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hine Normally RAW novel - Chapter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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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우리의 빛 – 13. 시작
숙소로 돌아오자 마자 레이는 침대 위에 누웠다. 시야 한켠에서 작은 시스템 창이 깜박거리고 있었지만 레이는 이를 무시했다.
대신 그는 문 앞에서 받아온 편지들을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일부러 맞춰서 온 건가?”
꼭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맞춰서 온 편지들인 것 같아 레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꼭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나 하나 자신에게 온 편지의 봉투들을 레이는 살펴봤다.
이제 글을 어느 정도 배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편지. 그리고 여동생 네트의 편지. 저번에 양피지와 잉크를 많이 사드렸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같은 날 이렇게 편지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수도에서 온 동생 베르의 편지. 아직 뜯어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편지 봉투에서부터 힘듦이 느껴지는 것 같아 레이는 피식 웃었다.
레이는 하나 하나 봉투를 뜯어 조심스럽게 안에 편지들을 펼쳤다.
‘잘 지내냐? 밥은 먹어야 한다. 몸 조심하도록.’
짧지만 역시 아버지 알칸 답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편지에 레이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렇게 짧게 편지를 보내서 그렇지 글을 배운 이후로, 아버지는 틈이 날 때마다 편지를 보내왔다. 가족 중 레이에게 가장 많이 편지를 보내는 이가 아버지였다.
레이는 그런 아버지에게 늘 길게 답장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짧았다. 하지만 레이는 그 짧은 답 속에 많은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 사랑하는 큰 아들. 엄마 글씨가 이쁘지 않아도 봐줘야 돼? 그래도 저번보다 늘었지? 네트한테 봐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이제 안하고 엄마가 혼자 다 편지를 써볼까 해. 밥은 잘 먹지? 세끼 제때 먹어야 하는 거 알지? 그리고 대충 먹으면 안되고 딱 제대로 먹어야 돼. 알고 있지? 잠은 하루에 적어도 4시간 이상 자야 하는 건 알지? 안 그러면-‘
“진짜, 어머니 답네.”
편지에 몇번이나 ‘알지?’가 들어갔는지 레이는 세다가 그만두었다. 뭐 그리 챙길 것이 많은지, 아들은 어련히 알아서 잘 할 텐데. 레이는 편지로도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 루나에게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고마웠다.
글씨도 서툴고 가끔씩 틀린 글자가 있음에도 항상 그녀는 레이에게 묻고 또 물었다. 잘 지내는지, 밥은 제대로 먹는지, 잠은 자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그렇기에 레이는 루나에게 답장을 쓸 때면 조금 즐거웠다. 물은 게 많으니 답할 말도 많아졌으니까. 물론 레이가 루나처럼 변하는 때도 있었다.
그건, 바로.
‘오빠! 나 팔뚝에 근육 생긴 거 같애! 완전 엄청나! 내가 코티랑 아리아보다 더 힘이 세! 역시 우리 집 사람들이 베르 오빠도 그렇고 다 힘이 쎈 것 같아!’
여동생 네트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쓸 때였다.
어찌나 편지만으로도 동생이 들떠있고 사고를 곧 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레이는 네트의 편지를 읽을 때면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답장을 쓸 때면 늘 미간에 주름을 만들면서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었다.
‘근데 오빠! 달꿈 축제 기간동안 쉰다고 했잖아? 이거 비밀인데 진짜 말하지 말랬는데, 그냥 말 할래! 아마-‘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레이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네트의 입에서 나온 비밀이라는 말. 괜히 불안했다.
하지만 곧 그 뒤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레이의 표정은 오늘 하루 중,
‘아마 오빠 보러 갈지도 몰라!’
그 어느때보다도 밝아져 있었다.
‘아빠는 감독관이니까 잘 모르는데, 엄마랑 나랑은 갈거야! 엄마랑 아빠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그냥 말할래! 아마 편지 도착하고 그 다음날이나 그 다음다음날 도착 할거야! 그러니까 기대해!’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지를 않았다. 레이는 얼굴 가득 기쁨을 담은 채 네트의 편지를 한번 더 읽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레이에게 무엇보다도 다행인 소식이기도 했다. 레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채 동생 베르의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처음에 적힌 문장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죽겠다. 너무 힘들어.’
마치 지렁이 글씨처럼, 펜을 손에 쥘 힘조차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베르의 글씨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듦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검술 훈련소는 별 것도 아니었어. 진짜 죽겠다. 여기 있는 놈들 다 날아다녀. 장난 아니야.’
레이는 동생이 고생한다니 걱정이 들면서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미소는 더 짙어졌다.
‘그래도 내가 제일 잘 날아다녀. 내가 제일 잘해.’
걱정말라는 말을 저렇게 자기 자랑으로 해놓는 게 베르 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대견했다. 베르 자신이 말했던 대로 스스로 잘 헤쳐나가는 것 같아 그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레이는 방학 되면 잠시 내려온다는 마지막 글을 읽은 후 베르의 편지를 눈에서 뗐다.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레이는 옆에 놓여있던 편지들을 하나하나 다시 봉투에 넣어 포갰다.
