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hine Normally RAW novel - Chapter 304
0304 ==============================================
3부 우리의 빛 – 9. 우기
총괄 감독관 세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멀리서 울리는 듯한 빗소리를 묻어버릴 만큼 크게 들려왔다.
“상인협회 인가.”
밧줄로 묶은 다섯명을 향한 그 목소리에 그 다섯명 속에 있던 치드는 몸을 움찔거렸다. 익숙한 이름이었으니까. 허나,
다섯명의 리더인 베크는 입을 열었다.
“그냥 한탕 해먹으려고 왔다.”
“훔치러 왔다는 말인가?”
“그래.”
베크의 답에 세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몇번이나 이 안에서 너네들을 확인했었어! 비 오는데 마차도 멀찍이 세워두고 물건을 훔친다고? 부수러 온 게 아니고?”
“진짜, 웃기는 놈들이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부탁해서 왔더만! 허, 참.”
“세반 아저씨! 그냥 더 들을 필요도 없고 아주 혼쭐을 내주죠!”
보관소 밖에서 쏟아붓듯이 내리는 거센 비처럼 장정들의 목소리가 다섯명에서 쏟아부어졌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치드는 쉽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살벌한 분위기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힐끗 시선을 들자 보이는 살벌한 시선들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치드는 황급히 시선들을 피해 고개를 다시 숙였다. 한 대 팰 듯이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 관찰하듯이 보는 사람. 한 몫 단단히 잡기 전에 자신의 인생부터 하직할 것 같았다.
“조용.”
세반의 낮은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감독관이라 싫은 소리를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반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무서운 표정으로 살벌한 눈빛을 한 채로 낮은 목소리를 내는 그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말할 수 없단 말인가?”
“.. 그래.”
침음성과 함께 베크가 답했을 때. 세반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직원에게로 다가갔다.
“음? 왜, 왜 그러십니까? 어?”
그리고는 직원의 손에 들린 쇠스랑을 뺏어들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직원과 다른 이들이 바라봤다. 설마, 혹시?
치드는 튀어나올 듯이 심장이 뛰었다. 저, 저 표정이! 무슨 짓을 해도 할 것 같은데! 치드는 베크를 바라봤다. 그냥 말하라고! 그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누가 끝마을 사람들이 순하댔어? 완전 눈이 다 돌아갔구만!
탕 탕 탕
쇠스랑의 끝에 달린 쇠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세반을 바라봤다.
“우선 하나씩 묻도록 하겠네.”
선언하듯이 천천히 울려퍼지는 세반의 목소리. 치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리더 베크를 바라봤다. 베크의 이마에 맺힌 땀인지 혹은 마르지 않은 빗방울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리는 것이 치드의 눈에 보였다. 안되면 자신이 불어야 겠다고 치드는 마음 먹었다. 위약금이고 뭐고 간에 오늘 인생 끝장 날 것 같은데!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베트는 답하지 않았다.
“이것도 답하지 않을 생각인가? 흐음. 그렇군.”
무표정한 얼굴의 세반이 쇠스랑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용병 일을 하면서 담이 꽤 컸던 베크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웬만하면 겁을 내지 않을 그인데, 눈 앞의 남자는 정말로 화가 나 보였다. 사장도 아닌 걸로 아는데, 뭐 저렇게 화를 내? 화가 아니라 더 깊은 분노가 눈에서 보였다.
잘못 걸렸다.
베크와 치드, 다섯 명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탕 탕 탕
점점 세반이 바닥에 쇠를 튕기게 하며 베크의 무리들 가까이 다가왔다.
오, 세상에!
치드는 그런 세반을 공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때, 그는 세반의 뒤에 서 있던 아까 전부터 자신을 관찰하듯이 바라보던 사람 중에 한 명의 눈과 마주쳤다. 그 남자는 치드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옆의 이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답을 하지 않을 생각인지는-”
베크의 바로 앞에 세반이 섰다.
“이제 알 수 있겠군.”
그의 쇠스랑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날이라도 갈았는지, 쇠스랑의 그 뾰족한 끝이 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그냥 불까?
베크는 세반의 감정 없는 눈동자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쇠스랑이 위로 올라갔고, 치드는 숨을 들이쉬었다. 설마! 설마! 여기 다른 이들도 많은데! 설마!
