않아요?”
보통 판테테 시험에 합격한 신입들은 속한 구역의 훈련소에 모여 짧게는 두 달, 길게는 반 년간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이걸 이수한 이들만 지부에 배정된다.
루가 이를 묻자 혜성이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쿤은 비판테테야. 로비츠 영지에서 보고 스카우트해 왔어.”
“정말요? 대박이다!”
부용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기대가 가득찬 눈빛에 쿤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에요. 마법도 못 쓰고, 아, 그니까 비마법사를 무시한 게 아니라 평범하단 소리예요.”
“에이~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제가 저희 단장님 성격 잘 아는데 절대 아무나 스카우트하지 않아요. 분명 쿤한테 그만큼의 장점과 능력이 있어서 스카우트한 거예요. 그리고 비마법사인데 스카우트받은 거면 더 대단한 거죠. 마법을 뛰어넘는 장점이 있단 소리잖아요.”
“하지만 저 정말 판테테 시험도 계속 낙방하고, 여기서도 큰 도움 안 됐는걸요.”
“쿤, 전 시험을 잘 본다고 좋은 판테테가 된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시험이란 게 운도 따르고 컨디션에 따라서 제 기량을 다 뽐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쿤이 받은 점수가 꼭 노력의 점수가 아니란 소리예요.”
쿤은 부용을 가만히 쳐다봤다.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전해졌다.
“뭣보다 쿤은 이제 막 판테테 일을 배우는 거잖아요. 버벅거리고 서툰 게 당연하죠. 판테테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어요. 적어도 2년은 해야 판테테 값한다고. 그전엔 돈 주면서 가르치는 거라고요. 지금은 이렇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대견한 거예요.”
부용은 굳은살이 밴 손으로 쿤이 손등을 토닥였다.
“그나저나- 뭘 했기에 우리 신참 기가 다 죽은 거예요. 설마 단장님이 혼냈어요?”
“왜 불똥이 나한테 튀는 거야?”
“그게 아니면 이렇게 우울할 리가 없잖아요. 저 막 도착했을 때도 심각한 분위기였고요.”
“그건 내가 아니라 보보 때문이야.”
“보보가 왜요?”
“보보가 쿤 담당 선배였는데 지금 병원에 있거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하던 중이었어.”
“예?!”
부용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혜성을 다그쳤다.
“왜요? 어디 다쳤어요? 많이 다친 건 아니죠?”
“크게 다친 곳은 없고, 마법 반동 때문에 열흘은 누워 있어야 한다더군.”
“열흘을 누워 있는데 그게 어떻게 크게 안 다친 거예요.”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사지육신 멀쩡하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장님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죠. 좀 더 단원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세요.”
“충분히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쿤 담당 문제도 고민하는 거잖아.”
“음… 보보 입원 기간이 열흘이라고 했죠? 좀 애매하긴 하네요.”
보보가 좀 더 크게 다쳤거나, 며칠 쉬고 마는 가벼운 상처였다면 선택이 쉽지만, 열흘은 조금 애매했다. 사람을 바꾸기도, 그렇다고 열흘을 버리기도 그랬으니 말이다.
“음…….”
부용은 침음을 흘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그때,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쿤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곧이어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루가 뛰어들어 왔다.
루는 소파에 앉은 부용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너……!”
루는 뭐라 한소리 하려다 이를 악다물며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 분을 삭이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이면 된다며. 왜 한 달이나 걸린 건데?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아.”
쿤의 눈이 오즈벨에 온 이래 가장 크게 떠졌다. 무뚝뚝하고 만사가 귀찮은 루가 처음으로 울상을 지으며 부용을 살폈기 때문이었다.
부용은 루를 안심시키듯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추가 지원 요청이 와서 어쩔 수 없었어.”
“추가 요청은 무슨. 지들이 귀찮으니까 너한테 떠넘기는 거잖아. 그런 거 상대하지 말라니까.”
귀찮다는 이유로 모든 걸 보보에게 떠넘기는 루가 하기엔 참으로 어폐가 있었으나 혜성과 쿤은 굳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복귀 보고 다 했어?”
“응.”
“그럼 이제 가자.”
루가 그리 말하며 제 가방을 대신 걸쳤지만, 부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해. 집에 안 가?”
“기다려 봐.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부용이 혜성을 쳐다봤다. 그리고 혜성이 반대하는 지원을 나가겠다 할 때처럼 비장함을 담아 말했다.
“단장님, 쿤 담당 선배 말이에요. 제가 대신해도 되나요?”
“예?!”
“뭐?!”
쿤과 루가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좀처럼 놀라지 않는 루나, 좀처럼 눈이 잘 뜨이지 않는 쿤 둘 다 토끼 눈을 하자 혜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주면 좋지.”
“그게 뭐가 좋아요! 부용, 하지 마. 네가 그걸 왜 하는데.”
루가 부용을 뜯어말렸다. 목소리에 짜증과 화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부용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왜긴. 내가 도와주고 싶으니까지. 그리고 쿤의 담당 선배가 정해져야 보보도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거 아냐. 나도 좋고 보보도 좋고 쿤도 좋으면 좋은 일 아냐?”
“내가 싫어.”
“왜? 루 너 혹시 쿤 담당 선배 하고 싶어?”
루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질색하는지 세상의 모든 욕을 끌어모아도 루의 표정보다는 아름다울 거 같았다.