이걸로 됐다.
레이는 편지들을 서랍에 넣은 후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그리고는 시야 한켠에서 깜박이는 반투명한 창을 펼쳤다.
아까 전, 다섯가지의 키워드가 뜬 이후로 계속해서 나타나있던 창이었다.
시스템 창이 펼쳐졌고, 그와 동시에.
시스템 안내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안내음을 한번 더 들으며 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시스템 종료. 그 아이템을 레이는 실행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 막 노을이 지고 있어 붉게 노을빛으로 물들어있던 레이의 방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겨 깜깜해졌다. 하지만 그 어둠은 차갑기보다는 포근했고 레이는 순식간에 변한 풍경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그 때, 어둠 속에서 하나의 작은 빛이 떠올랐고 그 빛은 점점 커져 순식간에 커다란 구체가 되었다. 그리고는 마치 폭발하듯이 빛이 터졌고 레이는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을 때.
“아-”
레이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눈 앞에 Hard 모드에 진입해서 받은 아이템인 ‘레이들리히 바이스의 기록창고’ 책이 떠올라 있었다.
어떠한 안내음도 들려오지 않은 채 오직 커다란 책만 눈 앞에 펼쳐져있자, 레이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책의 표지에 적힌 ‘레이들리 바이스의 기록창고’ 글자를 만졌다.
그 순간-
촤라라라락-
책이 금빛을 뿜어내며 펼쳐졌고 수많은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어둠들이 사라지며 레이의 눈 앞에 보여주었다.
지난 3년 간의 기록들을.
처음 다락방에서 눈을 떴을 때. 그리고 풀을 발견해 네트와 함께 조청을 만들었을 때.
그리고 호든을 만나고, 후에 친구인 빌리와 안느, 그리고 동생 베르와 함께 마스코바도와 달고나를 만들어 첫 추수제를 준비했을 때.
달꿈이 만들어졌을 때.
슈멜츠를 만나 거꾸로 된 삼각형인 프릴링과 울빛을 시작했을 때.
케인스시를 갔을 때.
수도에서 개국제와 알트 찻집을 겪었을 때.
이음새 협회를 만들었을 때.
북쪽과 계약을 했을 때.
두번째 우리의 빛 심사위원을 했을 때-
영화처럼 지나가는 장면들을 레이는 멍하니 바라봤다. 단순히 그 기록들이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그 때의 감정이 함께 느껴졌고.
장면마다 새로이 알게되고 함께 하게 된 이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레이는 그 장면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삼 3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느꼈다.
자신의 기록들 속에서 웃고 있는 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시간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처럼 이어가던 장면은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었다.
바로 방금 전, 가족들의 편지를 읽고 웃고 있던 레이의 모습을.
이를 보는 레이의 얼굴이 마치 우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그렸다. 기록창고의 페이지는 마지막 남은 한장. 비어있는 흰 여백에서 멈추었다.
[당신이 남긴 발자취입니다.]시스템 안내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전의 무감정해보였던 그 기계음과는 달리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레이는 가만히 마지막 흰 여백을 본 채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이 바꾸려고 한 것들, 바꾸어지지 않은 것들, 그리고 바꿔져서 안되는 것들. 이 모든 것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당신은 내렸으리라 봅니다.]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목소리는 이어졌다.
[우리는 처음 당신이 말했던 이 삶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순간 레이의 마음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귀가 아닌 저 밑바닥,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저에게 평범한 삶은, 특출나게 뛰어난 삶은 아니지만, 보통의 남과 비슷하다의 수준이 아니라 무언가 목표를 위해 노력할 수 있고 그 노력이 조금이라도 통하는 가능성이 있는 삶이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태성, 레이의 답이기도 했다.
그 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떤 알 수 없는 할머니와 나눴던 대화.
‘그렇다면, ‘지금’ 자네의 삶은 평범한가?’
‘그러면 다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자네에게 온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아, 아니지. 질문을 바꾸겠네. 만약 자네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 자네의 ‘지난’ 삶을 다시 바꿀 수 있다면 자네는 도전하겠는가?’
자신이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네. 당연히 도전합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모든 이들이 생각하는 평범함과는 다른 길인데도 말인가?’
‘네, 전 합니다. 그만큼 빛나는 가치이니까요.’
레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때 자신이 생각한 지난 삶은 자신의 과거였지만, 실제로 겪은 삶은 ‘지금’의 삶이었다.
그 때 시스템 안내음이 들려왔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지금까지와는 그 어투가 달랐다.
[그렇다면, 지금 자네의 삶은 평범한가?]레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3년 전에 했던 답을 떠올렸다.
무언가 목표를 위해 노력할 수 있고 그 노력이 조금이라도 통하는 가능성이 있는 삶.
그게 자신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삶은-
레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들려왔다.
[자네는 자신이 키워나갔던 바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레이의 마음 속에서 말해주었다. 언젠가 이 또한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볼보트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말.