치드는 15명이 넘는 장정들 중 어느 누구도 세반을 말리지 않음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 누가 여기가 물러터진 데라고 했어! 이, 이런 못된놈들! 순 거짓말이었어!
세반의 팔이 내리쳐졌다.
그리고 쇠스랑 또한 내리쳐졌다.
그 순간,
“세반씨. 장난은 그만하시죠.”
타앙-
쇠스랑의 쇠가 바닥에 부딪치며 튕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베크는 자신의 반발자국 옆에 떨어진 쇠스랑을 보며 순간 숨을 못 쉬었다.
세반은 그런 그를 보더니 곧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혀를 차며 다섯명을 향해 말했다.
“쯧쯧. 이렇게 겁이 많은 놈들이 이런 짓을 꾸며? 쯧쯧.”
치드는 멍한 표정으로 세반을 바라봤다. 언제 아까 전의 표정을 지었냐는 듯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의 세반이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은 아까 전 치드를 관찰하고 있던 남자의 옆이었다. 세반의 입이 열렸다.
“그래, 데이빗. 확인은 다 끝났는가?”
“그럼요.”
달꿈 제 5 공장. 중품 조청과 두번째 조청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의 감독관이자 다랑마을의 촌장인 데이빗이 미소지으며 답했다.
데이빗이 앞으로 나섰고 치드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거 뭔가 불안한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치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할 때 데이빗은 세반의 옆에 서며 말했다.
쿵쿵쿵.
빗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심장 소리가 치드는 들려왔지만 데이빗의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들려온 선고하는 듯한 목소리.
“퀼 입니다.”
“으음,”
베크의 침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니라고 발뺌하려고 해도 너무나도 확신을 담은 눈빛에 뭐라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데이빗은 한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희 직원 중에 한 분이 분명하다고 하시더군요. 저 분. 저분이 퀼 조청 공장에서 출 퇴근하는 모습을 몇번이고 확인했다고 합니다. 올해 겨울부터 말입니다.”
치드는 자신을 가리킨 손가락에 눈을 크게 떴다.
세반은 데이빗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군.”
데이빗의 입에는 한껏 비웃음이 지어져있었다. 한껏 조롱조가 담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조롱 아래에는 짓씹듯이 뱉어내는 화가 담겨져 있었다.
“정말, 겁도 없군요. 역시 우두머리가 멍청하니 밑에 있는 것들도 멍청하군요.”
올해 겨울. 사장 레이로부터 퀼 조청 공장에 대한 감시를 계속 해라는 서신을 받았었다. 척이라도 좋으니 매일 가서 확인하고 그 동향을 파악하라는 말. 자세한 탐색은 필요없다는 말. 데이빗은 마음속으로 의문을 표했던 그 지시들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다랑 마을 아래에 위치한 붉은 마을. 늘 퀼을 앞세워 잘 사는 마을이라고 으스대던 꼴들. 그 꼴이 보기 싫어 감시를 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 중에 한다고 나선 이가 방금 전까지 데이빗의 옆에 있었던 이였고 그 덕에 치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때의 그 지시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데이빗은 새삼 레이의 판단에 감탄을 하면서도 분노와 즐거움을 느꼈다.
“또 퀼입니까?”
“하! 도대체 그 썩을 놈은 잊었다하면 왜 또 튀어나온답니까? 무슨 할 짓이 그렇게 없나?”
“조청도 못 만드는 놈이 설치기는 엄청 설치는 구만!”
세반을 포함한 감독관들의 부탁에 함께 어둠의 7일 동안 보관소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던 이들은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혹시 보관소가 부서질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둠의 7일. 그 기간에는 특히 무슨 사고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원래보다 더 인원을 늘려서 그 기간동안만 관리할까 하네.’
‘우리도 함께 돌아가면서 할 것이니까, 부탁하네.’
그냥 우기로 인해 일어날 사고에 대한 방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보관소 한 쪽에 모여져있는 각종 농기구와 무기와 같은 물건들에 의아했었다.
“감독관님! 이 놈들 다 못 걸어가게 다리를 꽉 부숴버리죠!”
“그래, 그래! 그냥 오늘 인생 끝장나게 하자고!”
“이 괘씸한 놈들!”
세반과 데이빗을 향해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상인협회면 몰라, 퀼은 달꿈에 있어서 쉽게 꺼내선 안되는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오늘 담당이 붉은 마을 위인 다랑마을과 퀼 때문에 피해를 입었던 끝마을 직원들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치드는 울고 싶었다. 눈이 벌겋게 되어가지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이 퀼! 갈아버려도 모자랄 놈!”