“쿤 생각은 어떠세요?”
부용은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된단 말을 덧붙였다.
쿤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슬쩍 옆으로 옮겼다. 루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거절해’라는 무언의 압박이 쿡쿡 찔렀다.
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자, 보다 못한 혜성이 답을 내렸다.
“그럼 보보가 입원해 있는 열흘만 부용이가 맡는 걸로 하자. 그 이후는 쿤 네가 정하고.”
“보스!”
“좋아요.”
루와 부용의 입에서 동시에 정반대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혜성은 둘의 반응은 뒤로한 채 쿤에게 물었다.
“어때?”
“…….”
쿤은 짧게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의 살기 어린 시선을 외면한 채, 부용에게 잘 부탁한단 인사를 건넸다.
* * *
“그럼 10시에 뵙도록 해요.”
부용은 그리 말하며 짐을 풀 겸 집으로 돌아갔다. 루는 그런 부용을 따라가면서도 쿤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얼결에 새로운 담당 선배를 맞이하게 된 쿤은 혜성과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방에서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시각에 맞춰 지하 회의실로 향했다.
얼마 안 있어 부용이 도착했다.
“쿤, 저 왔어요.”
집에 다녀온 부용의 옷차림은 처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판테테 재킷 안에는 검정 셔츠와 주름치마를 입었고, 머리엔 새하얀 비니를 쓰고 있었다. 머리에 고정하기 위해 꼽은 주홍색과 초록색의 실핀이 참 귀엽다고 생각할 때, 부용이 물어왔다.
“그럼 여태 뭐뭐를 배웠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겠어요?”
“……배운 게 없는데요.”
쿤이 보보와 있던 일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부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보보 퇴원하면 혼내야겠네요.”
“하하하…….”
“좋아요. 그럼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해요.”
부용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한 뒤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약 10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가서 보니까 비밀유지 서약서만 작성하고 아무것도 안 했네요. 일단 이것부터 작성해요. 이건 인적사항 서류고, 이건 월급통장 개설 서류, 그리고 이건 가족들에 대해 적는 서류예요.”
가족의 인적을 적는 서류에서 쿤은 잠시 멈칫했다. 애써 잊고 있던 음울한 현실이 다시 고갤 들었다.
부용은 그런 쿤의 마음을 금방 이해했다.
“좀 슬픈 서류죠? 근데 그 서류가 꼭 슬픈 일에만 쓰이는 건 아니에요. 판테테의 가족은 차원문 사태가 터졌을 때 가장 안전한 대피소를 배정받고, 집이나 재산에 대한 보상도 먼저 받아요. 의료 지원도 마찬가지고요.”
쿤 역시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판테테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하다 죽어도 가족들은 최소 20년 동안 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쿤은 씁쓸함을 삼키며 모든 서류를 작성했다. 보내는 곳이 다른지 부용은 두 개의 서류봉투에 서류를 나눠 담았다.
“다음은 뭘 하나요?”
“신청서 적어야 해요. 근데 이건 저 혼자 하기 힘들어서 아까 원군을 불렀어요.”
“원군이요?”
쿤이 의아함에 고갤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강이 앞구르기를 하며 등장했다.
연극처럼 역동적으로 착지한 그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부용을 향해 손을 들었다.
“여~ 뿌용이~!”
“사강 선배!”
와아아아.
사강과 부용은 손을 잡고 둥글게 돌았다. 비슷한 키의 두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꼭 어린아이 둘이 뛰노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바쁜데 부른 건 아니죠?”
“아냐아냐~ 자고 있었어~”
둘은 연신 폴짝폴짝 뛰었다. 이래저래 합이 잘 맞는 둘이었다.
“오신다는 분이 사강 씨였어요?”
“그 반응 뭐야. 나 안 보고 싶었어?”
쿤은 ‘네’란 대답을 가까스로 삼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이세요?”
“왜긴 왜야. 너 옷 맞춰야지.”
사강이 허리춤에서 줄자를 꺼내며 말했다.
쿤은 그제야 제가 판테테 제복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저 옷 맞춰야 하죠.”
“원래 가장 먼저 해야 해요. 옷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판테테 제복은 해당 구역의 본부에 신청해야 했다. 신체 사이즈도 정확히 재서 보내야 하는데, 같은 남자인 사강이 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불렀다는 게 부용의 설명이었다.
사강은 줄자를 목에 걸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히 여기라고. 나 이런 데 오는 한가한 남자 아니야.”
“자고 계셨다면서요…….”
“자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너 안 자고 살 수 있어?”
“…….”
뭐지, 말이 안 되는데 설득되는 이 기분은?
쿤은 사뭇 진지하게 사강의 말을 곱씹었다. 그때 사강이 다가와 쿤의 카디건을 벗겼다.
“뭐, 뭐하세요?”
“뭐하긴, 벗어야 치수를 재지.”
“예?!”
“그럼 전 잠시 나가 있을게요.”
“자, 잠깐만요, 부용 씨!”
부용은 쿤의 구조요청을 외면한 채, 회의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강의 음흉한 웃음 소리가 흘러 펴졌다.
“흐흐흐흐. 얌전히 운명을 받아드려라, 신참.”
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쿤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도 잠시 벽에 막혀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쿤을 향해 사강이 달려들었다.
“자, 잠깐. 제가 혼자… 으악~!”
쿤의 비명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