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turn a dimensionpover correctly RAW novel - Chapter 94
93화-용사의 친구 (02)
가장 먼저 든 건 배신감이었다. 그다음엔 속이 상했고, 마지막은 그럼 그렇지 하고 모든 걸 체념했다.
쿤은 엘리아노를 쳐다봤다. 이쪽을 계속 흘끔거리는 게 제가 마법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살피는 것 같았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할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쓰여, 져주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꿈이라고 했으면서…….”
쿤의 중얼거림에 엘리아노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그대로 자릴 박차고 일어났다. 일그러진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스란히 보여줬다.
“너……!”
“예, 맞아요. 저 다 알아요.”
엘리아노의 얼굴이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잿빛이 되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네가 착각하는 거야, 절대……!”
엘리아노는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상기하고 마법이란 단어를 삼켰다.
“어쨌든 아니야. 잘못 안 거야. 지금 당장 할머니랑 집으로 가자.”
이 와중에도 끝까지 발뺌하는 할머니를 보자 너무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하지.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아니면 내 마법이 너무나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 그럼 적어도 이해는 갔을 텐데.
“할머니, 저 이제 일곱 살 아니에요.”
쿤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바보는 더더욱 아니고요.”
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옆에서 저를 붙잡는 할머니를 외면한 채, 혜성을 쳐다봤다.
“혜성 씨, 저 내려가서 훈련이나 할게요.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이렇게 가도 괜찮겠어?”
“있어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렇군. 알겠어, 내려가 봐.”
쿤은 할머니를 지나쳐 지하로 향했다. 내내 소파 뒤에 숨어 있던 북청 사자 두 마리도 호다닥 따라갔다.
엘리아노는 손자의 뒷모습만 쳐다보다 콰득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혜성을 노려봤다.
“이게 다 너 때문에……!”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니까.”
“왜 네가 아무것도 안 해! 애초에 네가 쿤을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달은 안 났어!”
“글쎄.”
혜성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제가 쿤을 스카우트하긴 했지만, 그게 없었더라도 분명 제 꿈을 이뤘을 것이다.
“그냥 손주의 길을 응원해 주는 게 어때?”
“닥쳐!”
그녀가 노골적인 적의를 내비쳤다. 금방이라도 혜성을 죽일 것만 같은 살기에 은이 그림자를 꺼냈고, 사강이 검을 뽑아 들었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치솟은 그림자와 은백색의 검날이 엘리아노의 목 부근에서 멈췄다.
“할멈~ 손자 때문에 화난 건 아는데, 우리 단장한테 화풀이하면 안 되지~”
“거기까지예요. 더 이상 다가오면 저도 가만 안 있습니다.”
“하……!”
“자~ 자~ 우리 다시 대화나 하자고~ 아니면 오래간만에 마법으로 대화하자는 거야?”
사강이 짓궂게 웃어 보였다.
엘리아노는 콰드득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야 혜성이고 사강이고 다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복병인 하은이 있었다. 심지어 이 자리엔 없지만 엘리아노와 가장 상성이 안 맞는 키리기스 역시 혜성의 든든한 뒷배였다.
“너희 셋, 아니, 넷을 뭉쳐 두는 게 아니었어.”
엘리아노가 때늦은 후회를 하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사강과 은은 검과 그림자를 거두었다.
카드를 움켜쥔 채, 내내 상황을 살피던 루는 엘리아노가 더는 오즈벨을 위협하지 않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도 여기 있어봐야 소용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내려가 볼게요.”
“그럼 나도.”
녹턴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혜성의 입에서 알았다는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쿤을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
* * *
쿤은 저에게 매달린 북청 사자 두 마리를 토닥여 주었다. 제 기분을 알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조금 전 상황이 무서웠던 것인지 둘 다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좀 놀까?”
쿤은 북청 사자들을 놀아줄 겸, 훈련장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보보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보보 씨, 여기 계셨어요?”
“어라? 쿤 씨 오셨네요.”
보보가 부드럽게 웃으며 쿤을 맞이해 주었다.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모르는 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씁쓸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보보를 보자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계속 훈련하고 계셨던 거예요?”
“네. 근데 이제 막 끝나서 근육 풀려던 참이었어요. 쿤 씨는요?”
“전 얘들 놀아줄까 해서 왔어요.”
“여기서요?”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널찍하고, 높이도 있어 애들 뛰어놀기 좋았다. 거기다 정원이나 오동촌처럼 공간이 뻥 뚫린 게 아니라 안전하기도 했다.
쿤은 북청 사자의 궁둥이를 톡톡 때렸다. 그러자 두 마리가 널찍한 훈련장을 뛰어놀았다.
공을 하나 던져 주자 두 아이가 서로 공을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더니 이내 함께 놀기 시작했다.
쿤과 보보는 이를 흐뭇하게 지켜봤다.
“애들 이름은 지었어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름 짓다 이 사달이 나는 바람에 잊고 말았다.