헐.
치드는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수많은 욕들이 다섯명에게로 그리고 퀼에게로 쏟아졌다. 차라리 저 밖에서 비바람 맞는 게 낫지. 치드는 그냥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살면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욕을 들어볼 일이 없던 그에게는,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 끔찍했다.
“그만 하게.”
세반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만 합니까?”
“그래! 세반, 자네는 화도 안 나는가?”
하지만 다른 이들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 세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더 이어가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잊고 있었다.
아까 전 처음 보았던 세반의 화난 모습을.
천천히 다시 세반의 말이 이어졌다.
“이들에 대한 처리는 이미 결정되어져 있네. 사장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네.”
그 순간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이 결정을 내리셨다니? 준비했다니? 오직 데이빗만이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즐거워했다.
열심히 노력한 것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퀼을 향한 분노.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의 목을 조이게 된 퀼에 대한 즐거움.
부사장 조지의 말이 데이빗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네들에게만 전하라고 해서 전하는 말이네. 이번 겨울. 자네들도 알다시피 사장님은 이음새 협회를 통해서 영지에 제안서를 보냈었네.’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고 한 일일까.
아니었다. 그 때 조지는 말했었다. 레이는 올바르지 못한 방법을 저지르는 사람은 언젠가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 제안서 속에는 우리 달꿈의 조청을 사치품으로 등록하자는 내용도 하나 있었네. 그 때문에 우리는 영지에 내어야 하는 세금이 대폭 증가했지. 하지만 우리 조청이 나아가려는 방향이 꿀이라면 이건 맞는 일이라고 보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손해를 감수 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
데이빗과 세반의 입에 똑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에 보관소 안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레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퀼이 그냥 그대로 멈출 인간이 아니라고.
‘그리고 영지에는 이득이 되는 일이지. 그런 상황이니, 사장님은 그 제안서에 제안을 하나 더 했지. 아직 없는 새로운 법을, 크론 영지 안에서라도 하나 제정하자고 말이야.’
그리고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이음새 협회도 상인협회, 영지의 관리들조차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반대를 하면 의심을 받을만한 제안이었다.
더욱이 영지의 부서 중 감찰부의 힘이 세졌고 법 제정 관련 고위 관리층들이 뇌물을 못 받는 현재, 그리고 법무부의 수장이 저스티스인 지금. 그 시기의 맞물림으로 아주 쉽게 제정될 수 있었다.
세반은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들의 뒷처리는 후에 말해주겠네. 그러니 우선,”
솔직히 말하면 세반은 레이의 방식이 성에 차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부수러 가고 싶었다. 자신이 흘린 땀과 사람들의 노력은 결코 우스운 것이 아니었고 이를 파괴하려던 자들이었으니까. 설마 설마했지만. 마주한 상황에 세반은 살면서 처음으로 눈이 뒤집힐 것 같이 화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레이의 방식이 달꿈답다는 생각을 그는 했고 그렇기에 참았다.
이는 데이빗 역시 마찬가지일 터.
세반은 다섯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이들을 레인시로 데리고 가세.”
다들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볼 때. 세반은 이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영주성에 가야 되니, 빨리 준비해야 되네. 어서 서두릅세!”
세반은 보관소의 문을 열었다. 세차게 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그는 전혀 신경쓰지않은 채 직원 몇을 데리고 마차를 가지러 빗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불공정한 수단에 의해 행해지는 경영 상의 모든 행위. 즉, 부정 경쟁에 대한 처벌을 포함한 업무 방해죄.
레이는 자신이 알던 업무 방해죄가 아닌 이 세계에 맞춰 같은 이름이지만 새로운 내용으로 제안했다. 절도와 사주에 의한 처벌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로도 벌을 더 주어야 옳다고 보았으니까.
사라지는 세반을 보던 데이빗의 입가에 미소가 더 짙어졌다. 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단순한 징역이나 노역, 벌금 뿐만 아니라 하나 더 형벌로서 제안했다고 하더군. 형벌보다는 말이야, 이게 조금 웃긴 이름인데.’
조지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데이빗의 입가에도 지어졌다.