‘그저, 저를 통해서, 제가 조금 더 노력해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꿈 꿀 수 있고 도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이 지겹지 않은 오늘을 살게 하고 싶어요.’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것을 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레이 자신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저 역시 내일이 지겹지 않기 위해 그러고 싶기도 했구요. 음, 행복의 평등보다는-, 행복의 기회? 그 정도 일 것 같네요. 별것 아닌 생각입니다.’
레이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 짙어졌다. 하지만 곧 그 미소를 지우며 레이는 입을 열었다.
“하나 미련이 남는 게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일지 모를 말을 레이는 천천히 말해나갔다.
“이전, 그러니까 이제는 ‘지난’ 삶이겠네요. 제가 태성이었을 때, 지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저를 도와주었던 분들도 떠오르지만.”
사람들과 그닥 깊은 관계가 없다고 해도 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은 있었다. 빵을 나눠주던 빵집 사장같은 사람들. 하지만, 그보다도.
“할머니. 이미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가 지난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조금 많이 미련이 남습니다.”
단 하나, 레이가 선택을 미루게 만들었던 존재. 태성으로서 유일하게 남는 미련이었다. 하지만, ‘지난’ 삶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자신이 할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움이 더 짙어지리라.
“하지만.”
레이는 자신의 선택을 말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비어있던 여백에 조금씩 어떤 글자들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제가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많고 함께해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가족이라 할 사람들도 늘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레이는 말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과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딘지 모를 어둠 속 한켠을 보며 레이는 말했다.
점점 종이 위의 글자는 짙어져갔다.
“그리고 아까 전에 물었던 말들. 그 말들에 대한 답을-”
[그렇다면, 지금 자네의 삶은 평범한가?] [자네는 자신이 키워나갔던 바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아직 다 끝맺지 못했습니다.”
종이 위에 글자가 온전히 드러났다.
「지금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실 건가요?」
레이는 답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삶을 더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답을 낼 수 있으니까요.
시스템의 도움 없이, 진짜 내가 온전히 노력한 만큼 도전하여 그 성과를 얻고.
다른 이들 또한 노력한 만큼 지금보다 더 이루어가면서 살 수 있도록.
지금의 짧은 3년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선택했다.
“이어갈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을요.”
담담하지만 깊은 고민과 단단한 확신이 담긴 답이었다.
[마지막 메인 퀘스트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100% 진행하셨습니다.]다시 이전의 시스템 안내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페이지에서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그 빛은 점점 커졌고 곧 이 어두운 공간을 다 삼킬만큼 환해졌다.
레이는 그 눈부신 빛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레이의 귓가로 마지막 시스템 안내음이 들려왔다.
[시스템 ‘평범하게 빛나는 방법’이 종료됩니다.]들려오는 따뜻한 시스템의 목소리에 레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흐른 후, 레이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 끝났나?”
자신의 방 천장이 보였다. 여전히 자신은 침대에 누운 그대로 였다. 하지만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있던 창 밖은 어렴풋한 새벽의 남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이는 멍하니 누운 채로 눈을 깜박였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마음 속에서 휘몰아쳤다.
더 이상 시야에 보이는 창은 없었고 불러도 열리는 시스템 창도 없었다. 자신에게 길을 안내해주던 그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두 손을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여전히 마음 속은 복잡하고 머릿속은 멍했지만 레이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한참을 그렇게 하던 레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끝났다.
하나의 끝이 맺어졌음을 레이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지금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레이는 자신의 바로 옆에 무언가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레이의 얼굴 위로 가늠할 수 없는 감정들이 지나갔다. 우는 듯 웃는 듯 혹은 그리운 듯. 레이는 자신의 표정을 정돈하지 못한 채 천천히 손을 뻗어 집어들었다.
몇번이나 봐서 익숙해진- 책.
레이는 천천히 책이 표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제목을 천천히 읽었다.
“레이들리히 바이스의 기록 창고.”
커다랬던 책은 평범한 책이 되어 레이의 손 위에 올려졌다. 레이는 천천히 이를 펼쳐들었다.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에서 레이는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겼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 레이는 책에 얼굴을 묻고야 말았다.
「지금의 삶을 함께 이어나가세요.」
한참 동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레이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저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을 때. 레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으로 향했다.
아직은 이른 새벽. 하지만 제 2 상업지구가 조금씩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레이가 일어나 또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레이는 가만히 서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새벽의 남색 하늘이 어느 덧 환한 태양과 함께 밝아져 오는 그 때까지.
청명한 가을 하늘과 빛나는 아침의 태양을 마주한 순간 레이는 창에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러다 늦겠네.”
얼른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레이의 표정은 평소로 돌아와 있었다. 씻으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서려던 그는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손을 뻗었다.
‘레이들리히 바이스의 기록창고.’ 레이는 집어든 책을 보며 피식 웃고는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넣었다. 가족들이 보낸 편지 바로 옆에 레이는 그 책을 놓아두었다.
탁.
경쾌하게 서랍이 닿이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레이는 닫혀진 서랍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의 끝나지 않은 오늘이 다시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다음 편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