“쯧. 이름 짓는 거 또 뒤로 미뤄졌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보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을 때였다. 루와 녹턴이 훈련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쿤이 그랬던 것처럼 보보가 있단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
“너 여기 있었어?”
“네. 훈련 중이었어요.”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도는 알아라.”
루는 혀를 차며 보보를 나무랐다. 부용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다음이었다.
“그게 무슨 일 있어?”
루는 물론 쿤과 녹턴 또한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 뒤에 부용이 서 있었다.
“너도 여기 있었어?”
“어. 뭐 찾을 게 있어서 창고 좀 뒤지고 있었어. 그보다 위에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루랑 녹턴이 쿤을 흘끔 쳐다봤다. 이걸 대놓고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쿤은 루가 제 눈치를 보는 게 신기해 피식 웃었다.
“제가 제 시험 성적이 조작된 걸 알았어요.”
쿤의 대답에 보보와 부용의 눈이 호두알만 해졌다.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놀랐다.
“쿠, 쿤 씨,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조작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부용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라다 이내 저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단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은과 달리 당시 부용은 오즈벨에 없어 이를 전해 듣지 못했다. 돌아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그녀 성격상 알아봤자 신경만 쓸 게 뻔했기에 단원들은 암암리에 말하는 것을 회피했다.
모든 걸 알게 된 부용은 쿤을 제한 세 사람에게 크게 화를 냈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있어? 그래, 나한테 안 하는 건 이해해. 그래도 쿤한테는 꼭 말해줬어야지. 이 일에 가장 큰 피해자는 쿤이잖아.”
“아니, 그때는 좀… 친해지기 전이었으니까… 어떤 애인지도 잘 모르고…….”
루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했다. 그러나 단단히 화가 난 부용에겐 통하지 않았다.
“변명하지 마. 그럼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는 얘기했어? 아니잖아. 특히 넌 쿤 담당 선배 아냐? 후배가 부정한 일을 당했으면 같이 해결해 줄 생각을 해야지, 왜 이런 식으로 알게 하는 건데.”
“윽… 미안…….”
“나한테 사과하지 말고 쿤한테 사과해.”
루가 쿤에게 머릴 숙여 사과했다. 녹턴과 보보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해.”
“죄송해요, 쿤.”
“우리가 생각이 짧았어.”
사과를 받을 거라 생각 못 했던 쿤은 세 사람이 머리까지 숙이자 아니라며 크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괜찮아요. 거기다 굳이 따지면 사과할 사람은 여러분이 아니라 저희 할머니죠.”
순간 부용과 보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머니요?”
“아, 이 얘기는 안 했네요. 제 시험 성적 저희 할머니가 조작한 거였어요.”
“…예?”
예상 못 한 범인에 두 사람은 당황하고 말았다. 더 충격적인 말은 다음에 이어졌다.
“저희 할머니가 엘리아노거든요.”
“네?”
“뭐, 뭐라고요? 누구?”
“엘리아노요. 우리가 아는 그 영웅이요.”
보보와 부용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루가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참고로 지금 거실에 계셔.”
“…….”
너무 놀란 부용과 보보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얼어 있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가능해…….”
“아, 아니. 일단 엘리아노 님은 미혼이잖아요…….”
엘리아노뿐 아니라 다섯 영웅 중 넷이나 미혼이었다. 심지어 결혼한 한 명조차 아이가 없었기에 그들은 모두 자손이 없는 걸로 알려졌다.
쿤은 뒷목을 긁적였다.
“미혼은 맞아요.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결혼을 안 하셨거든요.”
“예?!”
“연애만 하셨어요. 아버지가 태어난 후에도 그랬고요.”
엘리아노가 세간에 미혼으로 알려진 것처럼, 쿤의 조부 역시 세간에는 미혼부로 알려졌다. 물론 아내가 누군지는 밝힐 수 없었다.
심지어 쿤조차 자신의 조모가 영웅이라는 걸 알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저 절대 말하면 안 된다기에, 그랬다간 할머니를 영영 볼 수 없다 했기에 비밀을 꾹 지켜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쿤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저도 여태 계속 할머니가 누군지 말씀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그건 쿤이 미안할 일이 아니죠.”
“맞아. 네가 숨긴 것도 아니고, 엘리아노 님이 숨긴 거잖아. 근데 이런 가정사까지 우리한테 말해도 돼?”
“괜찮아요.”
굳이 따지자면 저 역시 녹턴을 제한 세 사람의 과거를 알고 있다. 거기다 이 꼴이 된 마당에 말 못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 엘리아노 님은 쿤을 판테테로 만들지 않으려고 계속 성적을 조작했다는 거네요.”
“그렇겠죠.”
뭐, 정확히는 제 마법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쿤이 아는 할머니는 절대 제 고집을 쉽게 꺾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를 데려가려고 애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쿤의 짐작대로 엘리아노가 오즈벨에 눌러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