‘부정경쟁을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벌을 받게 된 이는 그 이름과 해당 이유까지 같이 적혀져서 영지 곳곳에 벽보를 붙여서 알린다고 하더군.’
타인의 경영을 방해하려고 하다가, 자신의 사업을 결국 방해하는 형태가 되도록 하자는 거지.
“가만히 퀼 조청 판매점이나 운영했으면 그래도 경쟁자로 이름 좀 날렸을 건데. 사장님도 그런 위치로는 남겨둘 생각이었던 것 같았는데. 결국 욕심 때문에 망하는 구만.”
데이빗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들어 흘러내려갔다.
어둠의 7일의 어느 날 밤. 그 긴 밤이 아직 흘러가고 있었다.
*
돌아가는 마차 안. 워릭은 남쪽으로 갈수록 세지는 빗발에 얼굴을 찡그릴만도 하건만 여전히 그 특유의 낙천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릭은 뒷편의 창문을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이 속도로 가면 오늘 안으로 사절단과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 앞에 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워릭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바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저러시네.
수도를 벗어난 이후로 레이는 생각에 빠진 듯 멍하니 허공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다른 말도 없고, 늘 허공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 그 모습 때문에 워릭은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괜히 걱정이 되었다.
“워릭씨-”
그 때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뒤로 돌아볼 수 없었던 워릭은 환한 표정을 지은 채로 힘껏 답했다.
“네! 사장님!”
“사절단과 합류하지 않습니다.”
“예?”
워릭은 당황스러웠다. 서둘러서 왔기에 이 속도면 충분히 사절단과 만날 수 있을 텐데? 이제부터는 느리게 가나?”
“가능하다면 더 서둘러 주세요.”
“네?”
다시 한 번 워릭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레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사절단을 앞지릅니다. 힘드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워릭의 침음성이 들려왔지만 레이는 여전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뜬 기록 창고. 오직 레이의 눈에만` 보이는 그 책에는 지금도 글이 적혀져있었다.
드디어 뭔지 알겠다.
이음새 협회에 쓰여지는 글을 보며 레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수도를 떠난 이후 처음 지어진 미소였다.
레이는 하얀 페이지 위에 떠오르는 글자를 보며 워릭을 향해 말했다.
“케인스시.”
아이즌이 케인스시로 향했다는 글.
그 글을 보는 순간 레이는 확신했고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다.
“케인스시로 최대한 빠르게 갑니다.”
그리고 또 떠오르는 글자. 슈멜츠의 이름에 레이는 눈을 빛냈다.
레이, 슈멜츠, 아이즌. 세 사람의 이름이 이음새 협회의 이야기에 새겨지기 시작했고. 그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슈멜츠는 사무실을 방문한 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가운 얼굴이고 고마운 얼굴임에는 틀림 없었다.
“저 때문에, 빗속에 헤쳐오시느라 힘드셨죠?”
“아닙니다! 이 정도 비 쯤이야! 요즘 배수가 잘 되어서 그런가 걸어오는 것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건네진 말에 슈멜츠 역시 짧은 웃음으로 답했다.
아마 즐거우리라.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어내고 있는 요즘이었으니까.
슈멜츠는 자리로 상대방을 안내했고 함께 마주 앉게 되었을 때, 직원이 차를 가져왔고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건넸다.
“우기는 잘 보내고 계십니까?”
“으음, 사실 현재 어둠의 7일 동안은 쉬고 있습니다. 괜히 움직였다가 피해볼까봐 걱정되더군요.”
“그렇군요. 특히 운반업은 우기 때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죠. 하하. 아무 사고 없이 흘러가는 게 다행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그 답에 슈멜츠는 미소로 대신 답했다. 오늘 슈멜츠의 차는 그 향도 맛도 썼다. 특별히 준비한 차였다. 아버지가 즐겨드시는 그 차. 마음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슈멜츠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켄트릭씨.”
우리의 빛 제 1회 합격자 중. 첫번째 분야의 합격자.
켄트릭 제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를 향해 슈멜츠는 양피지 한장을 건넸다.
“으음? 이걸 왜?”
켄트릭은 의아하다는 듯이 펼쳐진 양피지의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이음새 지도 아닙니까?”
이번 3차 회원 모집. 그 일에 자신이 협회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주었던 도구. 켄트릭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슈멜츠의 표정 때문이었다.
“켄트릭씨. 그건 이음새 지도가 아닙니다. 자세히 보세요.”
나직하게, 부드럽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하지만 전혀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켄트릭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눈을 굴리다가 결국 다시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 이건-”
“검은 선.”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켄트릭을 향해 슈멜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상인협회와 이어진 검은 선들이, 이음새 지도에서 꿈꾸는 선들 위에 이어져 있죠. 그리고 이것은-”
탁. 찻잔을 슈멜츠는 차탁 위에 올려두었다. 쓴 차로 속이 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쓰림을 느끼며 슈멜츠는 켄트릭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상인 협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켄트릭은 비로소 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왜 하필 이것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일까. 왜 자신만을 따로 이런 비오는, 찾아오기도 힘든 날에 불러서 말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말 못하는 켄트릭을 향해 슈멜츠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더골 상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더골의 수하 중 한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더 자세히 들어가보면, 그 수하가 옛날부터 잠깐씩 같이 일하곤 했던 운반을 하는 이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운반을 같이 했던 이는, 지금-”
말하지 않아도 켄트릭은 그 뒷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을 부른 것이겠지. 슈멜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켄트릭씨 밑에 있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한참 동안 둘은 말이 없었고 둘 다 손 대지 않은 차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게-”
침묵을 깬 이는 켄트릭이었다.
“그게 확실합니까?”
슈멜츠는 답하지 않은 채 그저 켄트릭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 켄트릭은 고개를 떨구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지도를 맡겼던 이가 3명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오래 전부터 같이 운반상 일을 해오던 부하였고 나머지 둘은 이번에 새로이 맡은 이로, 그 중 한명은 엄청 일을 잘 해내어서 3차 회원들 중 몇명을 그가 맡아서 가입서를 받아왔었다.
“서, 설마!”
순간 생각을 이어가던 켄트릭은 번개를 맞은 것 같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검은 선들이 이어진 지도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슈멜츠는 이를 쓰라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테이블에 몸을 붙일 것처럼 딱 달라붙어서 지도를 살펴보는 켄트릭의 눈동자는 몇번이나 확인을 반복했고 결국에는.
“허-”
탄식을 내뱉으며 소파에 무너지듯이 등을 기대었다.
“믿었는데-”
탄식과 함께 내뱉은 말에 슈멜츠는 마음 속으로 답했다.
자신도 역시 믿었었다.
켄트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눈빛은 슈멜츠를 바라보며 흔들리고 있었다.
“3차 회원들과 검은 선 중에 겹치는 이들이 많군요.”
슈멜츠 자신 역시 믿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3차 회원들은 모두 이음새 협회의 뜻에 공감해서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끝까지 믿을 수 없었다.
켄트릭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닫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켄트릭은 눈 앞이 깜깜했다. 새로운 형태의 운반업을 시작하면서 더골 상단을 뛰어넘는 멋지고 깨끗한 운반상을 만들자고 외쳤던 그였다. 그런 그를 향해 직원들은 모두 박수를 쳐줬었다.
그런데-
사업이 잘 되어가고 있음에도 지금 이 배신에 대한 사실을 맞닥뜨리자, 눈 앞이 깜깜해지는 그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슈멜츠를 바라봤다. 그 무덤덤한 눈빛을. 하지만 이미 지금의 자신처럼 이 복잡한 감정을 지나쳐 온 자의 눈빛이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런 슈멜츠에게 달리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니, 하나 남아 있었다. 그걸 입 밖으로 떼는 것이 어려웠지만 켄트릭은 결국 입밖으로 내뱉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슈멜츠는 그 질문에 켄트릭을 다시 바라봤다. 여러 감정으로 흔들리는 눈. 그 눈동자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로 들려왔다.
“쳐 내야죠.”
귓가에 들린 자신의 목소리에 슈멜츠는 정신을 다 잡았다. 그리고는 한 번 더 힘을 주어 내뱉었다.
“쳐내야 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내뱉는 슈멜츠의 눈동자에는 씁쓸함은 사라졌고 그 대신 강한 결심이 서려있었다. 무언가를 정하면 밀어부치는 힘. 그 힘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결심이었다.
켄트릭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미 차는 식었고 빗소리만이 들려오는 공간. 슈멜츠는 드디어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그 시각. 레이는 슈멜츠의 이름이 떠오른 것을 보며 케인스시로 달려가고 있었다.
레이, 슈멜츠, 아이즌. 세 사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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